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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쫓기다시피 하여 계단을 올라, 겨우 4층에 도착한 재인선배.
"들어가지마, 강은석!!"
재인선배가 강은석의 이름을 불렀을 땐,
이미 강은석은 연기가 나는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강은석의 뒤를 따라 교실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재인선배.
그리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교실 창문으로는,
그 둘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5년 같았던 5분이 흐르고 난 후,
서서히 연기가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건물 안으로
나오는 강은석과 재인선배.
강은석은 숨쉬기가 불편한 듯, 허리를 숙여 헛구역질을 해보이고
재인선배는 화가 난 표정으로 강은석의 등을 두드려주기 시작한다.
그러면, 휘익.
재인선배의 손을 뿌리치고 걸음을 옮기는 강은석.
"어떤 놈이 구석에 담배꽁초 하나 버리고, 선풍기도 다 켜놓고
나왔었나봐."
사건이 일단락 되고,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온 다율이와 내 옆에 앉아,
아까의 사건을 얘기해주는 정신선배.
"그래도, 너무 위험했어요. 그냥 119 부르고 기다리지."
"하필 저기가, 미술부 작업실이라 도구며 작품이며
다 있는데, 119올때까지 기다리다가 다 타버리면 어쩔거야."
내 말에, 정신선배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화를 이어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걸어간다.
그러더니, 카운터 위에 올려져있던 물병을 우리 테이블 위에
갖다놓고는 다른 테이블로 걸어간다.
"그래도 학교 축제 와서 불구경도 다 하고, 재밌네. 키키"
나를 향해 웃어보이는 다율이를 바라보다가,
물병에 담긴 물을 컵에 가득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 어라, 정민아. 너네 테이블에 있는 물......"
다른 테이블에서 휘운고 여자아이들과 히히덕거리던 정신선배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나를 돌아보며 말을 꺼내다,
말끝을 흐린다.
"그거... 술인 것 같은데."
그 뒤로, 기억이 없다.
"어? 깼어?"
눈을 뜨고, 침대에서 부스럭대며 꺠어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날 돌아보는 찬영이.
이제 막 밖에서 돌아왔는지,
샤랄라 꽃무늬 원피스를 갈아입으려는 행세였다.
"아, 뭐야. 어떻게 된거야?"
"아까 올라오면서 들어보니까, 정신선배가 물인 줄 알고 너한테
술 먹였다는 것 같던데?"
원피스 자크를 혼자 낑낑대며 내려보려는 찬영이.
"이리와봐, 해줄게."
"근데 뭐 그거 한컵 먹고 훅 가냐?"
내게 다가오며 키득 웃어보이는 찬영이.
그러고선, 내 침대 끄트머리에 앉는다.
누운 상태로, 찬영이의 원피스 자크를 주욱 내려주었다.
그러나 옷 갈아입을 생각은 안 하고,
다시 내게로 몸을 돌려 앉는 찬영이.
"너 근데 지금 온거야?"
"아, 몰라! 아까 여장남자 그거 할 때, MC보던 선배가 이상한 말 해가지고.
여태까지 미림여고 여자애 노예노릇하다 왔어."
내 물음에, 찬영이는 푸념하듯 말을 꺼낸다.
키킥, 귀여운 자식.
"꺄악! 진짜?! 대박! 너 얼마에 낙찰됐었는데?"
내 물음에,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끝끝내 대답을 하지 않는 찬영이.
"아, 얼마에 낙찰됐는데~?"
"아, 몰라도 돼!"
"히잉, 천원은 넘었어?"
"무시하냐?! 천원은 넘었어!"
"오천원은 넘었어?"
"..........에라, 썅."
어색하게 욕을 하고는 내 침대에서 일어나는 찬영이.
그러더니, 급 화제를 돌리기 시작한다.
"재인선배 아니었으면, 너 아무도 여기다 안 업고 들어왔어."
찬영이의 말에,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뭐? 누가 날 업어?"
"재인선배가. 왜, 재인선배가 업으면 안돼?"
"왜 하필 재인 선배가 업었대?!"
"야, 재인선배라도 없었으면 너 그냥 그 테이블에 코박고
날 샐때까지 잘 뻔했어.
아무도 너 옮기려는 생각을 안 했대잖아."
아, 이런.
재인선배 마음에 쏙 드는 후배가 되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데,
결국 이 술 하나로 그 이미지를 다 망쳐버리다니.
"너, 재인선배 좋아해?"
"뭐? 뭔 개소리야?"
찬영이의 급작스런 질문에 인상을 팍 써보이자,
잠시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찬영이.
"근데 왜 그래?"
"저번에 말했잖아, 재인선배는 나의 신이자 우상이라구.
히잉, 몰라."
고개를 푹 숙이며 자책하는 듯한 내 모습에,
찬영이는 키킥대며 웃기 시작한다.
"야, 재인선배가 널 여자로 보는 것도 아니고.
어린 남자후배가 술 좀 먹고 쓰러졌다고 이미지 나쁘게 할 사람이 있겠냐?"
"어? 그런가?"
"키킥, 혼자 왕 오버야."
"지금 니 꼬라지가 더 오버거든?"
자신의 원피스를 쭈욱 훑어보는 내 눈길에,
찬영이는 민망한 듯 원피스를 훌렁 벗어제껴버린다.
"야! 그냥 막 벗으면 어떡해?!!!!"
"아, 팬티 입었잖아! 완전 벗은 것도 아니고"
"아, 이런 저질!!!"
그렇게, 내 눈 앞에서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찬영이를 애써 피하며,
난 기숙사 방을 나왔다.
교복바지에 들어있는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각.
다율이는 잘 들어갔으려나?
'다율아, 잘 들어갔어?'라는 문자를 보내며
1층으로 내려와 자판기로 향했다.
자판기에서 사이다를 꺼내 들 무렵,
띵동.
다율이에게서 답장이 날라왔다.
'응. 이제 막 들어왔어.'
에? 이제 집에 들어갔다고?
기숙사 로비쪽으로 걸어가, 운동장이 보일만한 곳에서 통유리를 통해 바깥을 바라보면,
이제 막 축제가 끝났는지, 하나둘 천막을 처리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와아, 고등학교 축제 한번 거하게 하는구나.
그렇게 다시 자판기 쪽으로 돌아와, 자판기 앞에 자리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이리저리 주변을 돌아보면.
"엄마야!!!!!!"
기숙사 뒤쪽으로 나있는 뒤뜰에,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사람 형체 하나를 비추고 있다.
나무벤츠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한 남자.
이제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도 누군지 알아볼 만큼의
사이가 되어버린 건가.
그렇게 한참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고개를 들어올린 강은석과 눈이 마주치고 만다.
까닥까닥,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해보이는 강은석.
술 기운 때문이었는지,
평소때 같았으면 보고도 피했을 그를 향해, 난 천천히 다가갔다.
평소 때 같았으면, 지금 이 시간엔 잠궈져야 했을 뒤뜰로 향하는
기숙사 문이, 지금은 열려져있다.
와, 축제날 다 개방해놓는다고 하더니,
진짜였네.
그렇게 뒤뜰로 향하는 유리문을 밀고,
강은석이 앉아있는 벤츠 옆에 자리한, 또 다른 벤츠에 앉았다.
"죽을래?"
란, 강은석의 말에 난 슬금슬금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앉아있는 벤츠에 앉았다.
최대한 강은석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흐음, 사람 불러놓고 5분째 말이 없는 강은석.
아씨, 또 그냥 올라가려고 하면 분명 뭐라 할텐데.
괜히 내려왔네.
"짜증나."
사람 불러놓고 5분을 말없던 강은석이,
처음 내뱉은 한마디였다.
농담처럼 'ME, TOO'라는,
진담섞인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재수없어."
지금 사람 앉혀놓고 인내심 테스트 하는건가?
최대한 기분 나쁘게, 그러나 맞지 않을 정도의 표정을 짓고서
강은석을 쳐다보자니,
강은석은 뭔가에 화가난 듯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진짜 싫다."
한참을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또 다시 강은석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뭐가요?......제가요?"
조심스럽게 물어본 내 물음에, 그제서야 나에게 눈길을 주더니
푸하하, 웃어보이는 강은석.
저렇게 시원하게 웃는 거 처음 보는 것 같다.
아, 선생님들 앞에서 짓는 가식적인 웃음을 제외하곤.
"난 싫어하는 사람 옆에 두진 않아."
흐음, 그렇다면 내 얘길 한 건 아닌가?
"그치만, 그렇다고 널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
자꾸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강은석.
어디서 술이라도 먹고 들어온거야, 뭐야?
"그냥, 내 주변에 지인~짜 싫은 사람 있어."
"싫어하는 사람, 옆에 안 둔다면서요?"
"응. 안 두고 싶은데....... 자꾸 쫓아다녀."
쫓아다니는 여자를 말하는 건가?
아, 이제 슬슬 졸려오는데, 언제쯤 이 대화는 끝이 날까.
"혹시, 술 드셨어요?"
"술? 먹었던가? 몰라."
말투며 목소리같은 걸 봐서는 술 먹은 것 같진 않은데,
술먹지 않고서야 강은석이 나를 상대로 이런 말을 꺼내진 않을텐데.
"여기 두드러기 났나 만져봐."
"두드러기요?"
"응, 아까 그 사람이 여기 만졌어."
라고 말하며, 자신의 왼쪽 어깨를, 먼지라도 털듯 오른손으로 탁탁 쳐낸다.
"그 사람이요?"
"내가 싫어한다는 사람."
내가 한 번에 말귀를 못 알아듣자,
약간 화난 듯한 말투로 대답하는 강은석.
"너, 항상 여기로 나와."
"네? 여기요?"
"응, 맨날 이 벤츠에 앉아있어."
"몇시에요?"
"석식 먹고."
"석식 먹고 연습해야 되는데..."
"연습하고."
"연습하면 10시 넘어가서, 씻고나오면 기숙사 문 다 닫히는데."
"하하, 병신."
강은석은 가소롭다는 듯이 날 비웃으며,
'병신'이란 단어를 담담하게 내뱉는다.
"여기 뚫려있어."
"아니에요. 오늘만 축제라서 열어둔거에요."
"아씨, 짜증나. 진짜 열려있다니까."
분명, 술을 먹은 게 분명하다.
나에게 '아씨'라던가, 투정섞인 말투로 말을 건넨 적 없는 위인이었다.
"저기 급식실 옆에 문 하나 보이지?"
별 영양가 없는 소리일테지, 란 생각에
대답도 않고 있는 나를 툭 치는 강은석.
"저기 보이냐고!"
자신의 말에 대답을 안 한게 짜증이 났는지
버럭 화를 낸다.
"아, 네. 보여요, 보여."
"저기 문 맨날 열려있어."
"아아, 그래요?"
"아씨, 진짠데."
그렇게 말해보이곤,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머리를 문지르며 눈살을 찌푸리는 강은석.
"알겠어요."
"그럼, 연습 끝나고, 샤워 끝내고, 맨날 여기로 와."
"네, 네."
"안 나오면 진짜 죽음이다?"
"네, 네."
"아씨, 왠지 대답에 성의가 없는데?"
강은석의 비위를 맞춰줘야 이 대화가 끝이 날 거란 생각에,
난 목소리까지 가다듬고 '네'라고 말하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만 올라가 볼게요."
"누가 가래?"
"저 내일 연습도 있는데."
"누가 가래."
"아침 일찍 일어나야 되는데."
"누가 가래, 썅."
강은석이 욕 하는 건 그리 흔치 않은 일인데.
아씨, 이대로 가면 안 되려나?
일어선 상태로, 이도저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는데,
내 손목을 붙들고는 다시 벤츠에 앉힌다.
몸은 여리여래헛는, 손아귀 힘은 엄청나다.
"내일 몇 시에 연습있는데?"
"아침 8시요!"
사실대로, 아침 10시라고 말하려다
급하게 8시로 대답했다.
아침 일찍 나간다고 하면,
혹시나 기숙사로 다시 보내줄까 싶은 마음에.
"근데? 내가 알 게 뭐야."
,그렇게 딱 두 마디를 내뱉고서는,
다시 침묵을 유지하는 강은석.
아오, 진짜 선배만 아니면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진짜 계속 여기 나와라."
"네."
"진짜 장난 아니다?"
"네, 알아요."
"새끼, 말 잘 듣네. 올라가라."
말 잘 듣는 돌고래에게 생선 하나 주는 듯한 포스로,
날 기숙사 안으로 들여보내주는 강은석.
혹시나 변덕을 부릴까, 얼른 기숙사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첫댓글 안가면 어떻게 되는거지?;;;
재미있어용>_<~~~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은석이 술먹은건가요 아 은석이랑 러브라인 되는건가요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