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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제1독서 : 예레 20,10-13
제2독서 : 로마 5,12-15
복 음 : 마태 10,26-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26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戰士
-두려워하지 마라, 함께하라, 선포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여, 당신의 넓으신 자비로 나를 도우소서”
방금 부른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화답송 후렴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깁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도움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때 일어나는 온갖 불행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환한 두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늘 미소 짓는 교황님 얼굴에 후덕해 보이는 중년 후반부의 여성이 함께 찍은
참 행복해 보이는 아름다운 사진이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그 유명한 인권 운동가였다 살해된 마르틴 루터 킹의 따님이었습니다.
머릿기사의 제목은 그녀의 고백이었습니다.
“교황님과 내 아버지는 똑같은 꿈에서 일치되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마르틴 루터 킹,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들이자 성인들입니다.
늘 하느님을 꿈꿨던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행복했던 분들이며 이런 성인 같은 분들을 통해
하느님의 꿈은 서서히 실현되어 갑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세상일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행복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습니다. 모든 불행과 혼란은 하느님 중심을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이야 말로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요 참행복의 원천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참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가 54장, ‘주님은 나의 목자’는 언제 불러도 감미롭고 위로와 힘을 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나는 아무것도 아쉽지 않네
푸른 풀밭 시냇가에 쉬게 하사/나의 심신을 새롭게 하네.”
하느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의 묘비명 부탁에 지체 없이 추천했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성구도 생각납니다.
“잘 놀다 간다”라는 묘비명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니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깊은 안정과 평화가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의 원초적 정서입니다.
요즘 같은 불확실한 삶은 더욱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합니다.
흡사 두려움에 포위되어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같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바로 믿음 부족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믿음의 빛이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여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박해 상황 중에 있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격려 말씀입니다만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지 마련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요 믿음의 기초입니다.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두려움,
즉 하느님을 경외敬畏하는 경건敬虔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할 때, 올바로 두려워할 때 세상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는 믿음 부재의 사람들이기에
생각 없이 함부로 본능의 욕망대로 막 살기에 불행한 삶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참으로 하나하나 귀하게 살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의 사람들은
세상 그 누구도,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 하나하나를 귀히 여깁니다.
참으로 주님께 청할 것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고통의 깊이는 믿음의 깊이입니다.
두려움의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버텨낼 수 있는 깊은 믿음을 달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넓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이를 보십니다.
삶의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이십니다. 두려움의 고통의 깊이 없이는 믿음의 깊이도 없습니다.
그러니 삶에서 오는 두려움과 고통을 믿음을 깊이 하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하여 더욱 견고해 지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둘째,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주님의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뒤에는 반드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이 뒤따릅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나 가까이 있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치유가 되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이보다 더 좋은 말씀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저절로 힐링이요 안정과 평화의 행복한 삶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돌판에 새겨진 주님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께서 승천시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제 여섯째 숙부가 임종 전 일주간 붙잡고 사신 말씀이요,
제가 고백성사 때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자주 써드리는 성구입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의 두려움과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면초가 상황 중에 들려오는 “저기 마고로 비싸빔이 지나간다!”며 수군대는 말소리입니다.
마고로 비싸빔은 “사방에서 공포가!”라는 뜻이요 적대자들이 예레미야에게 붙여준 별명입니다.
흡사 수난 중인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통이 클수록 깊어지는 하느님 믿음의 크기와 깊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 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이렇게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온통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처분에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이요 지혜입니다.
이런 고통의 심연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순경順境중에 찬미는 누구나 합니다.
이런 역경逆境중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가 그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역경을 순경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참으로 불운을 행운으로, 운명을 바꾸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예레미야의 찬양이 심금을 울리는 감동입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일희일비함이 없이 한 결 같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찬양이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견고히 하며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더불어 영원한 동반자이자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의 사랑과 신뢰도 날로 깊어지고 튼튼해집니다.
셋째, “복음을 선포하라”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주님과의 관상은 복음 선포의 활동으로, 주님과의 친교는
선교활동으로 향할 때 더욱 견고해지는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끊임없이 바다를 향해 흐를 때 살아 있는 맑은 강이듯
끊임없이 복음 선포의 활동이 있을 때 더욱 깊어지는 관상의 친교요
더욱 견고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우리 삶 자체가 복음이, 복음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와 더불어 사라지는 무지의 두려움, 무지의 어둠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하느님의 나라가, 파스카의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이 투명히 드러날수록 저절로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니 복음 선포의 삶은 그대로 말과 글과 행동으로,
아니 우리 삶 전부로 주님을 증언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사랑할 때 알고 알 때 증언합니다.
과연 나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주님은 나를 얼마나 알고 있겠는지요.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영원한 도반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사랑과 앎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과 앎의 관계인지 깊이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예레미야도 예수님도, 당대의 제자들도 모두 훌륭한 하느님의 전사들이었고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영원한 현역의 죽어야 제대인 우리들입니다.
강론을 써가면서 새롭게 바뀐 강론 제목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한결같아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모르지만 세월 흘러 나이 들어갈수록 한결같은 삶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습니다.
절대 저절로 한결같은 삶이 아니라 갈수록 치열한 분투奮鬪의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중심의 확고한 믿음의 삶과 더불어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며 당부 말씀을 주십니다.
1. 두려워하지 마라.
2. 나와 함께 있어라.
3. 복음을 선포하라. 아멘.
훌륭한 무사
류해욱 요셉 신부
오래 전에 일본에 훌륭한 무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폭풍우에 배는 금방이라도 파선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아내가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갖고 있던 칼을 빼어 들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 칼이 무섭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그 칼이 사랑하는 당신 손에 있는데 왜 무섭겠소.
그런데 이 상황에 왜 갑자기 칼을 빼어 나에게 보여 주시는 거요?”
무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칼이 무섭지 않듯이
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폭풍우가 무섭지 않소.
이 칼이 내 손에 있듯이 이 폭풍우는 하느님의 손에 있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절대로 우리를 해치지 않으실 거요.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 말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폭풍우는 잠잠해지고 미풍이 불어왔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은 지녀야 하겠지만 두려워 떨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지었기에 두렵다고 합니다.
죄를 지어 두려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죄는 피해야 하겠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죄를 짓고 하느님을 피해 숨는 그 행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오히려 용기를 갖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 앞에서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도 그렇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다르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작은 머리 안에 하느님을 집어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리의 사고 안에 다 잡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어떻게 했습니까?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느님 눈에 띄지 않게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몰라서 부르신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이 스스로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상처가 햇빛을 쏘여야 낫듯이 죄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하느님을 뵈어야 낫을 수 있기에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담은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답했습니다.
“두려워 숨었습니다.”고.
그래도 그런 용기를 지녔기에 아담은 죽지 않고 다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담은 바로 사람을 지칭하고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아담과 예수님, 죄와 은총의 비교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가 죽음을 불러들였지만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은 아담이 지은 죄의 경우와
실상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설파합니다.
“아담의 죄의 경우에는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큽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죄 때문에 절망에 빠지는 것은 두려워해야 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간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 때문에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탄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하느님의 자비하심, 그분의 사랑, 그분의 은총을 믿고
훌훌 떨고 일어나 그분 안에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설령 몇 번이고 죄로 인해 넘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때마다 우리는 오늘 화답송의 시편 말씀처럼
“주님, 당신의 넓으신 자비로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는 죄가 있는 곳에 은총이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화답송의 시편을 좀 더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은혜로운 때에 당신께 비오니 그 넓으신 자비, 진실한 사랑으로 저를 도우소서.
임의 자비하심 너그러우시니 주님,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그 사랑 지극하시니 저를 굽어 살피소서.”
여기서 은혜로운 때는 모든 것이 잘 되어나갈 때라기보다 오히려 바로 당신의 은총이 필요한 때,
다시 말해 우리가 죄를 지었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때입니다.
그때야말로 하느님께 나아가서 용서를 청하며 자비를 빌고
당신 사랑에 의탁하는 때이기에 참으로 은혜로운 때입니다.
복음서 안에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이 수없이 나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두려움은 우리를 작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바로 불안의 전주이고 불안은 옛말처럼 마귀의 운동장입니다.
불안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쉽게 유혹에 빠집니다.
하느님께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유혹, 책동입니다.
죄를 짓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잘하는 일인ㅡ줄로 착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찬란한 착각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착각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두려워하는 까닭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이신 지, 하느님이 얼마나 크신 사랑이신 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참으로 사랑이신 분이라는 것, 용서 자체이신 분이시라는 것을 안다면
두려워 숨지 않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서 “잘못했습니다.”하고 용서를 청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때마다 용서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벼룩이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같은 죄를 자꾸 짓고 또 고백성사를 보느냐고 합니다.
실은 자기가 쩨쩨하니까 하느님도 그렇게 쩨쩨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가 번역한 ‘일상 삶 안에서의 영신수련’이라는 책에 있는 작은 환상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립니다.
제목이 ‘가장 처참한 죄인에 대한 작은 환상’입니다.
<너무나 무서운, 누구도 죄목조차 댈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을 상상한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였다. 그는 그러한 죄를 범하고 또 범했다.
그러나 마침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심했다.
그는 하느님께 가서 고한다. “저는 죄를 뉘우칩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신다. “무슨 죄인데?” 그는 자신의 죄목을 댄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래, 나는 네가 자신의 죄에 이름을 붙이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다려 왔다.
지금 네가 네 죄를 뉘우치니 기쁘기 그지없다. 이제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
그 사람은 기쁨에 넘쳐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은 그 무서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또다시 죄를 짓고 말았다. 그는 실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수치심과 절망감으로 그는 비참함을 맛보아야 했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그는 두 번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고했다.
“주님, 저는 또다시 그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셨다. “무슨 죄인데?”>
하느님은 우리가 한번 용서를 청한 죄를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일곱 번 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용서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거꾸로 당신도 용서에 한계를 두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과거는 힘이 셉니다. 그래서 과거의 휘둘림에 한 대 맞으면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듭니다.
과거는 제자리에 있을 뿐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과거는 지금 현재에도 자신의 힘을 과시합니다.
어쩌면 미래에도 그 힘의 위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 4월 15일. 제 어머니께서 하늘 나라로 떠나셨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언젠가는 이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솔직히 어머니 잃은 슬픔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어떻게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됩니다.
분명 과거의 일회성 사건이지만, 지금도 그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어떤 쪽으로 그 힘을 발휘시키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글과 강의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언제나 제가 쓴 글을 읽으셨고, 이를 위해 컴퓨터도 스스로 독학하셨습니다.
이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이렇게 움직입니다. 또 자라고 변하고 몰라보게 달라집니다.
주님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마음에 따라 움직이며 자라고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는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즉,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심판 날에 우리 의지의 숨겨진 양심이 드러날 것이고,
지금은 흐리게 보이는 것들이 모두에게 드러나게 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박해자들의 위협이나 모략 또는 그 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육신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죽일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영혼이 없으면 죽고, 영혼은 하느님이 없으면 죽는다.’라는 성 아오스딩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육신의 죽음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죄를 슬퍼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귀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주님을 안다고 말로만 고백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과거의 주님을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하느님 나라 초대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연중 12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라.”(예레 20,11)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님을 두려워함”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0,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
두려움과 하느님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사람을 향한 두려움은
결코
영원하신 하느님을
뛰어넘어
덮칠 순 없습니다.
사람을 향한
두려움을
어김없이 부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통해
우리 사람이
더 귀해지고
더 아름다워집니다.
비로소 사람은
하느님을 통해
편안하여집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댈 수밖에 없는
우리들 생명입니다.
사람의 길은
사람을 더 귀하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향하는 길입니다.
서로를
귀하게 함과 소중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두려움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시어
행복으로 이끄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소중함으로
우리를
이끌어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진심으로 압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시간이
우리 영혼을
되살리는 은총의 시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님 말구’ 정신으로 사랑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
누군가를 사랑하여 다가가 고백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고백이 거절당하는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만약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평생 후회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일주일 남겨놓고 베트남전에 투입되게 된 군인이 있었습니다.
다녀와서 꼭 결혼하자고 약속을 하고 전투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목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그녀를 지켜볼 뿐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약혼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혼녀의 짐을 덜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약혼녀에게 가서 내가 죽었다고 전해주게. 그러나 끝까지 사랑했노라고 전해주게.”
친구는 약혼녀에게 그렇게 전해주었습니다.
약혼녀는 한없이 울었지만,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또한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혼인식을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혼인하는 사람은 발은 물론이요, 양손까지 절단된 퇴역군인이었던 것입니다.
두 다리가 절단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가가지 못한 이 군인은 얼마나 큰 후회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릅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을지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일단 표현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
런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또한 ‘아님 말구!’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를 그렇게 쓴 것입니다.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정신이 없으면 사랑이 집착이 되거나,
혹은 그 두려움 때문에 혼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한마디 말도 못 붙이고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안 잡히는 물고기 때문에 물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그물에 들어오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아야 할까요?
그러면 그물을 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이유는 그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들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잡히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는다면 그물질은 포기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선포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복음 선포를 하는데 우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멸망시켜도 영혼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오히려 영혼까지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두려움 없이 증언한다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그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님 말구!’ 정신입니다.
선교왕들은 다 이런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무조건 “찬미 예수!”라고 인사합니다.
불교 손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며 한 해에 서른 명 정도를 선교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길거리에서 띠를 두르고 무작정 다가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한 해에도 수백 명 선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나오고 싶어도 인도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주저하는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의 어떤 선교왕은 길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을 ‘고구마’로 여긴다고 합니다.
고구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찔러보는 것입니다.
안 익었으면 다음에 또 찔러본다는 마음으로 선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을 선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유튜브에도 가끔 ‘악성 댓글’을 달거나 ‘싫어요’를 누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싫어요’를 누르는 사람을 찾아낼 수 없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왜 찾아내야 할까요? 모두가 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졌는데 호수의 물고기들이 다 그 그물에 들어와 보십시오.
그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저는 사실 ‘좋아요’, ‘싫어요’가 몇 개인지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에 휘둘리면 에너지를 빼앗기고 그러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악플을 다신 분이 있다면 읽어보고 챙길 것은 챙기고
그분을 더는 댓글을 달지 못하게 차단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그것을 읽고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면 반드시 거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거절이 무서워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주님도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지붕 위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님 말구!’로 대처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고백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을 들었다면 선포합시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아신다고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뉴욕 타임지에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들의 부고 명단이 실렸습니다.
10만 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고인들과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아직도 매일 확진자가 생기고 있고, 안타깝지만 사망자도 나오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사라지기를 기도합니다. 치료제와 백신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미국의 방송에서 한국의 외교부 장관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한국이 어떻게 코로나19를 잘 막아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한국의 외교부 장관은 3T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Test, Trace, Treatment"라고 하였습니다. 검사, 추적, 치료라고 하였습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증상이 시작되면 이미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범위한 검사가 필요합니다.
빠른 진단키트의 개발과 신속한 검사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확진자의 동선을 추적하고, 자가 격리 시키는 것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확진자의 동선과 겹치는 지역에 있었다면 자발적인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지역 내 감염을 막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의료진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고,
자원 봉사자의 참여가 있었기에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사망자의 수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봉쇄와 단절, 폐쇄로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때로 위기와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Lockdown(폐쇄)가 장기화 되면서 미사 없는 신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체 활동도 중단 되었습니다.
영상으로 미사를 보고 있습니다. 문자로 신자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기름이 없으면 달릴 수 없듯이, 공동체의 친교와 나눔이 없으면
신앙의 열기와 활력이 식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다행히 성당 문은 열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내서 성체조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서와 신심서적을 가까이 하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단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부들은 교리와 신학을 수호하였습니다.
이단에 현혹되지 않도록 교회의 전통과 신앙의 진리를 지켜왔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엄청난 박해가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은 드러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박해는 점점 심해졌지만 신앙은 점점 뜨거워졌습니다.
한국교회도 박해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교우촌을 만들었습니다.
사제를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를 만나면 공동체는 기뻐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103위 성인이 되었고, 124위 복자가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시련과 갈등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함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께 의지하였고,
하느님께서 고난과 역경에서 구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시련과 갈등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더 강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갈등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때 일수록 더 굳게 하느님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걸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가엾이 여기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어
저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하느님 증언하기
권 루카스 수녀
성전에서 기도하는 밤
저 먼데서 소쩍새 운다.
청청한 밤 하늘에
청아하게 울리는 소쩍새!
소쩍새는 증언하는가?
그렇다. 온 힘을 다해...
아름다우신 하느님!
소쩍새가 불러서
중정을 나가보니
청청한 밤하늘에
별들이 내려온다.
별들은 증언하는 가?
그렇다. 온 빛을 다해...
참 아름다우신 하느님!
둘러보면 모든 것이 다 증언하고 있구나!
참 아름답게, 아름답게, 아름답게.....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