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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
그날은 무언가 고팠다.
그런데 퇴근 무렵..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나 오늘 시간 있어. 바람 쐬고 싶지 않니?"
"왜 남편이랑 싸웠니. 덕분에 내가 덕보겠네 ㅎㅎ."
그 친구는 운전을 잘해 길치에 운전이 젬병인 나를 가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주곤 한다.
"그렇지 않아도 시원한 바람이 그립던 참이야."
"오늘 나 가고 싶은데가 있어."
"늘 그리워하며 가슴에 담고 살았던 곳"
"그게 어딘데?"
"공주군 우성면 우성국민학교"
"가 줄래?"
우리는 공주군 우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대전을 빠져나가 세종시를 지나...
나는 국민학교 1,2학년 단발머리 어린 아이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고속 타임머신을 타고...
대학을 졸업하고 서산으로 발령을 받아 발령장 들고 우성을 지나면서 처음 알았다.
내가 이곳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학교 5학년 초에 공주로 전학 오며 떠난 후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멀지도 않은 그곳.
지날 때마다 목을 빼고
내가 살던 집이며 친구들과 놀던 공회당 마당이며
학교 운동장이며 아버지를 따라 공주 가는 차를 탔던 버스터미널(?)이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좀처럼 그곳에 내려 옛날 그 시간들 속에 잠길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길에서 좌회전하면 우성초등학교야."
친구의 소리에 난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렇게
그렇게 그리던 그곳!
45,6년전의 흔적들 그 시간들을 만날 수 있을까
우성초등학교 교문을 들어섰다.
친구들과 공기돌을 주어 모아 공기놀이를 하던 교문 옆 나무 밑...
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그늘이 왜 이리 작아
그 땐 엄청 넓어서 여러 친구들이 둘러 앉아도 남고 남았는데...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소풍가는 날 아침 전교생이 모여 섰을 때
작은 꼬마였던 날 짖꿎은 남자 녀석이 귀찮게 놀렸다
“아버지 얘가 자꾸 날 놀려”
앞에 섰던 그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와 선생님들이 다 웃었었지.
운동회 날
달리기 하기 싫어서(워낙에 운동신경이 둔해 달리기하면 늘 뒷땅이 내땅인지라) 화장실 뒤에 숨어 공기놀이 하며 놀다가
아버지한테 들켜 같이 놀던 언니들 하고 벌 받았던 곳이 여기쯤이겠지.
한참 젊으셨던 나의 아버지,
엄청 무서운 선생님이셨는데...
그 당시 우물이 있었던 곳이 보고 싶어 교사 뒤로 돌아가 보았다.
여선생님 한 분이 막 퇴근하려 나오시던 참이었다.
그 분이 나한테 관심 있을리 없지만
내 감정에 취해 괜히 감격스러워 인사를 하며 묻지도 않는 말을 건넸다.
“제가 여기 학교를 다녔어요.”
“아 예 ” 하며 그분은 별 느낌없이 차를 몰고 가버린다.
내가 그 분이었다면 최소한 내 느낌 반쯤이라도 이해하고 학교를 안내해 주지 않았을까
돌아나와 기억을 더듬어 학교 뒤 문이랄거 까지는 없지만 통로를 찾았다
위치는 좀 바뀌었지만.. 예전엔 그냥 흙언덕이었던 몇 개의 흑계단으로 올라갔다.
예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카시아 나무도 있었고 아래로 도랑도 흘렀던듯 싶은데..
그곳에서 그 시절 시커먼 조대흙을 파서 미술시간에 지금의 찰흙처럼 쓰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잘 정리되어 도랑은 보이지 않고 시멘트길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길을 따라가면
무언가 예전의 모습 한 조각이라도 주울까 싶어 몽유병환자처럼 길을 따라갔다.
예전의 기억들을 찾을 수 있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쯤에 밀밭이 있어서 밀목을 따 비벼 입에 넣고 씹기도 했었고.
가을에 무우가 하얀 속살을 땅위로 내놓고 배고픈 아이들을 유혹했었지.
몇 걸음 더 가니 집들이 몇 가구 있다.
이쯤에서 우리가 살았고 그 옆에 혜영이네 김호영선생님이 사셨었지 아마..
어느 집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삼십대쯤 되어보이는 여자가 물을 가지고 나와 밭에 휙 던져 주고 들어가버린다.
조금 더 가면 큰샘이 있었는데...
아, 있다 근데 이 샘이 45,6년전 그 샘일까?
샘 주변 집 앞에 꽤 연세가 많으신 듯한 할머니 두 분이 앉아 계셨다.
반가웠다.
아주머님 말씀 좀 여쭈어도 될까요?
이 동네에 오래 사셨어요?
아 그럼 내가 열아홉에 시집와서 육남매 낳고 여지껏 살았어. 왜 그래
이가 다 빠져서 말이 새고 귀가 어두우신 모양이다.
아 예 제가 45,6년 전에 이 동네에 살았었거든요.
우성국민학교 다녔구요.
우리 애들도 다 우성국민학교 다녔어.
아, 그럼 혹시 성관모 선생님 기억하세요. 10년 넘게 계셨었는데요. 제가 그 분 딸인데요.
근디 내가 하도 나이가 많아서 생각을 못하겄네.
그러시죠
아주머니 제 또래에 경숙이라고 있었는데 생각나세요?
이~ 저집 살았었는디 지금은...
이 샘이 예전에 큰샘이라 부르던 그샘 맞나요?
그럼.
샘 주변 형태가 변하긴 했지만
샘가에 아주머니들이 둘러 앉아 쌀도 씻고 채소도 씻고 빨래도 하시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조 아래 쯤에 공회당이 있었던거 같은데요.
응 지금은 식당해.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럼 가볼게요. 아이고 물 한모금도 못 먹고 가서 어쩐댜
아유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전화가 울린다.
“너 어디있어. 말도 안하고 혼자만 가면 어쩌니.”
“미안, 조금만 기다려”
나 혼자이고 싶었다.
공회당은 더 높아져서 식당으로 변해 있고
동무들과 사방치기 하던 그 마당은 작아졌다.
밭이었던 곳에 보건지소가 생기고
집으로 가던 논둑길(뱀이 또아리 틀고 있어 무서워 지나지 못해 한참을 섰던..)은 없어지고
내가 살았던
마당이 넓어 토마토에 토란에 가지에 배추도 크고
토담위에 호박이 열리고 양지바른 부엌 쪽 벽에 기대어 벌집도 여러통이 있었고
닭이 울면 닭장에 들어가 따뜻한 닭알을 꺼내오던 집
밤에 자다 소변보러 마루에 나와 요강 단지에 앉으면 달빛이 가득 내려와 마당이 환하던 집
그 집은 흔적도 없었다.
그 자리에라도 서보고 싶어 사잇길로 가다보니
40대쯤 되어보이는 남자 두분이 무언가 하고 있었다.
이 동네에서 오래 산거 같진 않아 큰 기대는 안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어디를 찾으세요?”
우성에서 마지막으로 살던 집 그집엘 가고 싶었다.
“제가 46년 전에 면사무소 옆집 고의사가 병원 하던 자리에 살았었는데 혹시 그 집에 살던 분들이 지금도 그 집에 사나 해서요”
“그 집에 살던 아이들이 지금은 나이가 50 조금 넘었을거고 이름은 영희 그리고 영철이었던거 같은데요”
“모르겠는데요.”
실망스런 마음으로 돌아서려는데
나보다는 5,6년은 위일거 같은 남자분이 나오시며
"누굴 찾는다고요"
뭔가 기대해도 좋을 듯 했다.
......
영희 어머니가 지금도 그 집에 사신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 골목길을 따라가면 그 집이 나온단다
맞아 옛날에도 이 골목길이 있었다. 시멘트가 깔린게 달라졌을 뿐 ..
가슴이 뛰었다. 감사하단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골목길을 빠져나가니 그 끝에 내가 살던 영희네 집이 정말로 나타났다.
많이 개조했지만 기본 골격은 그대로 인듯 했다.
대문은 열려 있었고 마당 가득 여름꽃들이 피어 있다 .
이 대문이 신작로쪽으로 나 있었는데..
신작로에서 올라오는 길이 가파르고..
내 어린 동생이 대문 가까이서 놀다가 길쪽으로 굴러 떨어져 온 식구가 놀랐었는데...
조용했다.
조금 전 만났던 남자분이 따라왔던가 보다.
내가 머뭇거리자 들어가 보란다.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계세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 기척이 없다. 더 안으로 들어가니 부엌인듯 싶은 곳 뒤쪽에서 물 끼얹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샤워를 하시는가 보다.
“실례합니다.” 조금 더 힘을 내서 불러 보았다.
계속 물소리 뿐 사람 목소리는 없다.
우리 식구가 살던 방이 저 끝에 있었지.
학교 점심시간이면 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고 집에 와
저 끝방에서 맛있게 점심 먹으며 김삿갓 북한 방랑기를 들었었는데..
시그널 음악이며 남자 성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병원이었던 방을 개조한 방이라서 창문이 넓은 방이었었지
겨울날 아침 잠에서 깨어 창문을 보면 성애가 동화속의 하얀 설국을 멋진 궁전을 환상속의 나라들을 그려놓곤 했었는데...
아버진 동화책이랑 동시집을 한보따리씩 빌려다 주셨고
저 방에서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었는지.
집없는 천사를 읽으며
레미가 할아버지를 따라 집을 떠나는데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장면을 읽으며 눈물을 얼마나 흘렸었는지...
남자분이 마당으로 들어오며 “더 크게 불러봐요.”
“물소리만 들려요. 조금 기다려 볼게요.”
성미 급한 남자분이 소리쳐 부른다.
“영희 어머니, 영희 어머니, 손님 왔어요”
대답소리가 들리고 부엌문이 열리며 할머니(?) 한분이 나오신다.
아, 그 옛날 기억 속의 빠글빠글한 퍼머 머리의 영희 어머니 얼굴에 세월만 내려 앉았지 그대로셨다.
날 알아보실리 없다.
“45,6년전 여기 사셨던 성관모 선생님 기억하세요?”
“그럼 알지, 점잖으셨었지.”
“제가 그분 큰딸이에요.”
영희 어머님이 내손을 덥석 잡으며 “어떻게 이렇게 왔어.”
....
드디어~ 드디어~
1964년 무렵으로 돌아가 그 옛날 꼬마 아이와 그시간들을 함께 나누어 줄 분을 만난거다.
기쁨(?)에 반가움에... 표현하기엔 무언가 부족한 그런 기분으로 난 들떠 있었다.
"영희는요 영철이는요"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
뒤따라 오셨던 그 분도 내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알고보니 나보다 8년위...)
그분을 통해서 같은 반이었던 그리운 친구들의 소식을 몇 명은 들을 수 있었다.
인사를 하고 나오려니 저녁을 먹고 가라하신다.
난 그제서야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부엌으로 들어가시더니 맛있는 식혜를 한 대접 주신다.
얼마나 맛있게 마셨던지...
다음에 또 들려서 밥 먹고 가라고 찾아와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뒤로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친구는 고맙게도 나 혼자만의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이해해 주었다.
'자기의 속상한 얘기를 하고 싶었을텐데.. 고마운 친구, 잊지 않을게'
“어땠니”
“음~ 글쎄 어릴 때의 첫사랑을 몇십년을 그리워하다 머리는 다 빠지고 쪼글쪼글한 얼굴로 만난 기분이랄까?
학교랑 집들은 다 새 건물로 바뀌고 흙길은 시멘트로 덮이고 논둑길 밭둑길은 반듯해졌지만 하나도 좋아보이지 않았어.
다 빠진 머리를, 쪼글쪼글한 얼굴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래도 확인하고난 뒤의 후련함(?) 허전함 글쎄 뭐라고 표현할 언어를 못찾겠다.“
암튼 큰샘이 그 자리에 있었고 영희어머니가 그 자리에 살고 계셔서 그 시간들을 나눌수 있었음에 감사해.“
우리는 오른쪽에
여름날 삼남매가 아버지 자전거를 함께 타고 더위를 피해 저녁에 놀러 나왔던 논가운데 데부둑을 뒤로 하며 대전을 향했다
친구야~ 고마워
내게 이렇게 귀한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주어서
네 얘긴 다음에 듣자. 나 그냥 이 기분 누리고 싶어..
첫댓글 네글이 나를 기억의 저편으로 데리고가서 너와의 추억을 뒤새김질하게 만드는구나.40년이 넘는 시간여행을 덕분에 했구나.
풋풋하게도 맛깔스럽게도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쓰는지 다시 감탄한다. 더위에 건강하자. 친구야~~~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넌 그 때도 마음이 컸던 언니 같은 동무였었지. ㅎㅎ 긴 글 읽어주어서 과찬까지 감사^^
더위야 물러가라. ㅎㅎ 건강+ 행복하자~~
와~~~감탄!! 감탄!! 우리 동기중에 이런 글쟁이가 있었나??? 큰샘, 공회당, 데부둑... 지금은 잊혀진 단어들을 어이 다 회상하는고.. 당신은 영락없는 꼬맹이 선생님이네요.. 실로 같은 세월을 살았던 우리네들의 45, 6 년전 삶의 정취와 초등학교 시절을 흠뻑 느낄 수있게 해주는 글입니다. 재미있게 단숨에 읽으면서, 문단에 데뷔안해도 어릴적 추억을 곱씹는 정초 선생님은 진정한 작가라 인정합니다. 짝!!짝!!짝!! 근데...그대는 뉘집 자손인고???
ㅋㅋㅋ 읽어주셔서 감사 또 감사해요. 이렇게 칭찬에 칭찬까지 ...
근데 아저씨 칭찬은 왠지 팔이 안으로 굽는 그런 거 같아서 신빙성(?)이....ㅎㅎㅎ
성가네 친척이라 칭찬을 하는 게 아니라...워낙 글을 잘 쓰셔요. 우리가 어릴 적 다녔던, 살았던, 댕기러갔던....그런 시골, 그런 국민학교, 학교 주변 동네, 면사무소와 주변 동네...로의 추억여행을 다녀온 듯이...좋은 글을 두 번째 읽고 갑니다. 창작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서....우성국민학교가 상서리에 있나요?ㅎㅎ
칭찬해 주셔서 더운 여름이 가뿐할 거 같아요. 더구나 긴 글을 두번씩이나 읽어주셨다니 넘치는 감사의 마음을 어찌 전해야할지..ㅎㅎ 우성국민학교는 동대리에 있답니다. 그 옛날의 동대리는 정말 정감 넘치는 동네였었어요. 늦둥이 잘 크고 있지요. 이제 아빠만 할거 같은데요?
초등학교를 두군데에서 다녔던 나로써는 두배의 감동을 받고 가네요.. 늦둥애비와 함께했던 산을 세고개나 너머 다녔던 2학년까지의 추억들, 분교가 되어 산을 넘지 안아도 되었던 또하나의 추억들~~암튼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당~~근데 성가네 친척이라함음 정월초하루=성열순, 바다=성용구 맞남요? 암튼 정초님은 대단한 글 솜씨로 몇번씩이나 감동을 주네요. 눈꽃속 속리산의 추억 여행은 아직도 생생하네요~~감사.
두 학교 다니셨으면 추억도 두배시겠네요. 칭찬은 고래도 춤춘다더니.. 제가 더욱 건강해질거 같은 기분이에요.
맞아요.ㅋㅋ 아저씨에요. 전 지금도 눈오는 겨울 날이면 속리산을 생각한답니다. 겨울 방학 쯤 눈이 오면 며칠쯤 속리산속에 묻혀볼까 한답니다..
정초의 글은 청정수~~!!! 마음이 맑아서 글 내용도 수채화 처럼 아름답구나. 아무나 이런 글 못쓰지~~~ 바다님이 평가를 잘해주셨어요. 어렸을때 부터 책을 많이 읽어서 필력이 이렇게 특출하구나. 울 동기들은 재주꾼들이 많네. 사진작가 송자, 문필가 정초.
사진작가. 문필가, 동양화백 백인현, 그리고 성악가 산소미소가 있지요.
ㅎㅎㅎㅎㅎ 모두 모두 감사 또 감사해요. 과찬인줄 알면서도 기분은 하늘을 날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