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이제 한 학년만 더 다니면 이 학교는 졸업이다.
빨리 빨리 시간이 지나 갔으면 좋겠다.
중학교 생활이 기대된다.
읍내에는 이곳과는 다른 것들이 많이 있을 텐데 발리 가고 싶다.
중학교에 다니게 되면 용돈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원하는 것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학교 교문 앞 문방구에는 늘 학생들이 북적인다.
무엇을 사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아이들은 모두 용돈을 주는 모양이다.
나도 이제는 가끔 문방구를 둘러본다.
자주 가지는 않지만 주말이나 학교가 좀 빨리 끝나면 한번 둘러보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학용품들은 부모님께서 사다 주신 것이라서
노트도 표지는 멋이 없고 장수만 많이 붙어 있는 노트이다.
아이들 말로는 중학생 언니 오빠들이 사용하는 노트 같다고 한다.
연필도 무색이다.
문방구에서 파는 것은 예쁜 만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지우개도 네모나고 필통도 예쁘지 않다.
문방구에는 예쁜 필통도 많고 모양 있는 지우개며 대나무자가 아닌 플라스틱에
예쁜 색깔의 자들도 가득하다.
나도 저런 것 가지고 다니고 싶다.
먹을 것도 수두룩하다.
쫀 득이, 분필 모양으로 생긴 하얀 우유, 라면땅, 눈깔사탕, 별 사탕, 줄줄이 사탕,
오꼬시, 밤 모양 과자, 빨강, 파랑 알록달록 색깔도 찬란한 여러 가지
이름 모를 간식들이 자판 가득하다.
이런 것들보다도 나의 눈에 확 들어온 한 가지는 ‘간스매’라고 부르는 통조림들이다.
저쪽 뒤에 복숭아 통조림이 너무너무 먹어보고 싶은 가장 가지고 싶은 물건이다.
우리 엄마는 우리를 위해 갖가지 반찬들, 여러 가지 젓갈들과 생선들을 많이 준비해 주신다.
그리고 간식으로는 고구마와 찐빵, 시장에서 파는 국화빵이랑 계절에 따라 봄에는
쑥을 캐서 쑥버무리나 쑥 개떡, 쑥 인절미를 해 주시고 여름에는 여름 과일들이랑
가을에는 찐 밤, 물 대추 등등 필요한 것을 충분히 제공해 주신다.
그런데 지금까지 통조림은 간식으로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다.
엄마는 통조림이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어떻게 하면 저 통조림을 한번 먹어 볼 수 있을까?
지금까지 부모님께 무엇을 사게 돈을 달라고 말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늘 말씀하시기를 “필요한 물건은 내가 사다주마”하시고
직접 물건을 사다 주신다.
심지어 육성회비도 부모님께서 직접 학교로 오셔서 반년 치나 일 년치씩 모두 내 주신다.
참고서나 필요한 모든 것을 부모님이 직접 사주시고 나에게 돈을 들고 다닐
기회는 한 번도 주시지를 않는다.
아버지가 벌어온 돈을 주머니에서 꺼내서 엄마에게 주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거의 한주먹씩 돈이 왔다 갔다 했다.
왜 아버지는 돈도 많이 버시면서 나에게는 동전 한 닢 만져볼 기회도 주시지 않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나를 못 믿으시는 것도 같고 돈이 주기 싫으신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나는 매일 복숭아 통조림을 먹고 싶은 생각에 돈이 너무 갖고 싶다.
돈이 좀 생기면 너무 좋을 것 같다.
나는 집에서 일도 많이 하고 동생들도 충분히 돌봐주는 데 왜 돈을
엄마 아버지만 쓰시고 나에게는 조금도 나누어 주시지 않는지 모르겠다.
엄마 아버지가 주시지 않으니 할 수 없다.
늘 아버지가 입으시는 양복 주머니에는 돈이 들어있다. 분명하다.
지금 마침 기회가 왔다.
동생들도 모두 놀러 나가고 엄마도 밖에 나가시고 아버지도 일하러 가셨다.
벽에 걸려있는 아버지 양복바지 뒷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넣는다.
“100원만 가져가야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 주머니에는 1000원짜리 밖에 없는 것이다.
모르겠다.
하나 빨리 집어서 내 주머니에 넣고 ‘걸음아 나 살려라’ 엄마 방을 빠져 나왔다.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지?’
‘캄캄한 동굴 속에 혼자 서 있는 것 같다.’
‘무섭고 답답하다’
부모님과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큰일이다.
내 방에 들어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책상에 앉았다.
지금 집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에 아무도 없건만 왜 이리 불안한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귀신이 등 뒤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두렵거나 떨리거나
무섭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소리가 들리고 한명씩 집으로 사람들이 돌아온다.
모두 나의 이름을 부를 것만 같다.
밖에 나가서 “엄마,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셨어요?”라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나갈 수가 없다.
놀러 나간 동생들도 모두 들어오고
언제나처럼 엄마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르신다.
“현진아”
‘큰일 났다. 엄마가 알아버리셨나 보다. 어떻게 하지? 뭐라고 변명하지?
동생들 얼굴은 어떻게 볼까?‘
“현진아 빨리 나와서 아궁이에 불 좀 때 거라. 저녁밥이 너무 늦었다.”
“네”
불을 때는 건지 뭐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안절부절 정신이 하나도 없다.
“현진아 애가 오늘 왜 이래? 그렇잖아도 늦었는데....
밥이 꿇어 넘쳤는데 왜 장작은 이렇게 많이 넣었어.
밥 다 타게 생겼다.“
발거케 달아오른 장작을 다른 아궁이로 옮기시고 옮길 수 없는
작아진 불덩어리들은 에는 물을 뿌리신다.
‘칙~~~~’
연기가 부엌 가득하고 소리가 요란하다.
모두 나에게 소리 지르고 연기도 나에게 대들어 따지는 것 같다.
정신없이 부엌에서 나와서 연기 때문에 기침이며 눈물이며 마음껏 쏟았다.
벌써 나의 지은 죄에 벌이 시작된 것 같다.
죄를 짓고 떠는 마음은 세상ㄹ에서 가장 힘든 마음 중에 하나이다.
아무것도 잘 못한 것이 없이 동생들 잘 못 때문에 야단맞을 때의 억울한 마음보다
훨씬 더 깊은 고통의 마음이다.
왜냐하면 동생들을 위한 마음은 그래도 스스로나 동생들 혹은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는 마음이지만 죄를 짓고 떠는 마음은 죄의 문제가 끝날 때까지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의 적대자가 되고 나를 쫒아오는 것 같은 압박감을 주기 때문이다.
저녁밥을 큰 상에 둘러서 함께 먹는다.
아버지께서 이래적인 대화를 시작하신다.
“아버님 어머니 오늘 하루 평안 하셨어요?”
“오냐”
“현진이 오늘 잘 지냈니?”
우리 오남매 대표가 바로 나다.
아버지는 ‘현진, 현아, 현규, 현성, 형용이 잘 지냈니?’라고 묻지 않으시고
동생들의 안부와 나의 안부를 늘 하나로 물으신다.
다시 말해서 ‘현진이 너 오늘 동생들 잘 보살폈니?’하시는 질문이다.
마음이 울컥하다.
‘왜 맨 날 해주시는 것도 없으면서 나에게 물어 보시는 거야?’
속으로 크게 외치지만 밖으로는 그저 숙인 고개를 까딱일 뿐이다.
대답하기도 싫다.
매일 정례 보고처럼 ‘네 오늘 현아는 숙제 다 하고 나서 놀았고요,
현규는 딱지 쳐서 20개 땄고요, 현성이는 웃집에 가서 놀았고요, 현용이는 저와
숙제하고 집에서 놀았어요.‘라고 말해야 하는 데 오늘은 동생들이 무엇을 했는지
묻지도 못했고, 동생들이 어디서 노는지 밖에 나가서 점검하지도 못했다.
‘오늘 나는 나만의 특별한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동생들 일은 몰라요’라고
말해야 하지만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저 불쾌하고 무섭고 답답하다.
오늘 따라 식구들이 왜 이렇게 밥을 천천히 먹는지 모르겠다.
모두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엄마 방에서 부모님이 대화하시는 소리가 우리 방까지 들려온다.
“여보, 내일은 재로 사러 재료 상에 가야 한다고 말했지?”
“아까 재료 살돈 드렸잖아요?”
“그랬나? 어디다 뒀지?”
“당신은 돈을 아무데나 두는 게 문제예요”
“바지 주머니 한번 찾아봐”
“여기 있네요.”
“그런데 왜 천원이 모자라요? 당신이 쓰셨어요?”
“내가 돈쓰는 것 봤어?”
“내가 분명히 맞춰서 드렸는데, 왜 모자라지?”
“잘 못 셋나보지”
“아니에요”
“빨리 채워 놔. 내일은 일찍 나가야 하니까”
“이상하네.”
“당신 먼저 자, 나는 오늘 일할 것이 좀 더 있어”
아버지는 골방으로 들어가시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는 우리들이 잘 자는 지 점검하러
오시는 소리가 들린다.
옆으로 바짝 구부리고 자는 척을 하고 있다.
많이 무섭고 떨린다.
입이 바짝바짝 타고 진땀이 흐른다.
내일은 문방구에 가서 복숭아 통조림을 꼭 사먹어야지.
17.
“현진아 빨리 일어나. 학교 가야지?”
어제 그렇게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도 다시 태양은 떠오르고 새롭게 아침은 시작되는 구나.
신기하다.
아버지가 늘 하시는 말씀
“하나님은 너희들을 다 지켜보고 계신다.”
어제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셨을까?
그런데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시지?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면 나에게 뭐라고 말씀 하실 텐데....
가방 챙겨들고 주머니에 손 꼭 집어넣고 천 원짜리 지폐 꼭 잡고 친구들도 동생들도
보고 싶지 않고 그저 학교 앞에 문방구를 보기 위해 빨리빨리 학교로 간다.
공부 시작하기 전에 사면 혹시 선생님께 들킬지도 모르니 공부 끝나고 사야지....
문방구에 들어가고 싶지만 학교가 끝난 다음에 사고 싶은 것을 사기로 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주머니에 큰돈이 있으니 매우 불편하다.
꼭 돈이 나에게 잘 지켜 달라고 하는 것도 같고, 자기가 있을 곳은 내 주머니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같다.
돈을 꼭 잡고 있다가 손에 땀이 차면 땀을 얼른 닦고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돈을 쥐고 있다.
돈을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서 불편하다.
필기도 해야 돼서 계속 오른 손을 써야 하는데 돈이 달아날 것 같아서
돈을 집고 있어야하고 마음이 분주하다.
왼쪽 주머니로 옮기고 싶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
큰일 난다.
내가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된다.
“왜?”
‘나에게 어떻게 돈이 생겼는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알고 있을 것만 같다.
수업시간도 점심시간도 쉬는 시간도 내 것이 아니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이 나의 시간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또 한 번 낮선 시간들을 만났다.
그래도 신간은 흘러서 종례가 끝나고 드디어 집에 갈 시간이다.
지금 나가면 문방구에 아이들이 가득일 것이다.
천천히 가방 챙기고 천천히 교실을 나와서
화장실에 들어가 돈을 한 번 더 확인하고
그리고 등나무 밑에 앉아서 아이들이 모두 문방구에서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따라 아이들이 문방구에 왜 이리 오래있는지 모르겠다.
저기 우리 동네 아이들도 보인다.
먹을 것 하나씩 집어서 입에다 넣고 돈이 없는 친구들은 눈으로만 하나씩
갖고 싶은 것 집고 집으로 가려고 문을 나온다.
‘엇!’
분명 저 아이는 돈을 지불하지 않았는데 눈깔사탕하나 슬쩍 집어서 옷 주머니에다
집어넣는다.
학교 끝나고 문방구에는 아주머니 뿐 아니라 아저씨랑 온 식구가 나와서
아이들을 감시한다.
그런데도 저렇게 용감한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구나.!!
하기야 나도 저 아이 탓할 형편은 아니지....
아이들이 거의 돌아가고 그 동네에 사는 아이들 중 한 두 명은 벌써 가방을 갔다
집에 놓고 다시 나와서 문방구 근처를 배회한다.
이제 가 봐야겠다.
“아줌마 저기 복숭아 통조림 하나 주세요.”
“통조림 따는 칼은 있어?”
“네?”
“이런 거 말이야”
“아니요”
“그럼 이것도 같이 사야지?”
“네”
천 원짜리를 아주머니께 내밀었다.
“이렇게 큰돈으로 통조림하나만 사려고”
“통조림이 얼마인데요?”
“통조림이 50원에다가 따개가 5원이니까 55원”
“거스름돈이 있나 모르겠네.”
100원짜리 종이 돈 7개에 50원짜리 10원짜리 1원짜리까지 돈이 너무 많아져 버렸다.
큰일 났다.
천 원짜리 하나 주머니에 넣고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제 돈이 한 주먹이다.
이것을 어떻게 한다.
학용품을 사면 엄마 아버지가 금방 아실 테고 과자나 사탕도 집에 갈 때까지
다 먹어 치워야 하니 많이 살 수도 없고 돈이 무섭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가방에 넣으면 좋은데 매일 저녁 그날 배운 것을 점검하고 다음 날 시간표대로 가방을
챙기기 위해 엄마가 늘 가방을 점검하신다.
가방은 절대로 안 된다.
며칠 전 동생이 짝꿍 물건 빌렸다가 깜빡 잊고 가져온 것도 다 등통이 났었다.
그날도 남의 물건에 손대는 사람에 대해 한참 동안 설교 말씀을 들어야 했다.
심지어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가지고 놀 고무줄이나 딱지도
엄마에 의해 다 꺼내어 지고 오직 교과서와 학용품만 가방에 남게 된다.
바지 주머니도 불가능하다.
그날 입은 옷들을 빨기 위해 밤에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옷 검사를 시작한다.
매일 빨지는 않지만 식구가 워낙 많아서 엄마 눈이 검사 기준이다.
‘이 옷은 빨 것, 이것은 더 입을 것...’
종이돈은 그래도 어떻게 해 보겠는데 이 동전들은 정말 처치 곤란이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통조림도 반갑지가 않고
이제 이 돈들 좀 누가 처리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 밖에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다.
‘그래도 샀으니 먹어 봐야지’
산마루 잔디가 잘난 곳에 앉아서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며
어렵게 통조림을 따서 먹으려니 수저가 필요하다.
할 수 없이 손으로 집어 먹는데 ‘통조림은 또 왜 이리 많이 들어있는 거야?’
끈적끈적한 손으로 남은 통조림이랑 깡통은 저쪽 소나무 밑에 세워두고 바지 주머니에서
소리 나는 동전들 손아귀에 잡고 집으로 가는 중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동네에서 노는 아이들도 거의 보이지를 않는다.
벌써 저녁 먹을 때가 다 된 것 같다.
이 돈들이랑 같이 집에 들어가기가 좀 어색하다.
돈들을 어디에다 두고 들어가야 할 텐데....
집을 휘돌아 뒤 곁에 있는 장독대로 갔다.
작은 항아리 중에 비어 있는 항아리에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핀 후에
돈을 넣고 다시 휘 돌아 집 대문으로 들어왔다.
빨리 손부터 씻어야지 끈적거려서 불쾌하기 짝이 없다.
“현진이 너는 왜 이제 오니?”
“네?”
“연우랑 경진이는 벌써 왔던데...”
“학교에서 좀 놀다 왔어요.”
빨리 손 씻고 방으로 들어가서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지...
매일 나가 놀던 동생들이 오늘은 나가지도 않고 웬일로 방에 앉아 있는 것일까?
그것도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뚜러지게 쳐다보고 있다.
손은 깨끗이 씻었는데 아직도 마음은 끈적끈적하다.
눈치 빠른 동생이랑 같이 있다가는 이런 끈적인 내 마음을 들켜 버릴 것만 같다.
그래도 우리 집에서 알면서도 모른 척 내 편이 되어 주시는 할머니 방이
지금 내게 있기에는 훨씬 나을 것 같다.
“할머니 저 왔어요.”
“응 학교는 잘 다녀왔구”
“네”
“여기서 숙제하려고요”
“응 그러렴”
할머니 방에 있는 자그마한 교자상 펴 놓고 그위에
책이랑 공책 올려 놓고 자리에 앉으니 궁둥이가 따뜻하다.
아까 산등성이 잔디밭은 엄청 차가왔는데....
자꾸 눈꺼풀이 눈 아래로 천근도 더 되게 내려앉는다.
할머니방 아랫목 따뜻한 보료위에 살그머니 잠이 들어
한심 푹 자려고 한다.
꼭 할머니 방은 나의 도피성 같다.
억울하게 야단맞고 아픈 몸과 마음을 끌고 잠깐 가서 쉬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할머니 방은 항상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은근한 보호 울타리도 나에게 큰 역할을 해준다.
잠이 들똥말똥한 이 시점에 또 나의 이름이 불려진다.
“어머니 현진이 지금 거기 있어요. 저녁준비 때문에 불 때야 하는 데...”
“현진이 지금 공부하다 잠깐 잠들었다.
저녁불은 내가 지피마...“
‘우리 할머니 최고!!’
저녁준비 될 때까지는 이제 좀 안심하고 쉴 수 있겠다.
18.
우리 언니는 바보 같다.
잔꾀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저 부모님이 시키면 아무런 변명도 반항도 없이 모두 다 순종한다.
자기를 위해서는 무엇도 할 줄 모른다.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나 모르겠다.
나는 언니를 보면 답답하다.
그저 착하기만하고 약지 못한 언니를 보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까 걱정이 될 때도 있다.
언니는 거의 집에서 나가지를 않는다.
물론 부모님께서 여자는 집 밖에서 노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집에서만 놀 수가 있단 말인가?
아버지가 일가시고 엄마 눈치 살짝 봐서 빠져 나오면 될 것을 언니는 절대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
도리어 눈치껏 나가는 나를 걱정하고 말리는 것이 언니의 일이다.
언니는 막내 동생을 거의 업고 산다.
엄마가 밭일 논일로 바쁘시기 때문에 아직 나이 어린 막내는 언니차지이다.
어니는 키가 작은 데 그래도 큰 누나라고 막내를 ‘이뻐라’하면서 잘도 업어준다.
짜증도 불평도 없다.
나는 혹시 어쩌다 언니가 없을 때 막내를 보게 되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업어 주기는커녕 땅 바닥에 앉혀 놓고 내가 하고 싶은 공기며 고무줄 다하고 논다.
특히 동생을 봐야 할 때는 집에 있지 않는다.
밖으로 업고 나와서 내려놓고 놀다가 다시 업고 들어간다.
막내를 땅에 내려놓으면 어떤 때는 땅바닥에 있는 흙도 집어 먹고 켁켁거리고,
어떤 때는 기어가서 또랑에 빠진 적도 있다.
그럴때면 동생 엉덩짝을 세게 때려주고 또랑물에 가서 깨끗이 씻겨서 업고 오면
부모님은 내가 동생을 잘 보살핀 줄 아신다.
우리 언니는 변명이라곤 전혀 할 줄 모른다.
입은 왜 달고 있는지 궁금하다.
자기가 혼날 상황이 아닌데도 부모님께 흠씬 혼이 나면서도 절대 변명 할 줄 모른다.
내가 잘못한 일도 동생들이 잘못한 일도 혼자서 다 뒤집어쓰고 야단을 맞는다.
나는 절대 야단을 맞고 싶지가 않다.
‘내가 왜 야단을 맞아야 하는가?’
특별히 나의 잘못이 입증되는 큰 잘못이 아니면 거의 말로 다 피해간다.
사실 내가 잘못한 일도 말로 때운 적이 많이 있다.
가끔은 언니에게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살짝 우는 척 연기도 해서 그냥 넘어 갈 때가 많다.
언니는 놀 줄도 모른다.
세상에는 얼마나 재미있는 놀이가 많은데 매일 불이나 때고 동생이나
업고 사는지 모르겠다.
우리 동네에서 고무줄놀이는 단연 내가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간다.
고무줄놀이 중에 가장 힘든 단계는 사람이 올릴 수 있는 가장 높이 드리워진 고무줄을
물구나무를 서서 발끝으로 고무줄을 낚아채서 넘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서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 넘을 수 없고
양손을 땅바닥에 대고 물구나무를 서서 손바닥을 들면서 몸을 공중으로
날리면서 넘어야 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마을에서 언니들 친구들 동생들 다 합해서
3명 뿐이다.
그 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래서 고무줄 편을 짤 때면 꼭 나를 편에 넣으려고 난리들이다.
우리 언니는 고무줄 1단계나 해 봤는지 모르겠다.
나는 엄마 몰래 매일 학교에 고무줄을 가지고 다니는 데 언니는
한 번도 고무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밖에 나와서 고무줄이나 공기놀이를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교실에서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은가?
공기놀이도 집에서 언니에게 내가 가르쳐 주었다.
철도 길에서 공기 한 아름 주워 다가 ‘많이 공기’하는 법도 가르쳐주고
5개의 공기 돌을 가지고 하는 공기도 가르쳐 주었다.
공기를 가르쳐 주어도 매일 일이 바빠서 할 시간이 없어 보인디ㅏ.
그리고 자주 하지를 않으니 실력이 늘지를 않는다.
언니랑 하면 재미가 없다.
억척스럽게 따먹으려고 열심히 해야 되는 데
“언니 다른 공기 닿았어 내 차래야”
“응. 그래. 너 해”
매일 자기는 하려고 하지도 않고 내 차례라고 하라고 하니 재미가 하나도 없다.
땅따먹기, 사방치기, 오징어 가이상, 자치기, 구슬치기, 머리핀 치기, 가끔 이것은
남자들만 하는 것이지만 딱지치기도 나는 잘한다.
언니는 땅따먹기랑 사방치기는 가르쳐 줬는데 노는 데 흥미가 없어서
그런지 그것도 벌서 다 잊어버린 모양이다.
우리 집에서 현규는 딱지가 재산이라면 나는 구슬이 재산이다.
언니랑 같이 쓰는 방, 나만의 비밀 장소에는 작은 구슬들이 제일 많고,
중간 구슬, 커다란 왕 구슬이랑 가끔 농기구에서 나오는 쇠 구슬이 있는데
이것은 정말 잘 보관해야 한다.
우리 동네에 쇠구슬은 아마 5개 정도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 중에 2개는 내가 가지고 있다.
이 구슬은 평소에는 절대 가지고 나가면 안 된다.
봄이 오기 시작하면 동네에 있는 구슬들이 모두 나와서 함께 겨루는 날이 있다.
이날 쇠구슬이 있는 사람이 왕구슬을 따올 수가 있다.
이 때 가지고 나가야 한다.
평소에 잘 못 가지고 나갔다가 오빠들에게 빼앗기기라도 하면 큰일난다.
언니는 내가 동네에서 오빠들이랑 노는 것도 모를 것이다.
오빠들은 언니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한다.
이것저것 언니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많다.
사실 나는 언니에 대해서 말해줄 것이 별로 없다.
“니네 언니는 집에 있니?”
“네”
“언니는 집에서 뭐하니?”
“몰라요”
“언니는 언제 밖에 나와서 노니?”
“몰라요”
언니는 오빠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른다.
오빠들이랑 놀다보면 좋은 오빠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오빠들도 있다.
바보 같은 우리 언니는 절대 이런 오빠들 사이에 나오면 안 된다.
언니는 그냥 집에 있는 것이 본이에게 가장 좋을 것 같다.
그래도 오빠들 중에 제일 신사적인 오빠는 석이 오빠이다.
석이 오빠는 거의 언니처럼 밖에 나오지 않지만 준이 오빠 따라서 가끔 나와서
놀 때면 다른 사람 생각해주고 정직하게 행동한다.
석이 오빠는 우리 언니에 대해 다른 오빠들처럼 물어 보는 일이 없다.
그런데 석이 오빠는 나를 친동생처럼 보살펴주고 다른 오빠들 보다 더 배려해 준다.
준이 오빠는 좀 거칠고 남자답다.
준이 오빠는 우리 언니에 대해 자주 물어본다.
슬쩍슬쩍 이럴때는 남자 다움이 좀 없어 보인다.
민우 오빠는 멋있다.
학년도 더 높지만 키도 크고 말하는 것도 어른 같고 언니 친구 연우 언니 오빠이다.
민우 오빠도 언니에 관해 자주 물어본다.
연우언니도 우리 언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민우오빠에게 정보를 주지 못한 모양이다.
우리 언니는 돈쓸 줄도 모른다.
부모님이 사다주신 것 쓰고, 먹고 그러면 다이다.
언니가 돈을 들고 물건을 사는 것은 엄마가 심부름 시킬 때뿐이다.
돈에 전혀 관심이 없나.....
나는 벌써부터 돈을 쓸 줄 알고 있다.
방바닥에 돌아다니는 동전들 주워 모아서 학교 앞 문방구에도 가고 학고방에도 많이 간다.
아버지가 사오 신 학용품 갔다가 아이들에게 팔아서 돈으로 바꿔 쓰기도 하고
서울에서 사오 신 줄줄이 별사탕도 팔아서 돈으로 만들어 쓰기도 한다.
가끔은 엄마에게 돈이 꼭 필요하다고 잘 말해서 돈을 벌써부터 타서 쓰고 있다.
우리 언니는 내가 엄마한테 돈을 타 쓰는 줄도 모른다.
학교에서 언니가 문방구에 들어가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저 학교에서 집, 집에서 학교 이것이 우리 언니 세계에 있는 지도이다.
문방구나, 다리 밑, 산등성이나 뚝 밑에 푹 파인 우리만의 장소는 전혀 모른다.
그런 것은 언니 지도에는 그려있지 않다.
내 지도는 언니 지도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런 복잡한 인간사 때문에 나의 눈은 벌써 많이 흐려졌다.
그런데 우리 언니 눈은 아니다.
투명하다. 언니 눈을 보면 속이 다 보인다.
밝은 시냇물 바닥을 보는 것처럼 다 보인다.
오늘은 언니 눈빛이 좀 이상하다.
그리 맑지 않고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
내 눈도 피하고 할머니 방으로 건너간다.
무슨 일이 언니에게 일어난 것일까?
언니에게 있는 일은 내가 다 알고 있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언니는 너무 단순하게 살기 때문에 다 알 수 있다.
학교생활도 마찬가지다.
친구도 거의 없고 관심 있는 것도 없고 집에서도 마찬가지 인데
오늘은 언니가 왜 이렇게 낮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나이는 언니여도 세상 물정이나 세상살이에서는 단연 내가 언니보다 앞서있다.
눈치도 언니보다 몇 단은 빠르다.
분명 오늘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아무 이야기 못 들었고
엄마도 할머니도 별 눈치 없으시고 동생들도 정상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19.
수찬이 사건이후 현진이는 밖에서 보기가 더 힘들어 졌다.
학교가 끝나도 불이 나게 집으로 달려간다.
가끔은 길바닥에 앉아서 무엇인가 유심히 보기도 하고 친구인 효진이와
교문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몇 번 보았는데 요즘은 통 볼 수가 없다.
수찬이가 현진이에게 ‘이빨’이라고 놀렸다는 사실을 자기 입으로 준이와 나에게 이야기 했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짓 하지 않기로 약속 받았고, 수찬이가 기분이 상하면 현진이에게
더 해꼬지를 할 지 몰라서 요즘은 우리가 놀 때 잘 끼워주고 같이 논다.
이제는 현진이를 괴롭히거나 별명을 부를 사람도 없고,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이는 데 왜 더 힘이 들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현진이 동생 현아는 현진이와 너무나 다르다.
우리들 사이에 끼어서 조금도 지지 않고 같이 놀이를 한다.
어찌나 억척스럽고 승부욕이 강한지 어지간한 남자들은 현아와 게임해서
이기 어렵다.
그래도 아직 어리고 여자여서 거친 남자들에게 가끔 거친 일을 당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현아가 좀 여성스럽게 여자들 사이에서 놀았으면 하는 생각도 하고,
현진이와 성격이 조금씩만 나누어 가졌으면 하는 생각도 한다.
나와 준이가 밖에 있을 때면 문제가 없지만 현아는 더 큰 형들이랑도 자주
어울려서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민우형이 보통은 밖에 나와 있어서 다행이다.
현아를 비롯해서 밖에 잘 나와 노는 아이들의 눈빛은 더 빠르다.
자신이 밖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 빠른 눈빛으로 판단
해야 하기 때문에 눈이 빨리 돌아간다.
집에서 많이 지내는 아이들의 눈빛은 느릿느릿하다.
특히 현진이 눈빛은 거의 흔들림이 없다.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이리저리 돌려서 주위를 살피는 일도 없고
특별히 누구를 찾는 다든가 누구를 경계하기위해 눈을 맞출일도 없다.
그저 잔잔한 호수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깊은 산속에 있는 조용한 호수 같다.
그래서 더 그 준이 보고 싶어진다.
나까지 맑게 해줄 것 같은 눈빛,
늘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그런 눈빛이다.
내 눈빛은 조금다르다.
고생하는 부모님이랑, 누나들 그리고 말썽피우는 형들과
야단맞는 형제들 사이에서 눈치를 가지고 싶지 않아도 눈치가 생겨 버렸다.
사람들을 보면 벌써 진실한지 거짓 스러운지 간사한지 욕심 장이 인지 알 것만 같다.
저 사람은 큰형 같고, 저 사람은 둘째 누나 같고 저 사람은 막내 형 같고
비교가 되곤 한다.
그래서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대하기가 쉽지 않다.
현진이처럼 아무런 자기 방어기제도 없이 무방비하게 사람을 맞이할 수 없다.
나는 많은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내 속마음도 다 보여주지 않는다.
눈빛에 무엇인가 한 꺼풀 덮어서 나를 보여준다.
내가 만난 친구들도 대부분 나와 비슷하다.
그래서 한참동안 사귀어야 속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점점 친구 사귀기가 어려워진다.
이미 내 속을 알아버린 사람도 너무 많다.
더 이상 더 많은 사람에게 나를 꺼내 놓을 자신도 없다.
아마 중학교에 들어가도 지금 다니는 친구들과 다닐 것 같다.
현진이는 아직 친한 친구도 없는 데 언제나 친구를 사귀려나?
내가 현진이 친구였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 현진이의 눈빛은 다른 때와는 좀 다라 보인다.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눈빛이고 괴로워하는 눈빛?
좀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눈빛이다.
주변에 관심도 없는 아이가 무척 두리번거린다.
“무슨 일이 있었나?”
현진이에게 일어날 일의 경우는 몇 가지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현진이는 나쁜 일 할 아이도 아니고 크게 잘못할 일도 없을 것이고, 현아나 현규면
몰라도 현진이는 절대 사고를 칠만한 아이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더욱 궁금해진다.
혹시나 해서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도 나갔었다.
역시 현진이는 보이지 않는다.
학교가 끝나고 청소 당번이어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늦게 학교에서 나왔다.
6년 동안 처음이다.
현진이가 등나무 밑에 앉아서 무엇인가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무엇을 보는 것일까?
내가 지나가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
물론 언제나 신경을 쓴 일은 없다.
그렇지만 저렇게 혼자 앉아서 무엇인가 쳐다보는 것도 처음 보았다.
현진이 심경에 무슨 변화가 일어 난 것 같다.
왜 혼자서 저렇게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느티나무 뒤에서 지켜봐야지’
이제 아이들이 거의다 학교 근처에서 빠져 나갔는 데도
현진이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는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앉아만 있다.
드디어 현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천천히 문방구로 들어가서 무엇인가 사가지고 나온다.
왜 저렇게 사방을 두리번거리는지 모르겠다.
산등성이까지 가서 또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잔디 위에 앉아서 무엇인가 부지런히 손을 놀리더니 깡통에서
무엇인가 꺼내서 하나 입에 넣는다.
현진이네는 먹을 것이 많기로 소문이 나있다.
‘그런데 저것이 먹고 싶었나?’
집에 가서 먹으면 되는데 왜 여기서 저러고 있지?
조금 먹다말고 깡통을 소나무 밑에 놓고 다시 집으로 간다.
손에는 무엇인가 한주먹 쥐고 있다.
우리 어머니가 혼자서 늦게 다니면 간빼머근ㄴ 사람 만난다고 했는데....
현진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미숙하기 짝이 없다.
두리번거리는 모습조차 어린 아기 같다.
기저귀를 차고 겨우 앉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엄마를 찾아 미숙한 놀림으로
이쪽으로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사방을 둘러보는 아기 같다.
먹는 것도 그렇다.
개걸스럽게 덥석덥석 먹지를 않고 꼭 다람쥐가 알밤을 꼭 잡고 앞니로 살살 갉아 먹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먹는다.
무엇인가 꼭 쥔 손도 통통하고 새하얀 것이 꼭 아기 손 같다.
도대체 무엇을 저렇게 꼭 쥐고 있는 걸까?
평생 저 손을 한번이나 잡아 볼 수 있으려나...
혼자 걸어가고 있는 현진이 옆자리에 내가 가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를 않는다.
현진이의 뒷자리만 아직은 나의 자리이다.
준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준이녀석은 의리도 없이 오늘 따라 일찍 가버리고
꼭 필요 할 때는 옆에 없는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친구 같으니...
20.
장독대를 청소할 시즌이 돌아왔다.
묵은 김치랑 동치미 모두 꺼내서 깨끗한 물에 닦아 다시 양념해서
기름에 볶고, 동치미 무는 깨끗이 씻어서 채를 쳐 양념에 무치고
뜨물 받아서 밥솥에 찌기도하고 짜게 저린 우거지랑
무청은 아직 꺼내지 않는다.
한 여름 입맛이 떨어지면 그때 꺼내서
시원한 얼음물에 짠무 얇게 썰어 넣으면 입맛이 돌아온다.
고추장 단지도 깨끗이 닦아서 업어 두고 간장 단지도 물로 부셔서 뒷 뚤에
서 있는 감나무 밑에 쏟아 붓는다.
그러면 감나무에 염분이 공급 되서 올해도 감이 떨어지지 않고 실하게
주렁주렁 열매가 열리게 된다.
된장에 박았던 장아찌들도 꺼내고 아직 찬물을 쓰기에는 좀 쌀쌀한 날씨라서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끓여 연신 퍼 나르면서 장독을 닦고 차례차례 정리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앞쪽에 놓은 비어 있던 장독을 닦을 차례이다.
나는 막내 동생 데리고 마루에서 놀고 있고 엄마와 할머니가
장독에 계시고 할아버지께서는 물을 퍼 나르고 계신다.
“딸그랑...”
장독을 청소하시던 엄마의 눈에 얼마 전에 내가 넣어 놓았던 돈들이 발견됐다.
‘딸그랑...’ 소리가 마루에 있는 나에게도 들려왔다.
다시 생각나 버렸다.
몇 일전의 일이...
그 갑갑하고 답답하고 두렵기 그지없던 그리고 돈이 무섭던 그 때가 생각나 버렸다.
다시 돈이 무섭다. 아니 이제는 사람이 더 무섭다.
엄마가 어떻게 하실까?
슬그머니 돈들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시고
잠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신다.
“어멈아 무슨 일이 있냐?”
“아니예요 어머니, 어머니 힘드시죠? 제가 혼자 할께요.
들어가서 쉬 세요“
“아니다. 밥 값은 해야지. 날도 땃땃하고 아주 좋다. 걱정 말거라.”
“네 어머니”
사람이 여럿이서 한집에 오래 살다보면 서로서로 말을 안 해도 통하는 어떤 것들이 생겨난다.
특별히 엄마와 할머니, 할머니와 우리들, 그리고 할아버지와 손자들 사이에
이런 보이지 않는 어떤 기류가 오고간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한 담..”
일단은 이 집을 벗어나서 생각해보자.
“현용아 밖에 나가서 놀자”
“왜?”
“날씨도 좋고 누나도 가고 싶은데가 생겼어”
“어디?”
“가보면 알아”
현용이도 이제 1학년이다.
친구들도 있지만 어려서부터 나랑 놀아서 인지 나와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는 현용이 손을 붙잡고 마을 언덕에 있는 교회당으로 걸어 갔다.
매일 우리 엄마 아버지가 기도하는 곳, 내가 일주일마다 찾아가는 곳,
그곳에는 나의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진정한 분이 계실 것 같다.
의자도 없는 시골 교회, 넓은 마루 바닥이 넓기도 하다.
강대상 위에는 십자가가 보이고, 어른들이 자부동이라고 부르는 방석은
이쪽저쪽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다.
유리창을 통하여 햇살이 가득 들어오고, 동네에서 유일하게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다.
환한곳은 어쩐지 나의 죄가 더 밝히 드러 날 것만 같다.
저쪽 자부동이 있는 그늘지고 구석진 곳에 가서 무엇인가 해야 겠다.
“현용아 현용이 누나가 방석 4개 깔아 줄테니까 놀고 있어”
“알았어”
나는 혼자 저 구석으로 가TEk.
자부동하나 내려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저는 너무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신다면 앞으로는 깨끗하게 착하게 살겠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나를 위해 밤 낮 쉬지 않고 고생하시는 아버지께도
엄마께도 너무 큰 죄를 지었다.
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를 믿어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너무 송구스럽니다.
심지어 나를 아껴주는 석이랑 준이 그리고 동네 오빠들이랑 친구들에게도
큰 죄를 지은 것 같다.
나는 정말 큰 죄인이다.
겉으로는 착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면서
속은 썩어버린 나쁜 아이이다.
너무나 괴롭다. 죄송하다. 미안하다.
늘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께도 죄송하다.
좋은 부모님, 좋은 환경을 주셨는데 나쁜 짓을 하다니...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도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꾿꾿이 잘
견뎌내는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죄를 저질렀는지 나도 모르겠다.
“주님, 나의 죄 값은 달게 받을게요.
부모님께 어떤 꾸중이나 야단을 맞아도
나의 지은 죄에 비하면 작은 것이고,
동생들로부터 어떤 눈길, 어떤 빈정대는 말이나 무시하는 말을 들어도
그것도 나의 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달게 받겠습니다.“
눈물을 닦고 얼굴을 들어보니 눈 앞에 현용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누나 울었어. 왜 울었어?”
“아니야 하나님이랑 할 말이 있어서 이야기하다가....”
“이제 이야기는 다 끝났어?”
“응”
‘현용이 이제 다 놀았으면 방석 가져와“
“알았어”
집에가서 먼저 엄마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필요한 벌을 달라고 해야겠다.
“현용아 저기 좀 봐, 노랑나비다.
봄에 노랑나비 먼저 보면 일년내내 좋은 일이생긴다는 데 올해는
우리 현용이랑 누나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기려나 보다.“
‘저렇게 작은 냉이 꽃에서 빨아 먹을 꿀이나 있으려나?’
‘남에게 행운을 갔다주기 위해 많이 날아 다리려고 일부러 작은 꽃에
앉아서 적은 꿀을 찾는 것은 아닐까?‘
‘하루 종일 날아 다녀야 겨우 눈 붙이고 잘 만큼 시장끼가 가실 텐데...’
‘고맙다 노랑나비...’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2.
[ 장편 ]
못생긴 여자 4
황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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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0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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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정말 재밌게 읽고 갑니다. ^^ 즐거운 주말 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