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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영앤리치핫나야나)
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313
“여자는, 온전한 인간이 아닌가요?” 이런 질문을 21세기, 그것도 젊은 여성 신자들에게 듣게 될 줄이야! 2005년 처음 대학 강단에 섰던 나는 기가 막혔다. 그 무렵의 나는 전업 육아의 배치와 교수자 사이를 저글링해가는 삶을 개인기로 버티고 있었다. 하긴 ‘여성학의 메카’ 이화여대에서 대학 4년 대학원 2년 합하여 6년을 페미니즘으로 무장하고도, 심지어 석사학위 논문으로 관계적 상호성을 새로운 기독교적 덕목으로 제시하는 페미니스트 시각의 글을 썼음에도, 나 역시 망설인 시간이 길었다. 이론보다 더 무서운 것이 교리 혹은 신앙 훈련의 내면화이다.
개인이 되는 법은 사회에서 배우고 여자가 되는 법은 교회와 집에서 배운, 분열적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여 ‘하나님을 세상에 잘 설명하고 싶다’는 신앙적 소명을 나름 굳건히 하고 떠났던 유학길이었음에도, 예상하지 않았던(그럼에도 생애사에서 자연스런 수순이라고 생각했던) 결혼과 출산은 오랫동안 내적 투쟁을 하게 만들었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개인’으로서 나의 선택지를 늘 지지했던 부모님들이, 결혼 후엔 육아와 사회활동을 놓고 다른 말씀을 하셨다. 돌이켜보면 그분들도 구조적 분열을 미처 읽지 못한 까닭이다. “자고로 아이는 어머니 무릎에서 자라야지. 신앙 교육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전업 육아로 인해 논문을 쓸 시간을 얻지 못해 동동거리는 나에게 하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남편 먼저 세상에서 든든히 서고 난 뒤에, 그 뒤에 너의 일을 해도 늦지 않다.” 절호의 직업 기회가 왔음에도 남편의 직업 상황이 불투명한 시점에서 기다리고 양보하는 것이 맞는 선택이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착한 딸이었던 나는 내 안의 불덩이를 삼키며 ‘순종’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조언이다. 아버지는 전업 육아를 경험한 적이 없었고 어머니는 전문가였던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엄마이기도 하고 전문가이기도 한 나는 ‘나만의 길’을 만들어야 했었다. 그러나 선뜻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권위’! 앞서 ‘성장하는데 동력이 되는 힘’이라고 말했던 그 권위를 나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내 의지대로, 내 선택지대로 살다가 ‘불경건’으로 인해 벌을 받으면 어쩌나. 아니 나는 행여 그렇다 해도, 혹시 이로 인해 내 아이까지 불이익을 당하면 어쩌나. 그런 불안감에 망설였다.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동안 배운 페미니스트 이론과 성경 지식이 나의 ‘불덩이’에 답을 줄 수 있는지를 묻고 읽고 묵상하느라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 깨닫고 확신하게 된 것이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된 언어가 담은 하나님의 계시였다. 물론 홀로 얻은 깨달음은 아니다.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이라는 구약 신학자가 이미 말했다.
“에제르는 관계적 용어다. 그것은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단어이며, 하느님, 인간, 동물에게 모두 사용된다. 하지만 단어 그 자체가 관계 속의 지위를 규정해 주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 단어가 열등성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 관계 속의 위치는 부연된 내용이나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다. … 하느님은 남자 위에 계셔서 돕는 분이시다. 동물들은 남자보다 열등한 입장에서 돕는 피조물이다.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관계에서 돕는 배필이다.”(“Eve and Adam: Genesis 2~3 Reread”, 백소영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146에서 재인용)
그렇다. 도움은 관계적인 언어다. 홀로 오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규정한 도움, 제도가 제한한 도움은 나의 필요가 아니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명 대학원 시절에 읽고 논문에도 인용한 구절인데, 짧게 지나가는 저 구절이 그땐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 후 나의 배치와 경험 속에서 이전에 배웠던 트리블의 텍스트가 다시 기억났고 나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 해석을 확장하며 ‘관계적’이고 ‘상호적’인 도움이 가능하려면 먼저 내 정체성과 행복과 재능을 확고히 하고 상대방에게 표현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야 마주 본 자가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이런 신앙적 확신으로 나는 가족들의 지지 없이도, 내 길을 걸었다. 불행히도 나의 파트너는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상응하는 도움’이 없었던 상황에서는 저글링만이 나의 선택지였다. 고단함에 더하여 양쪽 세상으로부터 받는 비난은 보너스였다. 일터에서는 온전히 전문가이지 못한 나를 한심한 눈으로 응시했고, 전업주부 비율이 90퍼센트 이상이었던 거주지 이웃 사이에서는 육아에 전념하지 못하는 B급 엄마로 평가되었다. 교회에서는 젊은 여성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는 위험한 사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2010년을 전후로 여기저기서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기독교 여성의 소명에 대한 강의 의뢰가 들어왔다. 그중 2016년 한 복음주의적인 리더십 훈련 학교에서의 특강 후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페미니즘의 내용으로 보자면 그다지 급진적인 주장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엄마요 아내의 삶이 여성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라고 강조되던 복음주의적 모임 안에서 ‘여성의 나됨’과 이를 위한 파트너 간의 ‘서로 도움’의 성경적 정당성이 전해졌다는 것이 새로웠을 뿐이다. 초청하신 분도, 듣는 이들도 ‘이 주제’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니 수위나 언어를 조심해 달라고 부탁받았다. 교회에서 나고 자란 나다. 그 의미를 알기에 미리 원고를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눈빛을 보며 소화 가능한 내용으로 풀어내려 노력했다. 덕분에 강의 내내 큰 마찰이나 혼란은 없었다. 다만, 생전 처음 듣는 내용에 살짝 긴장한 형제들의 모습, 그럼에도 충분히 ‘성경적’이요, ‘시의적’인 풀이에 공감하는 과정이 있었을 뿐이었다.
나의 놀람은 그 후였다. 강의는 마쳤는데, 다음 강의가 이어져야 한다는데, 자매들이 일제히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부흥회를 한 것도 아니건만 펑펑 우는 자매들도 있었다. 당황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지만, 이것은 새 사상이 아니었다. 페미니스트적 언어로는 이미 삼십 년 전에 이 땅에 도래했던 말들이다. 다만, 이를 기독교 신앙과 만나게 하고 이를 복음적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이 교회 안에서 들려질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제 꿈을 접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그걸 말이라고 묻나! 21세기 적자생존,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공적 성취를 기대받는 ‘형제들’의 삶도 만만치 않은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되는 법을 스무 해 이상 치열하게 배운 21세기 여성들에게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 ‘전업 육아’를 소명으로 여겨야 한다고 가르치다니! 이미 ‘기독교 허스토리’를 통해 여성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의 계보학을 따라온 독자라면, 그것이 이미 지난 시대의 제도적 제한을 담은 설명임을 익히 인정할 터이다.
이후 교회 안에서는 젊은 여신도들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자발적 모임들이 생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바야흐로 ‘기독교 페미니즘’의 때가 무르익었다. 우리보다 먼저 이런 시도를 한 신앙 선배들이 이 땅에 어찌 없었을까? 그러나 너무 일찍 말했던 선배들은 돌을 맞았고 교회로부터 배척당했다. 그런데 시절이 변했다. 신앙의 이유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전업주부’로만 머물 수 없는 생계형 위협이 중산층 가정들을 강타했다. 한동안 과도기에 청교도적 기독교 가정 담론을 고수하려는 분들은 ‘긴축재정’을 하더라도 아이들은 엄마가 키우는 것이 신앙적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다 실직한 가장들이 많아지고 아내의 생계형 노동이 불가피해지자 더 황당한 조언을 했다. 여자의 도움은 ‘육아와 더불어 가능한 도움을 다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애도 키우도 돈도 벌라는 말이었다. 전업주부의 삶을 신앙적 소명이라 여겨 10년, 20년 ‘나를 접고’ 살았던 어머니들이 갑자기 ‘생계형 소명’을 덧붙여 노동 시장으로 나아갔다. 교회는 주중 대낮에 헌신된 전업주부들을 동력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랜 경력 단절로 자신의 재능보다 훨씬 열악한 평가 속에 묵묵히 가정을 지키며 안팎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들을 보고 자란 소녀들은 ‘비혼’을 선언하며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이런 지경이다 보니 그동안 여성의 ‘보조 노동’을 소명으로 생각하던 보수적, 복음적 단체 안에서 기독교 영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이름도 재기발랄하다. 한 선교단체 여성 간사들의 모임 이름은 ‘갓페미’란다. 이제 ‘갓’ 페미니스트가 된 여성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딸들인 페미니스트, 거기다가 요즘 젊은이들의 신조어인 ‘최고’ ‘훌륭한’의 의미를 담은 접두어로서의 ‘갓’의 의미까지 담았다 한다. 내가 되느라 독주하며 페미니즘이 또 다른 승리주의 담론으로 되는 것을 막겠다면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약자들과 함께 가겠다는 ‘품는 페미’라는 캠퍼스 동아리도 생겼다. 각자의 소속이 있으면서 네트워크 형식으로 연대하여 활동하는 ‘믿는 페미’도 있다. 개별 교회 청년부와 대학부에서도 페미니즘 시각에서 성경 읽기 열풍이 불고 있다.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고 보니 이젠 남자 목사님들도 이게 웬일인가, 배움을 시작한다.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뉴스앤조이, 2018)은 그래서 썼다. 외롭게 외쳤던 선배들과 혈기 있게 일어섰지만 전사(前史)를 모르는 후배들 사이의 교량이 되는 것이 내 세대의 몫이라 생각해서였다. 기독교와 페미니즘이 공존 가능한지, 세상의 페미니즘과 ‘기독교’ 페미니즘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다음 호에서는 기독교 페미니즘의 역사와 주장을 요약하여 소개해볼까 한다.
백소영 교수/강남대학교
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313
첫댓글 가장 보수(적이면 안되는 집단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러한) 종교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건 정말 고무적인 일이네 개인적으로 종교는 필연적으로 여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변화가 일어나서 이런 내 생각이 깨지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교회가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이유
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301
전문 전 기사글 링크
백소영 교수 글 더 보고싶은 여시들은 링크 참고해서 한번 훑어보는거 ㅊㅊ
삭제된 댓글 입니다.
22222 어디에 소속되든 종교가 무엇이든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의하는 누구든지 모두다 환영!!!!
아무래도 기독교에선 성경을 거스르는 사상일텐데 어떻게 변할지 흥미진진..
보수집단, 성차별적 집단이 바뀌지 않고 득세하는 게 진짜 무서운 것 같음 미국 보수기독교가 트럼프랑 공화당 밀어주는데 결국 성차별적인 결과를 얻어내고 있잖아 보수기독교가 힘이 약했다면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집단이든 천천히라도 변해가야한다고 봄 지금 당장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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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ㄴㄱㄷ 여자목사님 계심
이대는 여자 목사님이시면서 교수님이신 분들 많았어
페미니즘 관점에서 성경 해석해야 하는거 아니냐 했다가 신성모독이라고 ㅈㄴ욕쳐먹고 안다닌지 오래됨 정신 안 차리면 곧 도태될거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예수를 따르고 예수처럼 살겠다는 종교고, 그 예수는 성별과 출신과 인종 등등 다 떠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평등하다 가르쳤음. 공생애 기간 동안 당시 가장 천하게 여겨진 창녀, 전염병 감염자 들하고 같이 밥 먹고 어울리고. 그런 식의 이웃 사랑이 기독교 교리의 가장 핵심인데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거야말로 반기독교적인 거지 ㅋㅋㅋ 내부에서 목소리 내기 힘들텐데 응원함.
22 이 책 보면 현 기독교가 더 차별과 혐오가 심하다는 것을 알게됨 .. 싹 다 갈아엎어버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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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나도 기독교인이고 탈기독교할 생각 없지만 댓글여시가 쓴 말대로 하나님은 사람의 백그라운드/모습 등등 상관없이 사랑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침 근데 현재 교회들은 그 사랑에 제한을 둠..... 그래서 교회 안나감ㅋㅋㅋㅋ 교회 안나간지 개오래됨 교회 시스템도 지긋지긋하지만 내가 아는 하나님의 사랑과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랑하고 거리감 ㅈㄴ커서 교회 거부감 생김
@파도가끝나는곳까ㅈi 책 봐야겠다 추천 감사합니다
개가치응원
저기 언급된 책들 진짜 좋아. 나도 신앙과 여성인권 사이에서 혼란스러울 때 도움 많이 받았어.
ㅋㅋㅋ𝙅𝙊𝙉𝙉𝘼 나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