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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을 노력에 집착하며 살아왔다. 더 정확히는 1등의 자리를.
유치원에 다녔을 때부터 받아쓰기는 모두 100점을 받았고,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반장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고, 중학교 때는 전교 1등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책을 한 번만 보고도 외울 수 있는 천재가 아니었다. 혹여나 1등의 자리가 역전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나는 항상 젖 먹던 힘까지 노력했다. 학교 수업은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 개근상을 밥 먹듯이 받았고, 학교를 끝마치곤 또래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학원과 과외에서 공부하는 걸 택했다. 끝없이 밀려 들어오는 숙제 때문에 밤에 자지 않는 걸 시작한 것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덕분에 에너지 드링크와 커피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부모님이 높은 성적을 원하셨던 영향도 있었지만, 내 자존심이 1등을 원했던 게 가장 컸다. 누군가에게 1등을 뺏긴 채로 잘 살아갈 수 있겠냐는 걱정, 살면서 다신 오지 않을 기회를 놓쳐버린다는 걱정, 원하는 대학에서 1등에서 2등이 되었다는 이유로 뽑아주지 않을 거라는 걱정 등등 오만가지의 걱정이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새로운 반이 된 친구들은 내 곁으로 다가올 때가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나에 대한 호기심 충족과 낮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다가왔던 거였다. 그리고 어느 날은 짝꿍이 된 여자애가 내게 어떤 조언을 들려주었다.
성적은 자신이 그 과목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이니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그럼 왜 그렇게 다들 성적에 집착하고, 왜 등수를 매겨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건지 생각은 해봤을까? 겨우 성적 1점이 부족했다는 이유로 1등급에서 2등급이 되는 건? 서점마다 세계 명작 소설보단 유명한 대학에 갔다는 수험생이 사용했다는 문제집을 더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진열해두었다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물론 나는 알겠다며 다시 공부에 전념했다. 옛날의 나나, 지금의 나나 그때로 돌아가도 반박하는 건 충분히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다. 다만 해야 할 공부가 있기도 했고, 괜히 말을 섞다간 같은 수준으로 떨어져 버릴 수도 있었기 뿐이었다. 그리고 다신 그 여자애와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까진.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도 변함없었다. 내년이면 대학생이 될 수 있었고, 주위에서 마구 떠들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거 두 가지뿐이었다.
그 날의 시작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교복으로 갈아입었고, 그 날 공부할 때 필요한 준비물을 챙겼다. 엄마가 주신 용돈으로 근처 편의점에서 아침밥으로 먹을 삼각김밥을 샀고, 평소보다 인파가 많았던 404번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버스 안은 너무 분주했고, 덕분에 20개는 족히 외울 수 있던 영어 단어를 15개밖에 외우지 못했던 게 흠이었다. 레인지에 덜 돌린 삼각김밥의 안쪽이 차갑고 딱딱했던 게 아직도 기억났다.
익숙한 교실이 눈에 들어왔었다. 담요를 덮고 책상 위에 엎드려서 쿨쿨 자고 있던 학생도 있었고, 나처럼 학원 숙제를 풀고 있던 학생들이 10명 정도 보였다. 나는 오늘 선생님이 내주실 쪽지 시험의 범위를 다시 한번 더 복습했다. 이미 여러 번 봐왔던 범위였지만, 안일의 상황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애매하게 자라나 있는 짧은 턱수염과 흐트러진 머리가 특징이었는데, 그 날따라 유독 더 단정했다.
“자, 다들 일어나! 오늘 우리 반에 새로운 전학생이 왔어.”
“백나현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소개로 들어온 여자애는 백나현이라는 여자애였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특이한 말투, 눈에 띌 정도로 타 있는 피부,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 반 친구들의 눈길을 사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안 그래도 시간이 없어서 밤까지 새고 있는 와중에 전학생이라니. 앞으로 더 바빠질 예정에 괜히 짜증이 났었다. 심지어 봉사 활동 점수나 시간 같은 건 다 채운 지 오래라 실질적으로 내게 돌아오는 이득 따윈 없는 거나 다름없어 더더욱.
“원래 여기에 살았는데, 부모님 직장 때문에 이사 갔다가 다시 이사 왔단다. 모르는 거 있으면 반장이나 선생님께 물어보고.”
“네, 알겠습니다.”
“빈자리는, 어디보자...아! 저기가 좋겠네. 마침 반장 바로 옆자리네.”
선생님의 손가락이 내 옆자리는 가리켰다. 나와 같이 공부하던 전교 2등의 자리였지만, 항상 뒤처진다고 생각했는지 소식도 없이 이사를 가 버려서 한 달째 빈자리였다. 시끄럽게 조잘대는 친구가 없어 좋았었는데.
나현은 사뿐사뿐 걸어 내 옆자리에 앉았다. 옅은 라벤더 향기가 났지만,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이 반의 반장이었기에 먼저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안녕? 나는 지은이라고 해. 이 반의 반장이니깐 언제든지 말 걸어도 좋아. 그리고 다음부턴 향수 같은 건 가급적이면 뿌리지 말아줘. 여기엔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거든.”
제발 쓸데없이 말 걸지 말았으면, 이라고 생각했다.
“알겠어...어라? 너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구면인가?”
“우리가 만난 적 있었어?”
“음...그래! 우리 초등학생 때! 너 그때 공부 엄청 열심히 했었는데 내가 계속 도중에 말 걸었잖아. 기억 안 나?”
대략 그때부터였다. 내게 훈수를 두었던 그 녀석이 우리 반에 전학을 온 이후로 내 인생은 단 한 번도 안 꼬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위험하다는 걸 느꼈던 건 며칠이나 지나, 쪽지 시험 성적을 공개할 때였다.
“너는 몇 점 나올 것 같아?”
“몰라, 시발. 다 망쳤어.”
선생님이 평소 내시던 문제와는 전혀 달랐던 문제 유형과 어려웠던 난이도 때문인지, 시험을 잘 보았다고 말하고 다니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비슷한 유형의 문제가 많이 출제되었던 문제집을 3회독이나 해본 덕분에, 이번에도 1등을 차지할 거라는 생각으로 학교 수업에서 배웠던 걸 다시 한번 더 복습했다.
“어제 밤 새서 공부했는데, 이게 다 뭐야...”
“지은이 너는 시험 날에 바로 이사 왔으니깐, 더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그 선생님 원래 문제 어렵게 내시던 분 아니셨는데.”
“내 말이~어려워질 거면 미리 말씀 좀 해주지. 이걸 엄마한테 어떻게 보여드려.”
3일조차 채 안 되는 시간에, 지은은 친구를 여럿 사귀었다. 지금 떠들고 있던 사람들도 다 새로 사귀었던 친구들이었고, 원래 이곳에서 살았을 때 친했던 친구들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매일 함께 돌아다니면서 왁자지껄 떠들고 다녔다. 어차피 평소에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놀러 다니기만 했던 흔히 ‘노는 애’들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내 옆자리에 당첨이 되어버렸기에 나는 그들의 소음을 계속 들었어야 했다. 강제로. 익숙한 일이었다. 시끄러운 공간에서 악착같이 집중력을 유지하는 건 유치원 때부터 해왔으니깐.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버린 나는 더 이상 일말의 인내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참아왔는데, 이제 와서 또 참아야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적어도 고등학교의 마지막인 3학년 때는 조용히 있다가 가고 싶었다.
‘할 게 없으면 제발 조용히 있기라도 하던가. 이 머저리들. 그러니깐 너희들이 이번 쪽지 시험을 망쳐버린 거라고.’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려던 찰나, 교실 문을 열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손에 쪽지 시험지가 들려 있는 걸 보니, 분명 결과를 발표하러 오신 거라며 확신했다. 동시에 지금까지 남들의 눈치도 없이 떠들던 녀석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왜인지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목! 이번 시간에는 며칠 전에 본 쪽지 시험 결과 발표 할 거야! 각자 부모님에게서 서명받아 오는 거 잊지 말고!”
“쌤! 저희 부모님 외국 출장 가셨으니깐 안 받아와도 되죠?”
“내가 어제 연락했을 때 너희 부모님은 집에 멀쩡히 잘 계시던데? 꼼수 부리지 마. 만약 우리 반에서 꼼수 썼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내가 집에 직접 찾아가서 부모님께 서명받아올 줄 알아.”
교탁 위에 시험지를 내려놓은 선생님은 1번부터 차례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1번은 당연히 나였다.
“아, 지은이 너는 안 나와도 돼. 이번에도 100점이야. 잘 했어.”
“오~”
아이들은 다 날 쳐다보았다. 이번 1학기 내내 1등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시선이 그쪽을 향해 돌리는 것도 이해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 시선 하나만큼은 내가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처럼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방금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녀석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나는 자리에서 풀던 문제집이나 빠르게 풀기 시작했고, 선생님은 바로 다음 번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문제집의 마지막 문제만을 남겼을 때, 우리 반에서 두 번째 만점자가 등장했다.
“이야~ 이 반에는 만점자가 둘씩이나 있네? 30번 백나현! 너는 100점이니깐 안 나와도 좋아.”
“야! 50점이라며! 이 배신자.”
“에이~너무 어려워서 다 틀릴 줄 알고 찍었던 건데, 이렇게 다 맞을 줄 알았겠어?”
나현과 같이 지내던 친구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자신들과 같이 다니던 친구 중 한 명이 100점을 맞을 줄 상상조차 못 했다면서 꺄르르 웃어댔다.
‘대체 왜, 저 녀석이 100점을 맞은 건데?!’
속으로 무척이나 당황했다. 우리 반에서 나 말고도 100점을 맞는 친구가 나와도 딱히 상관없었지만, 평소 학교에서 공부에 하나도 관심이 없고 민폐만 끼치던 나현이 바로 100점을 맞을 줄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었다.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그러자 연약했던 입술을 뜯은 부분이 작게 부어올랐고,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이 반에서 가장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던 나와 동급이라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만약 그곳이 내 방안이었다면 당장이라도 다 푼 문제지들을 찢어버리고 침대 위에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던 인형을 바닥에 던져버렸을 게 분명했다.
그때 갑자기 나현이 내 이름을 꺼냈다.
“여기서 제일 잘 한 건 지은이지! 나는 그래도 찍어서 맞춘 거지만, 지은이는 엄청 열심히 공부해서 맞췄잖아.”
어줍잖게 내 이름을 꺼내놓고선 마음대로 평가를 하고 난리였다. 누구는 바로 앞에 있는 누구 때문에 스트레스로 죽을 맛인데. 심지어 이번엔 내 시험지를 잠깐 봐도 되겠냐고 허락을 묻고 있었다. 자신의 답과 비교해보고 싶다면서.
“어차피 서술형 문제도 거의 없었잖아. 보여주기 힘들어서 그래~”
“제발~나 여기서 제일 똑똑한 친구는 너밖에 없어!”
나현은 말을 하던 도중 마음대로 손을 잡았다. 평생 펜을 잡고 문제를 풀었던 내 손은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마다 물집이 잡혀있거나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던 반면 나현의 손은 부드럽기 짝에 없었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손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제발 꺼리라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멈췄다.
“미안, 나 이제 공부에 집중해야 하거든. 이제 곧 기말고사도 있으니깐, 너도 열심히 공부해!”
“야, 공부하잖아. 그냥 우리끼리 놀자. 내가 괜찮은 맛집 알아뒀는데 주말에 같이 갈래?”
“그래! 어디야?”
나현의 친구 중 한 명이 보다못해 나현과 나를 떨어트려 두었다. 항상 시끄럽게 떠드느라 몰랐는데, 이런 쓸모가 있었다.
천천히 나현의 손을 떨쳐내고 문제집을 펼쳤다. 아까 풀다 만 문제 위에 볼펜으로 적혀진 식들이 여럿 적혀 있었고, 그중 일부는 덜 마른 채로 덮어버렸던 버리는 바람에 잉크가 축축하게 번져 있었다.
‘나는 너랑 같은 수준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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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순식간에 따뜻했던 봄을 지나 무더운 여름으로 들어가는 초여름이 시작되었다. 직장인들에게는 여름 휴가, 초등학생들에게는 여름 방학이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수능을 1년도 채 남겨두지 않은 우리 고등학교 3학년들은 얼마 남지 않은 기말고사 공부를 했다. 나는 1등을 차지하기 위해 브레이크 없이 더욱 공부에 매달렸다.
“이번에 시험 잘 보게 해주는 주술이 나왔다는데 같이 해보자!”
“이걸 싫어하는 사람 책상 안에 넣어두면 그 날부터 싫어하는 사람의 운이 안 좋아지다가 결국엔 미쳐서 죽어버린대.”
“죽을 수도 있지만, 성공하면 소원 한 개를 이루어주는 분신사바가 나왔대. 완전 바보 같지 않아?”
기말고사가 성큼성큼 다가올수록 친구들 사이에선 이상한 주술이나 괴담이 떠돌았다. 처음에는 다들 공부나 열심히 하자는 분위기였지만, ‘시험의 난이도가 대폭 올라갔다’라는 소문이 돌고 난 뒤에는 반마다 믿는 무리가 하나씩 생겼다. 옆 반에서는 단체로 야자 끝난 뒤 분신사바를 하다가 순차를 돌던 선생님께 걸렸다고.
“지은이 너는 괴담 같은 거 믿어? 아니면 주술이라던가.”
“...안 믿으니깐 공부나 하자.”
쪽지 시험이 끝난 뒤, 나와 나현이는 서로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했다. 발전보다는 퇴화에 가깝겠지만. 내가 원해서 이루어진 관계는 아니었고, 나현이 강제로 이루어지도록 말을 걸었다. 말을 걸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며칠이 지나선 물고기처럼 다 까먹어버리는 기억력을 보여주었다. 결국 더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내가 먼저 지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 이번에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대회 있잖아, 그거 나가고 싶어?”
“내신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흐음...”
이렇게 내가 목을 매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아시다시피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두 번째는 전국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 특히 올해부터 시작할 예정이라는 대회에서 우승하면 장학금은 물론 자소서에 나를 어필할 수 있는 좋은 성적이 될 수 있었다. 심지어 유명한 연예인들도 나오는 대회라서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했다. 일석삼조였다.
다만 전국 대회답게 턱이 있었는데, 이번 기말고사에서 전교 1등을 차지해야 나갈 수 있었다. 전교 1등들이 모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라면서 상큼하게 말했던 유명한 배우가 떠올랐다.
“나현아, 너도 나가보고 싶어?”
“당연하지!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도 온다는데, 가서 싸인이라도 받으면 얼마나 좋아?”
나현은 실실 웃으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리 학교는 아침 등교 시간마다 휴대폰을 걷는 규칙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거 규칙 위...”
“쉿! 들키면 안 돼! 나 압수당하면 엄마한테...으, 너무 끔찍해.”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내 입을 막은 나현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안 그래도 당시 더위를 많이 타던 내게는 고문 자체였다. 심지어 땀도 줄줄 흘렸던 터라 손안은 금세 고약한 땀 냄새로 가득 찼다.
“하지 마.”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지? 가끔씩 생각 없이 이럴 때가 많아서...”
“나 이제 학원 숙제 해야 돼.”
나는 나현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이어폰을 귀에 뀌었다. 원래는 전자기기 금지였지만, 유일하게 3학년은 MP3 사용을 허락받았다. 작년 생일 선물로 받았던 빨간색 MP3에서는 원어민 선생님의 영어 강의가 방금 막 시작했다. 나현이 무어라 말하는 듯 입을 옹알거렸지만, 강의 소리에 파묻히는 바람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원어민 선생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불안했던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벌써 기말고사를 하루 앞두고 있었다.
“하, 난 이걸 왜 깜박하지?”
학원이 다 끝나 학교로 터덜터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니, 평소였다면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그 날은 달랐다. 학교에 단권화 노트를 놓고 왔기 때문이다. 물론 개념이나 시험 범위만 알고 싶었으면 문제집이나 교과서로 충분히 끝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과목 선생님들이 중요하다고 표시하고 필기했던 부분은 오직 그 노트에만 담겨 있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학교에 노트를 두고 갔던 나와 노트에만 필기했던 나 자신에게 후회가 들었다.
다행히 거리가 가까웠던 학교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는 도중엔 MP3를 통해 강의를 다시 한번 더 들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다르게 정문은 철제 자물쇠로 막혀 있었고, 열려 있을 줄 알았던 후문도 잠겨 있었다. 괴담과 주술을 위해 밤마다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을 막기 위해 문을 잠그고 있다는 걸 들었던 적이 있던 것 같은데, 그게 진짜일 줄 모르고 있었다.
“경비 아저씨! 여기...잠만.”
나는 미리 챙겨온 손전등을 들고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사람 한 명 없는 학교엔 전등도 안 켜져 있어서 사방이 캄캄했다. 입고 있던 교복은 온통 흙먼지와 자갈이 묻어 있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작은 개구멍을 이용했는데, 땅에 마른 흙이 잔뜩 뿌려져 있었는데 아마 그때 묻었을 것이다. 누가 만들어 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더러웠다. 다신 사용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가지고 있는 거라곤 손전등뿐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엄마한테 혼이 날 정도로 더러워진 건 알고 있었다.
“그냥 경비 아저씨 부를 걸 그랬나.”
내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절대로 어둠이 무서웠던 건 아니었다. 어차피 살면서 귀신 따위 한 번도 믿은 적도 없었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공부하고 조금이라도 더 자둬야 하기 때문이었다. 시험 전날 최상의 컨디션이여야 하는 건 기본이었다.
내가 찾는 교실은 복도 맨 구석에 있었다. 아무도 없어서 불도 다 꺼져 있었다.
‘빨리 찾고 나가야겠어.’
나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책상 속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미리 책상 속에 물건들을 다 빼두었기에 들어있는 건 노트 한 권뿐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공부만 하고 자면 완벽했다.
하지만 나처럼 교실을 찾은 사람은 하나가 아니었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거기 있어?”
소리가 난 쪽으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내 질문이 들렸음에도 일부러 대답을 피한 게 확실했다.
“...”
어딘가 이상하다는 직감에 손전등으로 비추어 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결국 교실 불을 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누군가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무언가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교실 뒤편에서 들렸다.
“거기 있는 거 아니...”
교실 불을 키고 난 뒤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늦었고, 얼굴도 보지 못 한 누군가가 도망친 뒤였다. 얼마나 정신없이 도망쳤으면, 그 사람이 머물렀던 장소로 보이는 곳엔 책상이 몇 개가 넘어져 있던 데다가 수상한 물건까지 흘려버렸다.
아마 그 사람은 주술이나 강령술을 위해 학교에 먼저 방문했던 것 같았다. 마침 12시가 지난 늦은 시각이었으니, 다른 사람이 학교 맨 구석에 있는 교실까지 찾아올 줄 전혀 몰랐을 테다. 특히 이 반의 반장이었던 내게 이런 걸 들켜버린다면, 선생님께 혼나는 것뿐만 아니라 벌점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 나라도 도망쳤을 것이다.
나는 어지럽혀진 교실을 치웠다. 이래 봬도 반장이었으니, 이런 걸 그냥 두다간 하지도 않은 내가 혼날 게 뻔했다. 넘어진 책상을 원래대로 세웠고, 바닥에 흘린 물건들은 하나씩 주워 교실 분실함에 넣어두었다.
“이건...”
차츰 물건들을 다 주워갈 때 즈음, 눈에 띄는 머리핀 하나가 교실 구석에 떨어져 있었던 걸 발견했다. 연분홍빛 꽃에 플라스틱으로 코팅되어 있던 머리핀.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의 물건이 틀림없었다.
백나현이었다.
9282글자 쓰느라 죽을 뻔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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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열일추
하루에 3000자 쓰기로 마음 먹었어!
@넙춘(뉴비를 사랑하는 무덱러) 나도 님과 비슷한 사람인데 파이팅! 드립니다
@고느 와!
개꼴림
대체 저런 ㅅㄲ들은 어디가 꼴린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