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속에 들어간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단 3:17)
1. 인적 사항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바벨론식의 이름이며
이들의 본명은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입니다
그들의 나이 15세가 되었을 때,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애굽을 쳐서 격파하고 고대 근동의 패권을 차지 하게되었을 당시
애굽의 바로왕에 의해 즉위 된 유다 여호야김 왕도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왕족과 귀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 세 소년들도 다니엘과 함께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B.C. 605년)
바벨론으로 송환되어진 그들은 왕궁에서 3년간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그들의 이름이 바뀌어지게 되었으며, 이 같은 개명 정책은
정복자들이 피 정복자들의 문화와 민족성을 말살시켜
지배국에 동화 시키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행하여 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도 의미도 바뀌어지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냐' (주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가
'사드락'(월신의 명령) 으로,
'미사엘' (하나님과 같으신 이가 누구인가?)은
'메삭' (므로닥 같은 이가 누구인가?) 으로
'아사랴' (여호와는 돕는 자이시다)는
'아벳느고'(느고의 종)로 하나님과 관계된 의미를
모두 우상 신과의 관계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교육기간 3년 동안 다니엘과 더불어 우상에 바쳐진 음식으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채식 만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지식과 명철을 받아
지혜와 총명이 남보다 뛰어남으로 도지사급 수준의 직분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들을 시기하고 그들의 자리를 탐내는 무리들로 인하여
참소를 받게 되었는데, 그 사건은 바로 금신상을 세워 모두 절 하여 왕을
우상숭배 하도록 만든 칙령을 어긴데 대한 처벌을 받도록 한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의 나이는 34세 정도로 바밸론에 끌려온지
19년 째되는 (B.C. 586년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신앙의 결단은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하여
더욱 높임을 받아 쓰임받는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그 후 B.C. 538년 경까지 다니엘과 더불어 꾸준히 신앙을
지키는 생활을 한 뒤 바벨론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2. 신앙의 두 종류
믿음은 내면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의 믿음을 알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확실히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시련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시련의 고비에서 보여진 믿음이 바로 자신의
믿음의 수준임을 스스로 알게 하여주십니다.
그 이유는 참 믿음만이 하나님과 동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지내면서 느브갓네살 왕의 믿음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을 비교하여 나타내 줌으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도록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1) 느브갓네살 왕의 믿음은 감동적인 믿음입니다.
다니엘이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자 큰 감동을 받은 왕은
다니엘에게 이르되,"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단 2:47)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후 그는 꿈에서 본 금신상을 크게 만들어
'두라' 평지에 세우고 모든 사람들로 절을 하게 하며
스스로 우상이 되어버리는 믿음이 되어버렸습니다.
(1) 감동이 회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회개가 있어야 함을 알려주는 경우입니다.
감동은 감정의 영역으로, 의지의 영역인 욕망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군인도, 정치가도, 재벌도, 학자도 다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권력, 권세, 재력, 지력등은
감동받은 믿음과는 별개로 마음 속에 유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 속에는 두 영역이 공존하게 됩니다.
감동받은 신앙의 영역과 현재 소유하고 있는 욕망의 영역이 함께 있어
자신의 삶이 욕망의 범주에서 만족을 누릴 때는 그 편에 머물지만
인간의 한계를 느껴 갈급하게 되면 종교의 영역으로 옮겨가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스윙적인 마음을 갖고 살게 됩니다.
이때, 자신은 하나님과 공존 상태에 있게 됩니다.
회개만이 이 공존 상태가 교만임을 깨닫게 해주어 하나님 한분 만으로
자신의 삶의 모두를 종속시키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예: 세리장 삭개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재물에 대한
반대의 결과가 무엇이지를 보여준 예로 볼 수 있습니다.)
(2) 감동적인 믿음은 신앙영역 까지도 자신의 주관하에 놓이게 만듭니다.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통하여 국정이 안정되고
번영이 되자 왕은 다시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꿈속에서 본 금신상이 자신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섬김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결국 교만한 마음은 은혜로이 받은 하나님의 축복을 자신의
유익을 의하여 반역의 계기로 만들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권세, 물질, 인기등 세상의 소유는 육신에 속한 부분들입니다.
인간에게서 제일 먼저 없어지는 부분이 육신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부분은 세상에 있을동안 가장 섬김을 받으려 합니다.
믿음은 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육에 속하지도, 육신에 속한 것에도
속해 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에 의해서 축복받은 육신은 믿음을
내 보내고 자신이 주어진 것의 주인이 되어 천년만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느브갓네살 왕은 풀무불 사건이 있은 17년 후(B.C. 569)
왕궁 지붕을 거닐며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짐승과 같이 되어 7년을 고생하고 지냈으며, 다시
하나님을 주권자로 깨닫고 돌아와 B.C. 562 년에 삶을 마감 하였습니다.
인생의 부귀영화는 30-40년 이면 지나갑니다.
감동의 신앙은 그 사는동안 욕망의 시녀로서의 범주에
머물 수 있을 뿐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신앙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대변해주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은 헌신적 믿음 이었습니다.
헌신이란 그 일에 대하여 제일 우선 순위로 자신의 정성을 다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살 때에도 생활의 우선 순위가 있듯이, 신앙생활 에도 믿음의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그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이 두 분야를 실 생활에 바르게 적용시키고
살게하기 위하여 세가지의 시련이 오게 됨을 봅니다.
첫째, 참소의 시련을 겪게 됩니다.
(v. 8="갈대아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참소의 특징은 시기심, 거짓말, 욕심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참소를 받게되면 억울함 때문에 참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참소의 누명을 벗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벗겨주시는 때를 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내로 지내는 동안 교만이 깨뜨러지게 됩니다.
참소의 시련은 주로 교만을 깨뜨리기 위하여 주어집니다.
둘째, 위기의 시련을 겪게 됩니다.
(v.11="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의 특징은 육신의 고통과,
소유의 상실과, 생명의 위협, 등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삶에 낙심, 침체, 절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이 고통을 통하여 욕망을 버릴 수 가 있습니다.
고통은 내세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셋째, 타협의 유혹을 겪게 됩니다.
(v.15="이제라도 너희가 절하면 좋거니와")
타협의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 속에 자위나 명분을 갖게 만듭니다.
"그까짓 것 한번이면 어때? 다음에 잘 되면 더 크게 값으면 되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 ...등,
그러나 유혹은 우리의 의지적 믿음을 참 믿음으로 구분하거나,
바꾸어 주거나 하는 기회가 됩니다. 이 세가지의 상황을 맞이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들의 진정한 믿음을 다음과 같이 보였습니다.
(1) 그들의 믿음은 결단의 믿음이 었습니다.
(v.16="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그들은 신상에 절하느냐, 마느냐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십계명은 그들에게 절대적인 표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명령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타협에 의해서 세워질 수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으로만 세워지고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영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을 포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님을 그들은 보여준 것입니다.
(2) 그들의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한 믿음이 었습니다.
(v.17="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건져 내시겠고")
이들은 다니엘과 함께 하나님께서 왕의 꿈을 보여주셨던 체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러번 경험 하였으면서도 어려움이 올 때마다
흔들리고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를 열번이나 더 시험한 무리들 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너희가 말한 그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환경과 믿음은 상반 관계에 있습니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어야지 환경따라 믿게되면
환경이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이 세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 순간 환경은
영광에 이르는 코스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3) 그들의 믿음은 내세를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v.18="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성도가 불도, 물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불도 끌 수 있고, 물도 말릴 수 있고,
생명도 살릴 수 있는 분이심으로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풀무불 속에서도 타지않고 살아나왔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약속 하심과 같이
"네가 불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이사야 43:2)
하신 말씀을 그들에게 증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예수님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을 잡으려 든다면 다 놓치게 만드시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이 저 세상의 것을 잡으려 든다면
저 세상도, 이 세상의 것도 다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들의 신앙을 본받아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도록 함께 배워 나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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