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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서정주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갓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히 걸어 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서정주 徐廷柱
출생-사망 : 1915.5.18 ~ 2000.12.24
호 : 미당
시인. 전북 고창군 부안면 출생. 호는 미당(未棠).
전북 부안군 줄포보통학교 수료 후 서울중앙고보(中央高普) 및 전북 고창고보(高敞高普) 중퇴. 방랑생활. 1931년 고승(高僧) 박한영(朴漢永) 대종사 문하에 입산, 서울 개운사 대원암의 중앙불교전문강원(中央佛敎專門講院)에 입학,
그 뒤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수업. 1936년 시 《벽(壁)》이 〈동아일보(東亞日報)〉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시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으며,
동인은 김동리(金東里) · 이용희(李用熙) · 오장환(吳章煥) 등이었다.
1938년 화투패를 떼 보고 선을 본 방옥숙(方玉淑)여사와 결혼하고 첫 시집 《화사(花蛇)》를 남만서고(南蠻書庫)에서 출간,
그 뒤로 일제 식민지시대의 황막한 강산을 떠돌고 서울의 여기저기에 기류하다가 만주로 방랑, 한동안 간도(間島)에서 양곡주식회사 경리사원으로 있었고 용정(龍井)에도 가 있었다.
일제 말기를 고향과 서울에서 전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6년 선문사(宣文社)에서 시집 《귀촉도(歸蜀途)》가 출간되어 시단에 나온 직후부터 놀라운 반응을 일으킨 그의 시가 이 시집에 이르러 정착되었다.
동아대학 교수, 〈동아일보〉 사회부장 · 문화부장 등에 취임한 후 정부 수립과 함께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약 1년간 역임하면서 한국문학가협회 시부위원장에 피임되었다.
1950년 6 · 25 동란이 발발하자 조지훈(趙芝薰) · 이한직(李漢稷)들과 한강을 기적적으로 건너 대전(大田) · 대구(大邱) 등지로 피난하였다.
전쟁과 함께 그는 극심한 조현(정신분열)증세를 일으켜 전시(戰時)임시문인단체인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문우들의 보살핌으로 대구의 병원과 부산의 한거(閑居)에서 요양하다가 9 · 28수복 후 서울로 돌아왔다.
1 · 4후퇴와 함께 가족과 더불어 피난열차(避亂列車), 마차 따위를 타고 전주로 내려갔으며 후배들의 알선으로 생활 터전이 마련되어, 그의 중견시(中堅詩) 이후에 가장 중요한 시적 테마가 되었던 「신라(新羅) 체험」을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해 영감(靈感)이 확대된 경지에 정착시켰다.
또 전주시대는 자살미수사건도 생긴 반면 동양사상(東洋思想)과의 만남에 의해서1936년 초기에 강렬하게 보인 보들레에르풍(風)의 마성(魔性)이 승화되었다.
그의 전주시대 그리고 광주시대에 이르러 이른바 대가시(大家詩) 《상리과원(上里果園)》 《무등(無等)을 보며》 등 명작을 산출했는데, 이런 서정주문학의 예술적인 승리는 그의 조현(정신분열)증세와 함께 진행되었다.
전주의 전시연합대학 강사, 전주고교 교사, 조선대학 부교수 등으로 전전하다가 환도와 더불어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왔다.
예술원 회원, 서라벌 예술대학 교수, 동국대학(東國大學) 교수를 역임하면서 1960년 시집 《신라초(新羅抄)》를 출간했다.
그의 동양정신은 전후세대(戰後世代)의 공격을 받은 샤머니즘을 주조(注潮)로 삼으면서도 노장철학(老莊哲學) · 유교 등을 체질화한 뒤 마침내 그가 청년시대부터 경험해 온 불교에서 완숙한 상상력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실상론(實相論)보다는 현상론(現象論) · 연기론(緣起論)에 기울어져서 인연설화(因緣說話)의 오묘한 전생(轉生)에 시의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성사략(韓國星史略)》과 같은 전율적인 학구 정신사를 확인함과 동시에 불교적 영생주의(永生主義)를 고조하였다.
특히 1968년 출판의 시집 《동천(冬天)》은 「범천(梵天)」과 같은 「동천(冬天)」과 자아 사이의 성적(性的) 교감을 발휘한 것으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님은 주무시고》 《선운사 동구(禪雲寺洞口)》 《고요》 《외할머니네 마당에 올라온 해일(海溢)》 《산수유꽃 나무에 말한 비밀》과 같은 비술적(秘術的) 경지를 드러냈다.
시집 《동천》 이후 그는 다시 한번 《질마재 신화(神話)》와 같은 어린 시절의 토속적 감동(土俗的感動)을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서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를 가리켜 「한국 최대 시인」이라는 일반적인 찬양이 압도적이지만 그의 다음 세대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언어 패턴에 의해서는 많은 회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972년 《서정주문학전집》 전5권이 나오면서 서정주의 문학사적 위치는 거대한 것으로 공고해졌다.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이다.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등단하여 같은 해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김동인(金東仁)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지냈다.
1941년 〈화사(花蛇)〉〈자화상(自畵像)〉〈문둥이〉등 24편의 시를 묶어 첫시집 《화사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1944년까지 친일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에 관여하면서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隣保)의 정신》(1943), 《스무 살 된 벗에게》(1943)와 일본어로 쓴 시 〈항공일에〉(1943),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1943), 시 《헌시(獻詩)》(1943),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따위의 친일 작품들을 발표했다.
1948년에는 시집 《귀촉도》, 1955년에는 《서정주 시선》을 출간해 자기 성찰과 달관의 세계를 동양적이고 민족적인 정조로 노래하였고,
이후 불교 사상에 입각해 인간 구원을 시도한 《신라초》(1961), 《동천》(1969),
토속적·주술적이며 원시적 샤머니즘을 노래한 《질마재 신화》(1975)와 《떠돌이의 시》(1976) 외에 《노래》(1984), 《팔할이 바람》(1988),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을 출간하였다.
19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국장을 거쳐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문리대학 교수(1959~1979)를 지낸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 종신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1년 현대시인협회 회장,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84년 범세계 한국예술인회의 이사장, 1986년 《문학정신》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냈고,
2000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
저작에는 《한국의 현대시》《시문학원론》《세계민화집》(전5권) 등이 있으며,
시집에는 위의 시집 외에 《흑산호》(1953), 《국화 옆에서》(1975), 《미당 서정주 시전집》(1991)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5·16 민족상, 자유문학상 등을 받았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자체 조사하여 발표한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자 1차 명단(708명)'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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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먹는 나이는 거절할 수 없고
흐르는 시간은 멈추게 할 수 없다
생장(生長)과 소멸(消滅)
성(盛)하고 쇠(衰)함이끝나면
다시시작되어 끝이없다-莊子
다녀갑니다
가슴 뛰는 일을 하라.
그것이 최고의 명상이다.
신이 당신 자신에게 주는 메시지는
가슴 뛰는 일을 통해서 온다.
가슴 뛰는 일을 할 때
당신은 최고의 능력을 펼칠 수 있고,
가장 창조적이며, 가장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다릴 앙카-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