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안산강의(나라장로교회) 03 - 요한복음3(8장) 04,9,20 강의: 이근호 목사
우선 늦게 오시는 분을 기다리는 의미에서 지난 시간에 한 강의를 다시 요약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을 안 보면 우리는 보통의 다 같은 인간이지만, 그러나 요한복음을 들추게 되면, 거기에 하나님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적인 형태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자녀이다, 아니다" 라는 것을 판정하지 말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곧 "목자가 양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성도, 즉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 요한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것을 모를 것이 뭐가 있나? 우리가 다 알지" 라고 하면서, "우리가 안다" 라고 편하게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 12절 13절에 있는,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라고 이야기하는, 그것 자체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여기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 라는 것이 나타났다는 것은, 여기에서 무엇이 빠집니까? 인간의 '육(정)으로나 혈통' 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라는 말은, 구원받았음에 대해서 '육적인 조건과 혈통적인 조건'을 내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A :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B : 구원받았습니다. A :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B :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 하나님께로서 난 자 - 우리가 행동을 잘해서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
그것으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그 어떤 행위를 보태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라는 것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배제하는가 하면, "네가 행동 잘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구원받고 싶어서, 또 우리들 행동 여하에 따라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즉 행동여하에 따라서 운명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행동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바뀌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바뀐다" 라는 말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 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사항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자' 라니깐요! 그걸로 상황이 종결되었습니다. 아파도 상관없고, 안 아파도 상관없고, 나았다가 또 아파도 괜찮고 말입니다.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A :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B : '하나님께로서 난 자' 입니다. A :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듣습니까? B : '하나님께로서 난 자'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A : 다른 사람은 왜 주님을 떠납니까? B :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떠나는 겁니다. A : 당신은 왜 안 떠납니까? B : '하나님께로서 난 자' 이기 때문에, 즉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기에 안 떠나는 겁니다.
◈ 요한복음 -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지 않는다 !!
이것이 모두가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이므로. 그 외에 인간의 행위가 첨가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줄거리라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8장 - 간음한 여인 - 오직 예수님의 용서하심만 !!
오늘강의 서론으로서, 요한복음 8장을 먼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제일 재미있는(?) 상황이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의 상황입니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잡아 왔는데, 그런데 이 간음한 여인이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 여인이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 무엇만이 개입되었습니까? 간음한 여인이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어떻게 행동을 고쳤습니까?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용서하심'만 개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그림을 그려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 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에게 하나님의 속성을 주시는데, 그 속성은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용서받는 자' 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게는 용서받는 자만 있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까불거리면서 이 '용서받는 자'에서 벗어나려 하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 이제는 완전하게 되었으니 용서를 안 받아도 됩니다. 내 알아서 할게요" 라고 하는, 이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받을 것이 없어지면 '용서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위상이 날아가 버리지 않습니까?
"일곱 살 때 죄지었다", "열 일곱 살 때 죄지었다", "육십 살 때 죄지었다" 라고,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 다음 60에서 90살까지는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죽을 때까지 '용서하시는 분'이, '용서하시는 분'으로 남으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용서받는 자'가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첨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용서받고 난 뒤에 '새사람 되고', '바르게 살고' 등등, 그렇게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용서해주시는 하나님'과 '용서받는 사람', 그 외에 다른 노선이 없기에 말입니다. 다른 노선은 첨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나옵니다.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여기에 보면 분명히 "나는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라고 합니다. 사람을 누구에게 소개할 때 남들이 소개하는 것보다 본인이 소개하는 것이 제일 정확합니다. 하나님이 본인이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제일 정확한 것입니다. 남들이"하나님이 자비하시다", 혹은 "하나님이 어떠하다" 라는, 이런 소리 듣지 말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줄자에게 긍휼을 주는", 그런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뵈올 때는 다른 생각을 하면 전혀 안 됩니다. 책받침으로 양쪽 귀를 가려버리세요. 딱 가리고 뭐만 들으면 됩니까? 주님이 하신 소리만 들으라는 겁니다.
◈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줄 자에게 긍휼을 !!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줄 자에게 긍휼 주고" 라는 그것만 들으라는 겁니다. 그것이 신약에 오면"나는 끝까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고, 너는 용서받음으로 구원이 될 자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속성을 심기 위해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 라는 것이 요한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봉사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고, 헌금을 주고받는 관계 아니고, 그냥 무슨 관계입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는 그냥 자비를 받는 존재이다" 라는 겁니다. 그걸로 그치세요. 더 보태지도 말고 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은 세리와 창기와 십자가의 강도와 문둥병자와 소경 등에는 다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더 이상 자랑하고 내놓을 것이 전혀 없으니까 말입니다. 또 누가 이해됩니까? 사도바울도 역시 이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1장 35절입니다.
(롬 11:35) 누가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 말은 처음부터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핍박하면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것은 다 버리고 "나의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퍼부어 주시는 분!",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주는 대로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 선악과를 심은 이유? - 이 동산은 인간들이 만들지 않았다 !!
에덴동산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죠. 만약에 우리가 만들었으면 선악과를 만들어 넣었겠습니까? 그 에덴동산이 우리가 만든 아파트라면 절대로 선악과를 안 만들어 넣었겠지요? 그러나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인간은 그냥 누리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그냥 받아서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심은 것은 "인간들이 만들지 않았다" 라는 것을 명찰로 붙여서 분명하게 박아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주인 행세를 시도하다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저주받은 땅에서 살면서, 그 다음에부터는 자기 힘으로, 자기 선행과 자기 양심을 총동원해서 아둥바둥 구원을 받아내기 위한 종교적 인물로 변해버렸다는 것입니다.
◈ 가인 - 받으소서 - NO !!
그런 첫 번째 종교적인 인물이 바로 '가인' 이라는 것입니다. 가인이 무엇을 바쳤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안 받습니다. 누리는 것이 아니고 '받으소서' 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제사를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받으소서" 라고 하니까, 사도바울이 "누가 먼저 바쳐서 받아 내겠느냐" 라는 방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에 보면, 바친 것 도 없는데 저쪽에서 먼저 주심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 회수되는, 즉 주님께 돌아간다는 것이죠.
(롬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요한복음 8장과 9장을 오늘 강의하는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서론을 잊지 마세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끝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행함은 여기에 보태면 안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여기에 보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하나님께로서 난 자' 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속성 -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자 !!
우리가 왜 태어났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을 담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바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자입니다" 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담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은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이것을 '용서하심' 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교회 주일학교 아이들한테 다음과 같이 한번 물어 보세요. - 애들아,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선물을 준단다. 무엇일까요?
1)장난감 2)마징가 젯 3)돈 4)과자 5)죄용서
어른은 당연히 '돈!' 이라고 하겠지요. 물론 애들은 '과자', 혹은 '장난감!' 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에게 '하나님은 은혜 주시는 자' 라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담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자, 즉 '은혜 입은 자'가 나오지요? 그렇다면, 은혜 입은 자의 은혜를 입은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하심', 즉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자가 '하나님께로 난 자'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용서를 받는다는 전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인이다" 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기쁠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제가 죄인인 것을 순간 순간 알 때 그야말로 환희 그 자체입니다. 못 추는 춤이라도 추고 싶어요. 펄쩍 펄쩍 뜁니다. 자기가 죄인 되었을 때는 자기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은혜가 됩니다. 자기가 잘난 사람이 되어 버리면 모든 것이 불만이고 불평덩어리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 상황은 늘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상황이 좋아서 은혜가 아니고 상황이 못나서 불만이 아니라, 본인이 죄인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고마워 할 것은 고마워하고 불만할 것은 불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 죄 - 관계 끊어짐 !!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 때입니다. 죄인인 것을 알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잘못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다" 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때 그것이 곧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는 '관계 끊어짐' 이라는 말입니다.
◈ 홀로 있고 싶은 것도 죄 !!
다시 강조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사실은 관계가 안 끊어졌는데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있기에 혼자 있고 싶다는 것입니다. 마누라도 귀찮고, 혼자 있고 싶을 때, 혼자 있으면서 이 세상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 싶은, 만사가 귀찮고 혼자 있고 싶을 때, 그게 무엇인가 하면, 독자적인 행동을 하고,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혼자 있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 가치를 혼자서 결정하고 자기가 자기 측정의 기준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 자체가 함께 있는 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쫓아 내버리고,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로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스스로 있는 자처럼 여기고 그 순간에 나는 그것을 죄로 여기고, 죄를 느끼면서, "아! 하나님이 은혜로서 모든 것을 인도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 지금부터 본론 !!
이상 서론이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보겠습니다. 여기에 한 종류의 무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 법은 어디서 왔다고 봅니까? 모세에서 왔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실존주의 - "내가 누구냐?" 라는 것은, 내 앞에 누가 있는가를 통해서 !!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소지하게 됩니다. 사람이 법을 대하고 말씀을 대하면 그것이 뭐든지 그것을 소유화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실존주의 철학에서 잘 논의하고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이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 앞에 누가 있는가를 통해서 내가 누구냐가 정립된다" 라는 것입니다. 즉 대상이 누구냐를 통해서 그것을 보고 그것과 차이나는 나를 따로 챙기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보다 잘난 사람 앞에 있으면 자기는 졸지에 못난 자가 되고, 자기보다 못난 자가 있으면 졸지에 자신은 갑자기 잘난 자가 되는 겁니다. 자기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면, 자기 앞에 누가 얼쩡거리냐를 통해서 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해서 결혼하잖아요. 이렇게 결혼하면 서로 예뻐해 주고 서로에게 잘해주는데, 만약 배우자가 실망스런 행동을 했을 때, 갑자기 배우자가 달라졌다고 해서 자기도 똑같은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좋게 나올 때는 좋게 나와 줘야 합니다. 서로 좋을 때는 좋다가 상대방이 태도가 돌변하면 자기는 안 달라져야 할텐데, 상대방을 보고서 거기에 자기도 맞추어서 처신을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서기관들이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한사람은 간음한 여인이고, 또 한사람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처음에는 간음한 여인 만나서, "음매, 기 살아" 라고 했습니다. 왜 기가 살았습니까? 법에서 의가 나오는데, 그 의를 소유했거든요. 이게 인간의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가 이러한 소유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 부부하고 삼계탕을 먹으면서 한 이야기인데, 사실 이런 소리를 하면 안되지만 말입니다. 저는 두 분께서는 과연 뭘 소유하고 있느냐고 물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됨됨이는 "반드시 뭘 소유했습니다. 나 이거 있어" 라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뭘 소유했습니까?" 라고 물으니, 그 목사님의 답변이 복음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복음 때문에 결혼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저는 인정했습니다. 참으로 은혜라고 말입니다. 사모님이 이야기했죠. 복음 때문에 결혼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소유가 안되고, 복음은 그 뿌리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소유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뿌리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므로, 복음은 소유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빼놓고 나머지, 즉 돈은 자기가 소유하게 되어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윤리이고 말입니다. 윤리는 뿌리는 '나' 입니다. 주체자인 자기가 하는 겁니다. "내가 얼마 전에 술끊었다" 라는, 그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자기이니까, 그러니 소유가 되지요.
◈ 복음을 소유했다 - 복음의 뿌리가 되는 '예수님께 소유 당함' !!
그러나 복음의 십자가에는 누가 올라갔습니까? 베드로나 요한 모두 도망갔어요. 십자가는 다 탈락되고 누가 혼자 올라갔습니까? 그러니까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에는, 자기 행위가 전혀 첨가되지 않는다는 말을 알겠죠? 복음의 주체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복음을 소유했다는 말은, 복음의 뿌리가 되는 '예수님께 소유 당함'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자' 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제일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자유롭게 자기 맘대로 산 게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예수님의 소유가 된 겁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법을 지키고, 그것은 그 의를 축적하기 위해서 지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0장에 보면 나옵니다.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서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축적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 오는 목적이 최선을 다 하지만, 미진한 것이 있으니 성경을 법으로 봐서, 그 법을 하나 하나 준수함으로, 자기에게는 차곡차곡 은행에 저금통장에 적금 쌓이듯이, 자기의 의가 쌓이면 그 의만큼 축복하고 보상을 해준다는, 자기 일방적인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 바리새인들 - 하나님의 법을 소유해서, 그것으로 자기 구원을 시도 !!
그것을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그래서 만약에 자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누가 이혼을 했다" 라고 하면, 그걸 가지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면서 "나쁜 짓 했다" 라고 하면서, "나는 괜찮은데" 라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축적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소유해서 그것을 자기 구원을 확보하려는 시도라는 말입니다.
◈ 간음한 여인 - 예수님이 누구이며,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는 도구 !!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은 여기 왜 등장하느냐 하면, 재미있는 것이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지만, 왜 잡힙니까? 간음한 여인이 잡혀서 예수님께 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재료' 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도 소경으로 난 자와 같이, 예수님이 누군가를 보여주고,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교육용 자재이고, 비품이고 시험도구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 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32절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것은, 곧 법에서부터의 자유라는 말입니다. 법은 죄를 낳고 또한 의를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리새인 생각인데, 법이 의를 준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왔을 때,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뭘 썼습니다. 뭘 쓰시더니만, 아마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죠? 따라서 그 찔리는 것으로 인해서, 이제 자기가 손에 쥐고 있던 돌을 본인에게 던져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가고 말지요.
그들은 법은 의를 준다고 생각했는데, 법은 우리에게 더욱 더 죄인 되게 한다는 것을 예수님을 만나게 해줘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은 죄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교육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 만들기, 인간 만들기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죄를 억제해서 망나니 같은 애들을 양처럼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론은, 좋은 말을 많이 하면, 그것을 듣고 개과천선해서 사람답게 살게 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설마 죄가 아니겠지" 라고 여기는 것까지도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할 말이 없게 만들죠. 할 말이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것을 "골수를 찌른다" 라고 했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를 들면,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도시에 가서 하루나 이틀을 유하며 장사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약 4: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 사는 것 자체를 감사하라 !!
그런 대목 보면, 아마 장사하는 사람들은 섬뜩할 겁니다. "네가 내일을 아냐? 그렇게 아는 식으로 건방을 떠느냐?" 라고 야단을 치는 겁니다. "어느 도시에 가서 이득을 보면서 장사하리라" 라는 식으로 하지 말고, 차라리 말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뜻이면 죽고, 사는 문제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살려주니까 산다" 라는 것을 깔고 가서 장사를 하든지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다. 즉 살려 줘서 사는 것이지 자기가 살려고 애를 써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는 것 자체를 감사하라" 라는 것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에서, 안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인데, '있고, 없고' 라는 것이 자기 손에 달려있지 않은 것이 안개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있고, 없고'를 자기가 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개라는 것은 날씨가 따뜻하면 사라져주어야 하기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필요치 않으면 사라져 줘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살아있습니까? 아직도 붙드시니까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런데 늘 붙드니까 이력이 나가지고, 살아 있어야 당연한 권리처럼 주장하잖아요. 이런 소리를 하면 노인들은 미워하겠지요. 노인들은 제가 이렇게 설교하면 아마 죽을 맛 일 겁니다. 쓸데없이 왜 사냐는 것입니다.
◈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고 살려주니 살죠 !!
아마 그러면 어르신들은 "내가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고 안 죽으니까 사는 것이지" 라고 할 것인데, 사실 어르신들한테 그런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이것이 아주 예의 없는 이야기인데, 사실 이것이 얼마나 건방진 이야기입니까? 하지만 답변이 얼마나 좋은지요. "내가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고 살려주니 살죠" 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30대나 40대는 이렇게 답변을 못합니까? 자기가 가치가 있어 펄펄 사는 것 같이 그렇게 여겼지요? 그것이 맞나요? 왜 그런 이야기를 30대, 40대에는 못하냐는 말입니다. "저는 살려주니 사는 '안개'입니다" 라는 말을 말입니다.
야고보서에 이렇게 너무나 확실히 박혀 있는 것을 안 보고, 그걸 마음대로 치워버리니까 자기는 죄인이 안되잖아요. 성경말씀이 우리를 더욱더 죄인 되게 하는데, 그런데 그걸 덮어 버리니 자기는 죄인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잘난 사람이 되어버리고, 자기의 가치는 타자와 비교하면서 자기를 규정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나는 못난 사람이니까, 이 사람보다 더 착한 사람되어서 큰소리 치겠다" 라고 하는,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움직임입니다. 너무나 상투적인 성경과 관계없는 인간들의 '자기 의'의 집합소이며, '자기 의'를 과시하는 복음이 없는 곳이 오늘날 교회라는 말입니다.
◈ 자기의 열심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왜 '죄' 라고 !!
이렇게 강의를 하게 되면,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의 주된 원인이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목사의 말이 다 고맙고 이해가 되는데, 단 한가지 "내가 왜 죄인인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는 죄는, 교회에 안 다니고 망나니처럼 살고, 교회로부터 도망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이래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찬송 부르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이런 자기의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이것을 왜 '죄' 라고 이야기하느냐는 말입니다.
◈ 인간은 성경을 볼 때 지킬만한 것만 '골라, 골라' !!
그래서 '우리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반박이 이해가 되지요? 제가 요한복음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딴소리 안 합니다. "당신은 성경을 볼 때 지킬만한 것만 골라 봤다" 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성경에 상상도 못하게 많은 지킬 수도 없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마구 붕붕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 인간은 끊임없이 의(義)를 축적하려고 몸부림 !!
그렇다면, 왜 지킬 만한 것을 골랐을까요? 자기는 죄에서 의를 축적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을 보고 지킬만한 것을 골라잡는 겁니다. 온유하고, 자비하고, 점차 점차 의인이 되는 성화, 바로 여기에 관심이 있고 이러한 목적으로 교회에 온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스스로 의인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만 골라서 하는 것입니다. 비겁하게 말입니다.
◈ 시어머니가 아플 때 며느리의 태도 - ① 힘들어 죽겠다, ② 열심을 낼 찬스다 !!
예를 들어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아프다" 라고 할 때, 진짜 성도 같으면, 시어머니가 안 아플 때는 하지 않다가 아플 때 봉양하게 함으로서, 그 시어머니가 그렇게 싫고, 밉고, 귀찮고, 시어머니가 자기 인생을 망쳐놓고, 시어머니 때문에 애들 간식하나 못 만들어 주고, 용돈도 못 주고, 아이들 과외비도 제대로 못 내고 하는, 그 자체가 시어머니가 아플 때야 비로소 알았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자기 속에 그런 못된 구석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안 아플 때는 좋은 시어머니죠. 자기에게 피해를 안주니까 말입니다. 그런 경험을 결혼을 해서 몰랐고, 시어머니 안 아플 때 몰랐고, 나이가 들어서 아플 때 비로소 알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며느리가 계속해서 시어머니와 좋은 관계가 유지되었죠. 그런데 명절 때 만나서 이것저것 해보니까, 비로소 자기 속에 이런 나쁜 모습이 있을 줄이야 처음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와 같이 깨닫는 嚥珥?신자라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용기를 냅니다. "그렇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내가 의인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합니다. "아무리 구박해도 나는 이런 기회를 성화의 기회로 잡겠다" 라는 식으로 열심히 봉양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체가 의로워 지려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는 시어머니 만나서 전에 못했던 효도까지 하려는 의가 축적이 되겠지요.
◈ 성경말씀을 왜 건너뛰는가? 스파이더맨인가?
이런 사람은 "갈수록 내가 의인되는데, 그런데 죄인이다" 라고 하니, "전혀 모르겠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모르고, 갈수록 모르는 겁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자기가 그 속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이런 말씀은 그냥 건너뛰어 버립니다. 스파이더맨처럼 말입니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리고 다음의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말씀도 건너뜁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잘 지내고서 예수님을 따라가야지, 장사를 안 지내서 불효자가 되어버리면, 죄에서 의로 잘 나가다가 도리어 천하에 죄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죄가 뭔지 모르는 게 아니고, 죄인이 안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 십자가 - 인간이 스스로 의인이 되려고 하나님을 거부한 흔적 !!
이제 처음으로 가보세요. 뭐가 빠집니까? 용서가 빠지고, 용서가 빠지게 되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줄 자에게 은혜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죠. 그 사람에게는 '잘하는 놈에게 떡 주는 하나님'이죠. 은혜가 뭡니까? '죄용서' 입니다. 자기가 죄인이 안 되고 의인이 되려고 하는 자에게, 그런 하나님은 귀찮고,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거부하죠. 그 거부의 흔적이 뭐냐 하면, '십자가' 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타자를 만나게 되면 항상 자기 잘하는 것을 내세워요. 항상 자기 잘하는 것을 축적을 해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간증거리가 있어야 하잖아요. 부부사이라도, 부부가 직접 그냥 그렇게 되어 버리면 자아가 부각되고 타인이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거치면 뭐가 됩니까? 십자가를 통과해서 보면, "너나 내나 다 못난 사람끼리 모았으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자" 라고 대화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둘 중의 하나가 성도가 아니라서 죄에서 벗어나서 의를 축적하려고 한다면, 다른 한 사람은 성도가 되어서 자기를 십자가 앞으로 통과하려고 하면, 이게 대화가 됩니까? 전혀 안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차를 몰고 가다가, "저쪽에서 당신 욕을 하던데 왜 같이 욕을 안 하나? 당신은 못난 자인가? 왜 같이 안 대드나?" 라고 하면, "아니, 욕해서 뭐해요. 재수 없다고 여기고 그냥 가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남편의 위신을 자기가 챙겨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가정은 의롭고, 의로서 완전 무장을 시켜서 누가와도 위신과 체면을 갖출 때 사는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진짜 성도의 맛은, "이렇게 못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용서를 받아서, 은혜를 받아서 성도가 되었다" 라는 게 성도의 맛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받은 맛', 이 맛이 초코렛보다 더 맛있어요. 용서를 받아보세요. '용서해줄게' 라는, 이것보다 더 신나는 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없다는 것입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기도할 때 주께서 응답하시기를 "용서해줄게" 라고 하면 만사 끝이라는 겁니다.
8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의도적으로 글을 쓰시고 함으로, 돌을 들고 간음한 여인을 치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다 동일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 앞에서 모두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한쪽은 용서받고 한쪽은 그냥 가버렸다는 겁니다. 사실 가도 몇 발짝 못 갑니다. 나중에 도로 불려 나와서 다 심판 받고 지옥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한 것은 요한복음 8장의 쉬운 부분이라서 쉽게 했는데, 이제 어려운 것을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라는 것은,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을 담는다고 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뭐라고요?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이라고 했지요.
그 속성이 담긴 자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 라고 했는데, 그가 무슨 역할을 합니까? '용서받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용서하는 역할'을 하시고, 다른 사람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한복음 8장 23절입니다. 한번 봅시다.
(요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질문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같이 섞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속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그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라고 우겼다고 해봅시다. "그럼 당신은 어디서 났습니까?" 라고 했을 때, "하늘에서 났다" 라고 하면, "그럼 하늘에서 살지, 왜 여기 왔습니까?"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 그분이 오셔서 섞였다 - 이 세상은 끝났다 !!
우리의 상식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태어난 사람은 하늘에서 사시고 이 땅에서 난 사람만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왜 '섞였다' 하는 사실이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왜 섞였습니까? 섞임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 이 세상은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로 보내고 해야, 그래야 이 땅은 그냥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만약에 하늘에 속한 분이 여기 왔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진척될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분이 왔을 때, 그분을 못 알아 봤으면 이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제가 오늘 여기 왔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찾아오신 사건은, 어느 손님보다 더 무서운 사건입니다. 대접하기는 무엇을 대접합니까? "저는 잘난 체 했습니다" 라고,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제 그 종말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종말 생각하지 마세요. 그분이 오신 겁니다. 그리고 또 오신다고 합니다. 한차례 왔을 때 못 알아 봤고, 두 번째 오실 때는 알든지 모르든지, 그때는 모두 다 알아보도록 오신다는 것입니다. 석유수급이 안 된다든지, 장사가 잘 안 된다든지, 이런 문제들은 전혀 문제 거리가 됩니까? 왜 전혀 안됩니까? 추석을 앞두고 비상근무하는 것은 아무 문제 거리가 안 된다니깐요. 이런 것이 다 종말입니다. 정말이지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니깐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났다는 것은 여기 적혀 있지만,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충격입니다. 지금 성경을 보니 잠도 잘 오고 맹숭맹숭하지만,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은 아직까지 안 오게 되어 있는데, 졸지에 와 버리니 "너희들은 죄 가운데 있다" 라는 것입니다.
◈ 우린 모두가 다 '죄의 종' - 딸랑 딸랑 !!
이것이 중요한데, 하나님이 오셨는데,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어디에 속했다는 겁니까?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쉽고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이것이 이제 보편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다 확산이 됩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님이 오셨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다. 2) 간음한 여인을 누가 용서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용서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유케 한 자만 자유케 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다 도망을 쳤잖아요. 그들도 다 죄의 종인데 말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 만이, 즉 예수님께서 자유케 한 경우에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8장 33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여기에 전혀 동의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그들은 "우리는 죄의 종이 된 적이 없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이다" 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죄의 종인지를 모르면 마귀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이 죄의 종인지 모르면, 예수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자기가 죄의 종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오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여기 이미 왔습니다. 이렇게 이미 왔다면, 그렇게 이미 오신 분을 두고서 오실 필요 없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됩니다. 이미 왔는데 오실 필요가 없다니 말이 안되잖아요? 문간에서 허락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분은 허락을 안 받고 왔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필요 없다는 것이 무슨 현실감 떨어지는 이야기입니까?
◈ 예수님이 왜 오신 줄도 모르면서 !!
아니, 자기가 판사 되고, 국회의원 되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왜 오신 줄도 모르면서, 자기가 의사가 되고 판사가 되었다고 천국에 갑니까? 자기가 '죄의 종' 인 것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건지러 왔다" 라는, 즉 건짐의 의미를 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만요? 자기가 '죄의 종' 인 것을 아는 사람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위로와 격려, 다 좋아요. 그런데 그 위로가 몇 시간을 안 가거든요. 마치 약효가 떨어지면 또 오는 것 같이 또 옵니다. 위로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번에 해주는 위로는 이전보다 더 강도가 커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강도가 계속 더 보태어져야 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끝도 없고 한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책임을 못 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여줘야 합니다. 이것은 철칙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할까요? 아니면 저렇게 할까요?" 라고 하면, 예수님 왈 "그렇게 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여라" 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의'가 축적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키는 대로했는데 무익한 종이 무슨 '자기 의'가 축적이 됩니까? 시키는 대로 해줘야 용서의 의미가 아직도 녹아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분이고, 그것이 유예 될 때 아직도 '자기 증인'이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입장이 그렇다면 상대방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상대방을 죄 되게 하는 방법이 무엇밖에 없는가 하면, 상대방이 과연 은혜를 아느냐를 봐야 합니다. - 녹취자 주 : 이 부분이 어려워서 토를 달아봅니다. 이 구절의 의도는 아마,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은혜 곧 용서를 모르고, 예수 안에 있는 용서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죄라는 취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시편 136편 같은 경우는 그것이 노골적으로 나옵니다.
(시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3)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4)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6) 땅을 물 위에 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7)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8)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0)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1)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2)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3)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4)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5)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6)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7)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8)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9)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0)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1)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2)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3)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4)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5)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모든 것이 다 은혜이고, 은혜뭉치 !!
온통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니까, 자기를 애먹이는 모든 것이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모임, 못된 자식이니 뭐니 해도 전부가 다 뭐라구요? '은혜뭉치' 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을 한번 보세요. 굶기도 하고, 무서워서 광주리 타고 도망치기도 하고, 감옥소에 갇히기도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은혜로라' 라는 것입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바울이 자기 인생을 원망했으면,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합니다. 진작 죽어야 되는 인간이 주님의 자기 숙제물로서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의 자기 숙제를 주님께 맡깁시다. 그분이 하도록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이 오셨는데, 모든 인간은 다 죄의 종이라는 겁니다. 두 번째로, 간음한 여인을 누가 용서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용서했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유케 한 자만이 자유케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세 번째는, 드디어 참된 하나님과 악마와 구분이 됩니다. 이거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진짜 하나님과 악마의 차이점을 부각하면서 마지막에 이 갈등으로 생긴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십자가' 하는데, 하지만 십자가는 뭐라고요? 참 하나님과 악마를 하나님처럼 간주해서 섬기는 하나님과 그 갈등으로 생긴 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 성도 - 예수님, 무슨 일 났습니까?
그러니 성도라면 이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를 찍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그 충돌 현장 속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 났습니까?" 하고 뛰어 들어와서 부딪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마는 뭘 시키느냐 하면, "네가 죄인인데, 네가 의인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너의 가능성으로 할 수 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합니까? "네가 율법, 즉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네가 의인이 될 수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런 교리, 이런 종교,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악마를 섬기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말을 끄집어내고 보니, 이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죠? 이렇게 보니 다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 지금보다 달라진 '나',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싶어서 교회에 오는 겁니다. "내가 봐도 이런 식으로는 못살겠다. 딴 사람되어서 살고 싶다. 지긋지긋 하다. 뭔가 새 생활을 하고 싶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목사님! 한 수 가르쳐 주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교인들입니다.
◈ 어느 시골 조폭의 개과천선, 그러나 !!
어떤 조폭 출신이 시골교회 목사를 찾아 와서는, 횡포를 좀 섞어서 하는 말이, "왜 나는 믿고 싶은데 하나님이 나에게는 믿음을 안 줍니까?" 라는, 이런 식으로 따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말해주기를, "왜 그렇게 믿음도 없는데 교회를 다니려고 합니까? 집에 가셔서 믿음 생기거든 그때 교회 나오세요. 믿음은 갖고 싶다고 가지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다닌다고 당신 생각대로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맘이나 편히 갖고 사세요. 없는 믿음 자꾸 가지려고 하지 말고요" 라고 말입니다.
그 조폭 출신의 그 사람이 말하기를"자기가 믿고자 하는데도 믿음을 안 줘서 못 믿는다" 라는 겁니다.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분석을 해야 하는데 이게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뭘 꿈꾸고 있습니까? 자기는 조폭이었는데, 이젠 그 조폭이라는 그 어두운 과거를 깨끗이 씻고 싶은 것이죠. 확 달라져서 인간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나', 즉 남들로부터 비난받지 않고 칭찬 받는 자기의 미래상을 그리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에서 좋은 소리만 하니까 교회에서 도와줄 것 같지요. 자기가 믿으면, 믿기만 하면 자기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믿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피조물인지 모르고 말입니다. 그 사람은 근사한 사람이 되는 것을 새로운 피조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대충 보고, 아니 아예 안 보고, 자기가 알고 있던 선입관 가지고 지레 짐작하고 차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시골 목사님에게 조언을 조금 했습니다. 앞으로는 "네 주제 파악부터 해라. 조폭이 아니라고 하는데, 조폭이 나쁜 게 아니고, 조폭보다 더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을 왜 당신은 모르는가? 기껏 조폭인가? 그것보다 더 나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나? 살려달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정말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것을 못 느끼느냐?" 라고 말입니다.
◈ 은혜로 태어났잖아요. 그것에 대한 고마움이 있습니까?
우선 이렇게 자기 주제파악을 좀 시켜주고, 그 다음에 해줄 이야기는, "햇빛 받는데 돈 얼마 주고받았는데, 아침에 비오면 그거 얼마 주고받았는데,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은혜 아니고 무엇인데" 라고 하는 은혜를 이야기 해줘야 합니다. 즉 "은혜로 태어났잖아요. 그것에 대한 고마움이 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기껏 자아를 뭐하고 비교합니까? 잘난 사람하고 비교해서 자기도 그것이 되고 싶은 것이죠. 왜 스데반 집사님이 죽었지요? 야고보도 사도도 죽었지요? 예수님이 그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았어요? 아니지요. 서른 몇 살에 죽었지요? 그래서 "당신보다 잘난 사람들, 당신의 처지보다 훨씬 못하게 살고 훨씬 더 못한 모습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지금 당신 살아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당신보다 깨끗하고 좋은 사람도 돌에 맞아 죽었어요" 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생각도 못하고 뭐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첫째는 주제파악을 하게 하고, 두 번째는 은혜를 알아서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자체가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보면서, 모두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 이런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참 하나님과 악마, 즉 이 악마는 뭐냐 하면, 죄인을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 가능성을 주는 충돌현장인 것입니다. 그래야 참 하나님이 나중에 십자가를 질 것 아닙니까? 이것이 어려운데, 어렵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잠이 오셔도 좀 참으세요.
참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하잖아요. 예수님의 이야기를 그냥 풀이하면 틀립니다. 어디를 거쳐와야 되는고 하면, 십자가를 거치고 해석을 해줘야 정답인 것입니다. 왜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성전을 헐고 다시 짓는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못 알아들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난 뒤에 비로소 그것이 돌 성전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몸에 대한 것인 줄 알았잖아요.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모든 사람은 죄인이야 할 때, "죄의 종이야" 라고 할 때,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라고, 이렇게 자기 죄 지은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해석이 다 엉터리가 됩니다. 모든 말씀이 십자가를 거쳐서 나와야 할 것인데.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아버지께 버림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택한 백성이 지은 죄 때문에 버림받잖아요. 그러면 이것을 거치고 와 보세요. 그러면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이 이해가 됩니다. 이 안에 십자가가 미리 앞당겨 있다고 하고 보세요. 십자가를 걸치고 보면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을 더욱 더 죄인 되게 하고, 은혜를 주고 용서를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 이해가 될 때, 그것이 참 하나님이고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사람 같으면 다음과 같이 묻지요?
A :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B :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았습니다. A : 예, 그것은 다 아는 것이고요. 당신은 무슨 행동을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B : 그냥 예수님의 공로로 영원히 구원받았습니다. A : 영원히? 아니 그것은 다 아는 이야기고, 당신은 무슨 행동을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당신, 이제는 나이트클럽도 안 간다면서요? 날이 갈수록 착한 사람 되어가고 있지요? B : 그게 아니고 날이 갈수록 내가 왜 죄인인지를, 내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걸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는, 내가 누구를 도와주고, 도와줘서 내가 이만큼 착한 놈인지 몰랐다는 자기 의가 또 생기고요. 그래서 날이 갈수록 자기 죄인 됨을 알죠. 날이 가면 갈수록... 그러니 당신도 나처럼 주님만 믿으면, 예수의 공로만 믿으면 구원됩니다.
◈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
이렇게 제대로 예수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대로, 사도바울처럼, 오직 자랑할 것이 오직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이 자기 것이 되어서, 자기를 담아서 제대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坪?받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뿐이라는 것을,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직 멀었어요. 이제 52, 53절을 봅시다
(요 8: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뻗뼈?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 8: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을 봤다" 라는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것이 어려운데, 아브라함이 먼저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브라함이죠. 그러면 뒤에 태어난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볼 리가 없죠. 아니 제가 이순신을 보았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사람들의 상식이 그 정도인줄 알면서도 예수님은 "나는 아브라함을 봤다" 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과 우리가 구원받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꼭 그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당시 유대인들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구원받았다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것이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고, '아브라함의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혈통에게만 해당이 되고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는데, 문자 그대로 보면 유대인들이 딱 맞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을 믿는 자는,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에 참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유대인들을 보고 잘못되었다고 욕하면 안됩니다. 우리라도 그 본문 창세기를 보면 그렇게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창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점을 익히 아시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내가 봤다' 라고 되어버리면, 예수님은 뭡니까? 아브라함이 약속을 하나님에게 받았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을 먼저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지,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보다 먼저 노아가 있지 않나요? 아닙니다. 지금은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고, 그 약속을 보고 믿으니까, 그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을 보았다 - 예수님께서 약속에 해당되는 그 빈자리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기 위해서 !!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약속에 해당되는 그 빈자리에다 자기 자신을 집어넣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나를 보고, 약속을 받았기에 기뻐한 것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내용은 받았지만, 성취는 아직 안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누굴 보고 기뻐했다구요?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잖아요.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진짜 하나님의 약속대로 구원할 자는 마지막 나타난 하나님, 곧 예수님만이 아브라함의 모든 약속한 축복의 내용인데, 그 내용이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용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도 나를 보고 기뻐했는데 왜 너희들을 기뻐하지 않느냐?" 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아브라함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 !!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뭘 느낍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하고 나머지는 안 중요하네요? '딩동댕!' 정답입니다. 다른 것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다구요? 약속을 이루고 천국에 보낼 자는 천국 보내버리고, 지옥에 갈 자는 지옥 보내버리고, 그렇게 자기 일 마무리를 하고 자기 집에 가버리십니다.
사우나는 한번 들어가면 5분 후에 나오면 되잖아요. 그러니 지옥은 못나옵니다. 십 년 살고 봐주고, 그런 것 없습니다. 구더기도 안 죽는 곳입니다. 백년을 살아도 죽지도 않아요. 이것은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지옥에 보낼 자는 보내고,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줘서 천국 보내고, 그 작업하고 손 털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아니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은 되지만, 너는 안 되!" 라는, 그런 뜻입니다. 사실 그게 전도이고 말입니다.
◈ 중요한 것은, 어디에 용서가 임하는가?
다시 말해서, 한쪽에는 용서가 임했고 다른 한쪽에는 용서가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죄를 덜 짓고 안 짓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말입니다. 한쪽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자가 예수라는 것을 믿었고, 한쪽은 예수라는 것을 거부했죠. 이것은 판검사, 국회의원, 장관, 그런 것 다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이것이 최고입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라는 이것이 최고라는 겁니다.
일반사람들은 이것을 현실로 보지 않고 종교의 일종으로 봅니다. 불신 학자들은 "이 세상에 종교가 많다. 신이 있고 인간이 있는데 그 중에 예수라는 중보자가 있다. 불교는 부처가 있고, 이슬람교는 마호멧이 있는 이것뿐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란, 다 착하게 살고 죽어서 좋은데 간다는 것으로서 동일한 것 일뿐, 그 이상 의미는 없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를 가짐으로서 죄를 의인되게 하는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이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교인 되기, 목사 되기, 장로 되기 등등, 이런 것이 전혀 소용없다 짓이라는 말입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 용서받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뭐합니까? 예수님을 증거하면 되는 것이고 다른 것과 경쟁을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자기도 살고, 남도 같이 살리는 길이고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58절을 살펴봅시다.
(요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이제야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자기가 있었다고 하면서 아브라함을 끄집어내는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아브람의 약속이, 아브라함의 축복이 주어진다고 유대인들이 지금 학수고대를 하는데, 그가 "바로 지금 네 코앞에 나타났잖아. 뭘 또 기다리느냐?"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조차도 나를 보고 기뻐했는데 왜 나를 기뻐하지 않느냐? 그 이유는 바로 너희들은 악마의 종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8장은 이렇게 정리를 하고, 9장 마지막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어려운데 조금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속성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준다는 것입니다. 동의를 하시죠? 그러면 그 은혜는 용서지요? 인간들은 비품이라 했고 재료라고 했죠? 무슨 재료입니까? 용서함을 보여주는 재료 말입니다. 그러면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기 때문에 인간은 두 쪽이 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 받을 비품이 있고, 은혜 없는 비품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요한복음 9장 39절의 뜻은,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자기 할 일을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무슨 일을 위해서 말입니까? 구원될 사람은 예수님께서 알아서, 예수를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해야만이 이것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용서가 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개코도 보지도 못하면서 율법을 지켜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다는 이 인간들은 억지로 못 보게 소경이 되게 해줄 때, 비로소 은혜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딩동댕!' 입니다. 성립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진짜로 은혜 받은 사람은 너무나 고맙죠. "하필이면 납니까?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납니까?"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택하였다. 내가 너를 택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자이다" 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자가 예수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 강의를 마치면서 !!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철저하게 불신자라고 합시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오늘 강의를 다 들었다고 치면 어떤 느낌이 들겠어요? "이 목사! 당신 말에 의하면 무조건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부터 깔고 들어가는데, 내가 알고 있기는 사람이 착한 사람도 있고, 아침에 일어나서 인사 잘하고, 빗자루 들고 쓰는 사람도 있고, 비록 교회는 안 다녀도 이 사람 저 사람 훌륭한 수많은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사 당신은 '몽땅 다 죄인이다' 라고 주장할거 뭐 있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 라는 겁니다. 아까 유대인들 뭐라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죽고 우리도 죽는데 네가 어떻게 보느냐?" 라고 했습니다. 죽는 놈은 세상을 모릅니다. 죽어 가는 놈은 죽어 가는 놈일 뿐, 자기가 체험을 해봤자 그야말로 어설프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부분만 알뿐 전체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안 죽는 분, 하늘에 계신 분은 이 전체를 다 압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모두 다 죽는다" 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으니 다 죄의 종이 되어서 "모두 다 죽는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 없고, 남이 경험한 것을 들을 필요 없고, 동일하게 죽는 것은 예수를 안 믿어서 죄 값으로 죽는 것인데,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짧은 인생에 알기는 뭘 압니까? 전체를 다 아는 예수님 말만 듣고, 예수님이 "너희들은 죄인이다" 라고 하면 죄인인줄 알고, 예수님이 용서하러 오셔서 "십자가의 피로 용서한다" 라고 하면, 그 피로 '대신 죽은 피'로 용서받는 줄을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들도 다, 즉 햇빛도, 공기도, 그리고 자기 목숨도 공짜로 주신 은총이고, 공짜로 온 선물이며,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이 땅에 증거하기 위해서 두신 증거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뭘 알겠습니까? 우리가 백년을 산들 남 사정 알고 이웃 인생을 알겠습니까? 자기 인생도 제대로 모르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통해서 죄 때문에 죽는 것을 알았으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오직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얻는 축복을 저의 것 인줄 알고 감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