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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말씀(2017.10.8.) 말씀/ 마태복음 19:13-14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14)
추석 명절 잘 보내셨나요? 10일이나 되는 긴 연휴 저도 지인들 선물도 준비하면서 모처럼 잘 보냈습니다. 지난번 다친 갈비뼈도 거의 다 아물어서 산에도 올랐습니다. 주일 저녁에는 사모랑 누가도 오고, 화요일에는 루디아랑 사위도 다녀갔습니다. 이번에는 손주들도 효준이랑 현준이랑 다 왔습니다. 동생 현준이도 제법 커서 형이랑 뛰노는 걸을 보면서 세월이 참 빠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잠시도 가만있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뛰어 다니고, 움직이고, 무엇이던지 관심 갖고 만지며 커간다는 것입니다. 저도 잠시 할아버지가 되어서 손주들과 놀아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회전의자에 효준이를 태워서 돌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현준이도 올라타려하여 둘을 태우고 돌려주니 너무들 좋아 했습니다. 그러다 멈추고 돌아왔는데 효준이가 외할머니 출발 하고 외칩니다. 출발이라는 단어가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오 이 녀석 봐라! 매일 의자에 앚아서 컴퓨터를 다루면서도 고정 의자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는데 효준이는 의자 밑에 바퀴를 자동차와 연상 시키며 앞으로 전진 이동을 생각한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의자도 오히려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자동차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 노는 것을 보면서 참 천진하구나 하는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굳지 않고 늘 유연성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하셨는지 또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9: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 19:14) 아이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늘 관심을 갖고 알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다 안다는 생각은 절대로 갖지 않습니다. 틀이 없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배우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 곧 바로 실천으로 움직입니다. 제 연구실 색소폰 연주 무대에 스피커 위에 보면 호주에서 사온 큰 양 인형이 있습니다. 어느새 그것을 꺼내서 올라타고 껑충거립니다. 우리는 생각만 하고 배우려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하는데 굼뜨지 않습니까? 나에게 인형은 그냥 정지된 사물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정된 것을 움직이는 동체로 만듭니다. 제자들은 그런 아이들의 좋은 특성과 장점을 보지 못하고 아이들이 몰려오는 것을 막고 꾸짖었습니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부정적 측면을 본 것입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 이야기 하는데 기어들고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들 할 일을 하며 방해를 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그릇도 깨고 과자 부스러기도 흘리고 말썽꾸러기들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아이들이 귀찮은 존재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의 좋은 점을 보시고 기꺼이 영접하셨습니다. 끊임없이 알려하고 관심 갖고 배우려하고 실천하는 점들... 천국이 이런 아이들과 같은 자의 것이라고 말씀 하시면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이들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면 당연 어린이를 안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짧게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다녀오면서 아이 예수가 무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부모가 다시 돌아가 사흘이 지나 성전에서 아이 예수를 만났는데 거기서 주님은 선생들 중에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는데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천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알려고 배우려는 자의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천국 비밀이 열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0~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여기서 천국의 비밀이 너희에게 허락되었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그 앞에 말씀을 보면 비유의 말씀을 듣고 많은 무리가 떠난 뒤에 그 뜻을 알려고 남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고통 눈물이 없고 밤과 낮이 없는 너무나 좋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전하고자 하심 이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알기 쉽게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 해 주셨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도 알려주시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감추인 보화의 비유,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의 비유 등... 심혈을 기울려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심은 알려고 하는 자 배우려는 자에게는 열어주시고, 그런 마음이 없는 자에게는 닫아서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알려고 배우려는 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열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우려는 마음을 갖고 들을 귀 있는 자들이 복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리고, 천국의 비밀뿐 이겠습니까?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들이나 삶의 지혜 등 모든 값진 것들이 사실은 다 겉으로는 닫혀 있습니다. 배우는 마음 없이 그냥 쓱 지나치면 모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읽어도 사도행전 뵈레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기도하며 상고 하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깊은 의미를 알기 쉽지 않습니다(행전 17:11). 묵상을 해야 합니다.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세요. 도저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어떤 책도 한권을 쓰기까지는 그 사람의 인생의 오랜 경륜과 배움의 과정 속에서 깨달음을 기록한 것인데 그냥 쓱 읽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겨야만 깨달을 수 있는 지식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깊은 의미의 뜻을 깨닫는데 공통점은 겸손히 알려하고 배우려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세상에 모든 지식도 그렇게 알려고 하는 자들에게 열려지는 것입니다.
저도 날마다 글을 묵상하고, 심혈을 기울려 쓰고 올립니다. 하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다 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바빠서 못 읽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 복잡해서 글 읽을 여유가 없고, 어떤 사람은 한꺼번에 몰아서 대여섯 편을 읽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매일의 양식처럼 사모하면서 읽고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깨닫게 되겠습니까? 지금 광주 ubf의 후배 나안드레 목자는 한번 씩 카톡으로 답을 줍니다. “매일 감동적인 좋은 글, 어디서도 읽을 수 없는 위로와 마음의 양식이 되는 글 감사 합니다.” 이게 저한테는 정답이고 은혜가 됩니다. 한 두명이라도 깊은 의미를 깨닫고 감동을 받고 그렇게 살려고 한다면 그것이 기쁨이고 보람이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어도 그냥 돌아가는 이들과 달리 그 뜻을 알려고 남은 소수의 무리를 인해서 기뻐하고 천국 비밀을 알려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도 글을 쓰지만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 서서는 절대 안 됩니다. 어떤 글 이던 서로 배우는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배우려하고 실천하려고 마음을 우리는 늘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해서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게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가르치려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잘 모르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그렇게 남을 정죄하면서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 가르치려 했습니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주님 앞에 무릎을 끓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모를리도 없고 배척할 이도 없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알려고 해야 하는데 대게는 반대로 사람들이 가르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율 배반적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울위위에 있다고 세상을 가르치려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배워야 합니다. 가끔 제 카스토리에 들어와서 가르치는 전주에 어떤 집사님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문맥도 안 맞는 글을 길게 써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사실 길 하면서 저를 가르칩니다. 글 내용을 읽어보고 문제점이 있으면 거기에 대해서 배운 점, 그리고 자신의 다른 생각을 표현할 수 도 있는 것인데...본문의 내용과는 아무관계 없이 다른 자기 생각의 연설을 늘어놓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내가 먼저 배우는 자가 되라고 몇 번이나 충고를 했음에도 고쳐지지 않고 그제 밤에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란 글 밑에 또 길게 또 설교를 하였길래 이번에는 지워버리고, 차단을 시켰습니다.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목사인 저를 가르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배우려하면 너도 당연 안 배우겠습니까? 하나라도 배우려하고, 어린아이에게서라도 배우려는 겸손이 있으면 저절로 배우게 되고 그런 사람 누구던지 존경심이 생기게 됩니다. <논어 ><태백> 제 5장에 보면 증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능하면서도 유능하지 못한 이에게 묻고, 있어도 없는 것 처럼하고, 가득 찼어도 빈 것 처럼하고, 다른 사람이 덤벼도 따지지 않았다. 전에 내 친구가 이런 일에 종사한 적이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 되씹어보면...얼마나 겸손하고, 얼마나 배우려하고 또 온유 한 마음가짐 입니까?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여기서 친구를 공자의 제자 안연으로 해석했습니다. 실제 이런 모습을 보일 제자는 안연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안연은 공자의 수제자로서 30세는 연하였지만 공자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알고 있었으며, 공자가 자신의 도를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수제자로 손꼽은 인물 이라고 합니다. 안연이 먼저 죽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하며 애통했다고 합니다. 선생된 공자의 입장에서 이런 안연이란 제자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우리는 배우는 자의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첫째 ‘유능하면서도 유능하지 못한 이에게 묻고’ 대게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물을 때 누구에게 묻습니까? 무능한 자가 자기보다 더 훌륭한 선생 전문가에게 묻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유능한 자는 자기도 유능한 자 이면서 자기보다 못한 자에게 묻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겸손한 마음입니까? 그러면 상대방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니 제가 뭘 압니까? 저에게?” 그러나 속으로는 ‘저 분은 정말 겸손하신 분이네 정말 배워야할 분이야.’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배우는 것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책 읽는 것을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 말 안하고 엄마 아빠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다. 배우게 되면 자신도 배우지만 상대방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있어도 없는 것처럼 하고, 가득 찼어도 빈 것처 럼하고,,. 언제나 겸손히 부족함을 느끼며... 늘 부족하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배우는 자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루었어도 이루었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곧 성경말씀에 비하면 심령이 가난 자입니다. 주님은 천국이 이런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 하십니다. 셋째 다른 사람이 덤벼도 따지지 않았다... 제가 좀 그랬습니다. 누가 무엇인가 오해를 하고, 시비를 거는 듯 무례한듯하면 못 참고 따졌습니다. 그런데 안연은 누가 무례히 덤벼도 따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일보다 먼저 너그러이 품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덤볐다는 것은 무려하다는 것 아닙니까? 도의도 없고... 한번은 후배 신학교수 목사가 내 글에 답을 달면서 겸손히 은혜 받고 배웠다는 것보다는 맞춤법 틀린 것만 모며 계속 시비를 하는 겁니다. 화가 나서 나도 안다고 여기서 무슨 맞춤법 이야기냐 책출판도 아니고.. 그렇게 하려면 답글 달지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똑같은 사람이 된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고 잘 알겠습니다. 하고 너그러히 품어야 하는데 못한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배워야할 점입니다. 우리가 배우려하면 공자님 말씀을 통해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지 모릅니다. 시실은 배움은 다 주님의 말씀과 연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가 항상 책을 끼고 삽니다. 왜 책을 읽습니까? 배움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편협하게 치우칠 사간이 없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게 되고, 특히 책을 쓸 정도라면 보통은 넘은 사람들입니다. 배울 것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철학자도 있고, 철학자 중에는 유신론자 무신론자도 있습니다. 교육자도 있고, 사상가, 문인의 책도 있고, 예술가의 책도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서울대 병원 간호사 30살 임원히씨의 몰입 독서라는 책을 사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 겨우 30을 산 아이의 책을 통해서 60을 산 내가 무엇을 배울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사진을 보니 딸 엘리를 닮았고 간호사라는 공통점이 있어 샀는데 60대가 30대에게 배울 것이 있었습니다.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스런 삶을 이겨내기 위해서 10분 몰입 독서를 해서 성공한 삶의 이야기가 어떤 독서책보다도 감동이 되었고, 배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로인해서 딸 엘리도 그 책을 읽었고, 박중용 목사님, 김효주 선고사님, 김지홍, 김재중 집사님도 읽게 되었습니다. 그 후 독서의 필요성을 눈을 뜨고 책이 읽어진다는 분들이 여럿 생기게 되었습니다. 요즘 김재중 집사님도 독서에 푹 빠졌습니다. 아주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평생 주님과 천국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가르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배우는 자가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움은 의무가 아닙니다. 자기를 성숙시키는 기쁨이고 알아감의 행복이고,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축복입니다. 공자가 배움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는 몇가지 교훈을 알려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학이시습’: 배우고 때대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느가! 공자는 가르침이 기쁨 이라 하지 않고 배움이 기쁨이라 하였습니다. 배우고 익히는 사람은 삶이 언제나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행이던 등산이던 책을 꼭 갖고 다녀보세요. 기븜 행복이 배가 됩니다. 오징어 땅콩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삼인행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三人行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고, 그 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배우려하는 자에게는 셋이 길을 걸어도 언제나 스승이 있다는 것, 배우려는 마음만 있으면 어디던 선생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목회를 해야하는 디모데에게 먼저 가르침보다 배움의 자세를 갖도록 권면하였습니다. (14)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늘 겸손히 알려하고 배우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선생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가르치는 것은 선생으로서 배우는 모습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렇게 배우고 알려하는 어린아이 같은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입니다. 성경도 많이 읽고 책도 많이 읽고 배우는 기쁨을 누리는 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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