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참석한 우리 감찰 단합대회였으면 좋았을 텐데, 네 개 교회 여덟 명만이 함께 해서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즐겁고 따뜻하게 보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나들이엔 꼭 많은 숫자가 좋은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특히 대심방을 하루 미루면서까지 우리의 단합대회를 풍요롭게 만들어 준 익산 새롬교회 이진상 목사 부부, 그리고 바쁜 시간임에도 안내를 맡아 준 군산교회 신동원 목사 부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동역자들의 귀한 섬김이었습니다.
또 왜소한 규모를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감찰이지만 두 교회 네 사람까지 손수 보내 주셨습니다. 풍성한교회 이주형 목사 부부와 양평교회 오상진 목사 부부가 그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덟 개 교회 목회자 부부, 총 16명이 함께 움직인 것이 됩니다.
김천서부교회에서 오전 8시 40분 출발, 11시 익산 새롬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새롬교회 여러분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교회 내 카페에 다과가 차려져 있었고, 거기서 한 시간 여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점심은 이진상 목사가 쏘았습니다.
익산 근교, 군산 가는 길목 한적한 곳에 산정호수가든이 우리가 한 끼를 의탁할 음식점이었습니다. 호수가 있었고, 거기에는 어른 팔뚝보다도 큰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습니다. 호숫가에 달려 있는 종을 치니 물고기들이 몰려왔습니다.
점심 식사는 그곳 전문 메뉴인 메기 매운탕. 점심 때여서 이기도 했겠지만 놓여 있는 많은 상이 손님들로 꽉 찼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우리는 바쁘게 수저를 움직였습니다. 메기 매운탕도 맛이 훌륭했지만 딸려 나온 반찬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군산시 내흥동에 자리잡고 있는 채만식문학관. 군산을 생각할 때마다 품격 높은 문화 도시 이미지가 연상됩니다. 높은 빌딩의 숲 마천루와 초고층 아파트 군(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도회지 흐름을 마다하고 나지막한 20세기 초중반 건물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서 이상하게 사람 냄새를 느끼게 됩니다.
<레디메이드 인생> 그리고 <탁류>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 채만식의 아호가 백릉(白菱)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 동네와 떨어져 산 지가 오래 되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문학관 관리 팀장이 나와서 우리 일행에게 채만식에 대해 열정적으로 해설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목회자인 줄 안 뒤부터 정성의 도가 더 진해졌습니다.
군산은 일제 때 흥한 도시였지만 그것에 비례해 항일 의식도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발전의 이면에 수탈과 착취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뜻이 되겠지요.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되면서 3.1운동의 깃발이 올려진 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군산에서는 나흘 뒤인 3월 5일에 기독교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한강 이남에서의 첫 만세운동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운동의 발상지 구암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구암교회는 새 건물을 크게 지었고, 옛 예배당은 군산 3.1운동기념관으로 꾸며놓고 있었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당시 사진, 재판 기록과 당시의 상황을 알려 주는 자료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신동원 목사는 쉬운 설명으로 우리의 이해를 도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다음으로 둘러 볼 곳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라고 부르지만 군산 지역의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근대의 분량이 좀 많다는 것이지요. 일행 중 관람하지 않은 일곱 명만 입장했습니다. 나머지는 근처 커피전문점에 가서 또 다른 대화의 장을 펼쳤습니다.
역사기행은 공부의 영역에 속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진부하고 하품 나오게 하는 시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확 트인 공간을 맘껏 달리며 기분을 전환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신시도, 무녀도 등의 도서를 거쳐 부안까지 연결되는 새만금 방조제를 추천했습니다. 갯벌 보존 문제와 환경 파괴 문제 등 논란이 있었지만 바다를 메워 육지로 만드는 사업과 함께 세계 최장의 방조제라고 했습니다.
그 방조제를 가는 중간에 기독교 관련 장소를 찾았습니다. 군산시 내초동에 위치해 있는 아펜젤러기념교회가 바로 그곳입니다.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선교 사역을 감당해 냈습니다. 여러 각도에서 아펜젤러를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의 문서 선교 사역을 크게 봅니다.
복음 전파 방법으로서의 문서 선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초창기 성경 번역과 각종 한글 문서 발간은 한민족의 문맹을 쫓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1902년 목포에서 있을 성경 번역을 위한 회의 참석 차 배를 타고 가다가 군산 앞 바다에서 일본 상선과 부딪혀 침몰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감리교에서 그의 순교 유지를 받들어 이곳에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전시실에는 아펜젤러와 관련 있는 자료와 그가 쓰다 남긴 유물 등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담임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이렇게 열매 맺게 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펜젤러의 유족을 비롯하여 전 성도의 눈물겨운 협조가 따랐다고 합니다.
새만금 방조제 위를 시원하게 달렸습니다. 차로 한참을 달렸습니다. 신시도가 보이고 근처에 무녀도도 있었습니다. 섬들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이곳의 섬은 삼위일체의 총합물입니다. 흙과 나무와 물이 조화를 이루니 사람의 마음을 온통 빼앗기게 되더군요. 영화원(중국음식점)에 예약이 되어 있어 급히 돌아와야 했습니다.
물짜장으로 유명한 곳, 전 이번엔 짬뽕을 주문했습니다. 먼저 탕수육이 나왔고, 차례대로 물짜장과 짬뽕이 나왔습니다. 역시 다르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왔습니다. 군산에 오면 꼭 들려야 한다는 음식점, 작년에 왔을 적엔 점심시간과 맞물려 30 여 분을 기다려야 했었지요.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하고 100년 전통의 빵집 미성당으로 갔습니다. 미리 빵을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가지런히 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동원 목사가 마지막 코스로 빙수를 대접했습니다. 배를 가득 채운 가운데 떠먹는 빙수였지만 그 맛이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미성당은 우리게 헤어져야 할 아쉬움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 김천감찰의 단합대회는 여기서 막을 내려야 했습니다. 모두가 바쁜 하루였는데 이렇게 시간을 빼어 의기투합하니 그 즐거움이 적지 않더군요. 밤길을 헤쳐 김천에 들어 오니 밤 10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든 하루였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절로 솟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