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주례를 많이 했느냐 장례집례를 많이 했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목회자들은 행복과 불행을 따지는 경우가 있다.
결혼주례가 더 많으면 행복한 것이고 장례 집례가 더 많으면 불행한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이야기들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나는 이런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목회는 장례집례를 통해 많은 영혼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왔기 때문인데 지금부터 소개하는 장례 집례의 기억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에 공감이 일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리 큰 교회가 아닌 소규모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연고로 결혼식 주례도 많이 못했지만
장례집례는 이상하리만큼 기회가 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동료 목회자들에게 나는 행복한 목사라고
한 때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처음으로 장례를 집례해 본 것은 목회를 시작한지 10년쯤 지난 1989년 가을이었던것으로 기억되는데
송곡교회에 부임하던 첫 해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장례는 밀례장례라고 부르는 이장(移葬)이었는데
최용수권사님이 자신의 할아버지의 묘를 옮겨야겠다고 부탁을 해 와 산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시신을 수습하는데
십 수년이 지난 시신이어서 그런지 초라한 뼈만 남은 모습이었고 창호지를 깔고 유골을 하나 하나 수습해서는
다른 장소로 옮겨 매장을 해 드리는 방법이었는데 마침 최권사님이 [모가중기]라는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자신의 굴착기로
쉽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두번째 장례식은 참 안타까운 장례였는데 이 장례는 집례였다기 보다는 도움이었다고나 해야 할 일이었지만
송곡교회에서 시무할 당시 박종숙집사님이라고 하는, 교인 중 제일 가난한 집사님 남편의 장례였다.
이 가정의 이야기를 하자면 참 안타깝기만 한데 앞이 잘 안보이는 권씨 성을 가진 남편이 있었고 중증 폐결핵 환자인
내 또래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너무 증세가 심해 마산 결핵요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던 중 사망을 했고
그로부터 나흘 후에 남편이 사망을 했는데, 추운 겨울날 방에서도 아니고 문도 없는 부엌에 있는 짚더미 속에서 운명을 한 것이다.
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내와 교우 한 사람과 함께 가서 시신을 안고 안방에 옮겨 놓았고 얼어버린 시신을
더운 물로 녹이면서 펴고 닦아 드렸는데 어찌나 마른 체구에다 더러웠는지 수건을 몇번씩 빨아가며 닦았고 수의가 당도하기 전
내가 입으려고 준비해 놓았던 동내의를 집에서 가져다가 우선 입혀 드리고 수세 거둠을 해 드리고 났더니
그제서야 동네에서 권씨 집안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오더니 장례 일정에 대해 의논을 했는데 일반장으로 치르겠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나는 동의해 줄 수 밖에 없었는데 소천하신 날이 금요일이어서 주일에 장례를 모셔야 하는데
나는 주일에는 장례를 치르지 않는 목회방침을 갖고 있었고 고인의 부인인 박집사님은 정신이 모자라는 분이고
아무 일 처리 능력이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동네에서 집안 사람들이 하겠다는데 양보할 수 밖에....
하지만 박종숙집사님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평소 친분 관계를 유지하던 모가면 이종혁면장님을 찾아 만났고
아들이 부채를 걸머지고 사망했으니 탕감하는걸로 수습을 하고 난 뒤에 나는 춘천 안보리에 새로 개원한 광림교회
사랑의 집에 박집사님을 소개해서 생활하실 수 있게 해 드렸는데 그때가 마침 사할린동포 70명을 영주귀국시켜
사랑의 집에서 수용해 돌보아 드림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던 때라 뉴스에 그들의 생활모습이 방영될 때
행복해 하는 박종숙집사님의 모습도 비쳐졌고 그 일로 인해 나는 동네에서 아주 좋은 소문이 나기 시작했는데 가장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 주는 목사라는 좋은 이미지가 반영되어 동네 어르신들이 나를 무척 좋은 눈빛으로 보아 주시고
노인들 몇 분이 그 일로 인해 교회에 등록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