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허자(子虛子)는 숨어 살면서 독서한 지 30년에 천지의 조화와 성명(性命)의 은미(隱微)함을 궁구하고
오행(五行)의 근원과
삼교(三敎)의 진리를 달통하여 인도(人道)를 경위(經緯)로 하고 물리(物理)를 깨달아 통했다. 심오한 원위(源委)를 환히 안 다음에 세상에 나가 남에게 이야기했더니, 듣는 자마다 웃었다.
허자가 말하기를,
“작은 지혜와 더불어 큰 것을 이야기할 수 없고 비루한 세속 사람과 더불어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하고, 서쪽으로 연도(燕都 북경)에 들어가 선비와 더불어 이것저것 이야기할 때 여관에서 60일 동안이나 있었으나 마침내 알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에 허자가 슬피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주공(周公)이 쇠했는가? 철인(哲人)이 죽었는가? 우리 도(道)가 글렀는가?”
하고, 행장을 차려 돌아왔다.
이에 의무려산(毉巫閭山)에 올라 남쪽으로 창해(滄海)와 북쪽으로 대막(大漠)을 바라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노담(老聃)은 ‘호(胡)로 들어간다.’고 했고, 중니(仲尼)는 ‘바다에 뜨고 싶다.’고 했으니, 어찌 알건가, 어찌 알건가.”
하고는 드디어 세상을 도피할 뜻을 두었다.
수십 리쯤 가니 앞에 돌문[石門]이 나왔는데 실거지문(實居之門)이라고 씌어 있다. 허자가 말하기를,
“의무려산이 중국과 조선의 접경에 있으니, 동북 사이에 이름난 산이다. 반드시 숨은 선비가 있을 것이니, 내가 반드시 가서 물어 보리라.”
하였다. 드디어 석문으로 들어가니 한 거인(巨人)이 새집처럼 만든 증소(橧巢) 위에 홀로 앉았는데, 모습이 괴이하였으며 나무를 쪼개서 글씨쓰기를 실옹지거(實翁之居)라 하였다.
허자는 혼잣말로,
“내가 허(虛)자로써 호(號)를 한 까닭은 장차 천하의 실(實)을 살펴보고 싶어 한 것이며, 저가 실(實)자로써 호한 것은 장차 천하의 허(虛)를 타파시키고자 함일 것이다. 허는 허대로 실은 실대로 하는 것이 묘도(妙道)의 진리리니, 내 장차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리라.”
하고, 엉금엉금 기어 앞으로 나아가 우러러 절한 다음, 공수(拱手 존경의 표시로 팔짱을 낌)하고 그의 오른쪽에 섰다. 거인(巨人)은 고개를 떨구고 멍하게 있는 채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허자가 손을 들고 말하기를,
“군자(君子)로서 사람을 대하는데 진실로 이와 같이 거만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거인이 말하기를,
“네가 이 동해(東海)에 있는 허자인가?”
허자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부자(夫子)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술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거인은 무릎에 기대서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과연 허자로구나. 내가 무슨 술법을 가졌단 말이냐? 너의 옷차림을 보고 너의 음성을 들으니 동해라는 것을 알겠고, 너의 예법을 보니, 겸양을 꾸며서 거짓 공손함을 삼고 오로지 허로써 사람을 대한다. 이로써 네가 허자라는 것을 알았지, 내가 무슨 술법이 있겠느냐?”
하였다. 허자가 말하기를,
“공손이란 덕의 바탕입니다. 공손함엔 어진 이를 높이는 것보다 더 큼이 없으니, 조금 전에 내가 부자를 보고 현자(賢者)로 여겼기 때문에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 앞으로 나아가 우러러 절했으며, 팔짱을 끼고 오른쪽에 섰던 것인데, 이제 부자께서는 겸손을 꾸며서 거짓 공손한다 함은 무엇입니까?”
하니, 거인이 말하기를,
“이리 오라. 내 너에게 시험삼아 물어 보겠다.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현자라는 것을 알 뿐이지 부자가 누구인 줄 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렇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는 내가 누구인 줄을 알지 못하는데 내가 현자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내가 부자를 보니, 얼굴은 토목(土木)같고 음성은 생용(笙鏞)같으며 세상을 피해 외로이 서서 뇌정(雷霆)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이로써 부자가 현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하구나 너의 허(虛)여! 너는 저 석문(石門)에 적힌 것과 작목(斫木)에 쓰인 것을 보지 않았느냐? 네가 석문으로부터 들어왔고 작목에 쓰인 글자를 보았으니, 나의 이름은 이미 알았을 터이거늘 도리어 모른다 하고, 나의 어짐을 알지 못하거늘 도리어 안다고 하니 너의 허가 너무도 심하다.”
또한 너에게 백성들의 세 가지 미혹됨을 말하겠다. 식색(食色 식욕과 색욕)의 미혹은 가정을 망치고, 이권(利權)의 미혹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며, 도술(道術)의 미혹은 천하를 어지럽힌다. 너는 도술에 미혹됨이 있지 않느냐? 또한 너는 너무 지나치다. 이름[名]이란 덕(德)의 병부(兵符 반으로 가른 대[竹]. 여기서는 반쪽은 덕, 반쪽은 이름에 비유)요, 호(號)란 덕의 겉이다. 내가 실옹(實翁)이라는 것을 네가 알았다면 내가 실자(實者)라는 것을 알면 그뿐이지 도리어 나를 현자(賢者)라 함은 무엇이냐? 너는 나의 얼굴을 보고 토목(土木)에 비기었고 나의 음성을 듣고 생용(笙鏞)에 비기었으며 또 내가 산중에 살고 있다는 것으로써 세상을 도망하여 외로이 서고, 뇌정(雷霆)도 두려워하지 않는 데에 비기었으니, 이것은 사물을 접촉함에 따라 생각이 싹트고 환경에 따라 말하는 것으로 아첨이 아니면 허망이다.
대저 사람의 부드러운 육체는 저 억센 흙덩이와 나무에 비교하여 동떨어지게 멀고, 목구멍과 폐에서 나오는 약한 기(氣)를 저 단단한 금과 대나무에 비교한다면 역시 동떨어지게 먼 것이다. 또한 세상을 피해 외로이 섰던 자는 공자요 뇌정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는 우순(虞舜)이었다. 네가 과연 나를 공자로 여기고 또 나를 우순으로 생각하느냐?
나의 배움[學]이 공자와 같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으며 나의 착함[聖]이 우순과 같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느냐? 너는 나에게 얻은 바가 없는데도 갑작스럽게 비교해서 말하는것을 보니, 이것은 아첨이 아니면 허망[妄]이다 또 내가 너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은 네가 이른바 현자란 어떤 자이냐?”
허자가 말하기를,
“주공(周公)과 공자의 업(業)을 높이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말을 익혀서 정학(正學)을 붙들고 사설(邪說)을 물리치며, 인(仁)으로 세상을 구제하고 명철함으로써 몸을 보전하는 이러한 자가 유문(儒門)에서 말하는 현자입니다.”
하니, 실옹이 고개를 치켜들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도술(道術)에 미혹됨이 있음을 진실로 알겠다.
아아! 슬프다. 도술이 없어진 지 오래다. 공자가 죽은 후에 제자(諸子)들이 어지럽혔고, 주자(朱子)의 문하에 모든 유학자(儒學者)가 혼란시켰다. 그의 업적은 높이면서 그의 진리는 잊고 그의 말을 익히면서 그의 본의는 잃어버렸다. 정학을 붙드는 것은 실상 자랑하려는 마음에서 말미암고 사설을 물리치는 것도 실상 이기려는 마음에서 말미암았으며, 인(仁)으로 세상 구제하는 것은 실상 권력을 유지하려는 마음에서 말미암고 명철함으로 몸을 보전하는 것은 실상 이익을 노려보자는 마음에서 말미암았다. 이 네 가지 마음이 서로 따르매, 참뜻은 날로 없어지고 온 천하는 물흐르듯이 날로 허망에로 치닫도다.
지금 너는 겸손함을 꾸며서 거짓 공손으로 스스로를 현(賢)이라 여기며, 얼굴만 보고 음성만 듣고서 남도 현(賢)을 만드는구나. 마음이 헛되면 몸가짐이 헛되고 몸가짐이 헛되게 되면 모든 일이 헛되게 된다. 자신에게 헛되면 남에게도 헛되고 남에게 헛되면 온 천하가 모두 헛되게 된다. 도술(道術)의 미혹은 반드시 천하를 어지럽히나니, 네가 그것을 아느냐?”
하였다. 허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말하기를,
“이 허자는 동해의 한 시골 사람입니다. 옛사람의
찌꺼기[糟粕]에 마음을 붙이고 종이 위의 문투만 외면서 속된 학문에 몸을 의지해온 까닭에 작은 것을 보고 도(道)로 여겨 왔는데, 이제 부자의 말을 들으니, 심신이 개운하여 깨달은 바가 있는 듯합니다. 감히 대도(大道)의 요체를 묻나이다.”
하니, 실옹은 오래 동안 눈여겨보다가 이윽고 이르기를,
“너의 얼굴이 이미 쭈그러졌고 머리털이 이미 희어졌으니, 먼저 너의 배운 것부터 들어보자.”
하였다.
허자가 말하기를,
“젊었을 적에 성현의 글과 시례(詩禮)의 공부를 익혔고, 커서는 음양(陰陽)의 변화와 인물(人物)의 이치를 탐구하였습니다. 마음을 기르는 데는 충(忠)과 경(敬)으로써 했고 일을 꾀하는 데는 성실과 재빠름으로써 했으며, 경제(經濟 경국제세)는 주관(周官)에 근본했고 출처(出處 세상에 나오고 물러남)는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을 본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예술(藝術)과 성력(星曆)과 병기(兵器)와 변두(籩豆)와 수률(數律)에 이르기까지 제한하지 않고 널리 배웠으나 육경(六經)을 표준으로 삼고 정ㆍ주(程朱)의 학설에 절충하였습니다. 이것이 허자가 배운 것입니다.”
실옹이 말하기를,
“너의 말과 같다면 유자(儒者)의 학문에 강령(綱領)이 모두 갖춰진 것인데, 네 또 무엇이 부족해서 나에게 묻느냐? 나를 말로써 궁하게 할 작정인가? 또는 학문으로써 겨룰 셈인가? 아니면 나의 법칙을 시험하려는 것이냐?”
허자가 일어나서 절하고 말하기를,
“부자는 이 무슨 말씀이오. 나는 자질구레한 데 국한되어 큰 도(道)를 듣지 못했기에 우물 안에 개구리가 하늘 엿보듯 종작없이 잘난 체했고, 여름벌레가 얼음을 이야기하듯이 무식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부자를 뵙고 마음이 환히 트이고 이목이 쾌청하여져서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하는 바이온데, 부자께서는 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너는 유자(儒者)로구나. 쇄소(灑掃 실천적인 초학 곧 소학 따위)의 학부터 배운 다음에 성명(性命 인성과 천명을 다루는 학문. 곧 형이상학)의 학을 하는 것이 배움의 차례다. 이제 나는 너에게 대도(大道)를 말하기에 앞서 본원(本源)부터 일러 주리라. 사람이 다른 물(物)과 다른 것은 마음이요, 마음이 다른 물(物)과 다른 것은 몸이다. 지금 내가 너에게 묻겠다. 너의 몸이 물(物)과 다른 점을 꼭 이야기하라.”
“그 바탕을 말하오면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발이 모난 것은 땅을, 살과 머리털은 산과 숲을, 피는 하수(河水)나 바다를, 양쪽 눈은 해와 달을, 숨쉬는 것은 바람과 구름을 각각 상징한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의 몸을 일러 소천지(小天地)라 합니다.
그 태어남을 말하오면 아비의 정자(精子)와 어미의 혈액이 교감하여 태(胎)를 이루고 달이 차면 나옵니다. 나이가 더해짐에 따라 지혜가 진보하고 일곱 구멍이 모두 밝아지며 다섯 성품이 함께 갖추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곧 사람의 몸이 다른 물과 다른 점이 아닙니까?”
“아! 너의 말과 같다면 사람이 물과 다른 점이란 거의 없나니, 대저 털과 살로 된 체질과 정액의 교감은 초목(식물)이나 사람이 같거늘, 하물며 금수(동물)이겠는가?
내가 너에게 묻겠다. 생물의 종류는 셋이 있으니, 사람ㆍ금수(동물)ㆍ초목(식물)이 그것이다. 초목은 거꾸로 나는 까닭에 지(知)는 있어도 각(覺)이 없으며, 금수는 가로 나는 까닭에 각은 있어도 지가 없다. 이 삼생(三生)의 종류는 한없이 혼란을 일으키는 바, 서로 망하게 또는 흥하게 하는데, 귀천의 등급이 있는가?”
“천지간 생물 중에 오직 사람이 귀합니다. 저 금수나 초목은 지혜도 깨달음도 없으며, 예법도 의리도 없습니다. 사람이 금수보다 귀하고 초목이 금수보다 천한 것입니다.”
실옹은 고개를 젖히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너는 진실로 사람이로군. 오륜(五倫)과
오사(五事)는 사람의 예의(禮義)이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서로 불러 먹이는 것은 금수의 예의이며, 떨기로 나서 무성한 것은 초목의 예의이다. 사람으로써 물(物)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로써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이 보면 사람이나 물이 마찬가지다.
대저 지혜가 없는 까닭에 거짓이 없고 깨달음이 없는 까닭에 하는 짓도 없다. 그렇다면 물이 사람보다 훨씬 귀하다. 또 봉황(鳳凰)은 높이 천 길을 날고 용(龍)은 날아서 하늘에 있으며, 시초(蓍草)와 울금초(鬱金草)는 신을 통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는 재목으로 쓰인다. 사람의 유와 견주어 어느 것이 귀하고 어느 것이 천하냐?
대개 대도(大道)를 해치는 것으론 자랑하는 마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물을 천하게 여김은 자랑하는 마음의 근본이다.”
“봉황이 날고 용이 난다 하지만 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초와 울금초와 소나무와 잣나무는 초목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 그들은 백성에게 혜택을 입힐 인(仁)이 없고, 세상을 다스릴 지(知)가 없으며, 복식(服飾)ㆍ의장(儀章)의 제도와 예악(禮樂)ㆍ병형(兵刑)의 정사도 없거늘, 어찌하여 사람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까?”
“너의 미혹이 너무도 심하구나. 물고기를 놀라게 하지 않음은 백성을 위한 용의 혜택이며, 참새를 겁나게 하지 않음은 봉황의 세상 다스림이다. 다섯 가지 채색 구름은 용의 의장이요, 온몸에 두루한 문채는 봉황의 복식이며, 바람과 우레가 떨치는 것은 용의 병형(兵刑)이고, 높은 언덕에서 화한 울음을 우는 것은 봉황의 예악(禮樂)이다. 시초와 울금초는 종묘제사[廟社]에서 귀하게 쓰이며, 소나무와 잣나무는 량(棟樑)의 귀중한 재목이다.
이러므로 옛사람이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고 세상을 다스림에는 물(物)에 도움받지 않음이 없었다. 대체로 군신(君臣)간의 의리는 벌[蜂]에게서, 병진(兵陣)의 법은 개미[蟻]에게서, 예절(禮節)의 제도는 박쥐[拱鼠]에게서, 그물 치는 법은 거미[蜘跦]에게서 각각 취해 온 것이다. 까닭에 ‘성인(聖人)은 만물(萬物)을 스승으로 삼는다.’ 하였다. 그런데 너는 어찌해서 하늘의 입장에서 물을 보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입장에서 물을 보느냐?”
허자가 크게 깨닫고 두려운 모습으로 다시 절하고 다가서서 말하기를,
“사람과 물이 등분이 없다는 것은 삼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람과 물의 생긴 근본을 감히 묻나이다.”
하니, 실옹이 말하기를,
“좋은 물음이다. 그렇지만 사람과 물이 생긴 것은 천지에 근본했으니, 내가 천지의 실정부터 이야기하리라.
태허(太虛)는 본디 고요하고 비었으며, 가득히 차 있는 것은 기(氣)다.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데, 쌓인 기가 일렁거리고 엉켜 모여서 형체를 이루며 허공(虛空)에 두루 퍼져서 돌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나니 곧 땅과 달과 해와 별이 이것이다.
대저 땅이란 그 바탕이 물과 흙이며, 그 모양은 둥근데 공계(空界)에 떠서 쉬지 않고 돈다. 온갖 물(物)은 그 겉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다.”
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 하였는데, 지금 부자는 ‘땅의 체(體)가 둥글다.’ 함은 무엇입니까?”
“심하다. 너의 둔함이여! 온갖 물의 형체가 다 둥글고 모난 것이 없는데 하물며 땅이랴!
달이 해를 가리울 때는 일식(日蝕)이 되는데 가리워진 체(體)가 반드시 둥근 것은 달의 체가 둥근 때문이며, 땅이 해를 가리울 때 월식(月蝕)이 되는데 가리워진 체가 또한 둥근 것은 땅의 체가 둥글기 때문이다. 그러니 월식은 땅이 거울이다. 월식을 보고도 땅이 둥근 줄을 모른다면 이것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추면서 그 얼굴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어리석지 않느냐?
옛날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난다.’ 하였으나, 이것은 사각(四角)을 서로 가리워낼 수 없는 것인데 그 말만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었다.
대개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난다는 것을 어떤 자는 천지의 덕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또 너도 옛사람이 전해 기록한 말을 믿는 것이 어찌 직접 목도하여 실증하기만 하겠느냐?
진실로 땅이 둥글다면 사우(四隅)ㆍ팔각(八角)ㆍ육면(六面)이 모두 평면이고 변두리는 낭떨어지로 되어 마치 담이나 벽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가?”
“그렇게 봅니다.”
“그렇다면 하해(河海)의 물과 인물(人物)의 유가 한 면(面)에만 모여 살고 있는가. 아니면 육면에 퍼져서 있다는 거냐?”
“윗면에만 모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옆면에서 가로 살 수 없고 밑면에서 거꾸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로 살 수 없고 거꾸로 살 수 없다는 것은 밑으로 떨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인이나 물같은 미세한 것도 밑으로 떨어지는데, 어찌해서 무거운 땅덩이는 밑으로 떨어지지 않느냐?”
“기(氣)로써 타고 싣기 때문입니다.”
하니, 실옹은 거칠은 목소리로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도(道)를 논하다가 이치에 딸리면 항복하고, 소인(小人)은 도를 논하다가 말에 꿀리면 꾸며댄다. 물이 배[丹]를 실음에 있어 배가 비면 싣고 꽉 차면 가라앉힌다면 기(氣)는 힘이 없는 것인데, 능히 큰 땅덩이를 실을 수 있느냐?
지금 너는 과거의 들음에 집착하고 이기려는 마음에 젖어 있어 입을 앞세워 남을 막으려고 하니, 도를 얻음에 있어 잘못됨이 아닌가?
소요부(邵堯夫)는 이치에 통달한 선비였다. 그런데 그는 이치를 구하다가 깨닫지 못하고 말하기를 ‘하늘은 땅에 의존하고 땅은 하늘에 의존한다.’고 하였다. 땅이 의존한다는 것은 가하거니와, 하늘이 땅에 의지하다니, 크고 넓은 하늘이 어찌 흙덩이에 의지한단 말이냐?
뿐만 아니라, 땅이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도 스스로 그러한 힘이 있음이지 하늘과는 관계가 없다. 그런데 요부(堯夫)는 이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억지로 장담하여 한 세상을 속였으니, 이는 요부가 그의 스스로를 속인 것이다.”
하자, 허자가 절하고 대답하기를,
“허자가 잘못한 죄를 어찐 감히 모르리까? 그러나 새의 깃이나 짐승의 털처럼 가벼운 것도 모두 밑으로 떨어지는데 무거운 땅덩이가 지금껏 떨어지지 않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실옹은 말하기를,
“옛날의 들음에 집착한 자와 더불어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고, 이길 마음에 버릇된 자와 더불어 언쟁할 수 없다. 도를 들으려거든 너의 옛날의 들음을 씻어버리고 너의 이기려는 마음을 버리라. 마음을 비우고 입을 삼가는데 내 어찌 숨기겠느냐?
대저 크고 넓은
하늘[太虛]은 육합(六合)의 구분도 없는데 어찌 위와 아래가 있겠느냐?
또 대답해 보라. 네 발은 땅에 떨어지는데 네 머리는 하늘에 떨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냐?”
“이것은 위와 아래의 형세가 그렇게 된 때문입니다.”
“그렇다. 내가 또 너에게 묻겠다. 너의 가슴이 남쪽으로 떨어지지 아니하고 너의 등이 북쪽으로 떨어지지 않으며, 너의 왼쪽 어깨도 동쪽으로 떨어지지 아니하고 오른쪽 어깨가 서쪽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허자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는 남쪽ㆍ북쪽과 동쪽ㆍ서쪽엔 그러한 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니, 실옹도 웃고 말하기를,
“총명하다. 더불어 도(道)를 이야기할 만하다. 이제 이 땅과 해와 달과 별의 상하가 없는 것은 또한 너의 몸에 동ㆍ서와 남ㆍ북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이 땅이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데는 누구나 괴이하게 여기면서 해ㆍ달ㆍ별이 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대저 해와 달과 별은 하늘로 올라가도 오르는 것이 아니며 땅으로 내려와도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달리어 항상 머물러 있다. 하늘이 상하가 없는 것은 분명한데도 세상 사람들은 일상 소견에 젖어 있어 그 까닭을 찾아보지 않는다. 진실로 그 까닭을 찾아보면 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저 땅덩이는 하루 동안에 한 바퀴를 도는데, 땅 둘레는 9만 리이고 하루 시간은 12시간이다. 9만 리 넓은 둘레를 12시간에 도니, 번개나 포탄보다도 더 빠른 셈이다. 땅이 이미 빨리 돌매 하늘 기(氣)와 격하게 부딪치며 허공에서 쌓이고 땅에서 모이게 되니, 이리하여 상하의 세력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지면(地面)의 세력이다. 땅에서 멀다면 이런 세력이 없을 것이다. 또는 자석(磁石)은 무쇠를 당기고 호박(琥珀)은 지푸라기를 끌어당기게 되니, 근본이 같은 것끼리 서로 작용함은 물(物)의 이치다.
이러므로 불꽃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해에 근본한 때문이요, 조수(潮水)가 위로 솟는 것은 달에 근본한 때문이며, 온갖 물(物)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땅에 근본한 때문이다.
지금 사람은 지면(地面)의 상하만 보고 망령되이 하늘의 정해진 세력을 짐작하면서 땅 둘레에 모이는 기(氣)는 살피지 않으니, 또한 좁은 소견이 아니냐?
또 모두 이르기를 ‘하해(河海)의 물과 인물(人物)의 유가 한 면(面)에 모여 살게 되고 이ㆍ하(夷夏 오랑캐와 중국)의 수만 리가 먼 데나 가까운 데나 고루 판판한 바,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면 저 태산(泰山)과 거악(巨嶽)과 해외에 있는 나라끼리도 한번 보아 다 알 수 있다.’ 하는데 과연 그런가?”
“일찍이 사람의 눈은 한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치로 보아 혹 그럴지도 모릅니다.”
실옹이 말하기를,
“사람의 눈이란 진실로 한도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바다에서 보면 해와 달이 바다에서 나왔다가 바다로 들어가 보이고, 들에서 바라보면 해와 달이 들에서 나왔다가 들로 들어가 보인다. 하늘은 바다와 맞닿고 들은 막힘이 없으니 ‘눈은 한도가 있다.’는 말은 될 수 없다.
땅 측량은 하늘 측량에 표준하고, 하늘 측량은 남북 양극(兩極)에 근본한다. 하늘 측량하는 방법에 날[經]과 씨[緯]가 있다. 이러므로 선(線)을 드리워 놓고 그 직선(直線)의 도수[度]를 우러러 측량하는 것을 일러 천정(天頂)이라 하고, 극으로부터 떨어진 거리를 측량하는 것을 기하 위도(幾何緯度)라 한다.
지금 중국에서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으로, 북쪽에 악라(鄂羅)가 있고 남쪽에 진랍(眞臘)이 있다. 악라의 천정은 북쪽으로 북극(北極)과의 거리가 20도(度)요, 진랍의 천정은 남쪽으로 남극(南極)과의 거리가 60도(度)가 되며, 두 천정의 상거(相距)는 90도가 되고 두 지역의 상거는 2만 2천 5백 리가 된다. 이러므로, 악라 사람은 악라로써 정계(正界)를 삼고 진랍으로써 횡계(橫界)를 삼으며, 진랍 사람은 진랍으로써 정계를 삼고 악라로써 횡계를 삼는다.
또 중국은 서앙(西洋)에 대히서 경도(經度)의 차이가 1백 80도에 이르는데, 중국 사람은 중국을 정계로 삼고 서양으로써 도계(倒界)를 삼으며, 서양 사람은 서양을 정계로 삼고 중국으로써 도계를 삼는다. 그러나 실에 있어서는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으로서 지역에 따라 다 그러하니, 횡(橫)이나 도(倒)할 것 없이 다 정계다.
세상 사람은 옛 습관에 안착하여, 살피지 않는다. 이치가 눈앞에 있는데도 일찍이 연구하여 찾지 않는 때문에 일평생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건만 그 심정과 현상에 캄캄하다. 오직 서양 어떤 지역은 지혜와 기술이 정밀하고 소상하여 측량에 있어서는 해박하고 자세하다. 땅을 지구(地球)라고 하는 설은 다시 의심할 여지도 없다.”
“지구의 체와 상하의 세력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신대로 믿겠습니다. 감히 묻건대, 땅덩어리의 회전이 그처럼 빠르고, 부딪는 기운도 그처럼 격렬하다면 그 힘이 반드시 맹렬할 터인데, 사람이나 다른 사물이 쓰러지고 넘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실옹이 말하기를,
“온갖 물(物)이 생겨날 때는 모두 기(氣)가 있어, 그것이 휩싸고 있기 때문이다. 체(體)는 크기가 있고 기(氣)는 두께가 있으니, 마치 새알의 노른자의 흰자가 서로 붙어 있는 것과 같다.
땅은 덩어리도 크거니와, 싸고 있는 기운 또한 두껍다. 이것이 엉켜 뭉쳐져 하나의 공 모양을 이루어서 허공에서 돌게 된다. 천지의 두 기(氣)가 같고 비비는 즈음에 서로 빨리 부딪치는 것을 술사(術士)는 측량하여 강풍(罡風)이라 한다. 이 바깥은 크고 넓고 깨끗하고 고요할 뿐이다.
천지의 두 기가 서로 부딪쳐 땅으로 모이는데 마치 강과 하수의 물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소용돌이를 이루듯 한다. 상하의 세력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새가 공중에서 날고 구름은 피어나며 걷혀 물고기와 용은 물에서 놀고 쥐는 땅으로 다니듯, 모여진 기(氣)에서 활동하여 넘어지거나 쓰러질 염려가 없거늘, 하물며 지면에 붙어 있는 인ㆍ물이겠는가?
또 너는 너무도 생각지 못하는구나. 지구가 돌고 하늘이 운행함은 그 형세가 같은 것이다.
만약 쌓여진 기(氣)의 달림이 회오리바람보다 더 사납다면 인ㆍ물의 쓰러지고 넘어짐이 반드시 갑절이나 될 것이다. 개미가 맷돌에 붙어 빨리 돌다가 바람을 만나 쓰러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하늘의 운행은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땅의 회전에만 의심하니, 생각의 못 미침이 심하도다.”
“그러나 서양 사람의 정밀하고 자세함은 이미 ‘하늘은 운행하고 땅은 고요하다.’고 하였고, 중국의 성인(聖人) 공자께서도 또한 ‘하늘의 운행은 굳세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말들은 모두 잘못입니까?”
“좋도다. 너의 물음이여! 백성은 이치대로 말미암도록은 할 수 있어도 이치를 알도록 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군자(君子)는 풍속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고, 지혜로운 자는 알맞음을 좇아 세상에 말을 세울[立言] 뿐이다. 땅은 고요하고 하늘이 운행한다는 말은 사람들의 평범한 견해로 백성의 뜻에 해로울 것 없고 책력(冊曆)을 만들어 반포하는데도 어그러질 것이 없으니, 이로 인해 다스림을 마련하는 것이 또한 가하지 않겠느냐?
송(宋) 나라 장자후(張子厚)가 이 뜻을 조금 발명했으며 서양 사람도 또한 주행안행설(舟行岸行說)로써 추설(推說)하였는데, 매우 분명하다. 그 측후(測候)에 있어서는 오로지 천운(天運)설을 주로 하는 것이 추보(推步)하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하늘이 운행하는 것과 땅이 회전하는 것은 그 형세가 마찬가지며 나누어 말할 필요가 없다. 오직 9만 리를 한 바퀴 도는데 빠르기가 이와 같다. 저 성계(星界)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겨우 반경(半徑) 밖에 되지 않는데도 오히려 몇 천만 억인지도 알 수 없거늘, 더구나 성계 밖에도 또 별들[星辰]이 있음에랴? 공계(空界)도 다함이 없으면 별들도 또한 다함이 없으니, 그 한 바퀴를 말한다 하더라도 먼 거리는 이미 한량이 없다. 하루 동안에 그 도는 빠름을 생각해 본다면 번개나 포탄의 빠름으로도 여기에 견줄 수 없다. 이것은 추수(推數)를 잘하는 자도 능히 계산할 수 없고 말을 잘하는 자도 능히 이야기할 수 없다. 하늘이 운행한다는 설이 이치에 맞지 않음은 여러 말이 필요하지 않다.
또 내가 너에게 묻겠다. 세상 사람들은 천지를 이야기함에 있어 지계(地界)가 공계(空界)의 중심이 되며,
삼광(三光)의 두루 싸인 바가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느냐?”
허자가 말하기를,
“
칠정(七政)하면 단(丹)이 이루어지고 껍질이 벗겨지며, 법신(法身)이 영(靈)으로 변하면 하늘[雲霄]에도 뛰어 오른다.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여러 세계에 노닐면서 깨끗하고 상쾌함을 길이 누릴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으냐?”
“이것은 세속에서 이르는 선인(仙人)의 술법입니다. 소자도 그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감히 믿지는 않았었는데, 과연 이런 술법이 있다면 아내와 자식 버리기를 떨어진 신짝처럼 하겠습니다.”
실옹은 노여워 거친 소리로 말하기를,
“나는 너를 가르칠 만하다고 하였더니, 어리석고 막힌 소견을 열기가 이렇게 어려우며, 이욕에 흐려진 마음을 깨끗이 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이냐? 저 태(胎)로 호흡하는 방법과 단(丹)을 이루는 술법은 실상 그런 이치도 있고 또한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오래면 만 년을 살고, 작게는 천 년을 살 수 있을 뿐, 끝내는 죽음으로 돌아가니, 또한 무슨 이익이 있느냐?
사람이 세상에 나서 소원과 욕심은 한량이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거처, 살결 좋은 여색, 높은 직위와 빛나는 권세, 진귀한 물품과 이상한 구경 따위는 사람마다 모두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중에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 직위가 위태로워질까 염려하고 남이 헐뜯음을 괴롭게 여기며, 혹 갑자기 화나 닥칠까 근심하는데 반드시 그 계획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곧 자신에 반성하여 깨끗이 닦고 욕심을 세속 밖으로 드러내서 천만 년이 지나도록 쾌락하게 살기를 도모한다.
신선으로 된 다음에는 정신과 생각이 고요하고 까마득하여 여러 세계에 두루 노닌다. 칠정(七情)이 길이 없어지면 귀엔 들림이 없는 듯하고 눈은 보임이 없는 듯하나니, 세속의 실정으로 참작한다면 그것은 한가지도 즐거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은 그가 날아다니면서 한 세상 지내는 것을 보고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신선은 용과 바람을 타고 신선 친구를 부르면서 별천지에 노니, 모든 쾌락이 구비할 것이다.’고 하니, 또한 어리석지 않느냐?
대저 신선의 술법은 요점이 무위(無爲)에 있을 뿐이므로, 마음에 아무런 생각이 없이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다. 만약 고운 여색을 탐내는 속된 생각이 한번만 마음속에 싹튼다면 진원(眞元)이 흩어지고 법신(法身)이 하락되는 것이다.
만약 신선을 그리워하는 세속 사람으로 하여금 이 경지에 있게 한다면 그는 반드시 그 고요함과 쓸쓸함를 싫어하고 간솔(簡率)함과 담박(淡泊)함을 괴롭게 여겨 잠간 동안도 있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또 세상엔 혹 남을 속이는 허망한 술법을 가진 자가 있어 신선을 칭탁하고 여기 번뜩 저기 번뜩하는 기괴한 짓으로써 위치와 풍속을 우롱하나니, 어리석은 자의 망령된 생각은 실상 여기에서 연유되는 것이다.
대저 참된 신선은 표표히 세상을 버리고 친척의 은의를 잊으며, 고향의 그리움도 끊어버리거늘 하물며 혼탁한 세상에 냄새나고 더러움은 가까이 할 수도 없는데, 어찌 그 몸을 욕되게 하고 뜻을 굽히고 술법을 자부하고 세상을 놀래게 하며, 자기의 신분을 다 드러내고 스스로의 죄과(罪過)를 짓겠느냐? 세상의 어리석고 혼미함이 너무도 심하구나.
이러므로 신선의 무리는 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진원(眞元)을 보전하지만 만년이나 천년을 지낸 뒤엔 결국 소멸(消滅)로 돌아가 육체도 진원도 다 없어지고, 오램과 빠름의 구별없이 모두 부싯돌의 불이요 물거품과 눈어리[幻]로 되니 실로 상자(殤子)와 마찬가지다.
그 원을 발한 마음을 캐보면 사실은 자기 이익을 위한 마음에서 나왔던 것인데 결과는 이익이 없었으니, 그 생각이 교하였으나 실은 졸렬함이요, 꾀스러웠으나 실상은 어리석음이다. 너는 도(道)를 배우고 싶어 하면서 이러한 원을 두었으니, 또한 잘못이 아니냐?”
하였다. 허자는 깜짝 깨닫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감히 여쭈옵건대, 모든 세계가 다 돌고 또한 능히 다른 세계를 싸고도는데, 유독 이 지구의 세계만이 스스로 돌 뿐, 능히 싸고돌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 세계의 구성을 보면 체(體)엔 가볍고 무거움이 있고 성(性)엔 둔하고 빠름이 있다. 가볍고 빠른 자는 스스로 돌고 또 싸고 돌 수 있으나 무겁고 둔한 자는 스스로는 돌지만 싸고돌지 못한다.
가장 가볍고 빨리 도는 것은 주권(周圈 공전의 궤도)이 가장 넓으니, 오위(五緯)의 따위이고, 가장 무겁고 둔하게 도는 것은 주권이 절면(切面)으로 되었으니, 지구 따위다. 가벼운 세계에서 사는 자는 비어[虛]서 신령하고 무거운 세계에서 살고 있는 자는 차서[實] 둔하다.”
“그렇다면 오위는 오행(五行)의 정기(精氣)요, 항성(恒星)은 온갖 물(物)의 상징인데 아래로 지구 세계에 응해서 화복(禍福)의 경험이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오성(五星)의 체가 각각 그 덕성(德性)을 가졌지만 오행에 나누어 붙인 것은 술가(術家)의 좁은 소견이다.
또 지구로부터 보면 많은 별들이 잇달아 있는 것이 묘수(昴宿 별의 이름)가 다닥다닥 모여 있는 것처럼 끼리끼리 떼를 지어 모여 있다. 그러나 그 실에 있어서는 그 10여 개의 종횡의 거리가 천만 리도 넘는다.
다른 세계로부터 보면 해와 달, 지구 세 점이 꿴 구슬처럼 반짝인다. 이제 이 해ㆍ달ㆍ지구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 삼성(三星)으로 부른다면 되겠느냐?
오직 역상(曆象)은 추산하는 법은 궁도(宮度)에 따라 하는 것인데 별에 명칭이 붙은 것은 역가(曆家)에서 방편으로 전한 것이거늘, 이를 부연하고 억지로 맞추며 속된 것을 곁들여 복술가(卜術家)의 무기로 전변하였으니, 그 지리하고 난잡하고 허망함이 분야(分野)에 극하였다.
이 지구 세계를 태허(太虛)에 비교한다면 미세한 티끌만큼도 안 되며, 저 중국을 지구 세계와 비교한다면 십수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전 지구로써 별의 도수[宿度]에 나누어 붙인다면 혹 할 말이 있으려니와, 한쪽에 있는 구주(九州)로써 여러 별세계에 억지로 배합시켜 나누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여 재앙과 상서를 엿보다니 그 허망하고도 또 허망함을 말할 나위도 없다.”
허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분야라는 말은 전해온 지 이미 오래고 혹 분명한 징험도 있었습니다. 어느 때는 좋은 바람이 불었고 어느 때는 좋은 비가 왔으며, 어느 때는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지켰는데 이러한 천체 현상의 부응(符應)도 모두 믿을 것이 못됩니까?”
“입이 여럿이면 금도 녹이고 비방을 쌓으면 뼈도 녹인다 한다. 입이 금을 녹일 수 없고 비방이 뼈를 녹일 수 없지마는 오히려 녹이게 되는 것은 사람이 여럿이면 하늘도 이기기 때문이리라.
기술이란 비록 허망한 것이나 마음에 느꺼워 몹시 믿고 의지하게 되면 혹 징조의 감응이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허공에 헛 그림자를 잡는 것이다. 헛 그림자에 현혹되어 실제는 살피지 않으니 미혹됨이 심하다. 또 ‘기성(箕星)이 나타나면 바람이 불고 필성(畢星)이 나타나면 비가 온다.’는 말은 세속에 전하는 말을 끌어다가 민정(民情)을 밝힌 것뿐이요, 기성과 필성 두 별이 참으로 이런 것은 아니다.
형혹성이 가다가 때로 싸기도 하고 돌기도 하는데, ‘머물고 지키고, 나아가고 물러선다.’는 말은 지구 세계에서 보는 관점이 그러한 때문이다. ‘하늘이 높아도 낮은 데의 말을 듣는다.’ 함은 역가(曆家)의 잘못이다.”
“달 가운데 명암(明暗)을 일러 물과 흙이라고도 하고 혹은 지구의 그림자라 하는데, 이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내가 사실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만 믿을 터이니, 너의 소견에 따라 너의 실견(實見)을 열어 주는 쪽이 낫겠다.
대개 속설에서 말하는 ‘계수나무와 토끼’라는 것은 달이 동쪽으로 올라올 때 바라보는 형체다. 진실로 그것이 물과 흙이라면 달이 중천에 왔을 때는 그 형체가 반드시 횡으로 비껴질 것이고 달이 서쪽으로 떨어질 때는 그 형체가 반드시 거꾸로 될 것이다. 이제 가는 대로 변하여 가로도 되지 않고 거꾸로도 되지 않은 채 각각의 형태로 이루어지니, 세 번 멈춰지는 형태는 옛부터 한결같은 것이다.
또 초승달이나 그믐달일 때는 그 반절만 나타나야 마땅할 텐데 전체의 모양이 갖춰져 있으며, 다만 쭈그러지고 좁을 뿐이다. 물과 흙이라는 설은 옳은 듯하나 실은 잘못이다.
대개 달의 체는 거울과 같은데 지구의 반면(半面)이 밝음을 따라 그림자를 짓는다. 동쪽으로 올라올 때의 그림자는 지구 동쪽의 반면이고 중천에 있을 때의 그림자는 지구 중간의 반면이며 서쪽으로 떨어질 때의 그림자는 지구 서쪽의 반면이다. 그러니 지구의 그림자라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느냐?”
“감히 여쭙건대 하늘에 두 극(極)이 있다 함은 무엇입니까?”
“지구 세계에 있는 사람은 지구가 도는 줄을 모르는 까닭에 하늘에 두 극이 있다고 하는데 실은 그것이 하늘의 극이 아니라 곧 지구의 극이다.
무릇 물체가 돌고 움직임은 허(虛)하고 실(實)한 데서 기인되는데, 몸 바깥에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대저 하늘이란 그 체는 지극히 허하고 그 성(性)은 지극히 고요하며 그 크기는 한량이 없으며 그 가득함은 틈이 없다. 비록 돌고 움직이려고 한들 되겠느냐?
오직 여러 별세계만은 각각 돌고 움직인다. 세차론(歲次論)은 이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돌고 움직임엔 각각 늦고 빠름이 있고 남북과 동서가 옮겨짐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다만 지구에서 거리가 동떨어지게 멀고 시차(視差)의 각도도 아주 미세한 때문에 도상(圖象)이 시대에 따라 다른 바, 옛을 상고해도 증빙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이다.”
“감히 여쭙건대ㆍ유성ㆍ요성ㆍ혜성ㆍ패성[流妖慧孛]들은 어떠한 기(氣)로 생기는 것입니까?”
“이것은 한가지 때문이 아니라 공계(空界)에서 엉키어 어루어진 것도 있고 각 계의 기(氣)가 서로 마찰되어 이루어진 것도 있으며, 융계(瀜界)의 남은 기가 흘러서 이루어진 것도 있는데, 이 모두가 이유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다.
오직 사람과 지구의 기가 그 화기로움이 극도로 달하여 이루어진 자는 경성(慶星 상서로운 빛)의 유이고 사람과 지구의 기가 그 떳떳함을 잃고 이루어진 자는 혜발(慧孛 재앙이 생길 때 나타난다는 살별)의 유이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남은 망기(芒氣)가 성한 때문입니다. 감히 여쭙건대, 여러 세계의 기도 때로 성하고 쇠함이 있습니까?”
“태백성이 해를 싸는데 그 둘레가 반은 해의 바깥에 있고 반은 해의 안에 있다. 바깥에 있는 것은 지구에서 멀고 안에 있는 것은 지구에서 가깝다. 또 태백성은 광채가 없어 햇빛을 받아 밝게 되며 그믐과 보름이 생기는 것이 달과 같다. 지구에 가까워져서 밝은 빛이 아래에 가득한 것은 빛이 지구보다 성하여 해가 능히 가리울 수 없기 때문이요, 그 자체의 성쇠[衰旺]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일식(日蝕)이란 음(陰)이 양(陽)을 항거하는 것이요, 월식(月蝕)이란 양이 음을 항거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는 일식 때를 당해도 일식하지 않고 월식 때를 당해도 월식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이치가 있습니까?”
“음양(陰陽) 학설에 얽매어 이치에 막히고 천도(天道)를 살피지 않은 것은 선유(先儒)의 허물이다.
대저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이 되고 지구와 달을 가리면 월식이 된다. 경도ㆍ위도가 같고 삼계(三界 해ㆍ달ㆍ지구)가 일직선에 놓이면 서로 가려져서 일식과 월식이 생기는 것이 운행의 떳떳한 법칙이다.
또 해는 지구에게 먹히고 지구는 달에게 먹히며, 달은 지구에게 먹히고 해는 달에게 먹히는 것이 삼계의 떳떳한 도수며, 지구 세계의 정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해가 지면 밤이 되는 것은 역시 해의 변(變)이니, 낮에 처하는 도(道)로써 밤에 처한다면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 일식의 변도 또한 이와 같으니, 변을 당해 닦고 반성함은 사람의 일로서 당연한 것이다.”
“바람과 구름ㆍ비와 눈ㆍ서리와 우박ㆍ우레와 무지개 등, 천도(天道)의 변에 대하여 들을 수 있습니까?”
“허(虛)란 하늘이다. 이러므로 우물과 구덩이의 공(空)이나 병의 공 또한 하늘이다. 무릇 바람이나 구름 따위는 모두 허(虛)에서 나왔다 하여 도(道)라고 이르지만 실은 지기(地氣)의 증발로 생긴 것이지, 하늘에 전속된 것이 아니다.
시험삼아 이야기하겠다. 바람이란 지구의 한 모퉁에서 난다. 지구가 회전하자니 높은 산고개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고 깊은 골짜기가 격동하지 않을 수 없다. 까닭에 허한 기(氣)가 나부끼고 일렁거려 사방으로 나와 바람이 되는 것이다.
격동이 빠르면 바람이 사납고 격동이 느리면 바람이 조용하다. 격동에 가까우면 그 세력이 크고 격동에 멀면 그 세력이 미약하다. 일단 격동하여 서로 부딪치면 동서남북 할 것 없이 멋대로 몰아친다. 또 이무기와 용이 날치고 우레와 소낙비가 갑자기 쏟아지는데도 능히 선동하고 호령하는 것이 모두 지면(地面)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지구에서 수백 리 거리를 떨어지면 바람이 있지 않다.
구름이란 산천의 기(氣)가 올라가 엉기어 형체를 이룬 것으로 그 빛이 본디는 맑은데 햇빛의 작용으로 여러 가지의 색깔을 낸다. 한낮에 흰 것이 맑은 까닭은 햇빛을 바로 받기 때문이요, 검은 것은 두껍게 쌓여 그늘진 때문이며, 아침 저녁으로 붉은 빛깔이 많은 것은 지기(地氣)가 해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비는 시루 속에 이슬이 맺히는 형상으로, 수토(水土)의 증기(蒸氣)가 공중에 증발하여 오르다가 빽빽한 구름에 막혀 샐 데가 없으면 엉기어 비가 된다. 그러므로 증기는 있어도 구름이 빽빽하지 않으면 비가 되지 못하고 구름이 빽빽해도 증기가 없으면 역시 비가 되지 않는다.
눈은 냉기(冷氣)가 증발한 것이요, 서리는 온기(溫氣)와 냉기가 섞인 것이며 우박은 온기와 냉기가 서로 부딪쳤을 때 급작스럽게 내리던 비가 언 것이니, 이 모두 증기(蒸氣)에서 생기는 비의 종류다.
천둥이란, 꼭 갇히었던 증기가 서로 부딪치면 불이 나는데, 그 빛은 번개요, 그 소리는 천둥이다. 불에 닿으면 물체는 부서지고 뭉크러진다. 번개가 먼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뒤에 나는 것은 멀기 때문이요, 번개와 우레가 한꺼번에 이는 것은 가깝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먼 것은 공계(空界)로 흩어지는데 지구에서 가까운 것은 물(物)에 닿게 된다. 천둥 없이 번개만 치는 것은 백 리 이상 먼 것이며, 번개 없이 천둥하는 것은 쌓인 구름이 막혔기 때문이다.
철겸(鐵鎌)으로 돌을 두드려 화령(火鈴)이 땅에 펴지는데도 젖은 데는 피하고 반드시 마른 곳으로 나아감은, 대개 젖은 것은 불이 두려워하고 마른 것은 불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대저 천둥이란, 그 성(性)이 굳세고 그 기(氣)가 맹렬하여 바르고 곧음은 피하고 반드시 사뙤고 요망함에로 나아간다. 대개 바르고 곧음은 천둥이 두려워하고 사뙤고 요망함은 천둥이 좋아하는 바이다.
대개 사람의 영각(靈覺)이 곧 한 몸의 화정(火精)인데, 더구나 천둥이란 천지의 정화(正火)이다. 굳세고 맹렬함이 살리기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여, 삽시간에 벼락을 때리는데도 그 영각이 신(神)과 같다. 무릇 사람이나 물체가 벼락을 맞을 때 기적(奇跡)을 나타내고 기교를 베푸는데, 이것은 뇌신(雷神)에게도 정(情)이 있기 때문이다. 화정과 영각이 실로 사람의 마음과 같다.
무지개는 수기(水氣)로서 아침에는 동쪽, 저녁에는 서쪽에서 햇빛을 빌어 이루어진다. 해가 비스듬히 비치면 반드시 둥근 형태가 반원을 이루며 해가 정오가 되면 무지개가 없어지는 것은 수기가 두텁지 못한 때문이다. 해무리와 달무리도 무지개의 한 종류인데, 허공에 생기는 까닭에 반드시 원모양을 이룬다. 무지개와 해무리가 원을 이루는 것은 해와 달이 둥글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구 위에 있으면서 하늘을 반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해가 이미 동쪽으로 올라왔는데 서쪽에는 월식하는 것을 봅니다. 또는 해와 달이 지면(地面)에 있을 때는 사람과의 거리가 멀지마는 그 둘레가 반드시 크고, 해나 달이 중천에 있을 때는 사람과의 거리가 가까운데도 둘레가 도리어 작아집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이것은 기(氣)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시험삼아 동전(銅錢)을 대야에 넣고 물러서서 보면 겨우 한 쪽만 보이다가 깨끗한 물을 다시 부어주면 동전 전체가 드러나게 되니, 이것은 물의 힘이다. 눈에 파려(玻瓈 유리ㆍ수정 따위)를 대고 보면 미세한 털도 손가락만큼 크게 보이니, 이것은 파려의 힘이다.
지금 수토(水土)의 기가 증발하여 지면을 싸고 있어, 밖으로는 삼광(三光 해ㆍ달ㆍ별)을 약하게 하고, 안으로는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한다. 물처럼 비치고 유리처럼 어리어리하여 낮은 것은 높게 만들고 작은 것은 크게 만든다. 서양 사람은 이에 대한 견해가 있어 이것을 청몽(淸蒙)이라 이름하였다. 쳐다보면 작게 보이는 것은 청몽이 얕은 때문이고, 비스듬히 보면 크게 보이는 것은 청몽이 두텁기 때문이다.
대저 천둥소리가 웅장하다 해도 백 리를 넘지 않고 총탄(銃彈)이 사납다 해도 천 걸음을 미치지 못하니, 이것은 멀고 가까운 형세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멀고 가까움이 그렇게 되는 것도 반드시 그 까닭이 있는 것이다.
대개 유기(遊氣 공중에 떠다니는 운기(雲氣))가 꽉 차서 뚫고 빼는 것이 한도가 있으므로 소리가 울리고 탄환이 나는 데도 힘이 다하면 멈추는 것이다. 사람의 보는 힘도 또한 이와 같아서 저 해와 달의 직경(直徑)은 끝내 헤아릴 수 없다.
달의 체가 초사흘 저녁에 새로 나타날 때, 훤한 둘레가 언저리 밖으로 빙 두른 것은 광채가 무리[暉]로 된 것이고 달의 본체(本體)는 아니다. 반달과 망월(望月)의 경위(徑圍)도 어디를 표준해야 할는지 모르는데, 하물며 태양(太陽)은 순화(純火)로 광선과 둘레가 갑절이나 큰 데에 있어서랴? 진계(眞界)의 깊고 얕음은 마침내 헤아릴 수 없다.
또 둥근 형체를 헤아려 바라볼 때 가까이서 보면 작고 멀리서 보면 크다. 포탄처럼 작은 것도 본 형체를 분변할 수 없거늘 하물며 해와 달에 있어서랴?”
“지구의 형체가 둥글다는 것과 분야(分野)의 허망함은 이미 가르침을 받아 알았으나, 감히 묻건대, 하루 동안에 아침과 낮의 기후가 다르고 한 해 중에 겨울과 여름의 기후가 다르며 한 지구 가운데 남쪽과 북쪽의 기후가 다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실옹이 대답하기를,
“차가움은 지구의 본기(本氣)이고 따뜻함은 태양 화기의 쪼임이다.
또 중국을 가지고 말한다면 북경(北京)에서는 하지(夏至)날 해가 천정점[天頂]에 16도를 못 미치기 때문에 햇빛은 조금 비껴지고 따뜻한 기후도 이미 줄어지게 된다. 이로부터 북쪽으로 극에 이르면 여름 기후는 겨울 기후와 같으며, 만약 거기에 겨울이 되면 땅이 얼어 터지며 얼음만 있고 물은 없다.
남해(南海)에서는 하짓날 해가 바로 친정점에 닿으므로 여름엔 햇볕이 직사하여 더운 불꽃이 타는 듯하여 옛부터 얼음이 없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적도(赤道) 남쪽 20여 도(度)에 이르기까지는 한 해 가운데 따뜻한 기후가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고 오직 적도를 중심으로 남북만은 겨울과 여름의 기후가 아주 다르다.
적도(赤道)로부터 수십 도 남쪽은 동지에 여름이 되고 하지에 겨울이 되는데, 그 기후의 차고 더움은 대개 중국과 비슷하다. 여기서부터 더욱 남쪽 끝으로 내려가면 여름 기후가 겨울과 같으며, 겨울철엔 땅이 얼어 터져서 얼음만 있고 물이 없어 북극의 기후와 같다.
남극에서 남쪽으로, 북극에서 북쪽으로 간다면 기후는 차츰 따스하고 차츰 추우며 극도로 따스하고 극도로 추운 것은 모두 같은데, 이 지계(地界)는 오직 남과 북이 그 기후가 바꾸어진 것뿐이다.
대개 해는
황도(黃道)로 말미암아 적도(赤道)에 드나드는데 안과 밖이 각각 23°다. 지구 세계로서 적도에 가까운 지대는 햇빛이 직사하여, 그 기후가 극도로 따스하고 적도에서 조금 먼 지대는 햇빛이 비스듬히 쏘이므로, 그 기후가 약간 따스하며, 적도에서 동떨어지게 먼 지대는 햇빛이 횡으로 쏘아 그 기후가 몹시 차다. 그러므로, 지구가 따스한 것은 햇빛을 받는 때문이며, 그 따스함에 약간 따뜻함과 극히 따스함이 있음은 햇빛이 비스듬히 쏘느냐 직사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을 자세히 안다면 아침과 낮의 기후가 다른 이유가 분명하며, 아침과 낮 기후가 다름이 분명하다면 겨울과 여름 기후가 다름이 분명하며, 겨울과 여름 기후가 다름이 이미 분명하다면 남과 북의 기후가 다른 것도 분명할 것이다.”
허자가 말하기를,
“해가 남지(南至 곧 동짓날을 말함)하면 한 양(陽)이 생하고, 해가 북지(北至 곧 하지날을 말함)하면 한 음(陰)이 생하게 됩니다. 음과 양이 서로 바꿔짐에 따라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며, 천지가 닫겨짐에 따라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니, 남쪽이 양으로 되고 북쪽이 음으로 됨은 지세(地勢)의 정해진 국면이며, 여름이 따뜻하고 겨울이 추운 것은 음과 양이 번갈아 닫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자는 음과 양으로 정해진 국면과 바뀌고 닫기는 참 기틀은 버리고, 태양[日火]의 멀고 가까움과 비스듬하고 바름[斜直]을 가지고 통틀어 설명하시니, 옳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옳은 말이다. 그렇지만 양(陽)의 종류가 여러 가지로 있지만 모두 불에 근본했고, 음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두 땅에 근본했다. 옛사람이 여기에 깨달은 바가 있어 음양의 학설이 있게 되었다.
만물이 봄과 여름에 화생(化生)하는 것을 교(交)라 하고, 가을과 겨울에 거두어 저장하는 것을 닫긴[閉]다 했으니, 옛사람이 말을 세운[立言] 것도 각각 까닭이 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미루어 본다면 실상 태양빛[日火]의 얕음과 깊음에 속할 뿐, 후세 사람의 말대로 천지 사이에 별도로 음양 두 기(氣)가 있어서 때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며 조화(造化)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 세계의 생물이 모두 태양빛에 속했다면, 가령 해의 세계가 일조에 녹아 없어진다면 곧 이 지구의 세계에는 한 물체도 없게 될 것입니까?”
“얼음과 흙이 서로 얼어붙어 물(物)이 생성할 수 없다면 어두움과 싸늘한 한 덩어리 죽음의 세계가 될 것이다. 허공(虛空)의 중간에 태양빛이 단절된다면 다만 죽음의 세계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늘이란 오행(五行)의 기(氣)요, 땅이란 오행의 질(質)입니다. 하늘이 그 기를 갖고 땅이 그 질을 갖기 때문에 물(物)의 생성이 절로 갖추어지는 것인데, 어찌 태양에만 전속됩니까?”
“우하(虞夏) 때 육부(六府)를 말했는데 수ㆍ화ㆍ금ㆍ목ㆍ토ㆍ곡(水火金木土糓)이 이것이고, 주역(周易)에 팔상(八象)을 말했는데 천ㆍ지ㆍ화ㆍ수ㆍ뇌ㆍ풍ㆍ산ㆍ택(天地火水雷風山澤)이 이것이며, 홍범(洪範)에는 오행(五行)을 말했는데 수ㆍ화ㆍ금ㆍ목ㆍ토가 이것이고, 불(佛)은 사대(四大)를 말했는데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이 이것이다.
옛사람이 때에 따라 모범될 만한 말을 세워 만물(萬物)의 총명(摠名)을 지은 것은 여기에 한 가지도 보탤 수 없고 한 가지도 줄일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천지 만물이 이런 수(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행의 수(數)는 원래에 정해진 의론이 아닌데, 술가(術家)는 이를 조종(祖宗)으로 삼아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로써 억지로 맞추고 주(周易) 상수(象數)를 파고 들어가 생극(生克)이니 비복(飛伏 점치는데 쓰는 술어로, 비신(飛神)과 복신(伏神)을 말함)이니 하는 지리한 수작으로 여러 술수(術數)를 장황스럽게 이야기하나 끝내 그런 이치는 없는 것이다.
대저 화(火)는 태양이요 수(水)와 토(土)는 땅이다. 목(木)과 금(金) 따위는 해와 땅의 기(氣)로 말미암아 생성하는 것이니, 당연히 이 3자(화ㆍ토ㆍ수)와 더불어 병행될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늘이란, 맑고 허한 기(氣)가 끝없이 가득한 것인데, 자그마한 지구세계의 움직임을 가지고 이 지극히 맑고 지극히 허한 데 비겨 논할 수 있겠느냐?
이래서 하늘은 기(氣)뿐이요 해는 불 뿐이며 땅은 물과 흙일 뿐임을 안다. 만물(萬物)이란 기의 찌꺼기[糟粕]이고 불의 거푸집[陶鎔]이며 땅의 군살[疣贅]인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없어도 조화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어찌 의심하겠느냐?”
허자가 말하기를,
“사람이나 물체가 생길 때에 태와 알과 뿌리와 씨(胎卵根子)가 각기 근본이 있는 것인데, 어찌 태양의 화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인과 물의 생동이 태양빛에 근본한 것이다. 가령 하루아침에 해가 없어진다면 온 세계는 얼어붙고 온갖 물체는 녹아 없어질 텐데, 태ㆍ난ㆍ근ㆍ자가 어디에 근본하겠느냐? 까닭에 이르기를 ‘땅은 만물의 어미요, 해는 만물의 아비이며, 하늘은 만물의 할아버지다.’고 하였다.”
“옛사람이 이른 말에 ‘하늘은 서쪽과 북쪽이 가득 차지 않고 땅은 동쪽과 서쪽이 가득 차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도 과연 가득 차지 않은 곳이 있습니까?”
“이것은 중국의 야언(野言)이다. 북극(北極)이 낮게 도는 것을 보고 하늘이 가득 차지 않은 줄로 의심하며, 강하(江河)가 동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땅이 가득 차지 않은 줄로 의심한 것이다. 땅 형세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에 얽매어 온 지구의 다른 관점을 살피지 않으니, 또한 어리석지 않느냐?”
“지구의 표면에서는 밤낮의 길이가 저쪽과 이쪽이 다 같고 차이가 없습니까?”
“어찌 그렇겠느냐. 가령 여기서 낮 정오라면 여기서 동쪽 90°인 곳은 석양일 테고, 거기서 또 90°쯤 지나가면 밤일 것이다. 여기서 서쪽 90°인 곳은 아침일 테고 거기서 또 90° 지나면 새벽일 것이다. 동쪽과 서쪽이 각각 1백 80°의 이곳과 맞서는 곳은 밤 자정일 것이다. 적도(赤道)의 남쪽과 북쪽은 각각 20° 남짓한데 1년 중 밤낮의 길이는 균일하여 차이가 각ㆍ분(刻分)에 불과하며 여기에서 더 지나가면 밤낮의 차이는 점점 많아진다.
극도로 긴 데는 열한 시가 넘고 극도로 짧은 데는 한 시간이 차지 않는다. 두 극(極)에 이르러 적도가 지평선(地平線)처럼 되면 해가 적도 위에 있을 때는 반년 동안 낮이 계속되고, 해가 적도의 밑에 있을 때는 반년 동안 밤이 된다.”
“바다라는 물체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에도 넘치지 않으며 추워도 얼음이 얼지 않는다. 여러 냇물이 흘러들어도 그 짠맛이 변하지 않으며 때에 따라 밀물과 썰물이 져도 그 주기는 잃지 않는데, 그 이치를 듣고 싶습니다.”
“달은 물의 정기[水精]라, 물이 달을 만나면 감응하여 솟아 물결을 이룬다. 달은 일정한 길이 있고 조수는 일정한 시간이 있는 바, 물결 형세가 나부끼고 흔들리어 스스로 나아가고 물러서게 된다.
본 물결에 가까운 데는 간만의 차가 심하고 본 물결에 먼 데는 간조와 만조가 모두 미약하며, 본 물결에 더욱 먼 데는 물결 형세가 못 미치게 되므로 밀물과 썰물이 이뤄지지 않는다.
바닷물은 아무리 많이 모여도 새지 않는다. 적도 가까이는 태양열이 찌는 듯 볶는 듯하여 점점 짠맛이 되는데 그 맛이 소금 같고 솟는 물결은 여울물과 같으며, 육지 또한 해에 가까우므로 겨울에는 얼음이 얼지 않는다.
또 남극ㆍ북극은 기후가 극도로 냉하고 태양열도 따라서 미약하며 밀물이 미치지 않는 데에는 얼음 바다[氷海]도 있다.
또 모인 물이 크고 넓어, 왕양(汪洋)함이 가이 없으므로 모여드는 강해의 물과 끊임없는 장마비도 한 잔의 물과 같아 천 경(頃)의 물결엔 아무런 보탬도 손실도 없다.
또 강하(江河)의 근원은 샘물이고 샘물의 근원은 바다다. 물은 토맥(土脈)에 따라 부딪치는 듯 호흡하는 듯 옆으로도 흐르고 거꾸로도 흘러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스며들어 흙을 윤택하게 만들고 짠물을 변해 민물로 만들며 넘쳐서 우물과 샘이 되고 모여서 강ㆍ하수[江河]가 된다. 곧 서로서로 넘나들면서 이루어 주는 것으로 모두가 바다물이다.
또 바람과 햇볕에 증발되고 사람과 만물에게 소비되는 양이, 비와 눈으로 인한 불음과 서로 맞먹게 되므로, 그 물은 자연 마르지도, 붇지도 않기 마련인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한다.’고 하였는데, 그런 이치가 있습니까?”
“내가 보건대, 지구 세계에서 인간의 수(壽)는 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국사(國史)에도 그 실적이 전하지 않는다. 땅과 물의 변화는 점차로 되는 것이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데, 인간이 능히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조개껍질과 조약돌이 혹 높은 산에서 나타나고 바다 가까운 산의 모래가 흔히 흰 모래인 것으로 보아 산과 바다가 서로 넘나든 흔적이 뚜렷함을 알 수 있다.
또 중국을 보더라도 요동 들[遼野] 천 리는 곧 구하(九河)의 옛 길이요, 사막(沙漠) 밖에 모래와 자갈은 곧 황하(
黃河)의 옛 길이다. 맹자(孟子)가 이르지 않았느냐 ‘홍수(洪水)가 가로 흘러 중국으로 넘어들었다.’고.
대개 흘러내리는 모래가 쌓여 막히고 물길이 점점 높아지면 둑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황하(
黃河)가 넘쳐흐른 것은 바로 요(堯)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숭백(崇伯 우(禹) 아버지 이름은 곤)이 시대의 운수를 살피지 못하고 중국을 위해 먼 계획을 세운다고 그 옛 길만 회복하고자 하여, 9년 동안 막았으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제방(堤防)이 한번 무너지매 구주(九州)가 물속에 빠져 버렸다. 우(禹)가 곧 잇달아 일어나 용문산(龍門山)을 뚫어 물의 성질대로 인도하여 그 다급함을 구제하긴 하였으나, 마침내 중국의 후환이 되었다. 이로 본다면 뭍이 바다로 되고 바다가 뭍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땅에 지진(地震)이 있고 산이 옮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땅이란 활물(活物 움직이는 물체)이다. 맥락(脈絡)과 영위(榮衛)가 실상 사람의 몸과 같은데 다만 그 몸뚱이가 크고 무거워 사람처럼 뛰고 움직이지 못할 뿐이다. 이 때문에 조그만 변이 일어나도 사람은 반드시 괴이하게 여겨, 재앙이니 상서니 하고 함부로 추측한다.
그 실에 있어서는 수화(水火)와 풍기(風氣)가 두루 유행(流行)하다가 막히면 지진이 일어나고 격하면 밀어 옮기기도 하나니, 그 형세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땅에 온천(溫泉)과 염정(鹽井)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태허(太虛)는 물의 정[水精]이고 태양(太陽)은 불의 정[火精]이며 지구는 물과 불의 찌꺼기다. 물과 불이 아니면 땅은 능히 살아 활동할 수 없다. 돌고 위치를 정하고, 만물을 내고 성장 시키는 것은 물과 불의 힘이다. 이 온천과 염정도 물과 불이 서로 부딪쳐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는데 그 묘(墓)자리가 길하지 않으면 바람과 불이 재앙을 만든다 하니, 또한 그런 이치가 있습니까?”
“수화와 풍기(風氣)는 운행하는 길이 있으니, 실(實)을 만나면 피해 달아나고 허(虛)를 만나면 모이게 된다. 장사를 지냄에 있어 그 옳은 방법[道]를 잃으면 재앙이 반드시 이르나니, 해골(骸骨)이 엎어지거나 뒤쳐지거나 타버리거나, 심지어 벌레가 생기고 썩어 없어지기까지 함은 장사를 안전하게 지내지 못한 때문이다.”
“장례를 치를 적엔 토질이 깨끗하여 물ㆍ불ㆍ바람ㆍ벌레의 작용할 데가 없었는데, 뒤에 혹 면례(緬禮)를 하려고 구광(舊壙)을 해쳐 보면 편하고 좋은 자리가 별로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좋은 물음이구나. 사람이 부모에게, 살아 계실 때 봉양을 극진히 하고 죽으면 정성을 다하며 남긴 글과 남긴 의복을 높이 받들고 삼가 갈무리하는 것은 공경의 극치인데, 더구나 유해(遺骸)에 있어서랴. 묘 자리란 유해를 갈무리하는 곳인데, 감히 공경하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렇기는 하지만 포백(布帛)이나 의금(衣衾)은 생존시에 봉양하는 기구이고, 관곽(棺槨)이나 정삽(旌翣)은 남보기에 아름답게 하는 장식으로 흙에 들어가면 썩어서 유해를 더럽힐 뿐인데, 오직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움만 힘써 필경엔 더럽히는 것은 생각지 않으니, 효도하고 또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느냐?
더구나 허하면 반드시 딴 물건을 끌어들이는 것은 땅의 생리다. 정삽을 갖춤으로 해서 곽(槨)은 허해지고, 옷과 이불이 썩음으로 해서 관(棺)이 허해지고, 역청(瀝靑 송지(松脂)에 기름을 섞어서 짠 도료(塗料))과 회석(灰石)이 견고함으로 해서 광(壙)은 허해진다. 물ㆍ불ㆍ바람ㆍ벌레는 모두 허함으로 인해서 생기니 슬프다. 부모의 유해를 갈무리함에 있어, 안으로 썩을 물체를 입히고 바깥으로 풍화(風火)를 끌어들여 사지(四肢) 백절이 타고 흩어져 시체를 보존하지 못한다면 마음에 괘하겠느냐?
대저 흙은 물(物)의 모체요 생의 근본이다. 비단으로 족히 그 아름다움에 겨룰 수 없고 구슬도 족히 그 깨끗함에 비길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사람의 육체란 습한 데에 거처하면 병이 생기고 좋은 의복도 땅에 가까우면 더러워진다. 그러므로 높은 집에서 겹방석을 까는 것은 흙을 멀리하기 때문에 귀한 것이요, 움막에서 거적을 까는 것은 흙과 가깝기 때문에 천한 것이다.
사람이 옛 습관에 젖어 그 근본을 잊어버린다. 죽음에 임해서 염습(斂襲)하는 의복이 두텁지 못할까 염려하고 관곽과 회석이 단단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깊은 걱정과 긴 계획은 오직 흙을 멀리하기를 꾀한다.
사(死)와 생의 도가 다르고 귀와 천의 물이 다르나, 누른 정색(正色)으로 따뜻하고 윤택함이 흙보다 더 귀함이 없으니, 참 아름답고 참 깨끗한 것이 실로 유해(遺骸)의 보장(寶藏)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덤도 만들지 않고 나무도 심지 않음은 태고(太古) 시대의 너무 질박한 일이었고, 베로 싸기만 하고 관(棺)이 없이 나장(裸葬 관곽을 쓰지 않는 장례)한 것은 달사(達士)의 괴이한 짓이었으며, 다비(茶毘)로 사리(舍利)를 모아 탑(塔)을 쌓는 것은 불씨(佛氏)의 정법(淨法)이었고, 벽돌로 둘러쌓고[
周] 기와 [瓦棺]관을 만든 것은 성인(聖人)의 적중한 제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법은 다비이고 그 다음은 나장입니다. 무덤을 만든다 나무를 심는다 벽돌로 쌓는다 기와로 관을 만든다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스승을 장사 지내는 데는 의리를 주로 하고 어버이를 장사 지내는 데는 은애를 주로 하는 것이다. 서축(西竺 곧 불교를 말함)의 가르침은 은애를 끊고 의리를 세웠으며, 중국의 가르침은 의리를 굽히고 은애를 폈다. 그러나 왕손(王孫)을 나장한 것은 풍속을 바로 잡는데 과격했던 때문이다.
중국에 나면 자연 그 의가 있다. 곧 검소함을 숭상하고 그 꾸밈을 절제하며, 그 근본을 잊지 않고 시의(時義)를 참작하며 속습에 따르지 않고 어버이의 안장(安葬)을 길이 생각하는 일이다. 대개 판판한 언덕과 높은 산은 모두 복지(福地)인데, 무슨 풍화(風火)의 재앙이 있겠느냐? 이것은 남의 자식된 자가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다.
대개 성주(成周 주(周) 나라의 별칭) 시대엔 문(文)을 숭상하여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너무 갖춰졌고, 맹씨(孟氏)는 묵씨(墨氏)를 배척함에 있어 박장(薄葬)을 나무랐다. 그러나 ‘관(棺)을 무겁게 하고 명기(明器)를 써야 한다. 흙이 어버이 피부에 닿지 않아야 한다.’라는 의론은 폐단이 없지 않은 것이다.”
“택조(宅兆)의 길흉과 자손의 화복이 한 기(氣)로 감응(感應)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이치가 있습니까?”
“중형(重刑)을 당한 죄수가 옥(獄)에 있을 때 겪는 고통이 견딜 수 없다 하여, 죄수의 아들이 몸에 악한 병이 생겼다는 말을 듣지 못했거늘, 하물며 죽은 자의 혼백에 있어서랴?
비록 그러하나 기술이란 허망하여 본래는 그럴 이치가 없지만, 그런 줄로 믿어 내려온 지 오래고 마음을 모으고 영을 합하면 무(無)를 상상하여 유(有)를 이루나니, 가끔 중인(中人)의 기교를 하늘이 따라준다. ‘입이 여럿이면 금도 녹이고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아진다.’는 말이 이치가 있는 것이다.
대개 천문(天文)에 대해서 상서와 재앙, 복서(卜筮)에 있어서 길흉, 기도와 제사에 있어서 귀신의 흠향, 지술(地術)에 있어서의 화와 복은 모두 그 이치가 마찬가지다.
채계통(蔡季通)이 귀양갈 때에 남의 묘(墓)를 옮겨준 것을 후회하였다. 연고없이 남의 면례(緬禮)를 시켰으니, 뉘우쳐 마땅하나 사실은 오직 간사한 술법을 숭상하여 믿은 것이 후회의 근본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자양(紫陽)의 산릉 의장(山陵議狀)이 오로지 술가(術家)의 말만 주장한 것이 너무 심한 데도 대사(臺史)가 이 말이 유종(儒宗)에서 나왔다 하여 감히 의논하지 못했다. 이러므로 간사한 말이 거침없이 퍼져서 천하가 미친 듯하여 송옥(訟獄)이 들끓고 인심이 날로 무너지게 되었으니, 폐단의 혹독함이 어찌 선학(禪學)이나 공리론[事功]에 비등할 뿐이겠느냐?”
“천지의 형체와 정상은 이미 가르쳐 주심을 들었으나, 인물의 근본과 고금의 변화와 화이(華夷 중국과 오랑캐)의 구별을 듣고 싶습니다.”
“대저 땅이란 허계(虛界)의 활물(活物)이다. 흙은 그의 살이고 물은 그의 정기와 피이며, 비와 이슬은 그의 땀이고, 바람과 물은 그의 혼백이며 영위(榮衛)다. 이러므로 물과 흙은 안에서 빚어내고 태양 화기는 밖에서 쪼이므로, 원기가 모여 온갖 물을 생산시킨다. 풀과 나무는 땅의 모발(毛髮)이고 사람과 짐승은 땅의 벼룩이며 이[虱]이다.
바위 골짜기와 땅 속에 뚫린 굴은 기(氣)가 모여 바탕을 이룬 것이니 기화(氣化)라 이르고, 남녀가 서로 느끼어 육체로 교접하여 태(胎)로 낳은 것은 형화(形化)라 이른다.
상고(上古) 시대에는 오로지 기화(氣化)로 되었기 때문에 인물이 많지 않았으나 태어난 성품이 두텁고 정신과 지혜가 밝고 동정(動靜)도 점잖았다. 음식은 물(物)에 자뢰하지 않고 기뻐함과 노여워함도 마음에 싹트지 않고 호흡만 토하고 마시는데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았다. 하는 일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놀러만 다니니, 조수(鳥獸)와 어별(魚鼈)도 모두 제 마음대로 살고 초목과 금석(金石)도 각각 제 자체를 보전하였으며, 하늘엔 음하고 요사스러운 재앙이 없고, 땅엔 무너지고 마르[渴]는 해가 없었다. 이야말로 인물의 근본이요 태평한 세상이었다.
중고(中古)로 내려오면서부터 지기(地氣)가 비로소 쇠해지자 인물들이 점점 박잡하고 흐리게 되었다. 남녀가 서로 모이면 곧 정욕이 생기고 정신이 감동되어 아이를 배게 되었으니, 비로소 형화(形化)가 생긴 것이다. 형화가 있음으로부터 인물은 점점 늘어나고 지기는 더욱 줄어지며 기화(氣化)가 끊어졌다. 기화가 끊어지면 인물의 나는 것이 오르지 정혈(精血)만 타고나기 때문에 찌꺼기의 나쁜 것만 점점 자라나고 맑고 밝은 마음은 점점 없어졌다. 이것이 천지의 비운(否運 불행한 운수)이요, 화란(禍亂)의 시초였다.
남녀가 육체로 교접하매 기혈(氣血)이 소모되고, 기교한 꾀가 본심을 해치매 정신에 울화(鬱火)가 생겼다. 안으로 기갈(飢渴)의 걱정과 밖으로 한서(寒署)의 괴로움이 있게 되매, 풀잎을 먹고 물을 마셔서 기갈을 채웠으며, 나무로 둥우리를 틀고 토굴을 파서 움을 만들어 한서를 방비하였다. 이렇게 되자 온갖 물(物)은 각각 제 몸을 위하기에 이르렀으니, 백성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풀잎을 먹고 물을 마심이 너무 박하다 하여 함부로 사냥하고 고기 잡으매, 조수(鳥獸)와 어별(魚鼈)이 제대로 살 수 없게 되었고, 둥우리와 움집이 누추하다 하여 좋은 저택을 지으매 초목(草木)과 금석(金石)이 형체를 보전할 수 없게 되었다. 고량진미(膏粱珍味)로 그 입맛을 맞추자 장부[臟胃]가 약해졌고 베와 비단으로 그 몸을 따스게 하자 지절(肢節)이 해이하게 되었다. 동산을 만든다 정자를 짓는다 못을 판다는 일이 생기자 땅 힘이 줄어들고, 성냄과 원망함과 저주(咀呪)하는 더러운 기(氣)가 오르자 하늘 재앙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용맹스럽고 지혜롭고 욕심 많은 자가 그 중간에 나서 제 마음과 같은 자를 몰아 이끌고 각각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되매, 약한 자는 일만 수고로웠고, 억센 자는 이권을 누렸다. 각각 갈라 점령한 강토를 아울러 차지하려고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벌리면서 육박을 하므로 백성이 제대로 살 수 없게 되었다.
교(巧)한 자가 재주를 부려 살기(殺氣)를 도발시켰다. 쇠를 불리고 나무를 쪼개어 흉기(匈器)를 만들었다. 날카로운 칼과 창, 혹독한 활과 화살로 성(城)을 뺏고 땅을 다투매 쓰러진 시체가 들을 메웠다. 생민의 재앙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기주(冀州)는 지방이 천리로 중국이라 일컬었다. 산을 등지고 바다에 임하매 바람과 물이 혼후(混厚 넉넉함)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비치매 춥고 더움이 알맞고, 물과 산이 영기(靈氣)를 모으매 선량한 사람을 탄생시켰다. 대개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ㆍ요순(堯舜)이 일어나서 초가집에 살면서 자신부터 검소한 덕을 닦아 백성의 재산을 마련해 주었으며, 공손하고 겸양한 모습으로 밝은 덕을 몸소 실천하여 백성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문명한 교육이 차고 넘쳐서 천하가 화락하였다. 이것이 중국에서 이른바, 성인의 정치요 가장 잘다스려진 시대였다.
시대를 따르고 풍속에 순응함은 성인의 방편이요 다스림의 기술이다. 대저 가장 화락하게 잘 지내는 것은 성인이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건만, 시대가 바뀌고 풍속이 변해져서 법이 행해지지 않는데 만약 거스려 막는다면 그 혼란이 더욱 심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성인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까닭에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살면서 옛 도(道)를 회복시키려고 하면 재앙이 반드시 자신에게 미친다.’고 하였다.
정욕에 대한 느낌을 이미 금할 수 없게 되자, 혼인하는 예절로 부부(夫婦)로 짝지었으니 그 음탕함만 금했을 뿐이요, 좋은 집에 거처함을 금할 수 없게 되자 초가집을 짓되 갈고 깎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화려함만 금했을 뿐이며, 고기 먹는 습관을 이미 금할 수 없게 되자, 낙시만 하고 그 물질을 못하도록 산과 못을 금하였으니 함부로 잡는 것만 금했을 뿐이요, 좋은 옷 입는 것을 이미 금할 수 없게 되자 노소와 상하의 제도를 구별하였으니 그 사치함만 금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예악(禮樂)과 제도로서 성인이 인도해 주고 보충도 해주어 한 시대를 제어하는 방편으로 하였는데, 그것은 정욕의 뿌리가 뽑히지 않고 이욕의 근원이 막히지 아니하면 마치 방천처럼 끝내는 무너지리라는 것을 성인이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하후(夏后)가 천자(天子)의 위(位)를 아들에게 전하게 되자 백성이 비로소 제집 이익만 꾀하게 되었고, 탕무(湯武)가 임금을 내쫓고 죽이자 백성이 비로소 위를 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몇몇 임금의 허물은 아니다. 잘 다스려진 끝에 쇠하고 어지럽게 됨은 시대와 형세의 자연인 것이다.
하(夏) 나라가 충(忠)을 숭상하고, 상(商) 나라가 질(質)을 숭상했으나 당우(唐虞)에 비하면 이미 꾸민 것이었고, 성주(成周)의 제도는 오로지 화려하고 사치함만 숭상하여
소왕(昭王)과
목왕(穆王)부터는 임금의 기강이 이미 떨어져 정사가 제후(諸侯)에게 있었고, 한갓 헛 이름만 안고 윗자리에 기생(寄生)하였으니,
유왕(幽王)ㆍ
여왕(厲王)이 천하를 망치기 전에 주(周) 나라는 이미 없어졌던 것이다.
영대(靈臺)은 놀이를 위해 아름답게 만든 것이고,
구정(九鼎)는 보배로 여겨 갈무리한 것이었다. 옥로(玉輅)와 주면(朱冕)은 복식(服飾)을 사치하게 한 것이고, 구빈(九嬪)과 어첩(御妾)은 예쁜 여색을 뺏아들인 것이었다. 이리하여
낙읍(洛邑)과
호경(鎬京)에 토목 공사가 번다하였으니, 저 진 시황(秦始皇)이나 한 무제(漢武帝)도 이것을 본받았다 하겠다.
또
미자(微子)와 기자(箕子)를 버리고
무경(武庚)을 세워서 은(殷) 나라 도(道)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주 나라의 속 마음을 어찌 숨길 수 있겠느냐? 성왕(成王)이 즉위(卽位)함으로부터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형제간에 다투었던 바, 주공(周公)이 3년 동안이나 동쪽으로 정벌하는데 창과 도끼가 다 부서지고 여덟 번이나 매방(妹邦)에 고시(誥示)하였으나 미련한 백성이 대항하고 따르지 않았으니, 주 나라가 은 나라를 대신함에 천하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어찌 없었다 할 수 있겠느냐? 공자(孔子)가 순(舜)의 덕을 칭찬함에는 ‘성인(聖人)이라’ 했으나 무왕(武王)에 대해서는 ‘천하의 좋은 이름을 잃지 않았다.’ 했고,
태백(泰伯)의 덕을 칭찬함에는 ‘지극하다.’ 했으나 무왕을 말함에는 ‘다 착하지는 못했다.’ 하였으니, 공자의 뜻을 크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주 나라 이후로 왕도(王道)가 날로 없어지고 패도(覇道)가 횡행하여 거짓 인(仁)한 자가 황제(帝)로 되고 병력(兵力)이 강한 자가 왕(王)이 되었으며, 지략(智略)을 쓰는 자가 귀하게 되고 아첨을 잘한 자가 영화롭게 되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림에는 괴임과 녹으로 꾀이고 신하가 임금 섬김엔 권모(權謀)를 미끼로 하였다. 이리하여 얼굴을 반쯤 알아도 마음이 맞게 되고 남모르는 식견으로 걱정을 예방하는 바, 상하가 서로 다투어 사욕만 꾀하였다. 아아! 슬프구나. 천하가 번잡하게 됨은 이욕을 품고 서로 대한 때문이었다.
비용을 절약하고 부세를 덜어줌이 백성 위함이 되지 못하고, 어진 이를 높이고 유능한 자를 쓰는 일이 나라 위함이 되지 못하며, 반역을 치고 죄를 치는 것이 포악을 금하는 일이 못되며, 후하게 주고 박하게 받으며 먼 데 물건을 보배로 아니 여김이 먼 나라를 회유함이 못된다. 오직 이뤄진 업을 지키고 위를 보전하여 몸이 마치도록 영화롭게 지내다가 2대 3대 무궁토록 전하는 것, 이것이 소위 ‘어진 임금의 할 일이요 충신이 낼 아름다운 꾀’라는 것이었다.
어떤 자는 말하기를 ‘나무와 돌의 재앙은
유소씨(有巢氏)에게서 비롯했고 짐승의 재화는
포희씨(包羲氏)에게서 시작되었으며, 흉년의 걱정은
수인씨(燧人氏)에서 유래되었고 교묘한 지혜와 화려한 풍습은
창힐(蒼頡)에게서 근본하였다.
봉액(縫掖)의 위용이
좌임(左袵)의 편리함만 못하고 읍양(揖讓)의 허례가 막배(膜拜) 참다움만 못하며, 문장(文章)의 빈말[空言]이 말타고 활쏘는 실용만 못하고 따뜻하게 입고 더운밥 먹으면서 몸 약한 것이 저 추운 장막에서 우유 먹고 몸 강건한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이는 혹 지나친 의론인지는 모르지만 중국이 떨치지 못한 까닭이 여기서 싹트게 되었다.
혼돈(混沌)이 뚫어지매 대박(大樸)이 흩어졌고 문치(文治)가 승해지매 무력(武力)이 쇠했으며, 처사(處士)가 제멋대로 의논하매 주(周) 나라 도(道)가 날로 쭈그러졌다. 진 시황(秦始皇)이 서적을 불사르매 한(漢) 나라 왕업이 조금 편케 되었고 석거(石渠)에서 분쟁이 생기매 신망(新莾
신은 국명 왕은 왕망이 왕위(王位)를 찬탈했으며,
정현(鄭玄)과
마융(馬融)이 경서를 연역(演繹)하매 삼국(三國)이 분렬 되었으며 진씨(晋氏)가 청담(淸談)을 일삼으매, 신주(神州 중국)가 망하였다.
육조(六朝)는 강좌(江左) 부속되었고
오호(五胡)는 완락(宛洛)을 처부시었으며,
척발(拓跋)은 북조(北朝)에서 위(位)를 바르고
서량(西凉)은 당(唐) 나라에 통합되었다. 요(遼)와 금(金)은 서로 주인 노릇하다가 송막(松漠)에서 합쳐졌고,
주씨(朱氏)가 왕통을 잃으매 천하는 오랑캐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남풍(南風 천자의 덕)이 떨치지 못하고 오랑캐[胡]의 운수가 날로 자라남은 곧 인사(人事)의 감응이기도 하지만 천신(天時)의 필연이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짓되 중국은 안으로, 사이(四夷)는 밖으로 하였습니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별이 이와 같이 엄격하거늘 지금 부자는 ‘인사의 감응이요 천시의 필연이다.’고 하니, 옳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하늘이 내고 땅이 길러주는,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모두 이 사람이며, 여럿에 뛰어나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자는 모두 이 임금이며, 문을 거듭 만들고 해자를 깊이 파서 강토를 조심하여 지키는 것은 다 같은 국가요, 장보(章甫)이건
위모(委貌)건
문신(文身)이건
조제(雕題)건 간에 다 같은 자기들의 습속인 것이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이러므로 각각 제 나라 사람을 친하고 제 임금을 높이며 제 나라를 지키고 제 풍속을 좋게 여기는 것은 중국이나 오랑캐가 한가지다.
대저 천지의 변함에 따라 인물이 많아지고 인물이 많아짐에 따라 물아(物我 주체와 객체)가 나타나고 물아가 나타남에 따라 안과 밖이 구분된다. 장부[五臟六腑]와 지절(肢節)은 한 몸뚱이의 안과 바깥이요, 사체(四體)와 처자(妻子)는 한 집안의 안과 바깥이며, 형제와 종당(宗黨)은 한 문중의 안과 바깥이요, 이웃 마을과 넷 변두리는 한 나라의 안과 바깥이며, 법이 같은 제후국(諸侯國)과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는 먼 나라는 천지의 안과 바깥인 것이다. 대저 자기의 것이 아닌데 취하는 것을 도(盜)라 하고, 죄가 아닌데 죽이는 것을 적(賊)이라 하며, 사이(四夷)로서 중국을 침노하는 것을 구(寇)라 하고, 중국으로서 사이(四夷)를 번거롭게 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그러나 서로 구(寇)하고 서로 적(賊)하는 것은 그 뜻이 한 가지다.
공자는 주 나라 사람이다. 왕실(王室)이 날로 낮아지고 제후들은 쇠약해지자 오(吳) 나라와 초(楚) 나라가 중국을 어지럽혀 도둑질하고 해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춘추(春秋)란 주 나라 사기인 바, 안과 바깥에 대해서 엄격히 한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느냐?
그러하나 가령 공자가 바다에 떠서 구이(九夷)로 들어와 살았다면 중국법을 써서 구이의 풍속을 변화시키고 주 나라 도(道)를 역외(域外)에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즉 안과 밖이라는 구별과 높이고 물리치는 의리가 스스로 딴 역외 춘추(域外春秋)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성인(聖人)된 까닭이다.”
첫댓글 반갑고, 놀라운 내용입니다.
<궐한>님께서는 요즈음 건 수를 너무 올리시는 것 같군요. 반갑고, 고맙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내일 자세히 볼 생각입니다.
보고 난 뒤 다시 댓글을 달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읽어보았는데,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다시읽어보게 됩니다. 한번 더읽어야겠어요. 다운받야야지.
의무려산(毉巫閭山)에 올라 남쪽으로 창해(滄海)와 북쪽으로 대막(大漠)을 바라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노담(老聃)은 ‘호(胡)로 들어간다.’고 했고, 중니(仲尼)는 ‘바다에 뜨고 싶다.’고 했으니, 어찌 알건가, 어찌 알건가.”
하고는 드디어 세상을 도피할 뜻을 두었다.
수십 리쯤 가니 앞에 돌문[石門]이 나왔는데 실거지문(實居之門)이라고 씌어 있다. 허자가 말하기를,
“의무려산이 중국과 조선의 접경에 있으니, 동북 사이에 이름난 산이다.
==>여기서 의무려산 기점으로 남쪽은 창해 북쪽은 대막이라고 하였습니다./ 창해는 어디에 있는 바다인가요?
==>"동북 사이에 이름난 산이다.",/여기서 동북은 어디를 말하는 것입니까?
==>“이 허자는 동해의 한 시골 사람입니다."/여기서 동해는 어디에 있는 바다를 말하는 것입니까?
제 글을 잘 읽질 않으셨군요...섭섭합니다.
라포박이라 본문에 명기했습니다.
혹자들은 이러시겠지요...고 조그남 내륙호가 무슨 바다....?...그것고 가당찮게 무슨 창해(滄海)냐고요...?
홍대용이 본문글에 얘기하지않습니까...이 의무려산의 요동벌이 황하의 구하(九河)인데...당대엔 이미 자갈과 모래만 남은 사막이됐다고요...
황하가 엄청난 수량으로 구하(九河)..즉, 아홉갈래로 갈라져 흘렀을 정돈데...거기가 모래와 자갈사막으로 변했답니다.
그럼 황하가 거처왔을 라포박(발해?) 근처 저지대의 창해도 당연 쫄아 붙는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나마 라포박등 여러 내륙호들이 현재까지도 거기에 많은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겁니다.
홍대용의 본문글을 또 제대로 않 읽으셨습니다.
홍대용이 그랬다지 않습니까...학문을 논할 땐...상대를 이겨먹으려 하지 말고...기존에 배운 수 많은 지식을 매려 놓고 열린 마음으로 논하라고요...
홍대용은 동해가의 사람이라 했습니다...맞습니다 조선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본문 좀 보십시요...용대용(허자)가 나름 대단한 지식을 쌓았다 알았는데...남들에게 말하면 비웃기만하여...
더 큰 물인 서쪽의 연경을 찾았으나...역시 신통한 지식인들을 못 많나...동쪽(조선)으로 돌아오는길 요동벌에 있는 의무려산에 올라
도인을 찾았다고요...거기가 조선과 연경의 청나라의 경계라고요...
모든 정황들을 보아...하서주랑 같은 긴 협곡벌판을 지나 끝없이 천여리를 가다 처음 나오는 산다운 산이 의무려산이라 했으니...
그런 지형은 대륙 어디를 봐도 현 신장성 동천산(東天山) 밖에 없고...
그럼 조선의 서북도는 당대는 청해성 동부나 감숙성까지가 한계이니...상대적 서역인 청나라 연경과 동쪽인 조선을 나눌 동해는...
현 청해호가 적당하다고 전 봅니다.
청해는 현재 서해(西海)라 하는데 뭔 동해(東海)야 하겠으나...
중원(연경)기준으론 동쪽이니 동해요...당대 유행하던 음양오행으론 동쪽은 파랑색이니 청해(靑海)가 맞다 전 봅니다.
저는 금방 눈에 확 들어오고 설레며 보던 문구에...홍대용이 연경갔다 오는길이였단게 명기됐는데도...
자꾸 해무리님의 고정관념으로 글을 비평하시려니 그게 보이질 않으신 겁니다.
북경(北京)에서는 하지(夏至)날 해가 천정점[天頂]에 16도를 못 미치기 때문에 햇빛은 조금 비껴지고 따뜻한 기후도 이미 줄어지게 된다.
여기서 북경의 정확한 위도(緯度)를 알려 주는 자료입니다. 왜라고요? "16도"에 주목 하시기 바랍니다.
윗글 다시 잘 보십시요...
북극 남극이 따로 있고...북쪽 악라 지점부터를 기준한 천정점이라 명기했습니다.
현대의 적도부터 북극으로 올라가는 식의 위도표시가 아니란 겁니다...
연경이 그럼,적도부근 인도 남부나 베트남에 있었단 말씀은 아니시겠죠...?
연경가는길 기주(고 평양)가 중국인데...날씨도 적당하고 살기좋은 곳이라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사막화돼어 못 살 동내겠지만여...
16도라는 것은 적도를 기점으로 하면 90도-16도=74도입니다.
=>이것을 검증하여 보겠습니다.
지금 현재 베이징의 위도는 대략 39.5도입니다.
춘분과 추분 때는 태양의 남중고도는 90-39.5 =50.5도가 됩니다.
하지 때의 남중고도는 90-39.5 + 23.5 = "74도"가 됩니다.
동지 때의 남중고도는 90-39.5 - 23.5 = "27도"가 됩니다.
그럼으로 궐한님이 소개한 자료 "의산 문답(毉山問答)"에서 당시 북경 위도는 지금의 북경의 위도와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궐한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중요한 자료를 발굴하셨습니다.
지금 중국에서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으로, 북쪽에 악라(鄂羅)가 있고 남쪽에 진랍(眞臘)이 있다. 악라의 천정은 북쪽으로 북극(北極)과의 거리가 20도(度)요, 진랍의 천정은 남쪽으로 남극(南極)과의 거리가 60도(度)가 되며, 두 천정의 상거(相距)는 90도가 되고 두 지역의 상거는 2만 2천 5백 리가 된다.
중국의 천정점 기준인 악라가...북극에서 20도 빠진 거리라니...
현재의 시베리아(아라사)대륙 북쪽 끝단 카라해(흑해)정도입니다.
하지날 거기에 태양이 수직으로 내리 쏜다는 얘기겠지요...?
북경은 거기(북위 70도) 악라 기준...태양각도가 16도 비스듬이 빅싸리가 난다니...북위 54도 정도가 북경의 위도란 얘기가 나오는 건가요...?
어허...그럼 얘기가 좀 달라지는데...?..알타이산 위도로 나오니요...?
제가 솔직히 천문학은 좀 무리가 많습니다...^. .^
해무리님께 조언을 겸허하게 구하겠습니다.
어쨋거나 해무리님(박자우님?)의 천부적인 천문학 이론으론 현 북경의 위도가 연경의 당대 위도로 나온다 하시니...
저도 다행입니다.
저도 천산 부근 투루판 주변이나 우루무치 정도를 연경으로 점찍어 가던 도중이거든요...^. .^
제가 더 감사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지금의 북경 가는길 요녕성이 어찌 중원과 청나라 오랑케의 남북을 가르는 접경인 의무려산이 있단 말이 됄까란 것이여...
그 북쪽에 뭔 대사막...?..요즘 새로 사막화됀 조그만 사막들 뿐인데요...?
그럼, 의무려산의 서남에 있었단 송나라 명나라는...발해바다 용궁였단 말씀이 됍니다...?
김홍필님 수고 많으십니다. 열심히 노력해 주세요. 님같은 분 한명이 대륙조선사 1000만 안티를 능가합니다. 쫑궈만세. 만만세입니다.
그런데, 님이 아무리 여기서 눈물겨운 노력을 해도 저조차도 이미 대륙조선사 카페에 가서 글을 읽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거의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고요. 대륙조선사 카페를 접수하고 외면시키게 했으면 이미 김홍필님의 목표는 달성한 것입니다.
이제 문무의 조선사까지 접수하시려고 하시나요? 허 참 암세포의 번식욕이 좀 지나치군요.
이제 족함을 알고 물러가라는 을지문덕의 답변으로 대신합니다. 우중문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근신,자족할 줄 아셔야 할 줄로 압니다.
중요한게 하나 더 있습니다.
평양성의 대명사인 기주(箕)가...동쪽 금나라와 서쪽 송나라(탕구트?)가 접경으로한 지역이랍니다.
강단사학과 동북공정파들 학설대로면...송나라는 서해바다 용궁에 있었고...금나라는 강원도와 함경도에 있었단 기적이 연출됍니다.
송의 서북쪽이란 탕구트(서하제국)은 북경중심 하북성에 있었다 해야 할까요...?.
평양성이 현 하북성에 있었다 처도...강단사학이 떠들던 금나라의 최대 영토는 최소한 감숙성까지니...말이 않 됍니다.
구하는 황하의 아홉개 지류를 말하는 것이고, 그 황하가 넘쳐 흘러 요동, 요서지방을 스나미처럼 휩슬고 지나갔다고 했을 때의 상황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역시 대륙조선사에서 주장하는 그 논리와 객관적 증거(역사서의 기록)는 틀림없는 것으로 하나 하나 밝혀지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그동안의 여러 결과를 종합해 보면, 화의 당사자는 조선이며, 조선은 화의 본체라는 것입니다. 역시 영토는 요충지 땅과 사해의 땅을 통치한 것이지요. 아무리 막강한 나라라 하더라도 "망'할 때는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힘없이 무너집니다. 역사가 증명하지요. 님의 건투를 빌며,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북경이 연연산이라는 학설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럼으로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카페를 페쇄하셨으면 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불쌍한 님과 함께 저승길 함께 가야 될 것 같습니다.
해무리님. .
님이 걱정하지 않아도 이 까페를 진심으로 아끼는
분들이 많으니 폐쇄 운운하시려면 님이 나가셔도 될듯 싶어요 . . ^^
불쌍한 분이 많군요
천정점여...해무리님...
태양이 직각으로 내리 쏘는 위도지점이 아니였군요...제 생각이 어설펏습니다.
경도를 나누는 남북 수직선을 말하는듯 합니다...?
어쨋거나 그래도,,,진랍은 호주정도니...동경 130도를 중심으로 봐도 현 한반도와 유사한 경도인데...
문젠 현 북경을 연경으로 보고...악라(아라사)를 그 연경(북경)에서 동북 몇천리라 보면...역시 진랍의 경도인 130도선 비슷한 지점이나오는데...
홍대용(거인)은...진랍과 악라의 천정점(경도)는 서로 달라 자기 기준으로 한단 말을 쓴 듯 합니다...?
이경우 북경은 현제보다 한참 동쪽이든 서쪽이든 해야 홍대용의 말이 설명됍니다...?
참 일해가 안 가는건요...
하지에 태양이 약 16도 빗각이라서...오히려 선선해진다는게 이해가 않 갑니다,
물론, 7원이 돼야 최고 뜨거운 계절인건 한반도나 북경이나 비슷할텐데...오히려 서늘하여진다란 말로...슬슬가을이 됀단 식으로 말합니다...?
제 머리론 이해가 않 갑니다...?
위도 50도 비슷한 울란바타르도 우리하고 똑같이 하지가 한참 지난 칠월말에 가장 덥거든여...
북경도 마찬가지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