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스님은 평생 불과 인연이 많았던 분입니다.
처음 금강산 신계사 보운강회에서 경을 보고 있을 때 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더라"가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은암이 사라졌더라"입니다. 해은암이라는 산내 암자가 불타서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스님은 걸망을 삽니다. 한없는 무상을, 경전 밖에서 절감한 것이지요.
이리하여 남방으로 내려와 경허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두번째 불과의 인연은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서의 보림 당시의 일입니다.
부억에서 불을 지피다가 깨달음을 얻게 되지요.
이때의 오도송이 저 유명한 "부억에서 불을 지피다가 --- " 입니다.
또 한번의 인연이 있는데, 오대산 상원사 시절에 불을 만나는 것입니다.
많은 도량이 불에 타서 사라집니다. 이때 스님께서 평소에 서간이나 게송 등을 모아서 정리한 것으로 생각되는 문집 "일발록(一鉢錄)" 역시 불에타서 사라집니다.
저는 예전에 "방한암선사"라는 책을 쓸 때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일발록이 살아있었더라면 ----" 혹은 "만약 일발록이 그때 불에 탔지만, 스님께서 다시 기억을 되살리거나 글을 수집하여 다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왜 안 했던 것일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에 시봉하시는 스님들이 그러한 작업을 독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이때 역시 스님은 또 한번 저 해은암의 소실로 인해서 무상을 절감한 것과 마찬가지로 무상을 절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글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다 부질없는 짓. 글이 있든지 없든지
도는 존재하는 것, 도를 깨치는 사람도 존재할 터 ----
이렇게 생각하셨을지 모릅니다.
어쨋거나 스님의 "일발록 소실"과 그 복원하지 않음은 결국 무상에 철저하였던 것이며
글을 자기로 삼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께 떠오르는 분이 잇펜스님입니다.
잇펜스님은 왕생하시기 전에 자신의 저술들을 모아서 불을 태웁니다. 분서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진실로 "나무아미타불"이 존재하는 한 다른 것은 다 무용하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글이라는 것을 자기로 삼아서 글을 남겨봐야 그것은 또 하나의 망집이고 집착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자기의 글이 있든 없든 나무아미타불을 외울 사람은 있을 것이고 나무아미탐불을 외워서 극락에 갈 사람도 있으리라는 믿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글 역시 무상하다는 것을 절감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한암스님의 마음이나 잇펜스님의 마음이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평생 '글쓰는 사람'으로서 글에 대한 집착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두 분 스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제 인생의 목표는 '글로부터의 해탈'이 됩니다.
글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글 쓰는 것이 존재이유의 하나이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 역시 존재 이유일 것입니다.
과연 나는 내 죽기 전에 내 저술들을 다 불태울 수 있을까?
컴퓨터 작업하다가 날아가버리는 글들을 방하착하고 다시 복원하려 다시 쓰지 않으려 할 수 있을까?
숙제입니다.
현단계에서는 이런 정도의 대답은 가능할 것같습니다. 내 생애 동안에
내 스스로 정리하여 모아놓은 글들 말고는 내가 죽고 난 뒤에는 누구도 내 글들을 모아서 책을 내고 어쩌고 하지 말아도 좋다는 것이고 그런 짓은 하지 말라, 고 당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