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항과 청널공원
2024. 2. 4.
소을비포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139호
고성 소을비포 신성은 조선 시대 수군들이 전투를 위하여 해안 벽에 쌓은 성곽이다.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칠성지”등의 문헌에는 남해안의 왜구 방비를 목적으로 진(鎭)과 보(堡)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 권121에서 처ㅣ초로 소을비포가 나타나며, 당시 군함 제작에 쓰일 소나무 재배지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에 아래의 기록이 전한다. 소을비포성은 현의 서쪽 47리에 있으며, 성종 22년(1491)에 쌓았다. 둘레는 835척(250m)이다. 소을비포성에는 조선시대에 규모가 작은 지역의 수장인 종9품 권관이 파견되었다. 군사를 불러 모으는 곳인 소모진을 선조 37년(1604)에 거제로 옮겼다거 선조 39년(1606)에 이곳으로 다시 옮겼다, 평면 형태는 반원형이며, 둘레 330m, 체서의 폭은 5~6m이다. 체성을 쌓은 방법은 조선시대 때 읍성을 쌓은 방법과 비슷하다. anslw 3곳과 치성, 성내에서는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그중 공방의 흔적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청널공원
삼천포 쥐치포의 유래
먹거리가 귀하던 1960년대에 상품 가치가 없어 사료와 비료로 쓰이던 쥐치를 삼천포 청널굼터 주민들이 포를 떠서 말려 먹기 시작했던 것을 일본의 조미 어포(화어) 가공기술을 접목하여 현재에 쥐치포로 발전시켰고 쥐치포 가공공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삼천포 쥐치포의 호황기인 1960년대 말 ~70년대에 허가받은 가공업체는 80여개 정도였지만 가정집 등 가내수공업자를 포함하면 200여 곳을 웃돌아 아줌마들은 쥐치의 포를 뜨고 아이들은 발에 널어 말리는 광경을 동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삼천포 쥐치포가 전국에 알려져 국민 간식거리로 자리매김하는 한편, 일본 등지로 수출하는 주요 품목이 되어 단일 상품 수출 1,000만 불을 달성하기도 하는 등 쥐치포 생산이 지역민의 주요 수입원으로 자리 잡아 “천원도 귀하던 1970년대에 삼천포에서는 개도 만원따리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쥐치가 수산도시 삼천포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불황을 몰랐던 삼천포 쥐치포 업계가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쥐치 어획량 감소, 1988년 한일. 한중 어업 협정 체결에 따른 어장 축소. 이상 기온과 남획으로 인한 어자원 고갈이 심회되어, 현재는 몇몇 가공업체들만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