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석리(臥石里) :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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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御屯)마을 :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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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래골(仙來谷) :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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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석리(擧石里) :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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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랑의 시선(詩仙), 영원한 자유인의 안식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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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과 시와 방랑으로 일생을 마친 천재시인 김삿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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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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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此竹彼竹 化去竹)
바람 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風打之竹 浪打竹)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대로 (飯飯粥粥 生此竹)
시시비비를 붙이는 저대로 (是是非非 付此竹)
손님접대는 가세대로 (賓客接待 家勢竹)
시정매매는 세월대로 (市井賣買 歲月竹)
만사가 안되니 내 마음대로 (萬事不如 吾心竹)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 대로 (然然然世 過然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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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김삿갓의 대나무시(竹詩)이다. 위의 시에서 ‘죽(竹)’은 대나무가 아니라 ‘…대로’라는 우리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조선왕조가 그 임종을 향해 달리면서 혼미를 거듭하던 19세기 중엽, 이 땅에 걸출한 두 인물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김삿갓과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두 사람이지만, 막상 그 두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하면, 실상 제대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인물이 바로 이 두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점, 전국을 방랑(?)하며 천하를 주유하였다는 점, 그 생애를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존경이나 찬사를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다는 점, 두 사람이 모두 필자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점 등이 공통된다. 본 편에서는 두 인물 중 방랑시인 김삿갓에 대하여 그와 지명에 얽힌 인연을 살펴보고자 한다. |
당시에 한시를 짓는 선비들은 서로 문자를 맞추고, 기, 승, 전, 결을 논하며, 또 그 주제로 화조월석(花鳥月石)이나, 음풍농월(吟風弄月)에, 벼슬자리에서 밀려난 선비는 하는 짓거리가 임금을 사랑하는 투의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나 불러야 시의 격식과 품위를 지킨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그 당시에 우리의 김삿갓은 이것을 거부하였다. 기성의 선비들이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국한문 혼용 무정형시를 짓는가 하면, 또 그의 시어(詩語) 속에는 아니꼬운 것, 뒤틀린 것, 더러운 것들이 거침없이 토로되었고, 우리말의 속어, 비어 등 실제 생활에서 비롯된 모든 것들이 구애받지 않고 인용되거나 등장하였으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술이 있어 반갑고, 시가 있어서 인생이 즐거웠던 천재시인 김삿갓.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그는 일체 자기의 이름이나 경력, 고향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항상 삿갓을 쓰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김삿갓, 한문으로는 김립(金笠), 또는 김사립(김莎笠)이라 불렀으며, 방방곡곡에 그의 시와 행적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나중에는 곳곳에 김삿갓 노릇을 하면서 떠돌아다니는 유랑시인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에 그의 명성이 조선 팔도에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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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갓 쓰고 비바람 맞으며 36년 유랑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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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다리 소나무반에 죽이 한 그릇
하늘 빛 구름그림자 함께 떠도네.
주인이여 차린 것 없다 미안해 마오.
나는 물에 비친 청산을 사랑한다오.(원문생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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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김삿갓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는 시 중의 하나이다. 멀건 죽 한 그릇을 받아 놓고, 가난한 살림에 멀건 죽이라도 베풀어 준 주인을 위해, 죽 속의 청산을 사랑한다는 시인의 마음이 너무도 애처롭다. 금강산으로, 계룡산으로, 무등산으로, 구월산으로, 진주로, 부벽루로, 광한루로, 표표연정으로, 절로, 서당으로, 주막으로, 문전걸식에다 개에게 쫓기면서서도 휘파람 불 듯, 36년의 유랑생활에 시를 뿌리고 다녔지만, 그의 이런 생애를 오늘날의 무전여행처럼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말이나 당나귀를 탄 편한 여행도 아니요,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 채 죽장 짚고, 미투리 신발과 헤진 옷에, 비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때로는 굶주리고, 때로는 길가에서 자고 걸식하며, 이 세상을 극한의 체험으로 터득하였던 시인 김삿갓. 그는 굶주림에 떠는 농민과 가렴주구의 벼슬아치, 눈에 비치는 세상의 가식과 위선을 비웃으며 그것들을 뛰어 넘고자하였다. |
그는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베개 삼아 천지간을 자기 집으로 알고 대자연속을 자연과 하나가 되어 생사를 내 맡긴 채 발길이 닿은 대로 떠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파격적인 시와 기행을 전설처럼 뿌리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이 땅의 산수간을 표표히 넘나들며 살았던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 명(名)과 이(利)를 쫓아가는 세태에 김삿갓은 그것을 뛰어 넘는 초월자요, 대 기인(奇人)이었으며, 대주가(大酒家), 걸인(乞人), 광인(狂人), 달인(達人), 그리고 민중시인이자 방랑시인, 참여시인이었으며, 대 풍류객(風流客)이었던 것이다. |
김삿갓(1807 - 1863, 김정호 : ? - 1864이니 서로의 생몰연대가 비슷한 것 같다)이 태어난 곳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순조 7년에 태어났으며, 본명은 병연(炳淵)이요, 호는 난고(蘭皐), 자는 성심(性心)이다. 1827년 강원도 영월 동헌의 백일장에서 그날 장원은 삼옥리에 사는 당시 20세의 김병연이 차지했는데, 그날 출제된 시제(試題)가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김익순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탄식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김익순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김병연은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홍경래 난 때 선천 방어사로서 홍경래의 반란군에게 항복하여 그 휘하에서 좌영장이라는 벼슬까지 하다가 반란군이 토벌되자, 홍경래 휘하의 주모자 김창시의 목을 1천냥을 주고 사서 관가에 바치고 자신의 죄를 탕감받으려 하였음)을 규탄하기를 “한번 죽음은 가벼우며, 만번 죽어 마땅하다(一死猶輕 萬死宜)”하고 천하의 역적으로 매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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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석리 일대 땅이름이 모두 시인을 위해 준비된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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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집에 돌아와 모친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어머니는 사색이 되어 그때야 김익순이 바로 병연의 조부임을 밝혔다. 김삿갓은 앞이 캄캄하였을 것이다. 조부를 욕하였다는 사실보다도, 그리고 홍경래를 욕하기보다도, 그 조부의 파렴치한 행동에 더욱 분노하였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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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만리 장천 높다 해도 머리 들기 어렵고
삼천리 땅 넓다 해도 발뻗기 힘들구나(원문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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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김삿갓의 묘 > | |
이것은 그의 <자탄>이라는 시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을 만나보기 위해서는 강원도에서도 산골로 유명한 ‘영평정’(영월, 평창, 정선)의 그 영월고을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곳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臥石里)의 어둔(御屯 또는 於屯)마을 선래골은 김삿갓이 어려서 살았던 곳이다. 또 와석리 노루목은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씨가 김삿갓의 묘가 양백지간(태백 - 소백사이)의 영월 어딘가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묘소를 찾아 나섰다가 1982년 10월에 발견한 그의 묘가 있는 곳이다. 추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입고 있던 솜옷을 벗어주고, 어깨에 걸친 겹옷을 입었으며,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김삿갓. 1863년(철종 14) 3월 29일 마지막을 전라도 화순의 동복면 구암리에서 세상을 마쳤는데, 그 소식을 들은 아들이 천리 길을 달려가 부친의 시신을 메고 돌아와 이곳 영월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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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입고 있던 솜옷을 벗어주고, 어깨에 걸친 겹옷을 입었으며,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김삿갓. 1863년(철종 14) 3월 29일 마지막을 전라도 화순의 동복면 구암리에서 세상을 마쳤는데, 그 소식을 들은 아들이 천리 길을 달려가 부친의 시신을 메고 돌아와 이곳 영월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어둔마을. 대개 산골짜기나 햇빛이 적은 곳에 ‘어둔’이라는 지명이 많다. 김삿갓이 마치 천형(天刑)의 죄인인양 햇빛을 피하여 삿갓 쓰고 일생을 어둡게 살았으니 ‘어둔’이라는 이름이 이 시인의 생애를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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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래골(仙來谷). 이 땅을 신선처럼 표표하게 살다간 김삿갓이 살았던 곳이니 “신선이 내려왔다”는 뜻의 선래골이라는 이름이 그냥 붙여지지 않은 것임을 알겠다. 김삿갓이야말로 이 땅의 초탈한 신선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근래에 ‘선낙골’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전 자료에는 선래골(선내골)이라고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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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석리(臥石里). 천하를 주유하며 방랑하던 시인의 육신이 이곳에 와서 누웠으니 와석리라는 이름도 김삿갓이 이곳에 돌아와 누울 줄 알고 미리 붙여져 있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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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잘 마시고, 우스개 소리를 좋아하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가끔 대성통곡한다. 평생에 과거를 보지 않았
다니 괴상한 사람이다. 밤이 깊었는데, 나를 발길로
건드리면서 금강산 구경을 했느냐고 물었다. …아직
못 가보았다고 했더니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나는
해마다 금강산 구경을 한다. 혹은 봄에, 혹은 가을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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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석리(擧石里) 든돌마을. 와석리의 김삿갓 묘소 못미쳐서 계곡의 길가에 있는 큰 돌이다. 바위가 길가에 들려있으니 뜬 돌이요, 거석(擧石)이 곧 부석(浮石)이다. 김삿갓이 험한 세상을 뜬구름처럼(浮雲), 부평초(浮萍草)처럼 살았으니, 이 바위가 외롭고 고달펐던 한 시인의 에뜨랑제와 같은 생애를 증언하기 위하여 그 묘소 어구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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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 김삿갓 문화큰잔치의 한 모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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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일대가 모두 이 불우했던 시인의 일생을 반추하기 위하여 땅이름들을 예비해 두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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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황오라는 사람이 서울에서 김삿갓을 만난 내용을 그의 문집에 적은 글이다. 마지막 임종 때 “저 등잔불을 꺼 주시오”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운명의 사슬로 인하여 가족도 집도 버린 채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팔도를 방랑하였지만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으며, 두고두고 시선(詩仙)으로 회자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