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덮다
이 난 영
열정적인 난타 공연이 끝나자 천연염색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모델 못지않게 멋과 맵시를 뽐내며 등장하는 회원들이 관객을 사로잡았다. 자연에서 찾은 빛깔 고운 우리 색, 누구에게나 잘 어울린다.
천연염색인데도 기술이 뛰어나서인지 색이 곱다. 원피스, 조끼, 홈웨어 등 생활복은 편안하면서도 새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그중 올이 고운 모시 한복을 입은 출연자는 단연 돋보였다. 쪽 찐 머리에 군청색 치마와 하늘색 저고리, 반물빛 숄까지 두른 자태가 고아하다.
모시옷만 보면 어머니가 생각나서 그리움에 사무친다. 어머니는 청주가 고향이다. 관직에 계셨던 두 가문의 할아버님이 손자 손녀 자랑 끝에 혼인을 약속한 게 인연이 되어 열여섯 되던 해에 괴산 산골로 시집을 오셨다. 청주의 내로라하는 부잣집 따님인 열여섯 살 소녀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괴산 산골 총각과 결혼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시집와서 보니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데다 매일 끼니까지 걱정해야 했단다. 얼마나 어이없으셨을까. 일제 강점기 때 배고프지 않은 사람 어디 있었을까마는 산골이니 더했을 것이다.
부지런한 어머니 성격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농사를 지으면서도 틈틈이 삯바느질하셨다고 한다. 대갓집 규수답게 음식도 잘하고, 손끝이 여물어 누비 바지저고리에 마고자까지 못 하는 것이 없었으나, 정갈한 성품이 그대로 나타나는 모시옷 만드는 것은 단연 으뜸이었다고 한다.
타고난 솜씨에 지혜와 덕을 갖춘 어머니는 읍내까지 소문이 났고, 밀려드는 일감으로 밤을 낮 삼아 일해도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가난을 탈피하는 길은 자식 공부시키는 길뿐이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굶기를 밥 먹듯 하며, 60∼70년대 산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들들을 대학까지 보내셨다.
옆지기는 고생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고, 결과적으로 미래의 행복을 꿈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한다.
매일 늦게 퇴근하는 옆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무료해 손뜨개를 배워 어머니 스웨터, 조끼, 모자를 떠 드렸다. 매우 기뻐하시면서 ‘나도 모시옷은 만들 수 있는데’ 하신다.
세월이 흘러도 부지런함이 몸에 배어있는 어머니인데 아이들 학교 보내고 얼마나 적적하셨을까 생각하니 죄송했다.
슬며시 나가 모시 한 필을 사다가 어머니 품에 안겨 드렸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면서 젊었을 적 솜씨를 발휘해 자녀들 생활한복을 아주 맵시 있게 만들어 주셨다. 연세가 있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놀랄 만큼 훌륭한 솜씨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자녀들이 좋아하니 자신감을 얻은 어머니는 흰색 모시 원단을 떠다 직접 염색까지 하셨다. 청색, 보라색, 하늘색, 다홍색 등 곱게 물을 들여 기성복 못지않은 디자인에 정성까지 곁들였으니 실용적이면서도 멋스러웠다. 옷이 밋밋하다 싶으면 수예점에 가서 예쁜 자수까지 놓아다 주시니 매우 미려했다.
행복한 듯 재봉틀 앞을 떠나질 않고, 바늘과 실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취하셨다. 모든 시름 다 잊으시고, 열심히 바느질하는 모습은 팔십 노인이라도 기품 있고 우아했다. 다른 분들 같으면 당신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드실 텐데 하는 생각에 그저 고맙기만 했다.
모시옷은 정성으로 지어 기품으로 입는다고 한다. 어머니가 사랑과 정성으로 만들어 주신 모시옷을 입고 직장엘 가면 행동까지 조신해지니, 직원들이 우아하고 품위가 있다고 중전마마라고 불렀다. 문학에 소질은 없어도 어머니의 훌륭한 바느질 솜씨를 널리 알리고 싶어 그 이야기를 MBC라디오 여성시대에 응모하였고, 방송에 나오면서 어머니는 더욱 자신감을 얻으셨다.
불볕더위에 질감이 깔깔하고 촉감이 차가운 데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으면서 시원한 바람이 솔솔 통과하는 모시옷을 입고 있으면 나도 시원하지만, 보는 사람도 시원함을 느낀다. 손질은 어려우나 아름답고 시원해 한번 입어보면 모시의 마력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는 다니시는 절의 주지 스님 장삼부터 이웃 노인들의 수의까지 만들어 주셨다. 힘들게 왜 그러시냐고 하면, 사정이 여의치 못해 수의도 장만 못한 노인들에게 수의 만들어 주는 것도 보시하는 것이라며, 기꺼운 마음으로 밤잠까지 설쳐가며 만드셨다. 당신 몸 아픈 줄도 모르고,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이웃들의 어려운 사정까지 고루 보살피셨다. 자녀들에게도 예쁜 모시이불을 만들어 주시고는 너무 무리하셨는지 병환이 나셨다. 고난을 오직 부지런함으로 극복한 어머님은 지난한 삶을 살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으셨다.
어머니와 함께한 27년, 어머니가 가장 행복해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손주들과 함께할 때와 재봉틀 위에서 모시와 함께하실 때로 기억된다. 어머니의 모시이불 우리나라의 미를 상징하는 여름 전통 옷감 모시는 알게 모르게 어머님의 자존심이고, 사랑이고 행복이었지 싶다. 지혜와 덕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면서도, 언어의 겸손까지 겸비해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인고의 세월을 어머니의 모시이불 바느질로 승화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모시이불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 모시이불을 보며, 그리움의 냄새 어머니의 냄새를 맡아 본다. 애틋함이 차올라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머니의 자애롭고 다정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사랑과 정성, 바람을 덮어 본다.
▲제33화 수필 문학상 수상 작품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