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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에서 이어짐)
완도수목원을견학한 후 일기관계로 보길도로 가지못하여
대신 '남한답사 1번지 ' 인 강진의 다산초당과 영랑생가로 향하였다.
여행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간략하게 다산 정 약용 선생님에 대하여 알아 본다.
정 약용 (丁 若鏞, 1762 - 1836 )
본관 나주(羅州), 字는 美鏞, 頌甫 호는 茶山 시호는 文度
1762년 ( 영조 38) 광주부 초부면 마현리 (경기도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다산유적지) 에서 정 재원의 넷째 아들로 출생
1777년 ( 정조 1) 실학의 선구자 성호 李 翼의 유고를 읽고 그의 학문을 따름
1789년 ( 정조 13) 과거급제
1792년 ( 정조 16) 수원 화성의 설계를 명령받고 거중기 설계
1794년 ( 정조 21)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고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감
1797년 ( 정조 21) 천주교 신자로 탄핵받아 스스로 해명하는 상소를 올림. 곡산부사 제수 <마과회통> 저술
1799년 ( 정조 23)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공격받자 형조참의 사직
1801년 ( 순조 2) 신유사옥으로 투옥되었다가 강진으로 유배
1818년 ( 순조 18) <목민심서> 저술 유배지에서 풀려나 귀향
1819년 ( 순조 19) <흠흠신서> <아언각비> 저술
1836년 ( 순조 36) 별세
1910년 ( 순종 3) 文度라는 시호를 받음
다산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서로 만나는 두물머리 즉 요즘의 양수리를 바라보는 마을인 마재(馬峴마현)마을
에서 태어나고 삶을 다한 후 이곳에 묻혔다. 이것은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일이다.
다산 이전 조선의 실학파는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북학파' 와 '경세치용'학파로 두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다산은 이를 실사구시 정신으로 하나로 모은다 마치 북한강과 남한강이 두물머리에서 만나
하나의 한강이 되듯이.
다산의 가계는 선조가 내리 8대를 청요직의 하나인 옥당(홍문관)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문인,, 재사의
집안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는 당파싸움이 극심하여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남인이면 벼슬길을 허락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정치적 실권을 잡은것은 이 성계의 역성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신진사대부들로
이들은 조선개국후 15C에 훈구파로서 절정의 권력을 누리게 된다.
이에 반하여 이 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킨 사림파는 향촌으로 낙향하여
경학을 연구하고 왕도정치를 강조하는 修己之學을 추구하며 후학을 양성하며 실력을 기르고 있었다.
이들 사림이 16C- 17C 에 이르러 훈구파의 지나친 권력사유화에 맞서 왕권의 전제화를 추구하던 성종 등
왕실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며 비로소 과거를 통해 중앙관계로 진출하게 된다.
이 사림파의 계보를 보면 정 몽주로 부터 길재 -- 김 숙자 - 김 종직 -- 김 종직의 제자로 정 여창, 김 굉필,
김 일손이 있고, 정 여창, 김 굉필 문하에서 이언적, 서 경덕, 조 광조 , 김 안국 등이 나오며,
조 광조의 제자로 조 식, 이 황, 이 이, 성 혼 등이 있다.
사림파가 중앙정계로 대거 진출함에 따라 정치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들이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것이 무오, 갑자 , 기묘, 을사 등 조선 4대사화이며 이 사화의 결과 일시적으로는 사림파가 숙청되고 사사되는 등 큰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결국은 향촌에 확고한 기반을 마련한 사림파들이 선조조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중앙정계를 접수한다.
( 앞서 견학했었던 소쇄원의 양 산보도 이 사화의 하나인 기묘사화때 스승 조 광조의 사사로 말미암아
낙향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은일자의 삶을 살게된 것이다.)
여기서 부터 사림파는 다시 4색 붕당의 길로 접어들어 이 황의 제자들은 영남학파로 동인이라 하며 주리파이고,
이 이의 제자들은 기호학파로서 서인이라 하며 학문적으로는 주기파이다.
여기서 동인, 서인은 별 의미가 있는것은 아니다. 단지 문관의 인사권을 가진 정5품 이조전랑직을 두고
대립관계에 있던 구세력의 대변자 심 의겸이 서울의 서쪽에 살고 신세력의 대변자 김 효원이 동쪽에 살아서
이 두사람을 중심으로 모이는 세력을 자연히 동인, 서인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진 사림은 동인에서 정 여립 모반사건과 정 철 건저상소 사건으로 말미암아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어지게 되고 광해군때는 북인이 정권을 잡게된다.
이들은 조 식의 제자들로서 의리를 중시하고 대외관계에 탄력적이며, 따라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뒷받침하고 임진란 때는 수많은 의병장들이 이 북인계열에서 나온다.
한편 서인은 광해군에 반대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된다.
서인은 북인과 달리 화이론에 따라 명청 교체기에 스러져가는 명의 편을 들고 신흥 강국인 청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결국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까지 겪는 비극의 역사를 낳게 된다.
(우리가 풍랑때문에 가지 못한 보길도 부용동을 건설한 고산 윤 선도가 이때의 사람으로,
윤 고산은 병자호란시 곤궁에 빠진 인조를 도울려고 의병을 모아 강화도로 갔으나 인조가 이미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겠다며 제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정착한 곳이 바로 보길도인 것이다. 이때 윤 고산은 남인 계열 이었으므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이 모함하여
임금을 도우러 오지 않았다는 터무니 없는 괘씸죄에 걸려 8개월간인가 경북 영덕으로 유배를 가기도 한다.)
다시 붕당으로 돌아와서
이 서인과 남인간에 결정적으로 논쟁이 붙은것이 '예송논쟁' 이란 것이다.
이는 1차 , 2차 예송논쟁이 있는데,
1차예송논쟁은 인조의 아들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서인은 효종이 장남이 아니므로 1년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남인은 효종이 장남은 아니었지만 효종이 즉위시 이미 장남인 소현세자가 죽고 없었으므로 적통과 마찬가지로
3년상을 주장했다. 결과는 서인의 주장인 1년상이 받아들여지며 서인의 정치적 승리로 끝난다.
2차 예송논쟁은 이번에는 효종의 비가 죽자 역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식이 문제되어
9월상을 주장하는 서인과 1년상을 주장하는 남인의 주장이 대립되어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1년상을 치르고 남인이 정권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러한 남인의 우세속에 서인과 공존하는 정국은 숙종초 경신환국이 일어나기까지 계속되었다.
여기까지는 자율적 붕당이었는데 이후 부터는 왕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한쪽 정파를 제거하고
다른 정파를 등용하는 등 이용하였으므로 타율적 붕당이라 한다.
경신환국의 결과 서인이 집권했으나 왕비 민씨 (인현왕후)가 후사를 낳지 못하자
숙종이 후궁 숙원 장씨를 총애하게 되고 장씨 소생 왕자 균을 세자로 삼고 장씨를 희빈으로 삼고자 하니
서인이 반대하였다. 이에 숙종이 송 시열등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을 재등용하였다.
(소쇄원에 있는 제월당, 광풍각, 소쇄처사양공지려 라는 글씨가 송 시열의 것이다)
이 장씨가 우리가 TV 연속극에서 많이 본 그 장희빈이다.
이 장씨가 왕비로 까지 책봉되었으나 차차 방자해져서 그를 싫어한 숙종이 폐비된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에 앉히게 된다. 그 결과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고 이제 서인의 독무대가 된다.
하지만 남인의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이 분열하여 송 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성혼의 제자 윤 증을 영수로 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고 이후 노론이 계속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된다.
이 노론은 호락논쟁을 벌이게 되고 그 결과
人性과物性이 같다고 주장하는 인물성동론의 낙론 시파---이는 理 즉 자연과학사상에 영향을 받은
중상학파와 개화사상으로 그 맥을 이어가며 구한말 개화파, 일제강점기 실력양성론 등으로 이어진다.
人性과 物性이 같지 않다고 주장하는 인물성이론의 호론 벽파 --- 이는 대의명분에 입각한
화이사상을 중시하는 계열로 위정척사사상으로 맥을 이으며 구한말 무장독립투쟁으로 이어진다.
이후 영, 정조 시대 격화된 당쟁을 완화시키고자 탕평책 등이 시행되었고
17,18C 조선은 다시 한 번 문화 부흥기를 맞는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다산 정 약용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나 지방에서 이름을 알릴 정도였으나, 성호 이 익의 글을 읽으며
비로소 큰 학문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스물둘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정조대왕을 만난다. 공부잘하는 선비를 총애한 정조가 성균관 우등생인 다산을 눈여겨 본것은 당연했다.
(당시 조선의 과거제도는 생진과와 대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생원시는 오경과 사서, 진사시는 賦(부)와 詩로
초시에서 각 700명 복시에서 각 100명씩 뽑았다.
대과는 문과로서 동당시라고도 하며 생원진사시를 통과한 사람과 성균관 유생에게 자격을 주어
초시 240명, 복시 33명 전시 로 3번 치루어 1등이 장원으로 종6품 참상관직을 주니 이부터 수령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
스물여덟에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을 걷기 시작한 다산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출세가도를 달린다.
홍문관 수찬 시절이던 31세 무렵 정조로 부터 수원 화성을 설계하라는 역사적 과업을 받게 된다.
이때 매우 독창적인 설계로 세계 성곽사에서도 독특하고 창의적인 수원화성를 설계했으며,
거중기 등 다양한 축성용 기기를 제작하여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한다.
성균관과 비변사의 4 - 5품관을 거쳐 서른 넷, 대과에 합격한 지 6년만에 다산은 당상관(통정대부)인
승정원의 동부승지(정3품)에 임명된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와 함께 전도양양하던 다산의 삶도 끝없는 유배의 질곡으로 떨어진다.
남인인 다산이 출세가도를 달리는 것을 시기의 눈으로 지켜 보던 노론측에서 다산의 일가들의
천주교 연루 문제를 들고 나와 다산도 같이 처벌받게 되는 것이다.
정조 즉위시에는 이 문제가 유야무야 넘어 갔으나 바람막이가 되어 주던 정조가 없자 박해가 시작되었다.
집권 벽파가 시파인 남인계를 축출하고자 탄압을 가한 것이다.
이것이 신유박해로서 이때 이승훈, 이 가환, 권 철신, 주 문모 등이 처형당하고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당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만약 정조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다산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재상이 되었겠지만,
오늘날 세계가 우러러보는 훌륭한 사상가, 저술가는 없었을 터이니, 다산 개인에게는 엄청난
불행이지만 오늘의 우리 정신세계를 위해서는 뛰어난 재상보다 현재의 다산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하여 강진으로 유배를 오게된 다산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다산초당에서 10년간 머물며
500권이 넘는 저작물을 쓰게 된다. 오늘날 한국답사의 1번지는 이렇게 하여 생겨나게 된 것이다.
다산 기념관에서
승혁이가 다산 선생님을 조금이라도 닮아줄려나
다산기념관에서 나와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도중 두충나무 숲길에서
다산초당을 찾아가는 고개길에서 속살을 드러낸 남도의 붉은 황토
남도의 황토는 특히 붉은 색으로 유명하다. 긴 세월의 민중의 아픔이, 피가 스며들어서 그토록 붉은색인가
다산초당 가는 길목에 있는 다산초당 안내표지판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에 있는 죽은 나무가 교묘히 비틀어지며 그위에 이끼가 무성한 모습
'오솔길'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다산초당 오르막길에는 산길이 편하게 정비되어 있지 않고 나무뿌리가 마구 튀어나와 얽혀 있어
시인 정 호승은 '뿌리의 길' 이란 시로 그 길을 기리고 있다
뿌리의 길 - 정 호 승 -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 정호승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작과 비평사)중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마지막 고비 -- 92 계단
드디어 다산초당 도착-- 초혜야 힘들었지, 불평않고 잘 따라와서 고마워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해남 윤씨 후손이라는 강진군 문화유산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19C초 다산의 세계로
빠져들어간 우리 일행분들
다산 선생님이 주로 기거 하시면서 저작에 몰두하셨다는 다산동암, 18명 제자들은 서암에 기거했다함.
다산 선생님이 멀리 강진만을 바라 보며 향수를 달랬다는 천일각 -- 백련사로 넘어가는 길 중간에 있다.
다산초당에서 내려오는 길
200년전의 한 쓸쓸한 유배객은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오늘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것 외 무슨 특별한 할 일이 있을까
몇백년전의 위대한 실학자를 만나보고 그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현재의 내 삶을 한번이라도 되돌아 볼 수있다면
그 또한 시공을 격한 큰 스승을 가지게 된 크나큰 기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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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방대한 역사 자료 잘 읽었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께서 연구하신 것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해운대2기 정성식/해설사와 함께 떠나는 역사탐방길 같은 여운입니다,명재상으로 남았을 다산선생과 유배되므로서 남긴 정신문화 좋은 대비였네요.
선생님 다음 여행은 꼭 같이 가시지요. 현장감 이거 중요합니다.
한게령님!~생태여행에는 꼭 같이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멋진 글과 사진...감동입니다!~*^~^*
인제대팀분들 때문에 활기찬 여행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초당]으로 가는 '뿌리의 길'은 특히 했어요^^ 오르막이 정말 한참을 올라 가야 하더군요. 가장 높은 곳에 위치에 있었던 것 같아요^^
애들 때문에 해운대팀을 별도로 챙겨드리지 못해 죄송했었습니다.
여행에 참석하지 못해 정말 아쉽네요
좋은글과 사진 감사드려요~~~^^
정선생님 다음에는 함께 하시지요. 글로는 표현못하는 많은 것 이 있습니다.
여행 도중 버스에서 잠에 떨어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딸의 머리를 보호하시느라
눈을 떼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시는 모습을 뒤에서 보면서 참 자상한 아빠구나~ 했는데
글 솜씨, 사진 솜씨도 참 자상하시군요. 여행 복습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자료 감사하고 올리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