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희망하는 일을 이루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이 인도하는 길은 걷지 않으려 한다.
- 톨스토이의 <살아가는 날들을 위한 공부 중에서>-
산행의 열정이 조금씩 식어가도 새 봄이 돌아오면 여지없이 마른 가지에 수액을 채워 올리는 나무들처럼 아쉬움이 남는 일들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내면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약 10년이란 시간 동안 마음 속에 담고 있었던 점필재의 길, 그 미완의 길에 대한 아쉬움 또한 내게는 그러한 일들 중의 하나였다. 한편으로는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 나이에도 반드시 걸어보야겠다는 소망을 간직하게 해 준 지리산의 길이 남아있다는 것이..... <열정이 남아있는 한 청춘!>이라는 사무엘 울만( Samuel Ulman) 詩句가 아니더라도 아직은 배낭을 멜 힘이 남아 있고 걷고 싶은 산길에 대한 열정이 있으니 지리산을 걷는 날까지는 청춘이라고 믿어보자.
나는 일찍이 산을 알았으나 지리산을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이었고, 유두류록을 통해 점필재를 안 것은 이로부터도 10년이 지나서이다. 지리99 탐구 팀의 열정적인 선답과 촘촘한 보고서 덕분에 점필재의 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꾸준히 동북부의 길들을 훑고 다녔지만 온전한 루트를 한 번에 밟아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점필재의 기행시를 찾아 읽게 되었는데, 그것은 관료로서의 점필재가 아닌, 사림의 종조 문인으로서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보는 것 같아 큰 감동을 받았고, 그 구체적인 루트에 대해 더욱 더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점필재는 4박 5일의 두류산행을 하면서 느낌이 있는 곳마다 詩를 지어 총 11首의 산행시를 남겼으니, 산길을 걸으며 시를 지었던 지점마다 멈추어 서서 話者의 마음을 느끼고 음미해 보는 재미도 적지 않을 듯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핏빛 진달래 피고 두견새 슬피 우는 5월에 옛사람과 한마음이 되어, 좋은 산친들과 한걸음이 되어, 3박 4일 아름다운 지리 산천의 한 시절을 향유하게 되었으니, 이제, 점필재 선생이 42세가 되던 濕함이 사라진 가을날에 처음 걸은 그 길을, 545년이 지난 현재의 나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에 그 길을 완성해 보고자 한다.
花巖
꽃봉산은 花巖이다. 花巖은 꽃봉산 아래 특정한 바위가 아니고 꽃봉산 이름이 花巖이다.
華山 12곡의 華山이 바로 花巖이다. 花巖과 華山은 꽃봉산의 동명이칭이다.
巖은 바위라는 뜻만 있는것이 아니라 산봉우리의 뜻도 있다.
花巖에서 巖은 바위가 아니고 峯을 뜻한다.
# 2. 동강에서 출발하여 새봉에서 자다. <170503 : 1일차, 날씨 쾌청>
석탄일이기도 한 출발하는 첫날은 더 할 나위없이 쾌청하여 모든 미세 먼지가 사라진 것 같으니 신록의 수목들 사이로 빛나는 오색의 연등은 더욱 더 그 빛을 발하였다. 한껏 여유로운 걸음으로 동강을 따라 걷자니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華山 12曲의 새로움들을 알아가는 탐구자들의 희열과 즐거운 모습들이 강물따라 흘러간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렇게 어느 한 곳에 매진할 수 있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순수함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세파의 찌든 때 정도는 얼마든지 씻어내며 살아갈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어쩌면 나의 이 산행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동강 다리를 건너면서 꽃봉산을 바라보니 그 위로 비스듬히 이어진 시멘트 포장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저 길이 구시락재에서 운서마을로 이어지는 길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동강을 따라 운서마을로 가는 길을 걸어 들어갔다.
강물 속으로 뿌연 물빛 속에 팔뚝만한 물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이 전설의 가사어인지 감수재의 산행기에 나오는 錦麟魚(금린어)인지 모르겠으나 얼핏 금린어라 불리는 황쏘가리(錦鱗魚:비늘鱗)와 닮아 보인다. 감수재는 물고기에게 왜 기린麟자를 썼는지 궁금했는데지난 겨울 생초 어탕집 수조에서 자세히 본 쏘가리는 비늘이 없고 맨살에 기린의 문양을 하고 있었으니, 감수재가 사물을 보는 예리함이 새삼 놀랍다. 함께 길을 걷는 미산님께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물이 썩었네." 라는 동문서답이 되돌아왔다. 서로가 다른 생각을 하며 강물을 보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直江의 제방은 논과 냇물를 갈라 시멘트 포장도로로 곧게 뻗어 자연 제방의 입을 봉해 버렸고 만약, 동강에 댐을 만든다면 이 동강 마을도 물에 잠겨 버리고 말 것이니, 캄캄한 생각이 들었다.
운서마을을 지나며미산님이 '어데막걸리 한 잔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시기에 혹시 쉼터가 있을까 둘러보지만 산골마을의 구불구불한포장도로 뿐인데, 마침 <산지골펜션>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산지골님은 4년 전 뵌 적이 있고 연배도 비슷한데다가 최근 화산 12곡을 통해 동강에 대한 유쾌한 글도 접한 덕에 생소하지 않았다. 물이라도 한 잔 얻어 마실 요량으로 안으로 불쑥 들어서니 마침 마당에서 꽃에 물을 주고 계시다가 이른 아침의 불청객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귀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봉 곶감을 내오시고, 인사를 하고 출발을 하려는데 곶감 한 상자를 선듯내주신다. 염치없는 인간이 되었지만, <그 친절한 환대를 잊지 않겠습니다.^^>
가객님 댁을 지나치는데 말끔하게 새로 지은 건물에 데크 공사를 하고 있어 혹 밖에 계시면 인사를 드릴까했지만,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지나쳐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초파일이라 적조암에 오르는 차량이 많아서 미산 선생님은 히치를 할 수 있을까 기대하셨지만수포로 돌아갔고, 한쟁이골 입구에서 상대날등으로 오르는 길을 지나쳐 적조암을 향했다. 능선 길의 상태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상식적으로 대형 배낭을 메고 오르는 것만 해도 불편할 것 같은데, 그 옛날 점필재 일행이말을 타고 능선 길로 올라간다는 것은 나뭇가지에 걸려 낙마를 했을 수도 있을 것이기에 능선 길보다는 적조암 앞을 통과하는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함께 걷는 또 다른 산친 송연목씨는 전 치밭목 대피소 민대장님의 거창 某산악회 직속 후배이다. 치밭목 대피소에 4년간 머무르기도 한 전천후 트래커인데 사업차 외국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에 들어올 때마다 여전히 지리산을 찾으며 근자에 들어 자주 산행할 기회가 많았고 이번에도 마침 시간이 맞아 동참하게 되었다. 앞서 걷던 그 연목씨가 적조암 아래 <해동검도장 펜션> 마당에 세워진 노란색의 남근목과 여근목을 보고는 주춤거리더니 폰을 꺼내 사진에 담았다. 모양새가 얼마나 노골적인지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만 자연의 섭리란 본디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닐 런지 모르지.출산율이 저조한 요즘 세태에 다산을 권장하고 기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족상잔의 비극에서 희생된 장정들의 넋을 위로하는 것인지, 만든 이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보는 이에 따라 생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원초적인 풍경을 벗어나자마자 적조암으로 발길이 이어진다. 초파일을 맞은 적조암 경내는 형형색색의 연등속에 많은 불자들로 분주해 보였다. 대형 배낭을 지고 들어선 우리들의 모양새가 자연스럽지는 못했을 텐데 툇마루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보살님들이 공양을 권하시기에못 이기는 체하고 넉살 좋게 비빔밥과 떡, 과일을 먹었고 커피까지 마셨으니 정유년 사월 초파일, 적조암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입은 것이나 다름없어라. 벌여 놓은 잔치에 맛있게 먹고 봉축을 기원하였으니 축하객으로서의 의무는 다한 셈이라 여겨도 무방할 런지!
배부르게 먹고 적조암을 막 나서는데 어떤 남자 분이 다급하게 쫓아 나와 "등산로 외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됩니다."라고 외쳐서,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고 계곡을 따라 오른쪽 등로로 올라섰다. <꼭대>님의 '선인들의 옛길은 인간과 자연의 타협이다'라는 말씀처럼 점필재의 길은 부드럽고 유순하다. 나는 점필재의 노래에 따라 발을 맞추고 발걸음의 장단에 맞춰 점필재는 노래를 불렀다. 이내 그의 가사는 열두 폭의 그림이 되어 원시림과 바위 병풍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 병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노장동 돌배나무에서 좌측으로 틀어서 산죽과 너덜겅을 건너 미역 덩굴을 뚫고 금낭화 군락을 지나 상대날등 아래 지장사에 닿았다. 예전에는 박쥐굴에서 능선으로 올라 상대날등에서 내려왔던 가물가물한 기억이 다 소진이 되었고, 오래된아날로그의 기억으로는 도저히 찾기가 어려워 시간을 지체했다. 점필재는 이 곳 지장사까지 말을 타고 올랐으며, 이 길 이후에는 가팔라서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으며 길을 올랐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지장사에서 돌아 나와 환희대에 올라 잠시 휴식을 한 후, 선열암에 들러 조용히 점필재의 선열암시를 암송했다. 비가 내리던 어느 해 여름날 이곳 선열암에서 '구름이 뿌리내린 바위'를 확인한 적이 있으니 점필재가 이곳을 찾았던 날의 일기도 흐린 날씨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1수 : 先涅庵[선열암]
문은 등라 덩굴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 구름이 뿌리내린 우뚝 솟은 바위 아래 석간수는 맑고도 시원하구나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가고 / 다만 숲은 한가로운데 은거하는 선비들이 놀라는구나.
그동안 얼마나 여러 번 이곳을 찾았던가. 고운 최치원선생(857~?)과 김종직선생(1431~1492)이 500년 넘는 차이를 두고 함양 학사루에서 만났듯 시공을 초월한 한시 기행은 글의 에너지가 500년이 넘게 흐른 뒤에도 내 마음과 몸속에 살아 꿈틀거렸다. 단계석 고운 벼루에 정화수를 붓고 지그시 눈을 감고 둔탁한 등산화로 먹을 갈아 붓이 머금은 먹물을 화선지에 완전히 토해내듯, 발끝에 힘이 다할 때까지 점필재는 숙고열암을 노래 부르고 나는 배낭을 메고 춤을 췄다. 마음속의 때를 완전히 씻고 선생의 유두류기행시를 음미하며 나는 오늘 먹이 벼루를 뚫을 때까지 두 발로 점필재 길을 걸으리라.
獨女巖에 이르러 배낭을 내려놓고서도 한참을 창 꽂힌 짐승이 되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함양독바위는 왜 獨女巖독녀암이라고 하였을까. 유두류록에는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어 살면서 도를 닦아 하늘로 날아올라 독녀암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아침 해괴한 풍경을 본 것이 禍根인지 독녀암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異견들이 솟아난다. 환희대를 지나면 두개의 석문이 있는데, 독녀암 석문을 지나면 안락문 아니 悅樂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음양의 이치에 따라 선인들은 이 石門을性門으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
상상의 나래를 펴며 걷는 산길을 나와 10년 넘게 산행을 하신 <미산>선생님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독바위 아래에서 배낭을 지킨다는 핑계를 대며 신열암과 고열암, 의논대에 다녀오는 것을 생략하고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잠시 오수를 즐기셨으니, 어떤 일이든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입장에서 이해를 구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선인들의 유산기 또한 매 한가지라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쉽게 이해되는 곳도 있으나 의논대에 서서 유두류록의 향로봉과 미타봉을 끝내 풀지 못했으니 향로봉(상내봉)은 향로처럼 생긴 오뚝이 바위가 있는 상내봉 삼거리이고, 彌陀峯은 阿彌陀佛의 준말로 부처라는 뜻으로 와불산이고, 그럼 의논대 2句에 나오는 소림선방은 선녀굴이 아닌가 다시 생각하다가 내 능력이 거기까지라고 판단하고... 1471년 8월 14일 가을바람이 부는 상상 속으로 들어가 금방 의논대의 정서에 몰입하였다.
제2수 : 議論臺[의논대]
호로중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선방이라고 가리키네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 홀로 서 있으니 / 소매 가득 가을 바람이 들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雜생각에 사로잡힌 채, 서쪽 능선을 걸어 고열암에 도착했다. 10년 전지리동북부 처음 산행에서 지장사에 들렀다가 상대날등으로 올라와 고열암에 처음 찾았을 때의 점필재의 숙고열암 시는 너무도 강렬했다. 점필재는 이날 처음으로 험한 20리의 길을 걷고 너무 困하여 일찍 잠들었다가 한밤중에 깨어났는데, 보름을 하루 앞둔 달빛이 환하게 봉우리를 삼킬듯 빛났고 거친 솔바람 소리에 雲霧가 용틀임하듯 솟아나는 풍경을 보며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숙고열암"이라는 시를 남겼다. 신진 사림으로 훈구파와의 갈등 속에서 정쟁을 피해 함양군수로 내려왔고, 몸이 병약해있는 상태에서 서책이나 가까이 하던 이가 그리 길게 걸었으니 몸은 얼마나 피곤했겠으며, 한밤중 산에서 맞이한 달빛 아래 빛나는 준봉들과 운무의 춤사위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겠는가.
기회가 된다면 나도 소나무 물결 들끓는 음력 8월 14일 달빛 아래 고열암에서 의논대와 솔봉능선에서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를 듣고 싶다. 그날 상황으로 보아 낮에는 구름이 있었지만 시계는 좋아서 의논대에서 마천에서 농부들이 가을걷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불어 구름을 걷히고 보름달이 떠올라, 話者가 보름 달빛이 솔가지 위에서 들끓는 거친 바람소리를 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점필재는 다음날 아침 고열암 스님에게 천황봉에 오르라고 권유하는 시[贈古涅僧(고열암 스님에게 주다)] 한 수를 읊고 고열암을 출발하여 약 9km나 되는 천왕봉을 향한다.
제3수 : 宿古涅庵[고열암에서 자다.]
지친 몸 지탱하려고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소나무 물결달빛 아래 들끓으니 / 구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한밤중에 산골짜기 닫혀있구나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제4수:贈古涅僧[고열암 중에게 주다.]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따르는 것은 둘 다 어지러우니 / 지금은 승려와 속인을 구분하기 어렵구나
모름지기 두류산 최고봉에 올라보게나 / 세간의 흙먼지는 그대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네
숙고열암의 시 4구 巖谷에서 암각巖谷(八八口 : 천정각)으로 보아야한다. '천정각자'는 입천정이나 방 천정의 석가래 모양과 방(입)모양을 본뜬 글자로 우리나라에 나온 어떤 자전에도 전혀 나와 있지 않고 , 청나라 때 학자 傅賓石이 撰한 篆文大字典六書分類 12권주 2권 24頁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으니, 산에 다니기 전 이 책에서 평생 한 번 보았던 글자인데 고열암에 올 때마다 암각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번 산행에서 완전히 이해를 하고 의문을 풀게 되었다. 암곡이 아니라 암각인 것이다 그래서 국역도 바위 골짜기에서 바위 천정으로 수정했다. [夜半閉巖谷]
이제 우리도, 독녀암 근처에 있는 점필재의 발자취를 돌아본 후 안락문을 지나 점필재의 길을 재촉했다. 안락문은 유두류록에서 언급한 것이 없으니 점필재는 고열암 우측으로 곧장 올라갔는지는 모르겠다. <송연목>씨가 안락문 오른쪽에 있는 주먹만 한 바위 돌기를 보고 '안락문을 여닫는 버튼이 있다.'고 가리키며 버튼을 눌러도 문이 닫히지 않자 내가 '버튼이 고장 난 것 같다.'고 弄을 하였다. 상내봉 삼거리 조금 못미처 香爐 모양의 오뚝이 바위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보았다.
향로모양의 오뚝이 바위
비록 이곳에서는 상봉이 보이지는 않지만 성불능선을 따라 영랑재에 올라가면 비로소 보이는 하봉과 중봉, 천왕봉이 거대한 三佛帝釋이고 천왕봉을 法王이라고 하였을 때 이 오뚝이 바위는 향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향로는 유교와 불교 무속에서도 공통적으로 쓰는 제기인데 오늘따라 이 오뚝이 바위는 내 눈에 향로로 보였고, 근세에 와서는 빨치산들의 훌륭한 망바위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왕봉의 성모상과 성모사, 제석봉의 제석대와 향적대, 영신봉의 영신대, 노고단, 종석대, 만복대 등 토속 신앙에서 지리산은 인간과 신이 접신하는 장소였고 유·불·선과 토속신앙이 공존하는 세계였다. 그래서 선인들은 산을 심지어 인간 세계의 군신 관계에 비유하였고 또한 불국토의 극락세계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70년이 가까운데도 참호의 흔적이 지리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으니, 살기 위해 파 놓은 흙구덩이에서 주검이 되어 사라진 생명들이 수두룩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다만 아무것도 아니고[只弗] 자연의 섭리가 생사를 넘나들며 윤회하는 것이며,산에 대한 열정도 기운이 쇠하면 사라지듯 영원한 것이 없으니마음이 악착같이 검소하고 자린고비처럼 인색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때 마침 <미산>선생님이 명퇴금을 사모님 몰래 꼬불쳐 놓고 곶감 빼먹듯이 빼서 '피엘라밴 바지를 샀다,'고 자랑하시더라. 이 세상에 내 것은 없으니 남에게 신세지면 갚고 폐를 끼치지 않고 살면 그뿐이다.
체력이 어느 정도 소진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산에 들어 편안함을 구하고 체력을 아껴둔들 무엇하랴. 아끼는 것보다 차라리 쓰다 죽는 것이 낫다.'고 외치고 곰샘에서 물을 5리터나 취수하여 새봉으로 올라갔다. 젤트를 설치하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어둠이 내리더니 석양의 지는 해와 임무교대한 상현달이 떠오르고 뭇별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처럼 빛났다. 젊은 산친들과 산을 다니다 보니 밥을 할 기회가 적었는데 이번에는 아홉 끼 당번을 자청했다. 산에 들어 배부름을 구하거나 크게 취하지 말라. 평소 먹지 않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여 위장을 놀라게 하거나 목에 때를 벗겨 식도에 광낼 필요는 없다. 필요한 칼로리만 섭취하면 그만이다.
지장사를 놓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미산>선생님의 오룩스 맵 덕분이다. 분명히 능선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찾아내려왔을 것인데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었다. 산에서의 잠자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역학을 하시는 스님이 내가 '터를 볼 줄 알고 땅에 문리가 트였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고 하니‘문리가 트인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하며 명리학 공부를 권하여 손사래를 치고 웃어넘긴 일이 있다. 분명한 것은 눈 속에서 러셀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눈 속에 길이 보이기 때문에 제 길을 찾아 가는 재주가 있어 헛걸음으로 체력을 낭비하지 않는다.
사립재를 지나며 이곳이 초령일지, 새봉이 초령일지를 생각했는데 감수재와 점필재는 각기 138년의 차이를 두고 이곳에서 스쳐 지나갔다. 박여량이 두류암 갈림 길을 지나 이곳을 향했으니 <진양지>에 상류암을 기술하며 조개골은 써리봉(서흘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고, 감수재는 서쪽에 높은 대(독바위)가 보인다고 하였으니 조개골과 써리봉이 보이고 사철 물이 흐르는 <독바위양지>가 유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장사지 또한 점필재길의 최단거리에서 다소 벗어나 있으니, 돌배나무 부근 무속의 흔적이 있는 '금낭굴과 환희대 갈림길이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싹텄다. 점필재는 유두류록에서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지장사) 1리쯤 가서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에서 발췌]
이렇게, 점필재의 첫날은 흐림과 맑음이 교차되었다가 한밤중에는 환한 달빛이 사방에서 빛났고, 고열암에서 지친 몸을 쉰 것으로 여정이 끝난다. 나는 상현달이 일찍 떠 오른 초팔일에, 온종일 명쾌한 날씨와 조망 속에 머무른 하루였으며 고열암을 거쳐, 새봉의 안락한 젤트 안에서 이런 저런 끝없이 피어나는 지리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다가 문득, 잠이 들었다.
# 3. 甕巖 지나 영랑대의 달빛 <170504 : 2일차, 맑고 흐리다가 한밤중엔 雨>
1472년 8월 壬辰年 仲秋之節 한가위 날, 점필재의 이틀째 여정은 고열암에서 동부 능선 주요 지점을 거쳐 천왕까지[약9km] 오르고 성모사에 두 번째 잠을 자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가 더 병약해지기 전에, 가을날을 택하여 첫 두류산 산행을 감행한 가장 큰 연유 중의 하나가 천하가 내려다보이는 천왕봉에서 한가위 보름달을 보겠다는 열망을 품은 것으로 보아, 길고 험한 길을 무리해서라도 천왕까지 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가장 편안한 마음의 쉼터, 영랑대에서의 2박을 예정해 두고 있다. 박지는 다르나 그 길은 점필재의 루트를 그대로 따라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새봉의 아침은 안온했고, 젤트의 문을 여니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새봉은 일출 포인트가 없어 차를 한 잔 마시고 너럭바위로 조망 겸 산책을 나갔다. 이곳에서 차를 끓여 마셨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이 미치지 못했으니 다음에 오게 되면 잊지 않도록 기억해 두어야겠다. 너럭바위의 조망은 생각보다 훌륭했다.右로는 동부능선과 두류능선이 흐르고 정면에는 중봉과 써리봉능선, 左로는 황금능선이 구곡산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써리봉과 중봉에서 발원한 조개골이 큰조개골과 작은 조개골, 청이당 계곡, 모든 실 계곡의 물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여 동으로 굽이쳐 흐른다.
새봉에서 아침을 보내고 길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툭'하고 소리가 나더니 배낭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오른쪽 배낭 어께 벨트가 끊어진 것이다. 조여진 허리벨트 덕분에 겨우 등에 붙여오긴 하였으나 허리벨트를 풀자 중량이 오른쪽으로 쏠려 몸이 흔들렸다. 예전에는 구두를 꿰메는 바늘과 실을 가지고 다녀 덕유산에서 배낭끈을 꿰매 본 일이 있으나 요즘은 배낭끈이 끊어지는 일이 거의 없으니 망연자실 산행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확인하니 쇠가 부식되어 떨어져 나갔고 수습이 어려워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미산>선생님의 4mm 잡 끈을 주셔서 배낭을 겨우 응급조치를 하였으나 산행 내내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甕巖(진주독바위)에서 긴 휴식을 하며 배낭도 쉬고 나도 쉬었지만 왼쪽 어깨벨트 또한 쇠가 삭아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는데 집에 도착해서 왼쪽마저 끊어졌으니 지금 생각해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공자님께서 주역을 여러 번 읽어 책을 묶은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위편삼절(韋編三絶)]가 내게는 배낭 어깨 끈이 세 번 끊어졌으니 얼마나 험하게 산행을 하고 다녔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시간을 일부러 지체하여 오후 4시가 다 되어 청이당에 도착하였고 청이당 계류 반석에 배낭을 공손히 모셔놓고 이곳이 항상 점필재 일행이 쉬어간 곳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건너편 아래 계곡 가에 인공 석축의 흔적을 발견했다. <송연목>씨에게 '인공 석축이 분명히 맞지요?'라고 묻고 '석축이 맞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가까이 가보니 석축의 바위 겉면에 검버섯이 피어 계곡의 바위와 구분하기가 어려웠고 개머루 덩굴에 가려진 채 500년 넘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청이당에서 하봉 옛길로 가는 방향으로 계류 가운데 넓은 반석에서 아래쪽으로 건너편을 보면 석축의 흔적이 확연하다. 석축 위로는 지대가 다소 높은데 아마 이곳에 판자로 지은 청이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반석 위에서 쉬고 간 적이 수십 번도 넘을 텐데 오늘에야 비로소 눈에 띄다니 점필재 선생의 기행시를 읊으며 산행을 한 것이 허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일행 두 분도 함께 기뻐하였고 참으로 의미 있는'우연한 乭의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김종직 선생이 쉬었던 청이당 앞 溪石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에 기술된 淸伊堂>
抵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
청이당에 이르니 판자로 집을 지었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점당(청이당) 앞의 계석 위에서 잠깐 쉬었다.
청이당터 석축
청이당에서 하봉 옛길로 올라가면서 마암에 잠시 들렀는데 이곳은 점필재와 감수재의 기록과는 상이한 곳으로 기록에 근거한다면 중봉샘이 마암이 아닌가 생각한다. 능선에 올라서 1618봉에 오르니 날씨는 흐려지고 있었고 비가 오려고 하는지 습도 높은 바람이 불어왔다. 점필재의 유두류록에도 둘째 날 이 지점에 이르러 구름이 갓을 스치고 풀과 나무가 비가 오지 않는데도 젖어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높은 곳까지 올라왔기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영랑대에 올라 중봉과 상봉을 바라보니 온통 안개구름에 휘감겨 있어 오늘은 비의 전조 증상임이 역력하였다.
젤트를 두 분에게 부탁하고 하봉 쪽 전망 바위에 올라 영랑대의 사진을 담았다. 의미 있는 산행이니 일행에게는 미안하지만 양해를 구하고 영랑대 위에 서 계신 사진을 폰에 담았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횟수로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지나간 것까지 모두 합치면 100회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계절 우천불문하고 이곳만을 찾았으니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이곳에 오면 마음에 평화를 찾고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점필재 선생은 이곳을 지날 때에 일기가 좋지 않아 시를 남기지 않은 것 같고 고열암에서 이곳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니 많이 지쳐있었을 것이다. 이곳을 점필재는 영랑재라고 기록하고 있다. 岾의 한자가 중국에서 사용하는 한자가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만든 國字로 지명에서 사용되었다. 사천 와룡산 민재봉에서 이 한자를 쓰고 있고 금강산 유점사에서는 '절점'으로 쓰였으며 내가 사용하고 있는 젤트의 이름도 永郞齋라고 하는데 이곳의 이름을 차용하였고 마지막 글자를 齋로 한 것은 집, 방, 공부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점필재가 정오 무렵 영랑대를 지나쳐 천왕으로 걸음을 나아간 것과 달리 우리는 이곳에서 두 번째 밤을 보내게 되었다. 초저녁 달빛은 잠시 구름을 헤집고 나오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었고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영랑대 정상의 외로운 구상나무 한그루는 시름시름 앓더니 고사목이 되어 앙상하게 마르고 있었고 머지않아 살을 발라낸 생선가시처럼 하얀 뼈를 드러내고 말 것이다. 나무도 때가 되면 죽거늘 하물며 사람의 일이야. 잠이 오지 않는 영랑대의 밤, 여러 번 젤트 밖으로 나와 추성과 마천 쪽을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지난 날 폭설 속에서 이곳을 찾았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검게 먹을 칠한 듯한 삼봉의 위용은 어둠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으니 내가 앞으로 이곳에 얼마나 올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귀악신처럼 지킨들 못 가겠냐마는 산행에 대한 즐거움은 차츰 줄어들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정도가 예전만 못하니, 시간이 더 오래 지체되면 점필재의 복기산행을 하기 힘들까 염려되어 이번 산행을 애써 서둘렀다. 보통 1년이면 25회 정도 지리산 산행을 하는데 5월 초까지 9회에 불과하니 얼마나 지리에 들게 될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박산행을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으니 마음 또한 떳떳하지 않아 불편하다.
그러나 어쩌면 이 모두가 다 핑계이고 산에 다니는 열정이 예전 보다 많이 식었다는 뜻이 될테고, 모처럼 타프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생경스럽고도 새로웠다.이렇게 둘째 날의 밤은 깊어 갔고 착한 나라 어른들이라 술도 사양하고 적당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2편으로 이어집니다.)
첫댓글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에 따라
545년 전의 자취를 찾아 가면서 힘든 산행을 하고 계십니다.
둘째 날 밤을 산속에서 지내시는 것까지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그나저나 미산형님, 안 되겠군요.
형수님한테 크게 혼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