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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조국 통일의 꿈
(에스겔 37:15-23)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의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의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하거든,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의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하고,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목전에서 손에 잡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 바 열국에서 취하며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의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1. 본문 해설
1) 본문은 에스겔 37장의 뒷부분입니다.
① 앞부분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루게 된다는 환상 이야기입니다. 이 환상에 대한 해설이 11절부터 나옵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입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낙심하는 소리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라고 하셨고, 또한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완전히 절망적이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새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마른 뼈들이 어떤 군대가 되었습니까? 이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군대는 “나는 마른 뼈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줄 아는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주시옵소서.”라고 하는 베드로를 주님은 불러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나나 아볼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고백하는 바울을 하나님은 큰 사도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도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있으면 결코 하나님의 군대가 되지 못합니다.
② 이런 마른 뼈들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오늘의 본문인 15절부터의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는 남쪽 왕국과 북쪽 왕국으로 나누어져 있던 두 나라가 하나로 합해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에도 남쪽 사람들은 북쪽 사람들을 ‘사마리아인’이라 부르면서 이방인 취급을 하였고,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도 이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나라를 잃고 방황한 지 1,900년이나 지나서,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팔레스틴과 이스라엘로 나누어져 있어서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③ 그러면 에스겔의 예언은 거짓이었습니까? 조금 더 기다려보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남 유다나 북 이스라엘이나 분별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고토를 완전히 회복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이 예언은 오늘의 이스라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거짓이란 말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가 어느 나라인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옛날 솔로몬 다음에 두 나라로 갈라졌던 것처럼, 남북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는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남 유다는 그래도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나라였으나, 북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상만 섬기고, 한 번도 좋은 왕이 나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극동의 끝나라 대한민국이 일제 36년간의 압제에서 해방된 후에 독립을 했다고는 하지만 반쪽 해방을 맛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남북한의 모습은 옛날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져 싸웠던 일과 매우 가깝게 이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선민인 한국에 대한 것입니다.
2) 그 내용을 다시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셔서 말씀하십니다.
① 16-17절입니다.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의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의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막대기 하나에는 “유다와 그의 짝 이스라엘”이라고 쓰고, 다른 막대기에는 “요셉과 그의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쓰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남쪽 나라 유다와 그의 짝은 북쪽의 이스라엘입니다. 또한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의 짝은 이스라엘 온 족속, 곧 12지파 모두라고 했습니다. 분리된 두 나라가 아니라, 서로가 짝이 되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짝을 잃으면 얼마나 외롭습니까? 외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반쪽이니까 온전하지 못합니다. “짝 잃은 외기러기”라는 말이 있지요? 기러기는 사이가 좋기로 이름난 새랍니다. 그런데 사이가 가장 좋은 기러기가 짝을 잃었다면 얼마나 쓸쓸할까요?
문제는 짝을 잃고도 외로운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둘이 하나로 합쳐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 외로움을 알아야 하고, 둘이 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짝을 잃고도 외로운 줄을 몰랐고, 합치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남북이 분단된 후 65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남북이 서로 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합쳐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 중간에 서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그 합쳐진다는 의미가 사라졌지만, 한국에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능성이 큰 것이고, 이 말씀이 한국에 응하는 것입니다.
② 18절에 “이것이 무슨 뜻이냐?”라고 묻습니다. 19절에 하나님께서 설명하시기를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의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북쪽 나라를 남쪽 나라에 붙여서 하나가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③ 이어서 더 설명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 바 열국에서 취하며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의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라고 하셨습니다.
④ 우리 인간들의 참된 짝은 누구입니까? 부부나, 형제나, 친구가 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짝은 되지 못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짝을 잃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짝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 불러주셨고, 교회를 신부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와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모두 짝을 잃은 기러기 신세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짝을 찾았고, 또한 그 짝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3) 그러면 왜 그렇게 짝과 나누어져 있었을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과 짝하지 못하고 외로움과 슬픔과 허무함 속에서 살아와야 했던 것일까요?
① 23절에 설명하기를 “그들이 과거에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들의 모든 죄악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을 더럽혔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시면서 이제 그 상태에서 구원해 내셔서 정결케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도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사야 59:1-2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려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② 더 나아가 24절에서는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요,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율례를 지켜 행하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③ 마침내 하나님이 이 백성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하나님의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2. 우리에게 통일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1) 천안함 폭침(爆沈) 사건에 대해 북한의 대학생들의 동태를 살펴본 내용이 자유북한방송에 보도되었습니다. 북한 대학생들은 “2012년 강성대국을 헛소리”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① 방송은 함경북도 청진시의 대학생 김 모 씨가 최근 통화에서
“천안함 사건과 금강산 사건의 주범이 누구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우리(북한)쪽에서 의도적으로 저지른 소행으로 알고 있다.”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김 씨는 “그러나 우리 대학생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사건발생 경위보다 과연 우리가 이 시점에서 그런 사건을 저지를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대학생들이 한반도 정세를 크게 우려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김씨는 “지금 우리 대학생들도 크게 두 패로 갈렸다.”면서 “한쪽은 ‘지금보다 더 강경하게 나와야 한다.’는 패이고 다른 쪽은 ‘우리도 이젠 양보를 하고 정세를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패”라고 설명했다. 그는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는 학생들은 몇이 안 되는데다 학생 간부들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주장하는 측면이 있다”며 “대부분 학생들은 다 정세를 완화시키고 외국에서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은 얻어먹어야 한다는 의견”이라며 북한 대학생들은 김정일이 국제사회와 공조해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② 양강도 혜산시의 대학생 조 모 씨는 “오바마와 리명박이 들어앉은 후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데 대해 위에서도 몹시 불안해하고 있다”며 “김정일의 이번 중국 방문까지 시원치 않은 것으로 소문이 돌면서 간부들도 크게 실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씨는 “김정일의 이번 중국방문이 시원치 않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며 “하지만 대학 강연회에서조차도 ‘남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과 의지를 믿고 끝까지 혁명을 해야 한다’고 연일 주장해 이번 방문이 실패했다는 소문을 더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른 때 같으면 김정일의 방중 성과에 대해 대대적으로 떠들겠는데 지금은 모두가 침통한 분위기”라면서 “아래 간부들은 영문도 모른 채 ‘중국 놈들은 역시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죽어라 욕만 하는 판국”이라고 설명했다.
③ 조 씨는 이어 “지금 상태에선 2012년까지 ‘강성대국’은 고사하고 ‘먹는 문제’조차 해결할 수 있겠는지 의문”이라며 “김정일의 고압자세에 신물을 느낀 사람들이 이제라도 속 시원히 남조선과의 대화에 뛰어들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북한 분위기를 전했다.
2) 김정일은 자기가 빨리 죽고, 빨리 망할 일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① 김정일은 두 번이나 중풍으로 쓰러졌었고, 조금 회복되었다고는 해도 여러 가지 질병으로 인해 다리도 절고 있다고 합니다. 육신이 건강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게 됩니다. KAL기 폭파, 아웅산 국립묘지 폭파, 금강산 관광객 총격살해 등 수없이 많은 악한 일들을 평생토록 해왔는데 그의 마음에 평강이 있겠습니까?
②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갑자기 망했습니다. 김일성도 갑자기 죽었습니다. 하물며 김정일이 오래 편안히 살겠습니까? 잠언 28:1에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고 했고, 29:1에서는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김정일에게 이 모든 말씀이 응할 것입니다. 또한 대한민국에 살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조국을 저주하고 김정일 같은 독사의 자식을 두둔하는 자들이 그렇게 망할 것입니다.
③ 사람이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정도껏 죄를 지어야 하지요. 저렇게 지나치게 악하면 어찌 빨리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방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공갈을 치지만,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쟁을 일으켰다가는 자기가 제일 먼저 죽을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겁이 나니까 오히려 더욱 소리를 지르는 것이지요.
④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김정일 같은 악당을 그냥 살려두고 계실까요? 김일성이나 김정일 같은 악인들은 하나님의 몽둥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이 몽둥이로 때리려고 만들어두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와 정치계의 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악인들의 생명은 더 연장될 것이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악인들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3) 우리는 통일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① 다니엘은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바벨론 포로생활이 70년 만에 마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정을 하고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기도하였습니다(단 9:2-3). 우리도 이제 통일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면서 이렇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② 정치가들이나 경제인들은 자기 분야에서 통일을 대비하여 여러 가지 준비를 하겠지만, 우리 성도들은 기도하고 북한에 전도할 것을 계획해야 할 것입니다.
③ 우리 민족은 이제껏 65년 동안 끊임없이 기도해 왔습니다. 지금도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는 교회나 기도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해 주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이 그렇게 갑자기 무너지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4.19 후에 정권을 잡은 민주당의 장면 정권도 갑자기 일어난 5.16혁명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지 않았습니까? 김일성도 그렇게 죽었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줍니다. 김정일도 갑자기 무너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3. 어떤 통일이 올까요?
1) 북한이 남한에 흡수되는 통일입니다.
① 19절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의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이 남한에 흡수통일 되는 것입니다. 진정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민주주의로 통일되는 것이고, 온 백성이 자유롭게 살게 됩니다. 만일 북한에 흡수통일 된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② 북한이 남한에 흡수 통일되어야 북한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전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서독과 동독이 처음 통일되었을 때에 우려하는 소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곧 가난한 동독 사람들을 다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서독의 경제는 파탄이 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 잠깐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독일은 엄청나게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③ 북한이 남한에 흡수 통일되면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력을 가진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시고 은혜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북한에는 지하자원이 풍성합니다. 남한의 기술로 그 많은 자원들을 개발해 내게 될 것입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재산입니다. 북한 동포들의 노동력은 우수합니다. 이것도 엄청난 재산이 아닙니까? 또한 북한에는 세계적인 관광지도 많습니다. 이것도 잘 개발하면 온 세계가 주목하고 찾아오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남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세계 제일이라 할 탁월한 과학기술과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비결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엄청난 기적의 나라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무엇이든지 반드시 잘된다는 확신이 있고,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 성도들의 기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2) 다윗이 왕이 되는 통일입니다.
①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장차 다윗이 와서 다스리는 나라가 될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 1:6)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이 가장 자랑하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왕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통일되는 것이고, 복음으로 통일된다는 말이요, 다윗과 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나와서 다스리게 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② 다윗이 누구입니까?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병자들, 특히 소경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면서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육신의 질병에서부터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들을 죄에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이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이 유대교의 네 종류의 지도자들에게 심문을 받으셨는데, 그 첫째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마 21:23)라고 물었지요? 둘째는 헤롯당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물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이 와서 부활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성토를 했습니다. 넷째는 율법사가 와서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조금도 막힘없이 대답을 하셨고, 그들의 입을 봉해놓으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의 반격이 있었습니다. 곧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라고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맞는다고 대답했지만, 예수님은 시편 110:1의 말씀을 들어 다윗이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것 같아도 이 중요한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메시야의 상징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장차 다윗이 다스리는 나라가 된다는 말은 곧 메시야가 오셔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다스리시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③ 이제 우리나라에 훌륭한 인재들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복되고 거룩한 사명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진다고 해도 하나님은 훌륭한 일꾼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자기 하나만 남았다고 낙심하였던 엘리야에게 아직도 7,000명의 참 선지자가 있다고 가르쳐주셨던 하나님은 곳곳에 이런 훌륭한 신앙의 용사들을 숨겨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이런 훌륭한 신앙의 용사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서 이런 인물들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3)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① 첫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내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통일이 안 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현재의 한국의 부강은 장차 올 통일을 위한 것이요, 더 나아가 세계 선교와 마지막 추수작업을 위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말세에 온 세계에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위대한 선민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애초에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 백성이고,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이며, 거룩한 백성(출 19:5-6)입니다. 우리의 영광스러운 내일을 바라보면서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② 우리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넣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거룩한 백성임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민족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살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가장 복된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③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까? 성령은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됩니다”(슥 4:6). 우리가 이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가 성령 충만하여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④ 인생은 잠깐입니다. 헛되이 살지 말고 보람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심판의 날이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지 않습니까? 자기의 날을 계수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진리로 무장해야 합니다. 지금은 말세라, 온갖 거짓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천암함을 김정일이 어뢰를 폭발시켜 두 동강을 낸 것이 확실한데도 그것을 못 믿겠다고 하는 자들은 대관절 어느 나라 사람들입니까? 거짓을 믿는 자는 반드시 망합니다.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 3-4대까지 망합니다. 우리는 깨어야 합니다. 잠시 잠깐 후면 다 떠나갈 인생인데 왜 그렇게 더럽게 삽니까? 주님 앞에 진실해야 하겠습니다.
조국 통일의 꿈을 읽고
오늘도 나균용목사님 설교를 읽고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특별히 남북이 갈라져 21세기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여져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 에게 큰 힘을 주는 설교 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이 분단된 후 65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남북이 서로 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합쳐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 중간에 서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그 합쳐진다는 의미가 사라졌지만, 한국에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능성이 큰 것이고, 이 말씀이 한국에 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도 하나가 되는 것, 즉 예수님과 교회가 하나되는 것, 남과 북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 한반도가 제사장 민족으로 땅끝까지 복음전도 하는 민족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오늘도 나균용 목사님 설교를 읽으면서 큰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북 복음 통일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며 준비하기 위해 우리 탈북민 신학생들을 섬기고있는 목사님을 우리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실줄 믿습니다.
우리의 통일은 북한이 남한에 흡수되는 통일, 즉 신앙의 자유를 소유한 남한식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에스겔 37장 19절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의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이 남한에 흡수통일 되는 것입니다. 진정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민주주의로 통일되는 것이고, 온 백성이 자유롭게 살게 됩니다. 그리고 수십년동안 김씨일가 마귀를 섬기던 북한 백성들이 하나님 백성으로 돌아올수 있습니다.
북한 복음화를 위해 먼저 북한을 탈북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나균용목사님과 같은 복음통을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는 귀한 주님의 일군들과 함께 복음통일을 준비할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53. 하나님의 집이냐, 우상의 전이냐?
(고린도전서 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말에서 집을 나타내는 글자로 사람을 가리키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다. 예를 들어 집 댁(宅)자를 넣어서, “천안댁, 광주댁, 서울댁”이라고 하면 그 지역에서 시집온 여인을 가리킨다. 또한 집 가(家)자를 넣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정치가, 사업가, 문학가, 운동가, 작가, 화가” 등의 말은 모두 그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인을 말한다.
우리말의 존칭 중에 왕을 가리키는 전하(殿下)라는 말의 전(殿) 자는 궁전이라든가 성전이라고 할 때에 쓰는 글자다. 왕세자를 저하(邸下)라고 하였다. 그 때의 저(邸) 자도 저택(邸宅)이라고 할 때에 쓰는 글자로 큰집을 말한다. 대통령을 각하(閣下)라고 하지만, 각(閣) 자도 누각(樓閣), 전각(殿閣), 종각(鐘閣)이라고 할 때에 쓰는 글자이지만 전하나 저하에 비해 격이 한참 떨어진다. 임금을 뜻하는 폐하(陛下)의 ‘폐’자도 ‘대궐섬돌’을 뜻하는 것으로 역시 집이다. 그러니까 폐하란 섬돌이 있는 큰 궁전 아래에 사는 사람을 뜻한다. 곧 집이 클수록 높은 사람이고 작을수록 낮은 사람이다.
예수님도 자기를 가리켜 집이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2:19에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는데, 21절에서는 설명하기를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라고 하였다.
고린도후서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후 5:1)고 하였는데 여기의 장막집도 역시 우리의 육체를 가리킨다.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은 본문인 고린도전서 3:16뿐 아니라, 6:19에도 나오고, 고린도후서 6:16에도 나타난다.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강조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전들이다.
1. 하나님의 집이란 어떤 뜻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집이 내 집이다.”라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어떤 뜻인가?
1)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가 계신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를 낳은 부모를 모르는 사람보다도 더 악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부모가 없이 자기가 저절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자보다도 훨씬 더 악한 인간들이다. 그래서 시편 14:1과 53:1에서는 단 한 마디로 그런 자들을 일축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러면 그런 자들의 소행은 어떠한가?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을 모르면 다 이렇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제일 잘났다고 자랑을 한다. 빨리 깨달아 어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전도서 마지막 장인 12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또한 전도서의 결론으로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라고 하였다.
집마다 크기가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그 안의 구조도 다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다 지으셨지만, 우리가 서로 다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집이다.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고 다른 집을 함부로 비판하고 멸시하면 안 된다.
2) 하나님이 사시는 집이라는 뜻이다. 내 집이라고 할 때에도 내가 살고 있으면 참 내 집이지만, 만일 남에게 세를 주어서 내가 살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 집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하나님의 집이 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집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 찾아오셔서는 장사치들과 환전상(換錢商)들을 다 쫓아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였거늘, 너희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라고 무섭게 책망하셨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집에 계신다. 장사꾼들과 강도들이 있는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의 우리 교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사시는 집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교회라고 간판을 붙여놓았으니까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집이 더러우면 그 집에 들어가 사실 수 없다. 교회에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을 쫓아내야 한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결심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눈에 보이는 건물보다도 우리 성도 개개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좌정하신다. 그 사실을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이미 7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장차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기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라고 하였다(사 7:14).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이다. 마침내 하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심으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오셨다. 주님은 열두 제자들을 택하셨는데, 그 첫째가는 목적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었다(막 3:14). 또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그 약속을 이루어주셨다. 이제는 육신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라, 영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그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계신다. 그러나 성령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마음에 와 계시지 않는 사람이다. 성령이 없는 사람이 되면 사람들은 육신을 따라서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된다. 유다서 18-19절에 이런 자들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라고 하였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면 예수님의 경우처럼 제일 먼저 청결케 하시는 일부터 하신다. 마음에 숨은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마음을 거룩하게 만드신다. 악한 것은 모양뿐이 아니라 생각조차도 버리게 만드신다. 마음에 늘 찔림을 주시고 죄를 멀리 하도록 하신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 마음에 거룩한 소원을 넣어주시고,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을 주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거룩한 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3) 하나님이 소유하시고 관리하시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주인이 그 집을 팔 수도 있고, 구조를 바꿀 수도 있다. 내가 하나님의 집이 되면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따라 모양을 새롭게 바꾸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라면 하나님이 관리하신다.
① 그 첫째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한 해결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먹기 위해서 태어났는가? 그렇다면 날마다 시간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위해서 걱정도 하고 고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은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다. 마귀의 간계에 속지 말고, 의식주의 문제를 위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
②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관리하신다. 아무데나 내 마음대로 가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시편 37:5에서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겨라.”라고 말씀하신다.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라.”고 하신다. 또한 시편 55:22에서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려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잠언 16:3에서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라고 하신다. 베드로전서 5:7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12:19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겨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라고 말씀한다.
③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도 주장하신다.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더러운 것이나 악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고, 만일 악한 생각이라도 하게 되면 곧 찔림을 주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버리게 하신다. 그리하여 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하신다. 이렇게 될 때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뜻을 깨달아 그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신다.
2. 하나님의 집을 잘못되게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신다.
본문 17절에서는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소극적으로는 “더럽히지 말라”고 하였고, 적극적으로는 “거룩하게 하라”고 하였다.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을 더럽히지 말라”는 경고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지 말라는 것인가?
1) 첫째는 “내 집을 장사꾼들의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성전에 찾아가시니 성전 안에 매매하는 자들이 가득하였다. 환전상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채찍으로 노끈을 만드셔서 다 쫓아내지 않으셨다. 오늘의 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을까? 성경은 진리다. 성경은 2,000년 전 옛날이야기를 하는 책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게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의 몸도 세속적 욕심을 위하여 쓰면 안 된다.
2)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마 21:13)고 하신다. 대관절 누가 강도인가?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강도’에 대해 언급하셨다. 곧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셨고,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하셨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가 누구일까? 구약에 나오는 신앙의 위인들을 가리키는 말씀일까? 물론 아니다. 그러면 누구일까?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 곧 예수님보다 선배요, 형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보다 더 잘난 체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함부로 비판하고 멸시하면서 자기의 이론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가득하였고, 오늘날에도 역시 가득하다. 이런 자들이 거짓 선생들이다. 겉으로는 대단한 학자인 척하면서, 교묘한 말로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현혹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나 사상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예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없다. 그들도 입술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찬양한다고 하지만, 실은 자기의 영광을 더 나타내려고 하고,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우리는 이미 다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말하면서 주님의 구원을 싸구려로 만들고 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는다. 자기 마음대로 엄청난 할인을 해서 팔아먹고 왜곡하여 전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라고 하셨지만, 이 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니 이미 구원을 다 받았다.”라고 말한다. 어린이같이 되라고 강조하는 일이 없다. 믿으면 다 된다고 말하지만,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신도들의 영혼을 노략질하는 강도들이다.
3) 그 뿐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우리 몸이 귀신들이 사는 집이 됨을 경고한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3-45)라고 하셨다.
사울 왕도 처음에는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이었습.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되니 버림받았고, 악신이 들어와 그를 야료하게 만들었다.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될 때에 그 도가 지나치게 되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의 뜻대로 하려고 하면 악신이 들어온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람을 질투하고 대적하게 되면 악신의 역사가 강해진다. 우리 마음을 성결하게 해야 한다. 한번 믿어서 구원이 절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늘 살펴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죄를 멀리하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요(히 10:37), 또한 당신의 생명도 끝나게 된다. 조금만 더 참고 가면 된다.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다시금 죄 가운데로 빠져들어가야만 하는가?
3. 하나님의 집은 어떤 집이 되어야 하는가?
1)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막 11:17).
① 만민을 위해서 기도하는 집이다. 영어성경들은 하나같이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라고 하였다. 곧 만국, 또는 만민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미국에서 살면서도 한국을 위해서는 많이 기도하지만 미국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어떻게 만민이나 만국을 위해서 기도하겠는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세계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하고, 세계 모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들어야 그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된다.
②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집이다. 하나님의 집에는 어느 누구나 자유롭게 와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미국인들의 교회에서는 흑인들을 거절하였다. 특히 보수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죄악이다. 이제는 우리 한국인 목사님들이 미국 교회의 담임이 되어 목회를 하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감히 교회의 직분을 받을 수도 없었다. 지금도 여자들은 집사도 되지 못하는 교회가 있다. 보수적이라고 하는 교회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제는 여자도 목사와 장로가 되고, 교회를 맡아 일하고 있다. 엄청난 변화요, 발전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책임을 맡아 일을 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의 책임을 맡으면 안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을 더 앞세우기 때문이다. 인종이나 성별이나 나이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 줄 아는 사람이 중요하다. 오늘의 우리 교회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이 그 위에 임한다. 복된 역사가 일어난다.
③ 마음을 넓혀서 기도하는 집이다. 고린도후서 6:13에 “너희 마음을 넓히라”고 명하신다. 그렇다. 우리 마음을 넓혀야 한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오래 믿을수록 또는 정통이다 보수다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마음이 좁아진다는 것이다. 자기의 신앙만이 가장 옳은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아홉 가지 은사를 말하고, 이어서 우리 몸의 지체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은사들의 세계를 설명한다. 나아가 결론으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리라.”(고전 12:31)라고 명령한다.
9.11 테러 이후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다. 역대상 4:10에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하신 말씀을 기초로 해서 복을 받자고 하는 내용의 책인데, 미국 사람들이 그런 말씀을 그렇게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에서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은 “나의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다. 눈에 보이는 땅을 넓혀달라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사상을 넓혀달라고 이해해야 한다.
2) 하나님께 예배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예배해야 바른 예배가 될까?
①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예배에 대하여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면 복된 사람이 되지만, 만일 안 받아주시면 당신도 가인 같은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한다.
② 로마서 12:1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나를 제물로 바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③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해야 한다. 에베소서 5:19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3)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발견되는 곳이어야 한다.
① 옛날 유대 나라의 “요시야 왕 십팔 년에 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전의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다. 그 책을 왕의 앞에서 읽으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었다”(왕하 22:3,11). 학자들은 이 책을 신명기라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을 수리할 때에 하나님의 율법책이 새롭게 발견된다. 그러나 그냥 방치하면 발견되지 않는다.
② 얼굴에 쓴 수건을 벗어야 한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가 너무도 찬란해서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쓰고 백성들과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을 그대로 쓰고 있다고 바울은 탄식한다(고후 3:14).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는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인해 눈이 멀었었다. 그러다가 아나니아가 와서 안수하게 되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었다. 곧 예전에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미움과 분노의 눈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그를 알게 되고 지극한 존경과 감사의 눈으로 그분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의 눈에서 수건이 벗겨지면 우리도 이렇게 변화를 받는다. 오해와 편견도 버리고, 미움도 질투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③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어 그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복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골 2:2-3).
4)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 특히 신약시대의 교회는 성령이 오셔야만 한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 비로소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요, 이미 교회가 아니다. 성령이 거하시면서 역사하실 때에 비로소 교회는 교회가 된다. 성령의 불이 활활 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 불이 우리의 마음에 비치어 마음을 밝게 하고, 마음을 태워 헌신하게 하며, 마음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님을 닮아가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집이냐, 우상의 전이냐?를 읽고
오늘 나균용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너무 많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설교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검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내 마음에 성령님이 계시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성전, 즉 하나님의 집이 되지만 내 마음에 사탄이 있으면 근심과 걱정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내 삶을 주관하는 마귀의 집, 우상의 집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마귀가 둥지를 틉니다.
때문에 우리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성령님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면 예수님의 경우처럼 제일 먼저 청결케 하시는 일부터 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에 숨은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마음을 거룩하게 만드시고 악한 것은 모양뿐이 아니라 생각조차도 버리게 만드십니다.
때문에 마음에 늘 찔림을 주시고 죄를 멀리 하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 거룩한 소원을 넣어주시고,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거룩한 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저는 오늘 나균용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늘 날마다 저의 마음은 거룩한 성전이 되어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더욱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54. 사막의 오아시스
< 오아시스 교회 창립예배, 4/2/17 >
(사 43:18-21)
18)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몽골은 국토의 78%가 사막이다. 중국도 20%가 사막이다. 미국도 사막이 많아지고 있다.
사막에는 중요하게 세 가지, 곧 물과 길과 생명체가 없다. 물은 무엇인가? 원래 이 세상은 물에서부터 나왔고, 인체의 70%는 물이라고 한다. 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성경에서 물은 곧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공의(公義)다.
1. 사막의 영적 의미와 위험
그러면 사막이 영적으로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설명할 때에 광야라는 말과 사막이라는 말을 같이 쓰고 있다(시 78:40; 106:14; 107:4). 그런데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의 사역은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여기의 광야나 사막은 모두 이 세상을 가리키며, 우리의 일생을 상징한다. 나아가 스테반은 광야교회라는 말을 했으니 광야는 곧 교회를 상징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상징한다.
1) 사막의 영적 의미
①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맞지 않은 인생들은 삶이 사막이다. 돈도 있고, 고등교육도 받았고, 사회적 지위가 있어도 가정에 행복이 없다. 가족 사이에 사랑이 없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만드셨음도 알지 못한다. 나아가 심판이 있어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알고 산다.
② 교회는 어떠한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라고 하셨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교회에 은혜가 메말라가고 있다. 말씀이 없어져 가고, 기도도 점점 더 식어진다. 예배가 형식적이고 이방종교를 따라가고 있다.
③ 더 나아가 현대인들의 마음이 황폐해지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라고 하셨고,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딤후 3:1-4)고 하셨다. 눈에는 눈물이 흘러야 눈이 맑아지고 밝아져서 잘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마음에도 물, 곧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흘러야 마음이 깨끗해지고 따뜻해지고 행복이 넘치게 되는데 물이 없으니 인간성이 황폐해지고 길을 찾지 못하며, 천국의 영원한 생명이 있음도 알지 못하여 천국을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산다.
2) 사막의 큰 위험
① 모래바람 - 사막에도 태풍이 분다. 태풍이 어마어마한 양의 모래를 옮겨놓는다.
② 신기루(蜃氣樓, mirage) - 물체가 실제의 위치가 아닌 다른 위치에서 보이는 현상인데, 실제로 사막 여행자들 중에는 신기루를 오아시스로 착각하여 쫓아가다가 당연히 찾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③ 강도(强盜) - 사막엔 경찰도 군대도 없기에 실제로는 이것이 가장 무섭다고 한다.
❉ 우리 인생에도 이런 위험이 따라온다. 천재지변의 자연재해, 공산주의 같은 공상(空想) 또는 허상(虛想)을 믿고 따라가다가 멸망하는 경우, 악한 사람을 만나서 파멸하는 경우다. 교회에도 똑같은 위험이 있고, 우리 마음에도 이런 위험이 온다.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자기를 지켜 모든 죄악과 재앙의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2. 사막이 되는 원인
1) 비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1년 강수량은 적게는 1000mm, 많게는 1600mm다. 시애틀 지역도 1000mm가 내린다. 사막은 겨우 150mm 정도다. 식물이 자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 않으면 인생도, 교회도, 우리 마음도 메말라지다가 나중엔 사막이 된다.
2) 경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직 사람을 만드시지 아니한 때의 모습을 설명한 말씀을 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 2:5-6). 경작할 사람이 없으면 초목도 없고 사막이 된다. 로마서 8:19에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고, 22절에서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야 세상은 천국으로 변한다. 그러나 악인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사막으로 변하게 된다.
3) 수증기가 적게 증발하여 구름을 많이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① 물이 많이 증발해야 많은 비가 내리게 된다. 그런데 사막에서는 물이 많이 증발하지 못하여 구름을 만들지 못한다. 올라가는 것이 적으니 내려오는 것도 적을 수밖에 없다.
②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많아야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도 많게 된다.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지만,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은 점점 적어지고 있다. 교회 출석도 뜸해지고, 기도도 식어지고, 성경을 읽거나 말씀 듣는 일도 점점 적어지며, 헌금도 안하게 되어 교회를 약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니 은혜가 적게 내릴 수밖에 더 있겠는가!
③ 그래서 하나님은 7일 중에서 하루, 수입의 10 중에서 하나를 바치라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훨씬 더 큰 것으로 갚아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이다. 말라기 3:10에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고 하셨다. 미국과 독일이 이렇게 하여 복을 받아 세계에서 제일가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런 엄청난 약속을 무시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니까 점점 더 사막만 많아지는 것이다.
2. 오아시스는 사막의 안식처다.
1) 오아시스는 왜 생기는가?
① 그 가장 큰 원인은 지하수가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오아시스 이야기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출애급한 이스라엘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70그루가 있어서 거기서 그 물 곁에 장막을 쳤다는 이야기다(출 15:27).
② 겉은 사막이라도 땅속에 물이 흐르고 있다면 거기엔 식물이 살 수 있다. 그래서 오아시스를 만든다. 물도 길도 생명체도 없는 사막에 하나님은 이런 오아시스를 만드셨다. 그래서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에게 안식을 주시고 소망을 주신다.
③ 우리 인생길이 아무리 고달파도 오아시스가 있다. 교회도 사막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오아시스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곳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을 찾지 못하고 사막에서만 방황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은 죽을 때에 인생의 허무함을 깊이 느끼며 탄식한다. 이것이 인생인가? 그렇다면 짐승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2) 예수님은 성도의 배에서 생수가 강같이 흐르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① (요 7:38-39a)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② 구약성경에는 우리의 “배에서 생수가 흐르게 하신다.”는 말씀이 없다. 바울이 반석에서 생수가 나왔던 일을 설명하면서 그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생수를 주실 것을 상징한다. 이제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반석이 되면 우리 배에서도 생수가 흘러나오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③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살자. 사막길을 가더라도 생수가 터져 나온다. 인생길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우리 가정에 생수가 터져 나온다. 행복이 샘솟는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이 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3) 외부의 환경은 사막이나 오아시스나 똑같다. 그러나 땅속이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① 신자들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난이나 어려움을 안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생수가 흐르고 있어서 어려움이 와도 넉넉히 이긴다.
② 말세엔 기근이 심하고 지진이 많아지며 질병이 많아지고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죄악이 관영해지기 때문에 재앙이 이렇게 늘어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런 재앙을 견디지 못한다. 누가 이겨나갈 수 있는가? 마음속에서 생수가 나오는 사람이어야 한다.
③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된다(마 24:12-13). 누가 끝까지 견딜 수 있을까? 마음에 생수가 흐르는 사람이다.
3.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아시스교회의 목표는 무엇인가?
1) 온 성도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배에서 생수가 흐르는 생활을 해야 한다.
①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행 1:8). 세상을 이길 힘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신다.
② 육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살지 않고 성령에 이끌려 거룩한 생활로 많은 사람들에게 생수를 나누어주려는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③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서 “범사에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한다”(행 20:35).
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① 하나님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 13:22)라고 하셨다. 우리가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신다.
② 사람이 없으면 땅엔 식물도 자라지 못하고 비도 내리지 않는다. 의인이 많으면 하늘에서 복이 쏟아지고, 악인이 많으면 재앙이 쏟아진다. 당신의 환경은 당신이 만드는 대로 된다.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해야 한다.
③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
3) 하나님께 생명도 바치며 사는 헌신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① 심은 대로 거둔다. 땅에 심는 것에는 위험도 많이 따른다. 그래서 시편 126:5-6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하였다. 밭에 씨를 뿌리는 자 중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없고,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도 없다. 그러나 복음의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울며 기도하고 전도하며, 눈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② 하늘에 심는 사람은 가장 확실한 투자를 하는 것이다. 반드시 30배, 60배, 100배로 거두게 된다. 믿음으로 살자. 주님께 우리의 생명도 다 드리면서 살자.
③ 우리의 남은 날이 얼마나 되는가?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너는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지금부터 주님께 대답할 말을 준비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가 되어 평생 수고하고 쌓아놓은 것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불행을 당하지 말고, 어떤 비바람에도 어떤 화마에도 굳건히 견뎌낼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마 25:20)라고 자랑스럽게 보고할 수 있는 지혜로운 종들이 되어야 하겠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읽고
오늘 나균용 목사님의 섥교를 읽고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특별히 오늘 설교는 사막의 오아시스에 대한 설교인데 메마른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막은 이 세상을 가리키며, 우리의 일생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맞지 않은 인생들은 삶이 사막입니다. 그들에게는 돈도 있고, 고등교육도 받았고, 사회적 지위가 있어도 그 마음에는 평안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만드셨음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죽음이후에 심판이 있어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아시스는 사막의 안식처 입니다.
겉은 사막이지만 땅속에서 물이 흐르고 있다면 거기엔 식물이 살 수 있고. 거기서 오아시스를 만듭니다.
하나님은 물도 길도 생명체도 없는 사막에 하나님은 이런 오아시스를 만드셨습니다. 그
우리 인생길이 아무리 고달파도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오늘설교를 읽으면서 [오아시스 교회] 창립 예배를 맞으면서 오아시스 교회의 비젼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아시스교회의 목표는 ?
첫째: 온 성도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배에서 생수가 흐르는 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께 생명도 바치며 사는 헌신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설교속에 있는 오아시스의 비젼이 나의 비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너는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예 주님 사막과 같은 세상가운데 살면서도 오아시스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날마다 힘입어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왔습니다”
이렇게 대답할수 있는 삶으로 살기 위하여 늘 깨어 준비하겠습니다.
55. 심판하는 자냐, 심판 받는 자냐?
(마태복음 12:38-4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41-42).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구절들을 만나게 된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난해 구절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 어느 난해 구절 못지않게 어려운 구절 같다.
우리의 상식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고,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언제 예수님을 믿었는가?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겠으며, 나아가 이 세대 사람들을 어떻게 정죄하겠는가?
우리의 상식은 예수님이 재판장이시다. 마태복음 25:31 이하에서 보는 대로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 5:26-27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라고 선언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제자들이 장차 이방인들을 심판한다고 하시지 않고,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시니까.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도 심판을 받을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일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없었는데, 오늘날 어떤 목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당장에 모든 보수적인 목사나 신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비판과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오늘의 우리가 감히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오늘날에는 어느 목사님도 이 말씀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다룰 때에 이 말씀도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장차 심판관이 되는 것은 열두 제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들이 장차 천사도 심판한다고 했다(고전 6:2-3).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모두 재판관들이 될 소망이 있지 않은가! 장차 주님이 만국을 심판하실 때에 또 누가 심판권을 가지게 될 것인가? 계시록 20:4에서는 이렇게 밝히 설명하였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더라.” 장차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할 사람들, 죽음으로 말씀을 지켜 목 베임을 받기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설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직 본문에 나타난 두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이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의문점이 있다. 곧 요나의 전도를 듣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① 그들은 육신적인 심판을 면했을 뿐이 아닌가? 영혼의 구원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② 그들이 언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을까?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고, 물론 십자가의 구원이나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자기들도 장차 부활할 것이라는 어떤 소망이나 확신도 없었을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알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
③ 그들이 언제 세례를 받았나? 성령을 받아 거듭나기를 했나? 그러한데도 그들이 어떻게 심판관이 될 수가 있다는 말씀일까?
1.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1) 예수님이 니느웨 백성들에 대하여 칭찬하신 것은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들의 회개 때문이었다. 그들의 의로움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들이 구원받은 후에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였는가를 말씀하시지 않았다.
2) 그러므로 우리도 니느웨 백성들이 어떻게 철저히 회개했는가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아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요나가 한 일은 별것이 아니었다. 그는 니느웨에서 하룻길을 행하며 외치기를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라고 하였을 뿐이었다. 그는 회개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물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왜 심판하시는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나의 전도는 마지못해서 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니느웨에는 엄청난 회개가 일어났다.
① 요나서 3:5에 보니 왕이 아직 어떤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니느웨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대소를 막론하고 굵은 베를 입었다.”라고 했다.
② 3:6에는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았다고 했다. 왕이 어떻게 체면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③ 그뿐이 아니다. “왕이 니느웨에 선포하기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라고 하였다(욘 3:7-8). 혹시 사람에게는 금식하라고 명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죄 없고 무지한 짐승들까지도 금식하라고 할 수 있었을까?
④ 나아가 3:9에서 왕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의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라고 하였다. 왕은 진심으로 회개하였고,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⑤ 이런 이야기들은 누가 지어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실제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우리가 월드컵 축구에서 4강에 들어가게 되자 “4강 신화”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참으로 요나와 니느웨 성의 이야기는 신화 이상의 신비로운 이야기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고 신화나 지어낸 이야기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의심만 하지 말고, 이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장면들을 우리가 조용히 상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는 오늘의 우리들 자신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일이다.
3)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요나의 예언대로 멸망하였으리라.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이 장차 심판관이 되리라는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들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든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닌 극히 작은 일을 했을 뿐인데,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복이었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처럼,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는 하나님께 엄청난 기쁨을 드렸다.
회개를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가를 우리는 누가복음 7:29-30에서 발견한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겸손히 회개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은혜롭게 들리고 깨달아진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4) 바리새인들은 왜 회개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고정관념과 선입관념이 문제였다. 오늘의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을 깨뜨려야 드디어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고넬료의 집에 갔다가 그는 새로운 것을 크게 깨달았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이때가 바로 베드로의 선입관념과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 깊이 박혀 있는 이 고정관념과 선입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세계가 드디어 보이게 된다. 어떤 고정관념일까?
①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구원받을 것이고 이방인들은 다 멸망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② 오늘의 우리들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오히려 거절하고 있다.
③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시지 않으시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고 또한 그들을 받으신다. 그런데 우리는 보수적이라고 할수록 더욱 마음을 닫고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은 용납하지 않는다.
2.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1) 대관절 스바의 여왕이 무엇을 했기에 그런 엄청난 권세를 가지게 된다는 말인가? 그가 ‘땅 끝에서부터’ 솔로몬을 찾아왔기에 귀한 것인가? 그는 단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던 것일 뿐이 아닌가? 그런 일은 국가 간의 외교상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다른 나라의 왕들도 많이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왕들 모두가 장차 이 여왕과 똑같은 권세를 가지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2) 예수님이 왜 남방 여왕을 칭찬하셨을까?
① 예수님은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왔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물론 다른 나라 왕들도 먼 곳에서부터 왔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 사람들에 대하여는 칭찬을 하지 않으셨을까? 우리는 그 왕들이 찾아온 동기나 본심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다. 그들은 모두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찾아왔다. 자기의 딸을 바치면서 솔로몬과 가깝게 지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왕비가 700명, 후궁이 300명”(왕상 11:3)이나 되었다. 그러나 남방 여왕은 그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지혜를 사모하여 솔로몬을 찾아왔던 것이다.
② 스바의 여왕이 찾아온 사실을 알려주는 열왕기상 10:1에서는 그가 찾아온 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예루살렘이 이르니.” 그의 의도는 전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온갖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왔다. 물론 자기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그는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만나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깊은 지혜의 세계를 만나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솔로몬이 그 묻는 말을 다 대답하였으니 왕이 은미하여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드디어 스바 여왕이 정신이 현황하여 감탄 또 감탄하였다. 다른 왕들도 그렇게 했을까? 아니다. 그렇게 한 왕이 없었다.
③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중심을 살펴보고 계신다. 오늘날 교회에 찾아 나오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동기나 목적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도 너무도 많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무슨 일을 하셨던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쫓아내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마 21:12-13)라고 책망하셨다. 제사장으로부터 모두가 강도들이 되어 있었다. 오늘의 우리들의 교회는 어떨까? 안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자기를 볼 줄 알고, 솔직해야 한다.
3) 우리도 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실망을 느낄 때가 많았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헌금도 잘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데 그 모든 것이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평신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였다.
①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시면서 칭찬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의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다른 사람들의 속에는 간사한 것이 많이 있다는 말씀이 아닌가? 나다나엘은 아주 드물게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그를 잘 안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누구를 잘 안다고 하실까? 예수님은 물론 유대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 율법사들도 잘 아셨다. 그러기에 무섭게 책망도 하셨다. 문제는 심판 날 “내가 너를 아노라.”라는 선언을 듣는 일이다. 당신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② 하나님은 유대 나라가 망하게 될 때에 예루살렘 성 안에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찾아보셨는데”(렘 5:1), 그만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씀하신다. 에스겔 22:30-31에도 마찬가지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한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을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③ 우리가 교회에는 왜 다니는가? 지혜를 구하는 마음이 있는가? 진리를 사모하는가? 하나님께 은혜 받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는가? 참으로 천국을 소원하면서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가? 중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동기 중에 하나는 카톨릭교회에서 소위 면죄부(免罪符)라는 것을 팔아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돈도 안 받고 구원의 확신이라는 면죄부를 팔아먹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자들을 기뻐하실까? 교회가 할 일은 신자들에게 거짓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을 주어서 방심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귀가 제일로 좋아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가를 일깨워야 한다. 그래서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아무 것도 되지 않았는데도 다 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3.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좀 더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1) 참 믿음은 죄를 철저히 회개할 때에 오는 것이다. 마가복음 1:15에서는 예수님의 전도 제1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복음을 믿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것이 회개다. 그러니까 바른 회개가 되지 않으면 결코 바른 믿음도 갖지 못한다.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참 믿음이 어떻게 오는가를 잘 일깨워주셨다. 회개가 바르게 될수록 마음이 넓어지고 진리에 바로 서게 된다. 또한 나와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철저히 회개할 때에 마음이 깨끗해지고 하나님의 세계가 보인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5에서는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의 목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 첫째가 “청결한 마음”이요, 또한 “선한 양심”이다. 이것이 없는 믿음이란 모두가 거짓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1:6-7에서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탄식하였다.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래야 바른 믿음이 거하게 된다.
2) 참 믿음이란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그를 사모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가?
① 고린도전서 1:24에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말씀한다. 남방 여왕은 물론 예수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솔로몬의 소문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지혜를 만나보려고 하였고, 그 지혜를 사모하여서 만사를 제쳐놓고 멀고도 먼 길을 사양치 않고 솔로몬에게 찾아왔다.
② 잠언 8장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인화(擬人化)하여 설명하는데, 이 지혜가 곧 그리스도임을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다.”(22-23절)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하실 때에 내가 하나님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였다.”(29-30절)라고 말한다.
③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잠언 9:10이나 욥기 28:28뿐 아니라, 미가 6:9에도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그렇다. 그런데 그 지혜는 어디에서 올까? 욥기 28장에는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라는 말씀이 거듭 나온다. 욥은 간절히 찾고 또 찾았다. 그는 스스로 대답하기를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라고 말하였다. 과연 그 지혜가 어디에 있을까?
이사야서 11장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이렇게 나온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사 11:1-3). 여기에 그 답이 있지 않은가? 여호와의 신, 곧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보내주신 성령이 바로 지혜와 총명의 신이시다. 그분이 오시면 된다.
④ 모세가 세상을 떠날 때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다. 그랬더니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였다. 드디어 여호수아는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들을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였다. 이런 일은 당신에게도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최소한 우리의 자녀들을 약속의 땅, 저 아름다운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없이는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없다.
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함께 지식, 곧 진리를 사모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워지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 뜻을 행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그 마음을 드리자.
3)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은 그리스도를 잘 몰랐지만, 우리 앞에는 그리스도가 계신다. 예수님이 선언하셨다.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① 철저히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도 아직 그리스도를 잘 알지는 못했다. 그토록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한 남방 여왕도 아직 그리스도를 잘 알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될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를 아는가? 예수님도 당신을 안다고 말씀하시는가? 혹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나 하시지 않는가? 철저하고 진실한 회개를 통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마음에 흐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찬 186-5)라고 찬송할 수 있다.
② 그들은 장차 이 세대 사람들을 심판할 심판관들이 될 약속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영광스러운 약속이 있겠는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님을 아는 지식”(빌 3:8)! 이보다 더 고상한 지식은 없다. 이 지식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뿐 아니라,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을 줄 것이다.
③ 가장 중요한 것, 오늘 우리는 그것을 결단해야 한다. 장차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과 함께 앉아서 만국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는가? 아니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 사람이 되겠는가?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심판하는 자냐, 심판 받는 자냐?]를 읽고
오늘도 여전히 나균용 목사님 설교를 읽으면서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고,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니느웨 백성들에 대하여 칭찬하신 것은 그들의 회개 때문이었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는 하나님께 엄청난 기쁨을 드렸다.
참 믿음은 죄를 철저히 회개할 때에 옵니다.
때문에 마가복음 1:15에서 예수님의 전도 제1성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우리는 복음을 믿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회개입니다. 바른 회개가 되지 않으면 결코 바른 믿음도 갖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참 믿음이 어떻게 오는가를 잘 일깨워주셨습니다.
회개가 바르게 될수록 마음이 넓어지고 진리에 바로 서게 될 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철저히 회개할 때에 마음이 깨끗해지고 하나님의 세계가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은 그리스도를 잘 몰랐지만, 우리 에게는 예수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철저히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도 아직 그리스도를 잘 알지는 못했고 그토록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한 남방 여왕도 아직 그리스도를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 복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먼저 내 마음의 더러운것들을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나님과의 진정한 대화인 기도가 열리게 됩니다.
장차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과 함께 앉아서 만국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는가? 아니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 사람이 되겠는가?
오늘도 나균용 목사님의 귀한 설교를 읽으면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타락하고 음란한 이 시대에 나 뿐만 아니라 이 나라와 이 민족, 북한에 있는 우리 가족들이 사탄마귀 우상을 섬기고 있는 죄를 내가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 께 긍휼을 구하며 이 한반도가 하나님의 제사장 민족으로 쓰임받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삶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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