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관하고 있는 책 최남선 저 <국민 조선역사> 1947년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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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이 변절자로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았으면 이 원본은 더 큰 가치가 있을터인데 아쉽습니다. ㅎ
이 책 <국민 조선 역사>는 육당이 광복후인 1947(정확히는 1946년 12월)년에 자신의 출판사(동명사)에서 펴낸 역사책이지요. 그러나 저자의 친일행적으로 여론이 악화돼 1948년 10월4일 열린 각도 학무국장 회의에서는 최남선(이광수 포함)의 저서를 학원으로부터 축출하기로 결의했지요. 그 나흘 뒤 안호상 초대 문교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최남선과 이광수의 저서를 부교재 등으로 쓰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구요. 이후 전국 중등학교 교장회의에서는 1949년부터 반드시 검정된 교과서를 사용하되, 최남선의 역사 및 지리 관련 저서 일체(총 7종)와 이광수의 <문장독본>은 사용금지토록 조처했었지요.
춘원, 벽초와 더불어 조선의 3대천재라 불이웠던 육당이 독립선언문을 쓸때의 나이는 29세였지요. 이일로 잠시 투옥되었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난후 부터는 ‘동명사’라는 출판사를 하며 일본총독에게 편지를 보내 <동명>이란 잡지를 내면서 친일을 시작한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여서 안타깝습니다.
그는 일제의 배급을 타먹기를 거부하고 총독부를 등지게 지은 성북동 심우장에서 단식하다 입적하신 만해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려면 그의말년을 보라는 선친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위키백과를 비롯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리고 나무위키등도 최남선을 친일로 규정한 것은 동일합니다,
그외에도 최남선씨의 친일관련 행적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본 것입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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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애족적 행동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바로 '짧았던 애국(愛國)'을 끝내고 바야흐로 '기나긴 매국(賣國)'을 시작할 즈음이다.
[반항을 위한 불평불만'이 사라진 최남선 ]
3.1운동으로 투옥됐다가 1921년 10월 가석방된 후 두 달이 지난 1921년 12월 25일, 드디어 최남선은 '말(馬)을 갈아탔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즉 일본 도쿄의 아베(阿部充家)라는 자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그는 경성일보(京城日報) 사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해군 대장 출신으로 당시 조선총독으로 있던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조언자로 꼽힐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최남선이 그에게 편지를 한 이유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쓴다. "선생께서 주신 책을 읽고 시대의 추세를 거의 파악하게 되었다"고. 장문의 편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져 "금후(今後)에도 선생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동명(東明)》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싶다"고 청원하기에 이른다.
1922년 창간된 22면의 타블로이드판 《동명》은 예상하다시피 친일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던 주간지로, 조선 총독 사이토와의 연줄을 배경으로 독립 의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아베를 연결고리로 하는 사이토 총독과 최남선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존 관계를 이루고 있던 것으로, 놀랍지만 1920년대 초반의 최남선은 1919년 3월의 그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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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은 하나다! ]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30대 초반부터 보이기 시작한 최남선의 친일 성향은 1928년에 이르러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조선총독부 소속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이 기관은 '조선과 일본이 결국은 같은 뿌리에서 왔다'는 이른바 '일조동근론(日朝同根論)' 등을 주장하며 조선과 동아시아 역사를 왜곡하던 단체로, 식민 사관을 개발하는 데 앞장선 단체로 알려져 있다.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의 편수위원으로 일하면서 민중의 독립 의지를 꺾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돼,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변절자'라는 애칭아닌 애칭을 달고 살아가게 된다.
이후 그는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만주의 어용(御用) 신문이라 할 수 있는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을 거쳐, 이듬해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만주에 설립한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쉽게 말해 부귀와 영화가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청년들아, 대동아 성전에 참가하라!"]
더군다나 최남선은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조선 청년들을 향해 학도병에 자원입대하라며 참전을 독려하기도 한다. 그가 참전을 독려했던 대상은,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도병 자원을 권고하러 현해탄을 건넌 예에서도 알 수 있듯 국내와 일본을 넘나들고 있다.
실제로 1943년 11월 14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이광수와 함께 일본 도쿄의 메이지대학 대강당에서 열린 학도 궐기 대강연회에 참가, 열변을 토한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 1943년 태평양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출정하는 학도병과 그를 환송하는 어머니. 최남선은 조선은 물론 일본까지 가서 조선 청년들의 태평양전쟁 참전을 부추긴다.
ⓒ2003 민족문제연구소
"우리 일행은 동경을 중심으로 맹활동을 하였다.… 우리는 지난 14일과 20일 이틀 동안 메이지대학 대강당에서 학도 궐기 대강연회를 열었는데 그 때의 성황과 학도들의 열의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학도들은 황국을 위하여, 대동아건설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불타는 결의로 충만한 우렁찬 모습들이었다.… 나는 원컨대 입영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건전한 신체와 열렬한 순국의 결의로 매진하여 미·영 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정신을 발휘하는 가운데 잘 싸워주기 바라는 바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 7일에도 <매일신보>에 쓴 '전력증강 총후 수호의 진로'라는 논설을 통해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이 전쟁이 이기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것은 일본 국민의 영혼의 힘이 세계에 절대하기 때문이다. 미.영의 물량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것에는 한도가 있다. 그러나 영혼의 힘에는 한계가 없다. 만일 이 전쟁에 우리들의 운명이 참패를 당한다고 하면… 그것은 인류의 영원한 비극이요, 벗어날 수 없는 암흑의 운명을 뜻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겨야 한다."
[ "최남선은 이미 죽었다던데?" ]
그러나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고착화되어 가던 당시에도 민족혼은 완전히 말살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남선이 아무리 끝없는 영욕을 위해 달려가도 이에 대해 일갈을 서슴지 않는 이들이 있었으니, 먼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 그는 한 동이의 술을 최남선의 집 대문에 뿌리고 "육당은 죽었다"며 통곡하고, 길에서 최남선이 인사하자 "최남선은 이미 죽었다던데"하고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버렸다 한다.
한용운(韓龍雲) 선생도 최남선이 1928년 조선사편수위원이 되자 생초상(生初喪)을 치러준 바 있고, 역시 길에서 만난 최남선이 인사를 하자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故人)이오"라고 일갈한다.
여기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역시 빠지지 않는다. 당시 대구 감옥 수감 생활이 14년째로 접어들 무렵, 김창숙 선생은 일본인 간수가 읽어보라며 최남선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건네주자 "이런 흉서(凶書)가 있는가"며 책을 마루에 내던지고 "기미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이런 자가 도리어 일본에 붙은 역적이 되다니 만 번 죽어도 그 지은 죄는 남을 것이다"라며 울분을 토했다고 전해진다. 최남선의 변절은 결국 위당과 만해, 심산으로 하여금 슬픔을 유발했고, 한반도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로 남게 된 것이다.
▲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전라남도 조사부가 전남 광주에 설치한 투서함에 중절모를 쓴 두 사내가 투서하고 있다. 국회는 1948년 9월 7일 반민법을 통과시키고 반민특위를 구성, 1949년 1월 8일 박흥식 체포를 시작으로 활동에 들어간다.
ⓒ2003 역사학연구소
그러나 이런 변절에 대한 최남선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마포형무소에 반민족행위로 수감 중이던 1949년 2월 일종의 자백이라 할 수 있는 '자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