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분들로써 전직 대학교 총장, 고위 공직자, 대기업 CEO 등이 계십니다.'
사교모임 소개가 아니다. 어느 주례(主禮) 중개사이트의 광고문구다. 과거 결혼식 주례는 신랑 신부의 은사나 지인중에서 모셔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식장을 통해 전문 주례를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은 전문 주례업체를 통해 주례자를 섭외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전화신청은 물론이고, 요즘은 온라인 사이트에서 주례자들의 사진과 경력을 훑어본 후 주례를 의뢰하는 사람이 많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에게 일생일대 최고의 순간을 맡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 결혼식 주례 업체 전성시대
올해로 창립 6주년을 맞은 온라인 주례업체 A사는 지난 한 주에만 150건이 넘는 주례 요청을 받았다. 요즘이 결혼철이라는 특수성도 있지만 2004년 사업을 시작한 이후로 매년 20~30%씩 매출증가가 이뤄졌다는 게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B업체 또한 온라인으로 밀려드는 주례예약으로 정신이 없었다. 이 업체 관계자는 "호텔이나 결혼업체등을 통해 주례 신청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면서 “초기 3~4곳에 불과하던 협력업체가 지금은 서울 경기권만 60여군데에 달한다"고 말했다.
전문 주례자를 부탁하는 이유도 여러가지. 신랑신부들은 몇년 동안 연락한번 드리지 못한 은사님께 주례를 부탁하기가 어려울 때 주례전문 업체를 찾는다. 주례를 부탁하러 찾아다니는 일이나, 결혼식이 끝난후 감사인사를 가야 하는 점이 번거롭다는 사람도 있다. 외국생활을 오래해 국내에 마땅한 인맥이 없어 전문 주례자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다 지난 1998년 개정된 공직선거법에서 정치인과 선출직 및 고위 공직자의 주례행위를 금지하고 있어 '주례 설만한 분'이 줄어들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지난 9월 결혼한 신부 황모 씨는 "시댁은 인천, 친정은 대구인데 결혼식을 서울에서 하는 탓에 지방에 있는 분께 주례를 맡기기가 애매했다"며 주례전문 업체를 찾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전문 주례의 최대 장점은 섭외절차가 간편하다는 것이다. 한 주례업체 관계자는 "지인에게 주례를 맡길 경우 사례비나 처우에 대한 문제를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전문 주례자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주례사가 너무 길거나 짧지 않고 무난한 내용으로 식을 매끄럽게 진행한다고 업체들은 설명한다.
전문 주례자를 섭외하는 비용은 보통 10만~15만원이다. 경력과 선호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 온라인에서 클릭만 하면 주례 섭외 OK
주례전문 업체들은 주로 온라인으로 접수를 받는다. 전화의뢰나 방문접수도 있지만 요즘은 온라인 신청이 대세다. 온라인에서 주례를 신청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우선 중개 사이트에 들어가면 이 업체에 등록된 주례자들의 사진과 약력이 주르륵 나온다. 여러 주례자를 비교해 살펴본 뒤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른다. 주례자가 미리 잡아놓은 예약 일정과 자신의 결혼식 날짜가 겹치지 않는지 확인하고 스케줄 조정을 거치면 주례 섭외가 끝난다. 이후 주례자와 예비부부는 주례사 작성에 필요한 연락을 주고받는다.
간혹 결혼 전에 함께 식사를 하는 등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커플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결혼 당일날 주례자를 만난다고 한다. 이때문에 예식 1시간 전에 도착해 기다리던 주례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혼주측에서 주례자를 찾아 다니느라 진땀을 뺐다는 후기까지 등장했다.
전문주례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온 이용 후기(後記)는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이모씨는 "주례업체에 단순히 금액을 지불하고 모셨다는 느낌보단 정감있고 친근함이 넘치는 주례를 봐 주신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만족했다.
◆ 인기 주례자는 따로 있어
주례를 잘 본다고 '입 소문'이 난 주례자의 경우 주말 하루에만 3~4건의 결혼식에 참석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예비 부부 사이에서 선호도 1위 주례자는 60대 초중반의 나이에 온화한 인상을 지닌 전직 교수 출신. 여기에 짧고 재미있는 주례사까지 겸비한다면 수없이 많은 '러브콜' 이 들어온다.
지금까지 2000번 이상 주례를 봤다는 이상덕(63) 씨는 "요즘 젊은 부부들은 짧고, 재밌는 주례사를 좋아한다"며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말보다 '신랑신부는 오늘부터 누가 더 장모님께, 시어머니께 용돈을 많이 주는지 서로 경쟁하라'는 표현을 쓰는 식" 이라고 말했다.
고객유치 경쟁이 치열해지자 업체들은 저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신랑, 신부가 나온 학교의 교수 출신을 주례자로 섭외하는 정도는 기본이다. 신랑이 군인이면 전직 군간부를 소개하고, 대기업 사원이면 같은 회사 전직 간부를 주례로 모셔주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업체마다 영어, 일어 능통자가 항시 대기중이기 때문에 국제 결혼도 문제없다. C업체 대표는 "다양한 직업군의 주례자를 섭외하기 위해 노력한다" 고 말했다.
◆ 돈 주고 사는 주례? 씁쓸한 이면엔...
전문 주례 일을 하고 있는 박모(63)씨는 요즘 젊은 부부의 태도에 씁쓸함을 느낄때가 많다고 전했다. 박씨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정년 퇴직을 했다. 상실감이 많이 들어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을 찾아 시작한 것이 바로 전문 주례자였다.
"나이 든 사람들이 주례를 서는 이유가 꼭 돈 때문이겠어요? 인륜지대사에 참여한다는데 자부심까지 들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결혼을 무슨 연극 하듯 하더라고. ‘빨리 끝내라’ ‘재미있게 해달라’ ‘원래부터 아는 사람인 척 해달라’ 등 까다로운 주문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요."
그는 이력에 따라 사례비를 다르게 책정하는 몇몇 업체에 대해서도 ”주례자가 무슨 상품이냐" 며 강하게 비난했다.
허위 경력을 내세워 '가짜 주례 선생'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한국주례전문인협회 박재형 사무처장은 "허위 경력에 대한 우려가 있는 만큼 철저한 이력 검토 과정을 통해 주례자를 선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