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한자 남기지 않은 ‘무소유 스님’
한국의 선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린 스님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스님이 바로
숭산 행원 큰스님인데, 이 숭산 행원 스님의
은사 스님이 바로 저 유명한 고봉 경욱 스님이다.
고봉 스님은 1890년 9월 29일,
경북 대구시 지동(池洞)에서 출생,
15세가 되기 전에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1911년 9월에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남장사에서 이혜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 경욱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유일한 제자 숭산행원의 스승
1915년 4월 경북 팔공산 파계사 성전에서 좌선,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개오의 노래를 불렀다.
비바람 가고 나니
밝은 태양 솟아냈네
푸른 산 흰구름 눈앞에 뚜렷하니
흐르는 물소리 시원도 하여라.
그 후 스님은 1922년 충남 예산의 덕숭산
정혜사 만공 스님께 전법입실 건당하고
양산 내원사에서 혜월 스님과
선농생활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후 정혜사 조실을 지냈고 마곡사 은적암,
봉곡사, 복전암, 미타사 조실을 거쳐
서울 강북구 수유동 화계사 조실로 계시다가
1961년 8월 29일 세수 72세, 법랍 61세로 열반에 들었다.
혜월 스님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미 간단히 기술한바 있었지만
혜월 스님이 양산의
내원암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젊은 고봉 스님이 대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왜경에게 체포된 후 마산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출옥하여 곧바로 찾아간 곳이
혜월 스님이 계시던 내원암이었다.
그 때 혜월 스님은 산을 개간해 농토를 만들기 위해
젊은 수행자들을 동원, 혹심한 운력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젊은 수행자들이 온종일 고된
운력을 하는데 비해 먹거리가 너무 형편 없었다.
젊은 고봉도 별수 없이 이 고된
황무지 개간사업에 동원되었다.
일은 고되기 짝이 없지, 먹거리는 부실하지,
이대로 가다가는 젊은 수행자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불만을 터놓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혜월 스님이
부산에 볼일을 보러 나가셨다.
고봉 스님은 이때다 하고,
혜월 스님이 애지중지 키워오던 소를
끌고 양산장터로 끌고가 팔아버렸다.
그리고 그 돈으로 몇몇 수좌들과 함께
곡차를 한 잔 걸치고 내원사로 돌아와
소 판돈을 공양주에게 내놓으며
“대중공양에 맛있는 반찬을 장만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혜월 스님이 절에 돌아와 보니
소가 없어졌는지라 날벼락이 떨어졌다.
“대체 소가 어디로 갔느냐?
어서 나서거라! 어느 놈이 소를 어찌 했는고?!”
그러나 대중들은 감히 어느 누구도
얼른 나서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젊은 고봉이 입고 있던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혜월 스님의 방안으로 들어가
“움머어- 움머어-”
소울음 소리를 내며 기어 다녔다.
혜월 스님은 곧바로 고봉의 소행이었음을
알아차리고 고봉의 엉덩짝을 철썩 때리며 한마디 했다.
“어 녀석아 내가 찾는 소는 어미 소이지,
이런 송아지가 아니다!”
이 때 젊은 고봉이 곧바로 대답했다.
“새끼소가 어미 소 되지,
어미 소가 새끼 소 됩니까?”
“새끼소가 어미소 됩니다”
고봉 스님이 도반 금봉 스님과 함께 충남 예산의
덕숭산 정혜사로 천하의 선지식 만공사를 찾아갔다.
고봉은 지대방에 들어 앉아 만공선사께 인사도
드리지 않고 한나절 동안이나 먹을 갈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금봉이 고봉에게 물었다.
“뭘 하려고 먹물을 이리 많이 가는가?”
“사진을 찍으려고요...”
“무슨 사진을 먹물로 찍는단 말인가?”
고봉은 대답대신 옷을 훌훌 벗고 온몸에 먹물을
잔뜩 묻혀 벽지 위에 앞뒤로 몸도장을 찍었다.
뒷몸도장을 엉덩짝의 모양에 탐스러운 복숭아
모양이요, 알몸도장은 기이한 모양이었다.
물기가 마르자 고봉은 그 백지 두장을 들고
조실로 들어가 만공 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그 괴이한 백지 두 장을 스님 앞에 내놓았다.
만공 스님은 노기등등하여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이 지금 법으로 묻느냐,
그렇지 않으면 장난을 하는 것이냐?
만일 법으로 묻는다면 고금에 이러한 법은 없다.
그리고 허구 많은 법과 이야기거리가 있는데
이런 것으로 법을 묻느냐?
장난으로 했다면 내가 너희들보다
무엇으로 보아도 위인데, 함부로 이런 장난을 해?!
이놈들 둘 다 종아리를 걷어라!”
고봉과 금봉은 꼼짝없이 종아리를 걷어 올린 채
만공 스님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만공 스님은 두 엉뚱한 젊은 수좌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두 젊은 수좌는 ‘아얏’소리도 하지
않은 채 실컷 두들겨 맞았다. 한참동안 매질을
하고 난 만공선사가 두 젊은 수좌에게 물었다.
“매맞은 기분이 어떠하냐?”
“시원합니다.” 고봉이 얼른 대답했다.
무심(無心)으로 때리고, 무심으로 맞은 매....
그것은 벌로 때린 매가 아님을 스승과 제자가
주고 받는 법거량이었는지도 모른다.
매를 맞고 나서 “시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온갖 번뇌망상에 몸부림치며
법을 묻는 젊은 수좌들에게 혼침과 번뇌와
망상을 일시에 놓아버린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었다.
만공 스님은 이 때 벌써
고봉의 그릇을 알아보고 법을 전했다.
“법은 꾸밈이 없는 것.
조작된 마음을 갖지 말라.”
이후부터 고봉은 덕숭산에 머물면서
후학들을 제접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했으니 만공 선사와
고봉 선사는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덕숭산맥을 이어주고 이어 받으며
찬란한 한국불교의 내일을 마련하고 있었다.
윤청광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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