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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우리 대소가의 피란살이
(6.25전쟁 64주년을 맞이하여 그때 우리 대소가의 가족들이 겪은 어려웠던 피란살이의 기억을
더듬어 기록해 본다. 그 전쟁의 참화에 인적인 피해가 없었든 것은 조상님의 음덕이라 생각된다.
<사진자료>는 우리 것이 아닌 화첩에서 복사해 올린 것이다
<사진자료> 참혹했던 6.25전쟁
1. 전쟁 전 고향의 평화로움
<평화로운 고향>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불법 남침을 하여왔다. 나는 그때 안동사범에 재학 중이였기에 학교에 가서야 알았다. 그 무렵 38선에서는 남북 간의 군인들의 충돌이 자주 있어서 일시적인 것으로 온 국민은 믿었다.
그러나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고 국군이 후퇴하여 안동 가까이 까지 왔기 때문에 1950년 7월 29일 부터 안동방어전이 벌어졌으니 나는 그 며칠 전에 피란 가라는 소개령이 내려져 피란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50년 6월 5일에 입학하여 겨우 2개월도 안되었는데 전쟁으로 학교가 휴학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향에 오니 전쟁의 분위기는 없고 평화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농사일도 거들고, 과수원도 지키며, 소 먹이기도 하였다.
저녁이면 여러 종반이 노래를 좋아해서 우리 집에 모여 유행가를 즐겁게들 불렀다. 최신유행가는 언제나 우리 집에서 부터 유행되었다. 그 이유는 양동형님께서 영천 내왕이 많아서 배워 와서 전달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냄새가 나기 시작>
그르던 어느 날 군위형님이 자양초등학교에 근무 중이였는데, 면내 여러 명의 청년들과 같이 징집영장을 받으니 면민들이 환송식을 열렸다. 형님이 환송식에서 대표로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았고, 참석자 모두가 태극기를 흔들며 무훈장구를 빌며 환송을 해 주었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온 식구의 걱정은 말 할 수 없이 컸다. 다행히 교사는 전시 중이지만 2세 교육은 해야 하기에 귀향조치가 되어 돌아오셨다.
날이 갈수록 포항 쪽에서 함포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우르르, 우르르 들리기 시작하드니 날이 갈수록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세이버잿드기라는 일명 호주비행기도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자주 나라갔다.
그때 전세를 알고 보니 청송방면에서 영일 죽장을 거처 기계와 자양으로 침범하는 북한군을 방어하는 아군을 함포지원 포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신수단이 취약한 산골이라 전황은 알 길 없고 조용하기만 했다.
<사갓바우 도로 폭파>
벼논을 매는 계절 왔다. 8월 하순 들어 어느 날 우리 집도 뒷귀미 벼논의 김매기가 있었다. 나는 논의 김 을 맬 줄 몰라서 집에서 점심을 가져다 나르는 일을 맡았다. 그 날 일꾼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일 꾼 들은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나는 근처 버드나무숲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자호천 건너 ‘삿각바우’ 근처 에서 하늘색의 해군 트럭이 무슨 작업을 하드니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들렸다. 무었을 했는지를 몰랐는데 뒤에 알고 보니 적군의 탱크가 못 오게 하려고 도로 폭파작업을 한 것이었다.
그 날 논매기 작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군의 도로 폭파소식을 식구들에게 전하고 저녁을 먹고 고단 하 여 잠을 잤다. 그르니 적군이 턱밑 까지 왔지만 우 리 주민들은 모르고 평화롭게 밤잠을 잔 것이다.
<사진자료>한 여름의 평화로운 농촌풍경
2. 고향에도 소개령이 내려지다.
<피란살이의 시작>
1950년 8월 하순 우리 집 논매기를 한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 대포소리가 요란했다. 뒷귀미 뒷산인 ‘새들봇갓’ 정상 쪽으로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포연이 여러 곳에 보였고, 소총소리도 요란했다. 새 군복을 입은 국군들이 M1총을 들고 마을을 황급히 지나 ‘뒷솔밭’으로 달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경찰지서 순경이 와서 영천으로 피란 가라는 소개령이 떨어졌고 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모두가 당황스러웠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생각으로 우리 집에는 큰 독이 많아 그 독을 아래채 앞 텃밭에 묵고 중요한 물건들을 넣기로 하여 독을 두 개 묻었다. 재봉틀 등 가치 있는 물건들을 넣고 흙을 덮어 남들을 모르게 만들었다.
우리 집은 우차(소달구지)가 있어 많은 양식과 짐을 싣고, 우리들은 힘에 맞게 짐을 짊어졌다. 나는 할머니의 수의 와 이불 같은 것을 맡은 기억이 난다.
우리의 피란 행렬이 가등산 모롱이를 지나 ‘벌바우’에 이르니 현병들의 검문이 있었다. 우리들은 임고면 삼매리 ‘알매’의 아버지 이모가(할머니의 형님 집)인 의성댁으로 갔다.
그 때의 우리 피난가족을 살펴보면 할머니(78세), 아버지 내외분(50세), 경산형수(26세)와 태기(6세),
형기(4개월), 양동형님 내외분(23세)과 태교(3개월), 군위형님(21세), 나(17세), 병숙(14세), 병묵(11세) 과 그리고 작은집은 중숙부(43세)와 병집(17세), 병업(15세), 병옥(13세), 병섭(7세), 병협(4세) 5남매 와 그끝에집은 병철(18세)형님, 큰집은 재종조모이신 강정할매(68세), 거여아지매(35세), 병원(17세), 병만(12세) 4식구. 김실경 등 큰 부대였다.
그때 경산형님(26세)은 영천군청에 근무하셨기에 합류하지 못했다.
그와 같이 뭉쳐 다니는 이유는 어려운 난리판을 대소가가 모두 힘을 합하여 난국을 극복하려는 정신의 발로로 생각된다.
그곳에서 하루 빨리 전세가 호전되어 수복하는 날만 기다렸다. 매일 군 트럭과 야포를 끄는 차들만 분주히 자양으로 드나들었다.
<군위형님의 참전기>
한편 군위형님께서 자양초등학교에 근무하던 중, 직장 사수의 책임으로 사택에서 직원들과 합숙하면서 지내다가 겪은 자양전투의 체험담을 하여주셨다.
“하루는 하교에 새 군복을 입은 많은 신병들이 군용트럭으로 여러 차 들어왔다. 그들은 앳된 학생들로 보였다. 학교 교정에서 소총 다루기와 전투 훈련 등 재교육을 받고 있었다. 아마 전세가 급하니 모병된 군인들을 숙련된 훈련도 못하고 전쟁터로 투입된 것 같았다.
다음날 '북당골' 쪽에서 포성과 소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고 학교에 와있던 군인들도 출전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후 많은 부상병이 학교로 후송되어 왔다. 학교가 삽시간에 야전병원이 된 것이다.
그때의 참상은 말을 못할 정도였다. 경상자는 그곳에서 치료를 하고 중상자는 영천으로 옮겨 갔다. 우리들은 부상자의 치료 등을 도왔다.
그르다 어느날 죽장과 자양 사이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여러 날 계속되었는데, 밤중에 군의 요청으로 여러 사람이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20여리를 걸어서 죽장면의 지동리 ‘황소등’이라는 고지로 올라갔다. 적의 총탄이 비 오듯이 날아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었다. 그때에 술람아재께서는 무거워하는 나의 박격포탄을 멏개 나누어 가져가셨기에 많이 힘이 덜 들었다. 그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르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우리 일행을 학교로 무사히 돌아가게했다. 그 후 몇 차래 전쟁의 진퇴가 계속되다가 전세가 불리하니 교직원들을 후방으로 후퇴 하라고 해서 조교로 와 가족들과 합류를 했다“고 하셨다.
이상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군위형님의 아슬 아슬 한 전쟁 체험담이다.
< 포항 숙부님의 피란살이>
6.25전쟁 몇 년 전에 숙부(40세)께서는 포항으로 이사를 가셨다. 그곳에서 오징어낚시 제조업을 하셨는데 전쟁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고향이 안전하다고 맏아들인 병철형님을 우리 집으로 피란을 보내왔다. 숙부님 내외분(42세)는 병걸(7세), 병주(3세)를 대리고 오천방면으로 피난을 나가셨다. 그러나 불행히도 피란처에서 숙부님께서 맹장염 수술을 받으셨다. 그 난리 통에 올바른 치료를 받지 못해 수술 부위가 덜 아문대도 붕대를 동여매고 피란생활을 다녔다고 하셨다.
그르다 포항이 탈환되어 들어가니 집은 폭격으로 불타버려서 하는 수 없이 사업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추모당에서 잠시 기거하셨다. 그르다 다시 신용산쪽으로 남의 집을 얻어 사시면서 양곡사업을 시작 하셨다.
<사진자료> ; 우리 집에도 소달구지가 있어 많은 짐을 싣고 피란을 갔다
3.영천 계남댁에서의 피란생활
<영천 전황> 6.25전사에서
o50.9.4 - 자양 자천 신녕에 적이 침입하여 전투기들이 기관소사를 하였다.
o50.9.5 - 새벽1시에 입암과 영천사이의 도로를 따라 적 3개 방면에서 공격
해 왔다. 16연대 자양에서 평천으로 후퇴 하다.
o50.9.6 - 영천읍이 점령됨
o50.9.8 - 채악산에 적이 침입
o50.9.11 - 영천읍 다시 탈환 하다.
1950년 8월 어느 날 다시 소개령이 내려져 임고의 삼매에서 영천 조교의 사과밭을 하는 계남댁으로 피란 자리를 옮겼다. 계남삼종숙(고 동창)은 아버지와 8촌간이시고, 고향에 오시면 꼭 우리집에서 지내셨다. 그르니 평소에 정의가 남다르신것이다. 우리 대소가의 피난 무리가 계남댁을 차지했고 술람족숙 식구도 합류하니 더 큰 부대가 되었다.
그 집은 방도 많고 과수원이라 외부와 차단되어 피란처로 적소였다. 계남아재 내외분과 아들 병용형님 내외분 그리고 딸 등 단순했는데 우리 큰 부대가 닥쳐 온 집을 차지하니 복잡한 분위기가 역역했다.
날마다 군에서는 모병이 시작되어 젊은 장정은 닥치는 대로 모병해 갔다. 군위형님이 징병 1기로 징집대상이나 제2세국민교육의 담당자인 교사로 면제되어 보류된 상태였다.
어느 날 친정 가신 군위형수(20세) 모녀가 우리 들을 찾아 오셨다. 그때 친정인 군위에서 피난을 오빠집인 대구로 가셨다가 난리판에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오빠이신 김용환씨가 영천군청으로 큰형님께 전화를 걸어 소재를 알아서 군위형수와 순옥(7개월)을 데리고 온것이다. 즉 죽어도 시집 귀신이 되란 뜻으로 시집식구를 찾아서 합류 시킨 것이다. 온 식구가 반가워했고, 나는 귀여운 순옥을 처음 상면하였다.
어느 날 우리 집 황소를 군에서 증발해서 갔다. 군의 부식용으로 보상도 없이 증명서 한 장 만 주고 몰고 갔어 소달구지는 그 후로 역할을 못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생활은 무질서한 모병을 피해 과수원 안에 서만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큰형님께서는 영천군청 직원들이 피란민을 구호하는 민사처의 일을 하므로 몸이 자유로워 식량 등 식용품을 공급하셨다.
그르다 어느 날 우리가 피란하고 있는 계남댁의 병용형님이 소집영장을 받아 군에 입대하는 일이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북한에 침투하는 부대에 편입되어 무수한 사경을 넘고 살아 돌아왔고 했다.
<사진자료>푸른사과가 붉게 될 때까지 피란살이는 계속되었다.
4.영천읍도 적의 손에 떨어지다.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가다>
1950년 9월 5일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영천에도 소개령이 내려졌다. 다시 피란보따리를 짊어지고 ‘완산’ 마을 앞을 지나 주남 들 동쪽의 구릉지대를 걷고 있을 때, 박격포탄이 여기 저기 떨어졌다. 다행히 가까이는 100여m 떨러진 논에서 폭발하니 우리 일행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엎드렸다. 모두가 당황스러웠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도동'의 영천 경주간 국도에 다다르니 비옷을 입은 군인들이 못 가에 전투대형으로 배치되고 있었다.
그때도 북한군의 포탄이 머리위로 생 생 나라가고 있으니, 몸을 어디에 숨겨야 할지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몰랐다.
발을 재촉하여 금호면 ‘술람’ 쪽으로 나아갔다. ‘술람’은 아버지와 10촌간이신 술람아재(고 도식)의 처가 곳이다. 대부대가 방과 마당을 차지하니 작은 집이 혼란스러웠다.
<'술람, 섬들'의 피란생활>
그때 영천읍를 차지한 북한군이 채악산 까지 처 들어 와 장총을 메고 지나가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우리가 있는 곳 까지 곧 올 것 같았다. 밤이 되자 형님들이 뒤 언덕에 올라가서 영천 쪽을 보니 조명탄이 하늘을 수놓고, 화기의 섬광이 서로 교차하는 야간전투의 모습이 한편 재미있어 보였다고 했다.
그 이튿날 또다시 ‘술람’에서 ‘호남’을 지나 금호읍 ‘섬들’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정부의 피난민 유도계획이 경산 자인으로 유도하여 청도 매전을 거쳐 경남 밀양 쪽으로 가도록 계획되고 실행하고 있었다.
피란처인 금호면 ‘섬들’의 낮선 집에 짐을 내려놓고 한숨 쉬고 있는데 모병관이 들어 닥쳤다. 그때 술남아재, 실경, 나 등이 모병되었으나 나는 어리다는 이유로 돌려보내 주었고, 모두 다 그날 밤에 결국 다 돌라왔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불상한 실경이(우리 대소가의 궂은일을 함)의 신상에 항상 관심을 두셨다. 나는 돌아왔지만 실경이가 오지 아나서 애를 태우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 때 경산형님께서 영천군청 직원으로써 민사처 완장을 두르고 피란민을 돕는 업무를 수행하다 그곳에서 우리와 만났다. 역시 식량 공급 등의 조치를 하고는 다시 공무수행 차 떠나셨다.
<영천대첩의 언저리에서 피란하다.>
1950년 9월11일 영천이 탈환됨에 따라 다시 짐을 챙겨 영천 조교 계남댁으로 돌아갔다. 복귀하면서 보니 여기저기 전쟁의 참혹한 흔적이 많이 보였다. 부서진 탱크, 군용트럭, 화물차, 포탄 등과 전사자의 가묘도 여기 저기 보였고, 말이 죽어 있는 모습도 보였다.
영천전투에서 북한군은 아주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기 때문에 아군이 북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전사에 길이 빛나는 영천대첩을 이룬 전투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언저리를 돌면서 피란살이를 한샘이다.
영천대첩의 전과를 전사에서 찾아보니 전차, 박격포, 대전차포, 로켓포 등 수 많은 무기를 노획했고, 사살된 북한군이 3,799명, 포로 209명이다.
계남댁에서 수복할 날만 기다리며 여기저기 들판을 돌아다니다 수로에서 물고기도 잡았다. 물을 푸니 수로에 버려진 북한군의 다발총을 찾기도 했다.
그르다 자양으로 복귀해도 된다는 소식을 듣고 짐을 싸서 짊어지고 고향으로 향하였다.
<사진자료> ; 우리도 저처럼 지고 매고 피란을 갔다.
영천전투 당시 8사단 21연대 장교들의 모습, 마지막 공세가 가해진 영천지역이의 전투
5. 우리 집이 불타버렸다.
<재 더미로 변한 우리 집>
1950년 9월 11일 영천에서 대패한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뒤 이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로가 차단되어 후퇴가 가속화 되었다.
계남댁에서 자양 귀환을 고대하다가 복귀해도 된다는 소문을 듣고 귀향하기로 하였다. 소달구지로 많은 살림을 날라 왔으나 이젠 소가 없으니 다 버리고 중요한 것만 가지고 걸어서 자양으로 향했다.
도로 양쪽에는 부서진 탱크와 군용차, 버스, 야포, 지뢰, 포탄, 탄피 등이 널려있었다. '월연 솔끝’을 지나 우리 집을 바라보니 집은 보이지 않고 연기만 나고 있었다.
황급히 달려가 보니 집은 불타 버렸고, 그때 까지 연기가 나고 있었다. 피란 갈 때에 우리 집에는 발동기로 보리방아를 찧어주고 삯으로 보리를 받아 바깟마당과 안마당의 경계에 있는 담 밑에 수 십 가마니를 쌓아 두고 떠났는데 그 보리가마니가 그때 까지 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온 힘을 기우려 훌륭한 좋은 새집을 지으신지 10여년 만에 불타버리니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대성통곡을 하셨다. 온 식구가 같이 울었다.
우리 집은 전 살림이 불타버린 것이다. 특히 몇 대를 이어 소장했던 귀중한 서책, 어머니께서 시집오시며 가져 온 귀한 장롱, 소중히 간직했던 여러 가지 가구, 가사도구 등과 특히 추억어린 귀중한 사진첩도 다 불타버렸다. 다행히 우리 여러 남매의 학교졸업장과 상장 등은 누가 간수해 피란을 시켰는지 현재도 남아있다.
<북한군의 지휘소가 된 우리 집>
우리 집이 불탄 것은 북한군의 지휘본부가 있어서였다. 집이 커서 방이 많았고, 마당이 두 개이니 많은 인원이 모이기 좋고, 우물이 있어 식수하기 좋고, 마당까지 길이 넓어 차가 들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6.25전쟁 전에도 공비소탕을 할 때 우리 집이 국군의 지휘소가 된 적이 있었고, 전쟁이 나고도 강원도경찰이 후퇴해 와서 우리 집에 한 때 와 있었다.
그르다 전쟁 중에 우리 집을 북한군들이 차지하여 들락거리니 아군 정찰기가 군인이 있다고 연락하여 F80 전투기가 와서 소이탄을 투하하여 여러 집을 불살랐다.
뒷소문에는 불이 담을 타고 지붕으로 번져나가 초가집이 다 탔다고 했다. 사람 만 있었으면 불을 끌 수 있다는 말이다.
<아버지께서 이룩하신 불탄 우리 새집>
애석하게 불타 버린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증조부가 살림나신 집이 고택이라 새집을 마을 앞의 우리 밭에다 널찍하게 터를 잡아 ㄷ자 형의 집을 지으셨다. 내가 6살 때쯤 집을 지을 때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며 도대목이 평촌노인이었다.
몸채 네 간, 사랑채 세 간, 아래채 네 간이였고, 소마굿간은 별동으로 있었다.
재목은 장차 기와를 이을 계획으로 굵은 것으로 썼으며, 대청마루의 판목는 벼 등겨를 덮어 시어 불에 구워서 재질이 빨갛게 윤이 나게 하여 깔았다. 그리고 앞, 밖같 두 개의 넓은 마당과 우리 동내의 첫 우물까지 팠다. 집 둘레에는 과일 나무가 둘러섰고, 사랑방 앞에는 화단이 있어 무궁화와 작약, 골담초, 회양목, 난초 등도 심어져 있었다.
불행이도 돈이 부족하여 기와를 못 이은 것이 화재를 당한 이유가 되었다.
<폐허가 된 고향마을 >
그때 동네를 살펴보니 초가였던 집들은 모두 다 불타버렸고, 돌담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고, 마을의 여기저기에는 미군이 터뜨린 소이탐의 흰색껍질과 여러 가지 총기류, 탄약, 군 장비, 탄피 등 이 널려있어 전쟁이 휩쓸고 간 그 자취 바로 그대로였다.
피란 간 집은 대다수가 불타 버렸고, 피란 가지 않고 있었던 집은 불을 꺼서 살아남아 있었다. 그리고 선조의 얼이 스며있는 강호정과 추모당, 송암정 등 정자 재실이 피해를 보지 않아서 다행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기와집들도 모두가 무사히 난을 피해 있었다.
<사진자료> ; 네이팜탄(소이탄)을 공중 투하하는 F-80
<사진자료> ; 네이팜탄(소이탄)으로 불타고 있는 가옥들
6. 원산댁에서의 피란생활
<귀향 후의 여러 모습>
다음은 거주할 집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월연의 아버지 종숙이신 원산댁에 국동재종제가 살고 있었기에 부탁해서 아래 체 방 두간과 대청, 몸체의 옆방을 얻어 짐을 풀었다.
식구가 많다. 할머니와 아버지 내외분, 경산형수와 태기 형제, 군위형님 내외분과 순옥, 양동형님 내외분과 태교, 나, 병숙, 병묵, 병철형님 등 16명이다. 방 세간에 나누어 살기 시작했다.
그때는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가 살아남음을 축하했다. 그때 어른들의 인사 대답은 "대동지환(大同之患)으로 다 당하는데...."이라고 했다. 나는 그 낮선 문자가 우스워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마을을 다녀보니 여기저기 전차지뢰, 대포 탄피, 부서진 군용차, 군수물자, 소총 및 탄환, 철조망, 철모 등이 널려있어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M1소총을 주어다 총신을 줄로 끊어버리고 가져놀다가 버리기도 했다. 논밭에는 여기 저기 포탄이 터진 웅덩이가 생겨 물이 고여 있기도 했고, 그리고 ‘진질밭’에는 그냥 흙으로 가매장한 군인들의 무덤이 여러 곳에 보였다. 그때 질서가 없어서 그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자호천에는 팔뚝만한 은어가 떼를 지어 얕은 물에도 헤엄치고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같이 ‘새들 보’ 밑에 가서 막대기로 두들겨서 은어를 많이 잡아 왔다. 그와 같이 많은 이유는 전쟁 중이라 아무도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는 병철형님과 같이 ‘모사골’ 수원지인 물구덩이에서 물고기를 수류탄을 던져서 많이 잡아온 기억도 난다. 나는 그날 겁이나 숨어있었다. 그르나 철이 형님은 대담하여 주은 총도 잘 쏘고, 간 큰 짓을 자주 했다.
그 해의 농사는 비가 자주 와서 사람이 논밭을 건사하지 못했는데도 다행히 풍년이 들었다. 추수는 불탄 집 마당에서 하였다. 나도 열심히 거들었다.
<경산형님의 셋방살이>
1950년 7월 10일자로 경산형님께서 영천군청에 기원으로 발령받아 근무를 시작하셨다. 처음의 하숙은 영천 도동으로 시집간 제종고모 교촌동 집이였다. 그전에 나도 중하교에 다닐 때 일 년 반 동안 하숙한 곳이기도 했다. 그 시절은 친척집에 하숙함이 통산적인 예였다.
1950년 가을에 경산형님도 돌밭댁에 옆방을 얻어 숙이를 오게 해서 자취를 시작 하셨다.
그때에 나는 추수를 거들다 계속 기침이 나고 열이 나서 영천의 주의원에서 진찰을 받으니 폐침윤으로 진단되어 통원 치료를 위해 합류 했다.
다음에 이사 간 곳이 그 집에서 좀 떨어진 '부채만댕이'의 이씨 집이었다. 나는 그때 그집에는 개인수도가 없어 멀리 떨어져 있는 군청청사 옆의 공동수도에서 물지게로 물을 길러 날랐다. 하루는 지나가던 미군이 물지게를 진 나의 모습을 신기하게 여겨 사진을 촬영 해 갔다. 아마 세계적인 유명 사진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때 영천에서도 신병을 교육하고 있었다. 집에서 바라보이는 수도산에는 매일 고지를 공격하는 전투 훈련이 진행되는 모습이 보였고. 그리고 자주 미군의 탱크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영천시내에는 피란민들의 초라한 모습도 여기저기 보였다.
1950년 12월 어느 날 나는 경산형님의 노력으로 군용열차를 타고 안동의 사범학교로 복학을 하러갔다. 학교에 가보니 폭격으로 교사는 살라지고 여기 저기 큰 폭탄이 터진 자리에는 물이 고여 못이 되어 있었다. 그때 전시라 고향의 동급학교에 이수하는 제도가 있어서 2월부터 영천중하교 4학년에 편입되어 학교에 다니게 되어 큰형님과 같이 영천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르다 1951년 9월에 2학년부터 다시 안동사범하교로 복학하였다.
영천의 생활은 병숙이가 살림을 맡아 그야말로 어린이 작란 같은 살림살이였다. 친구도 없으니 징역살이였지! 마침 옆집에 언하재종고모의 시숙이 살고 있었는데 시누이가 와있어 자주 만나 동무가 된 것 같았다.
1951년의 봄에 어머니께서 영천에 오셨다. 그래서 기념으로 어머니 독사진과 네 식구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에 아버지께서도 같이 오셔 사진을 찍었으면 얼마나 좋아 쓸까! 하는 후회가 된다.
51년 어머니께서 영천에 오셨다. 그날 어며니 독사진과 같이 찍은 사진
<어린 태기가 다치다.>
1951년 후반의 어느 날 폭발 사고가 났다. 호기심 많은 어린 태기가 이상하게 생긴 폭발물을 주어다 분해하려고 두드리다 폭발하여 양손과 얼굴 등에 중상을 입어 온 집안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의료시설이 빈약한 농촌이라 간단한 응급치료를 하고 어머니께서 대리고 영천으로 가셔서 주외과의원에서 치료를 받게 하셨다. 지금도 그 손자인 태기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할머니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고 한다.
“병원의 의사와 조수가 나의 손과 얼굴의 상처를 무지막지하게 벗기고 바르고 치료 할 때의 그 고통은 말 할 수 없이 병원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저를 달래서 치료케 하신 할머니의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수가 없다.“ 고하고 있다.
<할머니께서 돌아 가셨다.>
6.25가 일어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52년 1월 25일(음12월 29일) 할머니께서 피란살림 중인 원산댁 사랑방에서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소위 객사를 하신 것이다. 나는 그때 안동사범에 재학중이였는데 전화를 받은 선생님이 전해주었다. 기차 편으로 영천에 오니 대구사범에 다니시던 군위형님을 영천 동문통에서 만나 같이 걸어서 자양으로 간 기억이 난다.
나는 우리 집에서의 죽음이라는 초상은 생후 처음이고 특히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던 할머니의 별세는 나에게는 처음 겪는 큰 충격이었다. 효심이 지극하신 아버지 삼 형제분께서는 7일장을 상례법에 맞게 무사히 마치시고, 그 후 삼년상을 나셨다.
할머니 상주복을 3년 입고계셨던 송당공 삼형제 분
<중숙부님 새로 집을 지으시다>
중숙부께서는 6.25전쟁으로부터 20 여 년 전에 일본으로 가시어 토건업을 창업하여 많은 돈을 버셨다.
1945년 조국해방으로 그해 겨울 일본에서 귀향하여 신용산의 경찰지서 옆의 기와집을 사서 사셨다. 그르다 우리와 같이 피란하고 돌아오니 집은 포탄으로 약간의 손상이 있었으나 살기에는 별 불편이 없었다.
1951년 상반기에 사시던 집을 경찰지서의 사택으로 팔고, 임시로 큰집인 거여댁에 새로 짓는 집이 준공될 때 까지 살다가 이사를 하였다.
불탄 우리 집이 있었던 인구 마을 입구에다 4 간 겹집을 지으셨다. 이사를 하고 할머니 빙소를 그 집으로 옮겼다. 그때 중숙모께서 몇 년 전에 별세를 하셨기 때문에 병옥이가 살림을 맡아 살았다. 그래서 매일 아침저녁의 상식과 초하루 보름의 삭망의 제수는 월연의 큰집에서 날라 지냈다.
<불탄 집터에 새집을 짓다.>
1952년 상반기 들어 온 식구가 남의 집에 살고 있는 것이 한스럽고, 특히 할머니 빈소도 작은 집에 있으니 큰형님께서 우리 집 전체 복원은 어렵고 연차계획을 새워 한 채씩을 복원키로 결정하셨다.
그래서 아래채 4 간 부터 짓기로 하고 자금은 큰형님께서 대시고 감독은 아버지께서 하셨다. 그때만 해도 동내 사람들이 도와주는 풍습이 있어, 알매(지붕을 이기 위한 일들)를 동네 분들이 도와주었다. 지금도 동내사람들이 지붕을 이는 모습의 사진이 기억난다.
집이 준공되어 원산댁에 좁게 살던 식구들이 새 집으로 옮겨와 집 없는 서러움을 풀게 되었다. 그리고 작은 집에 모셨던 할머니 빙소도 같이 옮겨졌다. 그래서 한 많은 6.25전쟁의 피란살이의 막이 내려 진 것이다.
7. 두 번째의 피란을 가다.
1951년 2월 어느 날이었다. 정월 대보름을 지나니 날도 많이 풀리었다. 그때 우리 여러 종반이 모이 며는 노래도 하고 신나게 작란도 치고 놀고있는데, 그날 오후에 다시 피란을 가라는 연락이 왔다.
그 피란의 이유는 알고 보니 북한에서 후방교란을 위해 많은 유격대를 배에 실어다가 울산 쪽의 어느 해안에 상륙시켰는데, 언양 부터 국군과 유엔군의 추격을 받아 산맥을 타고 북으로 올라가면서 교란작전을 펴고 있는 부대였다.
우리 식구는 다시 간단히 짐을 싸 짊어지고 걸어서 1차 피란살이를 했던 임고면 삼매의 '알뫼' 의성댁으로 다시 피란을 갔다. 그때 소개령을 내린 이유는 그 날밤 유격대가 신방을 넘어 자양으로 처 들어 온다고 판단하여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다고 했다.
피란 가면서 보니 성곡리의 언덕에 미군들이 호를 파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밤에 통과하는 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되자 우리 식구는 여러 집으로 나누어 자러갔다. 나는 병철형과 의성아재의 끝에 동생이신 연동댁에 갔다. 그런데 한밤중에 이곳으로 유격대가 들러 다쳐 밥을 지어 달라고 하여 떡국을 끓어주었는데, 우리 둘은 방을 나와 화장실 입구에 서있는 대마 속대인 ‘재랍’을 앞에 새우고 뒤에 숨었다. 군화소리가 요란했다. 가슴이 뛰었다. 철이 형님의 숨이 가빠 몸을 떠니 ‘재랍’이 흔들이며 소리가 났다. 조용히 하라고 손으로 자극을 주었다. 그르나 도리어 나를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르고 보니 자신은 모르고 남의 행동만 느낀 것이다.
유격대는 자양으로 가지 않고 밤중에 임고의 삼매 쪽으로 온 것이다. 결국 우리는 난리를 마중 간 것이 되었다.
밤을 새우고 아침이 되어 나가보니 미군들이 부상한 패잔병 1명을 잡아 가고 있었고, 유격대는 매곡 쪽으로 살아졌다. 조금 있으니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인 무스당 전투기 여러 대가 매곡 쪽으로 기총소사를 요란하게 하였다. 다 죽었으리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전과는 미미했다는 소문이었다.
우리는 다시 자양으로 복귀했다. 그르니 미련하게 남아 있었던 사람만 덕을 본 샘이다.
그 유격대는 그 이튿날 밤 화북면의 자천경찰지서를 습격하여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고, 의성 안동을 거쳐 올라가며 그런 만행을 자행하다 결국은 모두가 소탕되고 말았다고 한다.
<사진자료> ; 미군들이 참호를 파고 있다.
<사진자료>항공모함에서 출격을 하고 있는 함재기
첫댓글 우리집 피난살이 역사을 쓰셨군요,
숙부님 종반분께서 6,25사변에 관한 여러이야기는 많이 듣곤 했습니다,
우리 집안 만해도 징집되여 전사자가 많은걸로 알고있으나,
우리집은 한분도 징집 당하지않고 조상님의 음덕으로 잘 피해 입지않았으나,
철모르고 부질없는 장난으로 폭팔물 사고로 저만 6,25사변 피해자가 되였네요,,,
피난살이 갔다 돌아오니 다타버린 가옥, 우물가에 당감나무 향나무 붙잡고 통곡하시는 할아버지,
폭팔사고 양손 다리 모두 다쳐 치료 과정에 할머니 애를 많이 태우시고 걱정도 고생도 많이하셨지요,
숙부님 올리신 사변사를 읽어보니 돌아가신 할아버지 내외분이 그립고 생각 간절하네요
수고 많았습니다
그때 생사를
그시절 생각만
해도 끔직한 그때의
모습들을 기억하시어
글로 올리고 사진도 찾아
옮길 수 있다는 것은 글 솜씨가
대단하시며 지역을 알아 생생하게
적을 수 있었음에 감격하옵니다
지금은 이야기로 생각되지만 그때는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겠습니까
두고 피해 다니셔야 되었던 마음이었으니
일일이 이름도 기억하시고 나이도 알고 계시니
집안의 모든 일에 관심도 많으시고 리드도 잘 하시니
존경하옵니다. 그 시절의 형상을 잘 읽고 느낌이 많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의 고생은 필설로 표현키 어럽지요!
과분한 칭찬이네요!
그때 원산댁과 아재집인 기계댁은 앞 뒤집이고 울산아지매와 나는 동갑이라 자주 청년들이 아재집에서 모여놀았지요! 어릴때 아재가 누나들에게 어리광과 고집 부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인계 그렇네요
어림푸시 문호아즈매께서
사신것은 기억이 안나고 원산아즈매
옆방에는 국동형님 내외와 교촌어른(병용씨 형제)
이 계셨든것은 기억 납니다. 금성(동발)형님과 병진이 하고
자주 놀았는데 원산아즈매께서 저를 너무 너무 아껴주셔서 칭찬의
기억은 남아있네요. 정말 감사의 마음을 전해 올립니다
저에게도 너무나 많은 일들이 생각이 나지만 이렇게 정리를 상세하게 하셔서 깜짝 놀랄정도입니다,
대단하신 우리형님 존경 스럽다는 말씀밖게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이글을 읽으면서 사변이나면서부터 피난살이,귀향,집화제로 셋방살이,할머니 돌아가시고 원산댁에서 인구저근댁까지 매일 상석드리는일등 고생한 일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가지만 이렇게 정리를 할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겟지요.
형님 고생하신 보람으로 저의 추억을 더듬어 볼 기회를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고생 하셨습니다...
여가가 있어 기억을 더듬어 기록해 보았다. 볼수록 틀림이 많아 수정을 한다마는 이것도 나이인가봐....
그때 어린 내 눈에 비친 피란살이 이니 다들 눈마다 다를거야!
이 기록도 우리 가족사의 한 단면이겠지?
우리 가족들의 피난사를 다 읽고나니 가슴이 아립니다. 다시는 나라를 잃거나 내란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작금의 정치인들을 보면 꼭 임란전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보는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가장이신 아버지의 가족사랑이 대단했슴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적은아버지.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오늘의 현실은 6.25전쟁 전야와 같은 느낌이난다. 무책임한 정객들과 관리들의 꼬락서니를 보니.....
전쟁이 일어나면 죽어나는것은 불쌍한 백성들이지!
경산형님의 예리한 판단력이 우리 가족들을 잘 인도하셨지!
위의 빠진 내용을 더 찾아 정리해서 가족사의 한 단면을 더 알차게 할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