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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2014,06,24,뿌연가스가 가득한 가끔 흐린 날씨 독립문역-현대아이파크아파트-선바위-부처바위-달팽이바위 성곽길-정상-홍지문 종로구 옥인동 · 누상동 · 사직동 · 부암동과 서대문구 현저동 · 홍제동 경계에 있는 표고 338.2m의 산이다. 인왕사(仁王寺)가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가 궁궐터를 정할 때, 북악주산론에 대한 인왕산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 주목받았다. 조선 중기 인물인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에 보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청룡 · 우백호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면서 극력 반대하여 무학대사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나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또 신라 말의 도선대사가 지었다고 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국도를 정할 때 스님의 말을 들으면 국기가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5대 만에 세조의 계유정난이 발생하고,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19세기 기록인 ≪한경지략≫에서 볼 수 있다. 과연 선조가 사직골에서 났다.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색문동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그 왕의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인왕산 아래에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인조 2년(1624) 2월에는 안주병사 이괄이 반기를 들고 서울을 점령하여 도원수 장만과 대전할 때, 이괄이 서울사람들에게 “안산에 진을 친 장만을 단숨에 무찌를 터이니, 나와서 싸움을 구경하라.”고 선언하였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찌 많이 모였던지 인왕산은 흰 사람들로 덮여 백로처럼 되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또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많아서 태종 5년(1405) 7월에는 경복궁 안까지 들어와 횡행하였다고 하며, 세조 10년(1464) 9월에는 창덕궁 후원에 들어왔고, 연산군 11년(1505) 5월에는 종묘에 침입하였다.
속설에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는 말이 전하였다고 한다. 서산 · 필운산이라고도 한다.
독립문역 1번출구로 나와 우측 현대아이파크아파트 쪽이 들머리 아파트 상단 삼거리에서 좌측 선바위 쪽으로 올라... 인왕사 일주문을 통과하여 국사당을 지나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오르면 선바위가 나타난다. 내려다 본 인왕사 주변엔 각종 신당이 있다 국사당 조선시대의 무속신당이다. 서울 인왕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등 여러 신을 모셨다. 조선 태조 5년(1396)에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아 조선시대에는 ‘목멱신사’라고 불렸다. 무속신당이 되어 일반인의 기도장이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이전을 강요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건물은 간단한 구조로 내부에는 3면에 무신도가 걸려있고, 마루는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흔히 ‘당집’이라고 하며 굿판을 벌이기 위해 산속에 세운 굿당에 속한다. 무속신을 모신 당집이다.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국사당은 무속신앙에서 섬겨지는 여러 신을 모신 당집으로 요란한 굿판을 벌이기 쉽도록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세운 ‘굿당’에 속한다. 원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던 것을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전을 강요하여 지금의 위치로 해체, 복원한 것이다. 인왕산을 택한 이유는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에 속하고 현재 무속신으로 모셔지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국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양끝의 2칸은 새로 지은 것이다. 1칸은 4쪽의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고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내부의 3면에는 무신도가 걸려있고 마루에는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 건물보다 구조는 간단한 편이나 그 규모는 더 크다. 1925년경에 새로 지어진 국사당은 영·정조때의 건축기법을 바탕으로 한 원래의 국사당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내부의 대들보가 아치형으로 된 것이 특이한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목재의 짜임새가 튼튼한 것이 목공의 솜씨가 돋보인다. 인왕산 국사당은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하고 많은 무신도를 볼 수 있다.
禪바위 조선의 수도인 한양은 성곽도시였다. 예로부터 종묘와 사직, 궁궐을 조성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성곽을 쌓는 일은 건국의 중요한 과정 중
하나였다. 네 개의 산(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을 연결해 한양을 감싸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후에 점차 도시가 확장되면서 도심 부근의 성곽은 대부분 철거돼 사라졌다. 그나마 산 위의
성곽은 그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다행스러울 따름이다. 한 나라의 수도(정확히는 그 경계)를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성곽의 위치를 정할 때 여러 의견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오늘날 시(市) 경계나 지하철 노선의 위치를 정하는 일 같았다고나 할까. 조선 초기에는 인왕산에 있는 선바위를 놓고 무학대사와 삼봉 정도전이 설전을
벌였다. 참선(參禪)을 하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선(禪)’자가 붙은 불교풍의 이름을 갖게 됐다. 그런데 ‘불씨잡변(佛氏雜辨)’의 저자이자 숭유억불(崇儒抑佛·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누름) 정책의 선봉장이었던 정도전은 이것이 그냥 보고 넘길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나 보다. 양측(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선바위가 도성 안에 있으면 불교가 흥하고, 성 밖에 놓이면 유교가 흥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대립을 벌였다. 그러다 눈이 펑펑 내린 후의 어느 날 산에 가 보니 특이하게도 지금의 도성 안쪽으로는 모두 눈이 녹아 있는데 바깥쪽으로는 그대로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태조는 이것을 하늘의 계시로 여겨 눈이 녹은 경계를 따라 성터를 정했고,
결국 선바위는 성곽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제 중들은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태조가 눈 녹은 자리를 보고 성곽 자리를 정했다는 것은 한양의 도성을 설성(雪城)이라 부르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설성이란 말이 훗날 ‘설울’이 되었고, 다시 ‘서울’이 되었다는 추측이 나왔다. △▽뒤에서 본 선바위 선바위의 ‘선’은 보통 한자의 ‘禪(선)’자로 해석한다. 바위가 ‘두 스님의 참선(參禪) 모습’을 닮았다. ‘고깔과 장삼 차림의 두 스님이 합장하고 있는 것’ 같다. 뒤쪽에서 보면 영락없는 ‘도포 입은 스님의 뒷모습’이다. 바위에 눈이 쌓이면 공력 높은 조실스님 같다. ‘서 있는 바위(立巖)’라는 뜻의 선바위라는 설도 있다. 마을 앞에 선돌을 세우거나 돌무더기를 쌓는 ‘바위 숭배사상’의 흔적이라는 주장이다. 일종의 돌미륵사상과 통한다. ‘돌미륵의 코를 문지르면 아이가 생긴다’는 속설도 선바위 ‘돌붙임’과 흡사하다. 해골바위
안산(鞍山)은 서대문구에 있는 산이다. 무악산, 길마재로도 불리며 정상인 동봉수대에서의 경치는 서울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좋다. 봉원사가 이 산에 위치해 있으며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대문 독립공원, 서대문 자연사 박물관, 서대문구청과 길이 이어져있고 주변에는 백련산과 인왕산, 홍제천 등이 있다. 서대문형무소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있었다. 전신(前身)은 형조의 지휘를 받아 죄수를 관장하던 전옥서(典獄署)이며, 1908년(순종 2)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四天王要馬]의 설계에 의해 인왕산록(仁王山麓)의 금계동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인 경성감옥으로 준공되었다. 수용능력은 500명 정도였다. 그후 여러 차례 증축되면서 1912년 일제에 의해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불렸으며,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로 개칭되었다. 1961년 개정된 행형법(行刑法)에 따라 서울교도소가 되었으며 1967년 7월 7일부터 1987년 옥사를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할 때까지 서울구치소로 불렸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수용된 것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 허위·유관순·강우규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수감되었던 민족수난의 현장이다. 1945년 이후에도 간첩·사상범, 많은 운동권학생과 재야인사 등이 거쳐간 곳으로서 한국의 교도행정상 빼놓을 수 없는 기념지이다. 이곳에는 유관순굴·특수고문실 등이 있는 감방과 강우규·송학선이 처형된 사형장 및 일반사무실·교회당·공장·창고·취사장·식당·세면장·감시탑과 운동장 등이 있었다. 1987년 3월부터 서울특별시는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곳 전체를 사적으로 지정,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조성했다. 인왕산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기도터가 있는 곳이다
모자바위봉
남산타워가 연무에 희미하게 보인다
그냥 느낀대로 얼굴이든 미인이든 부처님이든...부르면 될듯...
가까이서 본 모자바위
부처님바위 밑에서는 많은 무속인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기도와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고 자기들 영역이라 우회하란다 올라서서 본 부처님바위...굴러 떨어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었다. 부처님바위 아래에서 우회하여 갈림길이 나오고... 산딸기를 좀 따 먹고 위쪽으로 치고 올랐더니... 이렇게 전망바위가 있더라 ♠♥전망바위에서 몇컷 건지고... 북악산
산딸기 따 먹던 갈림길로 되돌아 와 100m 쯤 내려 섰더니 성곽 넘어로 보이는 범바위 데크계단을 만나 산성을 넘어서니 초소가 있고 좌측 성곽길을 따라 오르면 범바위에 오른다 달팽이를 닮았다
범바위에서 수경사 군인한테 부탁해서 한방~~
한양도성(사적 제 10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4대문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 소의문 · 광희문 ·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한양도성에는 우리 역사 전체가 아로새겨져 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민족이 발전시켜 온 축성기법과 성곽구조를 계승하였으며,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처음 축조 당시의 모습은 물론이고 후에 보수하고 개축한 모습까지 간직하고 있어 성벽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문화유산이다. 태조 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 간, 이어서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 간, 모두 98일 동안 전국 백성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전체 공사구간(총 5만 9,500척)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이름 붙인 뒤 군현(郡縣)별로 할당하였다. 태조 때 처음 축성할 당시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쌓았으나, 세종 때 개축하면서 흙으로 쌓은 구간도 석성으로 바꾸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벽 일부가 무너져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 · 개축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비하였다. 성을 쌓을 때에는 일부 성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태조 · 세종 때에는 구간명 · 담당 군현명 등을 새겼고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 · 책임기술자 · 날짜 등을 명기하여 책임 소재를 밝혔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먼저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고,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어 1908년에는 평지의 성벽 대부분이 헐렸다. 성문도 온전하지 못하였다.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으며, 돈의문은 1915년에 건축 자재로 매각되었다. 광희문의 문루는 1915년에 붕괴되었고, 혜화문은 1928년에 문루가, 1938년에 성문과 성벽 일부가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 조선신궁과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주변 성벽을 헐어버리고 성돌을 석재로 썼다. 민간에서도 성벽에 인접하여 집을 지으며 성벽을 훼손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도로 · 주택 · 공공건물 · 학교 등을 지으면서 성벽이 훼손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일단 훼손된 문화재를 완벽하게 회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 데에만 치중하여 오히려 주변 지형과 원 석재를 훼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울시는 한양도성의 역사성을 온전히 보존하여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전승하기 위해 2012년 9월 한양도성도감을 신설하고, 2013년 10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한양도성 보존 · 관리 · 활용 계획을 수립하였다. 숙정문 · 광희문 · 혜화문을 중건하였지만 광희문과 혜화문은 부득이하게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시민들의 지혜를 모아야 하며, 축성기술 등 무형의 자산을 제대로 발굴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범바위를 넘어서면 종로구 경계점을 만나고 인왕산 인왕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라는 말은 출세한 사람이 있으면 그 덕을 입어 잘된 사람이 많다는 말이고,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라는 말은 어떤 일을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또 ‘인왕산 중허리 같다’라는 말은 배가 부른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인왕산 차돌을 먹을망정 사돈집 밥은 먹지 말랬다’라는 말은 아무리 먹고살기가 어려워도 사돈의 도움을 받기는 싫음을 뜻한다. 조선 태종 5년(1405) 7월에는 호랑이가 경복궁 내정까지 들어왔고, 세조 10년(1464) 9월에는 창덕궁 후원에 들어왔으며, 연산군 11년(1503) 5월에는 종묘에 침입하였다. 그 밖의 민가에는 피해가 실로 많았다. 세조는 친히 세 차례나 백악에 올라가서 호랑이를 잡았으며, 시 외곽인 양주 수락산과 고양 벌고개에까지 나아가서 호랑이를 사냥하였다. 선조 때는 고양 등지에서 흰 이마의 호랑이가 횡행하여 4백여 명이 해를 입었다. 조정에서는 수많은 군대를 출동시켜 호랑이를 잡게 하였으므로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 등 많은 속담과 속설이 생겨났으며,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코끼리바위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생명력
인왕산 정상 기차바위와 능선
북악산 북악(北岳)·백악(白岳)·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높이 342m. 기반암은 화강암이다. 인왕산·북한산·낙산·남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서울 북쪽 경복궁의 진산이다. 1395년(태조 5) 시축한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의 기점으로서 북악산에서 낙산·남산·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쌓았다. 정도전이 성저(城底)를 측정한 뒤 천자문의 글자 순서에 따라 97구로 나누고 북악산의 정상에서부터 각 구마다 순서대로 번호를 동쪽으로 붙여 나가면서 97번째 글자인 조(弔)자에서 다시 북악산에 이르도록 했다. 서쪽 인왕산과의 안부에 자하문(紫霞門)이 있으며, 남동쪽 기슭에 삼청 터널과 삼청공원이 있다.
북한산 보현봉이 우뚝~~비탐방구역으로 묶어 놔서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내부순환도로 홍지문터널 입구 홍지문으로 내려서는 곳의 탕춘대성은 옛 그대로 방치된 구간(上)도 있고 복원 된 곳(下)도 있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21년 홍수로 오간대 수문과 같이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한북문이라고도 부른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한 것으로, 명칭은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蕩春臺)에서 따왔다고 한다. 세검정 일대 홍지문 앞 날머리 홍지문 조선시대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보조 산성과 문루이다. 숙종 45년(1719)에 건립된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문루로 1921년 홍수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77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홍예문이 있는 축대 위에 단층 문루을 올렸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우진각지붕이다. 숙종 44년(1718) 여름에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봄에 완성하였다. 성안에 군사훈련장을 설치하고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를 두 군데 만들었다. 길이는 약 4㎞로 창의문 서쪽의 도성 성곽에서 북한산 비봉까지 이어져 있다. |
첫댓글 멋져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