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의 원조 <반포>그리고 반포동성당
반포는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구비쳐 흐른다하여 그이름을 <서리개> 라고 했다.
고속도로변에 있던 주공3단지(지금의 엘지자이 아파트)자리는 <고모래산>이라는 야산으로
<게루지마을>로 불리웠고, 천주교인의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이다.
예전에 이 반포지역의 땅들은 상습 침수지역으로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한 곳이 신도시형의 원조가 되었고, 지금 신반포역 1번 출구 주위를 비롯하여 반포지역은
손꼽히는 부촌으로 탈바꿈되었다.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반포성당>이 옛모습을 잃지않고 자리하고 있다.
빗줄기는 세차고 바람도 불어제끼는 날이지만 마음은 상쾌하다.
이곳이 상습 침수지역이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곳 <반포성당>은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건축물이라는 유명세가 있다.
한양대 유희준교수가 설계한 육각형 평면형태의 건물이다.
그러나 무슨 상을 받은 건물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 싶지는 않다.
사제(박병윤신부/박용일신부)의 이해와 공감으로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는 점이
나에게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성모마리아상, 지붕위 베드로 닭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도
당대 유명한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이루어 진 것으로 알고 있다.
사제의 지혜와 수고 그리고 헌신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믿고 맡긴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감놓아라 배놓아라>하다보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한다.
강남구 반포2동 은방울(신반포)아파트20동.....
전두환 정권시절 청와대 경제 수석을 한 <김재익>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살았던 동네이다.
버마의 <아웅산>묘소에서 45세의 나이로 순직한 그 <김재익>의 집이 반포에 있었다.
지금은 원베일리아파트로 재건축 되었다.
며칠 뒤이면 5.18이다. <전두환>이란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뒤로 미루고 적어도 <전두환>이란
인물이 <김재익>이란 인물의 경제 정책에대한 의견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우리 경제 역사에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사회는 혼란스러운 철권 통치시대였다.
체육관 대통령의 殺氣 풍기는 얼굴이 T.V에 비치면 상당수 국민들이 섬뜩함을 느꼈다.
그런 시절이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정권의 정통성을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던 인기없는 정권이었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쩌면 정권이 궁지에 내몰릴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속에서 표풀리즘과는 거리가 먼 인기없는 정책을 믿고 전권을 일임했다는 것은 또하나의
쿠테타였을 수도 있다. 그 엄청난 도박(?)으로 "국제수지 흑자, 높은 경제 성장률, 물가안정"이라는
세마리 토끼를 잡는 성과를 이루었다.
동아일보 고승철기자의 <김재익평전>은 오늘날 한국이 정보기술(IT)강국이 된 것은 김재익의 통찰력 산물
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금융자율화, 수입자유화, 통화감소, 부가가치세'그리고 '금융실명제(기득권의강한 반발로 좌절)'토대 마련등,
그의 경제 철학은 <안정,자율,개방>으로 요약된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쓰는 것에 행복을 느낀 사람이다.
힘이나 권력이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살아서도 살아 남았고, 죽어서도 살아남은 이유는 그런 지혜로운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김재익의 아내 이순자 숙명여대 교수는 재산을 정리한 20억을 가난한 나라 젊은이들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기부했다. 첫 수혜자로 몽골과 인도네시아 청년이 선발 되었다.
그들은 지금 서울대에서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이교수의 아버지는 고려대의 이홍직 교수이다.
5월 15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불두화가 피어나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천주교 정순택 대주교는 <불기 2568년 부처님 오신날>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화합과 일치의 모습으로 함께 평화를 일구자고 기원했다.
서로를 인정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반포성당에서 천주교 입문 교리공부하고 귀가하다가 강도에게 차량을 빼앗긴 농경제학과 윤정인은
그후 천주교에 입문 했는지 궁금하다. 그곳이 아마 지금의 신반포역쯤 되지 않았나 싶다.
산악부에도 같이 있었고, 꼭두새벽에 충무로 학원에 영어회화 배우러 다니던 추억이 새롭다.
고영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