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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죽음과 시간'에 대한 공부 _ 6편
계단의 변명
박해람
계단 중간쯤에 죽어 있는 새,
바글거리며 육탈 중인 징그러운 문이다
구름의 하류가 키우는 모든 계단들의 변명엔 반드시 날아오르는 것들의 깃털이 있다.
모의(謨議)를 열어놓고 있는 익접(翼摺)
누군가 먼저 저 쪽에서 문을 열 때까지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데 아이가 좁은 몸으로 빠져 나오고 서둘러 닫히는 계단의 틈으로 절 한 채가 신기루처럼 서 있다
작은 새가 부리로 지워지는 종족의 몸을 맛보다 날아가고
꽃잎 끌고 가던 봄날이 흘깃, 흘기고 가고
계단의 손잡이는 오전에서 오후로 모양이 바뀌고
난감한 수단(手段)은 점점 썩어가고
깃털의 관(棺)으로 문을 잠그고 있는 계단, 비켜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없다
오그라든 조족(鳥足), 움켜진 문고리가 단단하다
끊어진 바람이 묻어 있는 새
담배를 물고 연기를 축내다 문득, 천적이라 여겼던 것의 뱃속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상의 계단들은 날아오르는 짐승인 듯 비상과 착지가 한 몸에 있고 포물선 모양의 꽁지가 있다.
소리의 인주(印呪)가 붉다
—《시와 세계》 2011년 가을호
풀리고 있는 오전
—《현대시학》 2011년 10월호, 제24회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 작자 본인이 저작권 침해 게시물이라고 Daum에 삭제 요청하여 여기에 게시하지 않음.
새의 풍장
한교만 (57세, 남.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푸조나무 밑에 여행가방 하나가 버려져있다 무정형의 폐기물 잠금장치
가 풀리지 않아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어느 저녁쯤에야 반쯤 열린
가방 안에는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목록들이 가방주인의 취향대로 꼼꼼
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공중을 날기 위해 모든 목록들은 초경량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이렇게
가벼운 것들만 넣고 다녔으니 여기까지 쉽게 날아올 수 있었으리라
실밥이 풀린 안주머니에는
기내식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는데
여독旅毒을 잘게 부수기 위한
옥수수 콘 몇 알과
출처가 불분명한 모래들
월동지의 메뉴가 소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차적응에 실패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동거리를 재는 손목시계는 날짜변경선에 부딪치면서 가방 한쪽 구석
에 찌그러져 있었다 버려지기 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째깍거렸던 들
숨과 날숨이 동시에 멈춰있었다
긴 여행이 끝난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가방의 잠금장치를 푼 바람이
내장을 말끔히 비우기 위해 좁은 통로를 들락거리고,
십진법의 아라비아 숫자들 몇 개 나무 그늘 밑에 떨어져 있다 비밀번
호를 해제하기 위해 여러 번 쪼았는지, 끝이 너덜너덜하게 해진 바람의
부리
—2013년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 대상
오리의 계절
이여원
열 두 개의 숫자들, 둥근 시계 안에 흩어져 있다
시침 밑으로 분주한 초침이 물 갈퀴질 중이죠
계절풍과 물가의 산란産卵을 끝낸
몸속의 시계가
징검다리처럼 물을 건너고 있죠
물의 상피, 굳어져가는 호수는 단호하다
새 을乙 자의 숫자들,
모두 아랫배 쪽이 젖어 있지만
햇빛 얹혀 있는 곳은 모두 등이죠
숫자가 숫자를 앞지르지 않듯이
아무리 거센 물살에도 뒤로 가지 않는 시간들
언젠가는 다 날아갈
추운 계절의 시간들이죠
누군가 돌을 던지면
흔들리는 수면 위로 겁먹은 숫자들이
제 발자국을 가슴에 붙이고 날아오르죠
쥐눈이콩 같은 까만 눈으로
별이 춤을 추는 것, 구름이 집을 넓혀 가는 것,
바람이 아이를 낳는 것, 나무가 이사를 가는 것
다 본 매서운 눈
그 눈으로
수만리를 날아와 천연스레 엉덩이를 세운 채
계절을 고르고 있죠
물 뒤를 오리가 따라갔다고 생각했으나
오리가 물을 끌고 가는 것을 보았죠
—《문학청춘》2012년 여름호
오리시계
이서빈
겨울, 오리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이면 다시 걸어 나온다.
연못으로 들어간 발자국과 나간 발자국으로 눈은 녹는다.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 뭉툭한 부리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 무심한 시보(時報)를 알린다. 시침과 분침이 걸어 나간 연못은 점점 얼어간다.
여름 지나 가을 가는 사이 흰 날짜 표지 건널목처럼 가지런하다.
시계 안엔 날짜 없고 시간만 있다.
반복하는 시차만 있다.
오리 날아간 날짜들, 어느 달은 28마리, 어느 달은 31마리
가끔 붉거나 푸른 자국도 있다.
무게가 덜 찬 몇 마리만 얼어있는 웅덩이를 보면
손목시계보다 벗어 놓고 간 시계가 더 많을 것 같다.
결빙된 시간을 깨면
수 세기 전 물속에 스며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
웅크렸던 깃털을 털고
꽁꽁 얼다 풀리다 할 것 같다.
오늘밤 웅덩이는 캄캄하고
수억 광년 연대기를 기록한 저 별빛들이 가득 들어있는 하늘은
누군가 잃어버린 야광 시계다.
—2014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새
안영선
햇살이 식은 몸을 힐끔
흘겨보고 지나간다
촉촉한 바람이 굳은 몸을 톡톡
건드려 본다
출입문 앞에서 그렇게 발견되었다
부드러운 살이 깃털 속에 흩어져 있고,
나는 아주 잠시 위로하며
날아가는 영혼의 주저흔을 본다
벌써 세 구째 유리에 부딪힌
새의 영혼을 수습한다
죽은 새는 자작나무 뒤편으로 던져질 때
잠시 다시 날기도 했다
나는 손바닥에 잠시 머물던
죽음을 탁탁 턴다
새는 현생과 후생의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날갯짓을 퍼덕였을까
새들 중에는 살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들도 있다
푼푼이 모아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새
갈아엎은 배추밭 고랑에 쓰러져 잠드는 새
낡은 크레인 위에서 툭 자신을 던지는 새
새는
살기 위해 날마다 몸을 던진다
—《문학의 오늘》2013년 가을호, 제1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대화
김진규
메마른 나무옹이에 새 한 마리가 구겨져있다
다물어지지 않는 부리 위를 기어 다니는 어두운 벌레들
작은 구멍에 다 들어가지 않는 꺾인 날개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다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넣은 새의 몸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았던 것들의 속을 채워보기 위해
아귀가 맞지 않는 열쇠를 한 번 밀어 넣어 보듯이
혼자 날아가지도 못할 말들을 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둥근 머리통을 한참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이쪽의 눈과 저쪽에 있는 새의 눈이 마주치자,
여태껏 맞아본 적 없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통이 간지러워져서,
나도 어딘가 머리를 드밀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방에서 방으로 옮겨갈 때의 걸음을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나 이곳과 저곳의 국경을 넘는 사람인 거 같아
누워있는 사람의 말을 대신 전할 때
구겨진 새의 몸을 손으로 감싸서 누구한테 내밀 듯
나도 어떤 말인지 모를 말들을 했던 것 같아
새의 부리가 날보고 웅얼거리는 것 같아서
내 귀가 어쩌면, 파닥거리다가 날아갈 것 같아서
나무옹이를 나뭇가지로 쑤신다
좀 더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삼키지 못할 것들을 밀어 넣듯이 밀어 넣는다
—2014년〈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출처: 푸른 시의 방
첫댓글 보고, 느끼고,
비교하고, 생각하고 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