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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한 300호 발행하기까지 이야기
김형근 발행인
지난 6월호에 미주현대불교가 창간부터 300호가 발행되기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이야기를 실었다. 월간으로 300호를 26년 동안 발행하다 보니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이 워낙 많았다. 이런 생각 속에 이름을 명시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 속에 혹 꼭 거론되어야 할 사람의 이름이 빠지면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오해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이름을 거론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 글을 내보내고 난 후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앨범을 들추니 그 동안 잊었던 많은 얼굴들이 나타난다. 실수로 이름을 빠뜨리더라도 다는 쓸 수 없더라도 꼭 쓰고 싶은 사람들을 미주현대불교와 인연을 소개하면서 거론하고자 한다.
창간호에 축시를 써준 정현스님으로부터 시작된 인연이 꽃을 피운 연꽃축제, 노란 연을 한국에 들여가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변해인 선생님과 윤시내 보살님
미주현대불교창간에 부쳐
꽃을 피우는 향연 속에
한 줄기 빛 어둠을 빍히소서.
광명의 새시대 문을 여는
동녁 하늘에 솟아오른 태양,
넘치는 환희속에
찬란한 영광으로 온 누리를 비추소서.
‘현대불교’ 발전을 위해
기치를 드높이 올리소서.
금빛 눈부신 보람으로
영겁의 사악을 남김없이 사루옵고.
미망의 무명, 혼돈의 미로에
큰 빛으로 꽃 비 되어 나리소서.
이 시는 1989년 10월에 발행된 ‘미주현대불교’ 창간호에 실린 축시다. 이 시를 쓴 정현스님은 당시 콜로라도 덴버의 용화사 주지였다. 스님은 미국의 오렌곤 포틀랜드 보광사 주지도 하였고 LA에서도 활동하였다. 당시에는 만나 뵙지도 못한 스님이었지만 정정달 법사의 소개로 인연이 되었다. 스님은 그 후에 미주현대불교를 청화스님께 소개하여 미주현대불교의 초청으로 청화스님이 미국을 방문하도록 역할을 하였다. 정현스님은 300호가 발행되기 까지 미주현대불교를 가장 많이 도와준 스님중의 한 분이다.
정현스님과 정정달 법사
불교잡지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교문화인들과 만나게 되었고 불교문화에 눈뜨게 되었다.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뉴욕에 불교문화원 건립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 일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에서 기금모금 전시회를 하였는데 이때 정현스님 자신의 일처럼 많이 도와주었다. 필자와 함께 한국의 유명, 무명 화가를 찾아 여러 지역을 방문하여 작품을 싼 값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2002년 ‘한미불교문화원’ 건립 기금 모금 행사를 서울, 부산, 광주 세 도시에서 하였지만 전시회에서 기금이 모아지지는 않았다. 이 때, 정현스님과 함께 만난 사람중의 한 사람이 서세옥 화백이다. 서 화백은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을 역임한 한국화단의 거목이다. 2001년 서울 성북동에서 서 화백 자택에서 만난 필자에게 서 화백은 필자에게 연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면서 한국에는 없지만 미국에 노란 연꽃이 있는데 그 연꽃을 한번 구해 보라고 부탁하였다. 그렇게 해서 필자는 한국의 연꽃에 하얀 백련과 빨강 연꽃이 있고 이런 연꽃 때문에 ‘백련암’ ,’청련암’ 등의 이름이 있지만 파란 연꽃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서 화백은 필자에게 “고려시대 문익점이 목화씨를 구해오는 심정으로 노란 연꽃을 찾아서 가져오라”고 당부하였다.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은 부탁이기에 미국에 돌아온 필자는 여기 저기 아는 사람들에게 노란 연꽃이 있으면 구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고 연락해 왔지만 그것은 ‘연’이 아니고 ‘수련’이었다. 연꽃과 수련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에 버지니아에 사는 변해인 선생님으로부터 노란 황연을 구했다는 연락이 왔다. 변 선생님의 아들이 인터넷으로 찾았는데 버지니아에서 6시간 걸리는 노스 케롤라이나에 가서 구입해 왔다고 한다. 뉴욕에서 역시 차로 6시간 걸리는 변해인 선생님이 사는 버지니아 프레딕스 버그에 가서 황연을 가져왔다. 화분에 있는 이 노란 연 뿌리를 잘 싸가지고 비행기로 가지고 가서 2002년 봄에 서 화백에게 전해주었다. 서 세옥 화백은 이 노란 연을 아산 인취사에서 연꽃을 키우며 보급하는 혜민스님에게 전해주었고 연꽃 전문가인 혜민스님은 이 황연을 키워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 노란 연이 보급되게 되었다.
변해인 선생님 부부
노란 연꽃을 한국에 처음으로 반입하다
변해인 선생님 부부는 한국에서 불교와 인연 깊은 사람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천주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필자 때문에 연꽃에 관심을 가지게 된 변해인 선생님 부부는 미주현대불교에서 하는 연꽃축제에 엄청난 도움을 준 분이다. 손수 여러 종류의 연꽃을 키우면서 연꽃축제에 재정후원도 많이 하였고 이 축제를 위해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행사 날에는 무더운 여름날에도 정장을 하고 행사장에서 안내도하고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하였다. 그 뿐만 아니다. 이 연꽃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당시에 70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라오스 사찰 축제에 가서 홍보를 하고 타민족 사찰을 방문하면서 연꽃축제를 홍보하였다. 어느 불교인보다도 연꽃축제에 많은 관심과 후원을 해준 변해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이런 변해인 선생님의 성원과 후원이 밑바탕이 되어 오늘 날 연꽃축제가 잘 진행되고 있다. 변해인 선생님 부부는 프레딕스 버그에서 햄버거 가게를 하였는데 필자가 차로 조지아를 오고 갈 때마다 가게에 들려 생선 튀김도 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출발하였으며, 때로는 필자에게 숙박까지 제공해 주었다. 변해인 선생님뿐만 아니라 메릴랜드 봍티모어 거주 유달희 거사, 현재 수 년을 연꽃축제 준비위원장으로 수고하고 있는 성진모 거사 등도 미주현대불교 오랜 후원자이자 연꽃축제 공로자들이다. 유달희 거사는 연꽃축제 기간 뿐만 아니라 필자가 워싱턴DC를 거쳐 가거나 워싱턴에 볼 일이 있을 때마다 숙소를 제공하여 주었고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연꽃축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 중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메릴랜드 거주 윤시내 보살님이다. 한때 짧게 미주현대불교 워싱턴 취재기자를 지내기도 한 윤시내 보살님은 경기여고를 졸업한 뛰어난 영어실력의 소유자이다. 변해인 선생님 아들이 찾아내 노란연꽃을 구입한 농장은 노스 켈로라이나 아팔래치아 산맥 주변에 있는 시골이었다. 여기에 연꽃에 관한 책도 낸 연꽃 최고 전문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연꽃농장이 있었고 여기에서 연꽃축제라는 이름으로 농장을 외부인들에게 공개하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필자는 뉴욕에서 사람을 모집하여 차로 왕복 30시간을 2002년과 2003년에 다녀왔다. 연꽃농장을 보러 그 먼거리를 전신자 보살, 대법화 보살, 보현화보살, 이정희 점전사 등이 동참해주었다. 연꽃에 매료되어 어쩌면 무모하고 미련한 일을 하고 있을 때 윤시내 보살님이 워싱턴DC 식물원에서 연꽃축제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 소식은 마치 천둥치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그곳은 뉴욕에서 4시간 내지 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15시간에 비하면 그야말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서 바로 가보았다. 2003년 이다. 그게 워싱턴DC 연방수생식물원과 인연이었고 2004년 연방수생식물원과 미주현대불교가 공동 주최하는 연꽃축제의 시작이었다. 윤 시내 보살님은 첫 번째 행사부터 몇 번에 걸쳐 행사 사회도 보면서 수고해 주었다. 윤시내 보살님은 그 전에 미국불교사 책인 ‘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후반부를 무보수로 번역해 주었다. 고마운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제행무상이라는 말을 필자는 항상 생각한다. 미주현대불교와 인연 맺은 시간이 흘러 정현스님은 노스님으로 현재 수원 용주사에서 불편한 몸으로 수행하고 있고, 변해인 선생님은 햄버거 가게를 닫고 완전 은퇴하였다.
연꽃축제의 버팀목들
연꽃축제는 행사 장소는 워싱턴DC 이지만 주최 단체인 미주현대불교 사무실은 뉴욕에 있다. 연꽃축제는 워싱턴 불교인들과 뉴욕불교인들의 서로 협력하여 하는 행사이다. 뉴욕에서 연꽃축제를 참가하려면 버스를 타고 4시간을 가야 하기 때문에 아침 6시에 출발한다. 지금은 50여명이 한 대로 가지만 보통 2대, 많을 때는 3대가 갔다. 버스로 사람을 모집하여 태우고 가려면 참가자 접수와 아침과 점심도 준비 등 해야 할 일이 많다. 필자는 하루나 이틀 전에 워싱턴 행사장으로 떠나기 때문에 뉴욕에서 2-3명이 이 준비를 해야 한다. 이 준비를 김오연, 유보현화 보살 등이 10년을 해 주었다. 불광선원 신도 원적화 보살은 연등과 컵 등을 아주 아름답게 만드는 뛰어난 기술이 있다. 원적화 보살의 참여는 연꽃축제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메릴랜드 진각종 법광심인당은 워싱턴 지역의 사찰중에서는 유일하게 꾸준히 이 연꽃축제에 참가하여 연등과 컵 등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담당하였다.
10만 달러를 후원금으로 가져가라고 하시던 도문 큰스님
임도문 스님은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이며 백용성대사 탄생지에 죽림정사를 건립하여 주석하고 있다. 세수로 80이 넘었지만 아직도 사자 후 설법을 하는 스님이다. 찬불가 가사에 ~ 사자 후를 하소서~ 라는 가사가 있는데 필자가 본 스님들 중에서 이 가사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사자후를 하는 스님은 도문스님이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 초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살던 동생인 묘련화 보살의 소개로 미주현대불교와 인연이 되어 1992년 처음 미국을 방문하였고 LA, 시카고, 뉴욕, 플로리다 마이애미 등을 순회법회 하였다. 80살이 넘은 노 스님이지만 지금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청중을 휘어잡는 설법을 하시기 때문에 많은 사찰을 비롯한 불교단체 초청을 받아 설법을 하시고 있다. 1997년 필자가 결혼할 당시 영어 통역을 대동하고 뉴욕에 오셔서 결혼식 주례를 해주신 스님으로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깊은 스님이다. 결혼식이 2시간이 걸리더라도 스님이 주관하는 불교식 결혼식은 너무 재미가 있어 모두가 결혼식에 빠져서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필자가 지금까지 수 많은 결혼식에 참석했지만 도문큰스님 처럼 주례를 품위 있고 재미있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문큰스님은 그 후에도 미주현대불교에 꾸준하게 재정지원을 해 주셨다. 매년 3-4백 만원, 어떤 경우에는 5-6백만원을 도와주었다. 7-8년 전에는 스님께서 1억원을 지원하시겠다고 가져가라고 하셨지만 필자는 도저히 받을 명분이 없어 받지 않았다. 지금까지 미주현대불교는 한번에 일만 달러 후원금이 가장 큰 후원금이었는데 도문스님을 비롯하여 청화스님, 뉴욕 최정예 보살, 그리고 LA 김소연 약사에게는 몇 차례 받은 적이 있다. 현재는 한미불교진흥재단의 조일환, 조순자 부부가 매달 $500씩 일년에 $6,000를 후원하고 있는데 아마 10년 정도 된 것 같다.
도문스님이 1992년 미국에 처음 방문 때 LA공항으로 오셨는데 도안스님과 함께 마중을 나갔다. 공항에서 첫 인사를 드렸다. 도안스님은 도문스님과 같은 용성문도 스님으로 도문스님을 여러 차례에 걸쳐 초청하였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미주현대불교 초청으로 오시게 된 것이다. 그 후 도안스님은 LA관음사 30년 기념행사에 도문스님을 초청하여 법회를 하였고 2006년 임종시에는 도문스님께 청하여 임종법문을 듣고 입적하였다.
도문스님
학담스님과 법륜스님은 도문스님 제자인데 도문스님의 인연으로 이 스님들도 미주현대불교 초청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하였다. 학담스님은 최근에 한길사에서 나온 아함경 12책의 집필자인데 이외에도 반야심경을 비롯하여 원각경, 화엄경 등 대부분의 대승경전과 조사어록을 우리 말로 번역하고 해설을 하였다. 원래 1970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학년때 도문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였고 승복을 입고 대학을 졸업하였다. 제방선원에서 선 수행을 오래하였고 선교 일치를 주장하며 한국불교사상을 이끌어 가는 학담스님은 미주현대불교 초청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을 방문하여 경전강의를 하였다. 지금도 필자는 한국을 방문할 때 마다 학담스님을 찾아서 인사를 하고 있다.
학담스님
구독자를 많이 구해준 사람들
미주현대불교는 잡지사로는 광고 후원자가 매우 부족하다. 재정의 중요 부분을 구독료에 의존하고 있어서 구독자 확보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26년째 발행하고 있는 미주현대불교는 구독자 확보에 잊지 못할 스님이 3분과 정정달 법사가 있다. 1990년대 초 동사섭으로 유명한 용타스님이 미네소타 삼불사 신도들에게 권하여 모든 신도들이 구독을 한 적이 있다. 그 뒤를 이어 휴스톤 해동, 덕수스님이 그 지역 신도들에게 권하여 10명의 구독자를 구해 준 적이 있다. 삼보사와 태고사 주지를 역임한 범휴스님도 태고사 주지시절 직접 잡지를 들고 신도들에게 구독을 권하여 10명의 구독자를 구해 주었다. 지금까지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LA에서 정혜사와 법보선원을 운영하였던 정달법사도 필자가 사찰을 방문 할 때마다 신도들에게 구독을 강력하게 권하였다.
수증론과 박성배 교수
미주현대불교는 창간 초기에 약 2년에 걸쳐 수증론을 매달 실은 적이 있다. 깨달음과 닦음에 관한 문제는 한국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성철스님이 돈오돈수를 주장하면서 보조스님을 비판하면서 한국불교의 가장 뜨거운 주제가 되었다. 성철스님의 제자이기도 한 박성배 교수는 송광사와 해인사에서 주최한 행사에도 참여하였는데 스승 성철스님을 비판하기도 하고 이 문제에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였다. 미주현대불교는 박성배 교수의 도움으로 박성배 교수 글 뿐만 아니라 한국의 심재룡 교수,강건기 교수, 미국의 이 경재 박사 등 많은 사람들의 글을 다른 매체에서 옮겨 싣거나 혹은 직접 글을 받아서 2년간 연재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 글들을 모아서 단행본으로 출판하지 못한 아쉬움이 많다. 필자는 미주현대불교를 시작하기 전인 1986년에 원각사에서 박성배 교수를 만나 강의를 듣고 불교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이 인연으로 박성배 교수가 지도법사로 이끌던 ‘민족불교연구호’ 총무로 약 2년간 활동하였으며 동시에 박 교수가 재직하는 뉴욕주립대 스토니부룩 캠퍼스에서 박성배교수가 주축이 되어 추진하던 ‘한국학과 설립추진위원회’의 사무국장으로 7-8년 일을 하였다. 지난 5월에 뉴욕주립대학교를 은퇴한 박성배 교수는 어째든 미주현대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후원을 하였다.
자비원과 김오연 원장
지난 6월에 자비원에 관한 기사를 자세하게 썼는데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많아 김오연 보살님에 대한 이야기가 생략되었다. 이민자로 이루어진 미국의 한인커뮤니티에서 한인들을 돕는 봉사단체는 매우 중요한 단체로 보였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는 불교신자들은 정착과정에서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 일을 봉사단체에서 많이 하였는데 대부분의 봉사단체는 기독교인들이 설립하였고 일하는 사람들도 기독교인이 절대 다수였다. 봉사단체에서 도움을 받고 이민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불교신자였던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는 요인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잡지 발행이 5년쯤 흐르면서 필자는 불교계 봉사단체의 설립을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 주변의 소셜워커들의 자문도 많이 받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사무실에서 상근자로 일을 할 사람이었다. 소셜워커를 고용할 재정이 부족하여 어떻게 해결하나 고민하면서 세월이 흘러갔다. 1998년 필자가 운영하는 뉴욕시 플러싱 소재 송백출판사로 어느 보살님이 미주현대불교 잡지를 들고 찾아왔다. 당시에 미주현대불교는 송백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던 시기였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불교잡지사가 궁금하여 찾아오신 것이다. 당시 90에 가까운 연세로 2-3년 전에 100살이 넘어 돌아가신 어머님을 따라 한마음선원에 나가시는 김오연 보살님이었다. 필자는 이 보살님과 대화를 통해 이 보살님이 경기여고와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분으로 이곳에서 소셜워커로 일을 할 수 있는 경험과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김오연 보살님에게 불교계 봉사단체 설립의 뜻을 말씀드렸더니 무료로 도와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였다. 문제는 장소였다. 장소를 마련하기 위한 재원을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였다. 전명국, 전신자 보살님 부부에게 가장 먼저 상의를 하였다. 두 분은 불교계 봉사단체 설립에 적극 찬성하였다. 보현화 보살님 또한 적극 찬성하였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닌 봉사단체 운영을 위한 그럴듯한 사무실 마련은 돈 문제로 시간이 흘러만 갔다. 그래서 논의 끝에 미주현대불교 사무실 지하실에서 일을 하기로 하고 봉사단체 이름은 ‘자비원’으로 하여 1999년 정명사에서 당시 뉴욕불교사원연합회 회장 휘광스님을 이사장으로 하고 김오연 보살님이 자비원 원장, 보현화 보살님이 재무, 필자가 총무로 하여 뉴욕불교사원연합회 산하 단체로 출범하였다. 전신자 보살님은 백림사 신도로 미주현대불교 창간 초부터 구독자이자 후원자였는데 남편 전명국 선생님은 이 일을 계기로 처음 불교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이후 이사로 자비원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 비록 2년 후에 ‘자비원’이 다른 곳으로 이전 하면서 김오연 보살님은 원장을 그만두었지만 보현화 보살님과 함께 ‘연꽃축제’를 비롯하여 미주현대불교의 여러 가지 일들을 오랫동안 돕고 있다.
맥이 끊기 고려사경을 복원한 김경호 선생.
2002년 9월에‘한미불교문화원’건립을 위한 기금 모금 전시회를 하였다. 이 전시회 준비위원장을 당시 조계종 포교원장 도영스님이 맡아주었는데 도영스님은 사경을 하는 김경호 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김경호 선생은 이렇게 만나게 되었고 고려사경이라는 것이 한국전통문화에 중요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불교문화를 미국에 소개하려고 생각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필자는 뉴욕한국문화원에 김경호 선생 전시회를 추진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일은 쉽지 않았다. 문화원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직원들은 이 고려사경에 대해 몰랐다. 종교도 불교인은 거의 없었다. 또 문화원에서는 개인전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는 답변만 하였다. 그래서 주변의 평통위원도 내세우고 여러 사람을 내세워 부탁을 하여 행사 추진 3년이 지난 다음인 2007년 2월에 뉴욕문화원에서 김경호 선생 초대전이 성사되었다. 뉴욕문화원 초대전은 고려사경이 미국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초대전 훨씬 전부터 김경호 선생이 미주현대불교에 연재를 한 고려사경에 대한 글을 읽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우선 뉴져지 원적사, 뉴욕 정명사 등에서 사경강의를 하여 아주 좋은 호응을 받았다. 그리고 문화원 전시회의 사경 강의에는 보스톤 문수사 도범스님을 비롯한 불교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여 김경호 선생의 작품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뉴욕문화원의 소개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관계자를 소개받았다. 세계 문화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전시회는 김경호 선생에게도 필자에게도 좋은 경험이었고 한국전통문화 소개에 대한 자신감과 사명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였다. 이어 김경호 선생은 혼자 힘으로 LA의 LACMA 초청 강연회 등을 성사시켰다. 이런 행사에 미주현대불교에서 불교계에 이 행사를 홍보하고 불교인들이 대거 행사장에 참석하게 하였다.
2012년 11월 뉴욕시 32개 산하기관중의 하나인 플러싱 타운홀에서 가진 ‘SAMADHI + ART= SAGYEONG’라는 행사는 지금까지 미주한국불교계가 독자적으로 한 문화행사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행사라고 생각된다. 한국에서 이 행사를 위해 김경호 선생을 포함하여 23명이 참석한 이 행사는 플러싱 타운 홀 건물 1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이었다. 퀸즈컬리지, 루빈 박물관 수석 큐레이터, 이 지역 미국정치인들이 대거 몰린 이 행사의 오픈닝은 타운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온 행사라는 평가가 있었고 이 전시회에 이은 김경호 선생의 강의를 들은 동포사회 리더들은 한국에 이런 훌륭한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 아주 훌륭한 행사라고 평가를 해주었다. 행사의 추진 형태는 타운 홀과 한국사경연구회가 공동주최이고 미주현대불교 사람들이 주축인‘뉴욕한국문화재단’과 문화체육관광부, 뉴욕한국문화원, Bloomberg 이 후원단체로 되어있다. 미주현대불교가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실제적으로는 미주현대불교의 힘을 모아 추진한 것이고 뉴욕한국문화재단 이사장 김지영 변호사는 본지 편집위원이다. 그 후 세계미술시장의 중심부인 첼시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사경 전시회를 2014년 4월 3일부터 5월 3일까지 한 달 동안 가졌는데 이 행사는‘HO Gallery’와‘뉴욕한국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하였고 미주현대불교가 후원단체로 한 행사였다. 김경호 선생은 본인의 뛰어난 실력과 국내 전시, 그리고 미국전시 등으로 그의 예술세계가 널리 알려졌고 올 5월 16일 본국 중앙일보에 예술인으로는 아주 드물게 한 페이지 전체에 걸쳐 그의 소개 기사가 실렸다. 앞으로 미국에서의 김경호 선생 전시에 관한 것은 필자가 디렉터로 있는 ‘뉴욕한국문화재단’에서 하기로 되어있다.
이름없이 도와준 하경금 보살과 알래스카 거주
임혜숙 보살. L.A.최환희 보살님
하경금 보살은 현재 한국의 함양에 살고 있다. 버지니아에 거주하던 1990년대 초에 어느 스님의 소개로 뉴욕에서 첫 번째 만났다. 조금 후에 L.A. 이사 가서 10여년을 살다가 현재는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요즘에는 자주 가지 못하지만 한 동안 필자는 L.A.를 매년 5-6번씩 방문하였다. 숙소는 주로 도안스님이 주지로 있는 관음사였지만 도안스님 입적 후에는 주로 하경금 보살님의 호의로 하 보살의 아파트를 이용하였다. LA를 방문할 때마다 음식점으로 필자를 데리고 가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후원금도 주고 필자를 격려하였다. 20주년 호를 L.A. 행사를 마친 필자에게 하 보살은 $5,000 수표를 주면서 수고했다고 용기를 주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후원하는 사실을 공개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던 하보살은 5-6년 전에 한국으로 이사를 갔지만 지금도 가끔 전화를 하여 격려를 해주고 있다. 필자는 대부분의 후원자의 사진이 있지만 사진을 못 가진 유일한 보살님이다.
임혜숙 보살님은 한국인들이 별로 없던 1966년부터 뉴욕에서 살았다고 한다. 기계공학을 공부하러 온 남편따라 와서 뉴욕에서 수 십 년을 살다 2002년에 알래스카로 이사하여 혼자 살고 있다. 이곳에는 사찰이 없고 보살님을 간병하는 간병인들이 모두 타종교인이어서 현재는 불교도 좋고, 타종교인도 좋다는 종교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 현재 80대 후반인 임혜숙 보살님은 뉴욕에서 백림사를 다녔으며 이곳에서 만난 도선스님에게 1990년대에 플러싱에서 포교활동을 하도록 뉴욕 도선사를 구입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임 보살님의 좋은 뜻은 아쉽게도 도선사 매각 대금을 보관하던 변호사가 이 돈을 착복한 후 한국으로 도주하여 물거품이 되었고 도선스님도 또한 작년에 한국에서 입적을 하였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임 보살님은 뉴욕에서 부동산 브로커로 일하였는데 미주현대불교를 본인의 자식처럼 생각하며 도와주었다. 자비원의 이사도 해주고, 1999년 미주현대불교가 가입한 UN/NGO의 유엔본부 정기 모임에 미주현대불교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면서 심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최환희 보살님은 최근에 연락이 끊긴 보살님이다. 미주현대불교가 발행되고 4-5년 지나면서부터 구독과 후원을 한 보살님이다. 당시 L.A. 한인타운에 있는 의류상가에서 가게를 하였다. 반야사를 다녔던 보살님은 아버지가 태고종 스님이었다고 한다. 오랜 동안 후원자로 있었는데 항상 잡지사를 돕고 싶어하였고 한국에도 잡지를 보내고 연꽃축제를 후원하였다. 고령과 당뇨로 인하여 거동이 불편하여 한인타운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간 후부터는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올 해부터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건강하게 살아계시기를 기원한다. 이 분들이 300호 기념행사장에 참석하면 좋을텐데 참으로 아쉬운 마음이다.
필라델피아 지문자 보살
미 중부 대표적 도시 시카고는 불교와 인연깊은 도시로 여기에 어울리는 한국불교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필자가 시카고를 처음 방문하여 인사를 드린 불교인은 불타사 주지였던 오 홍선스님이다. 현재 스님은 부산 범어사에 거주하고 있다. 이 지역의 불교신자로 본지와 인연이 많은 사람은 이장수, 림대지, 정법심, 임백풍, 김승한, 최일당 거사 부부이다. 이들 중 이장수, 림대지, 최일당.태고심 부부는 1974년 불타사 창건때부터 함께 만나 이 지역 불교발전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필자가 시카고를 방문할 때 바쁜 시간을 내어 만나주었고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림대지 거사는 ‘본지가 주관한 ‘미주전법 40주년 행사에도 참석하였고 여러 차례에 글을 투고하였으며 재정 후원을 많이 하였다. 정법심 보살님은 불타사 합창단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현재 필라델피아 화엄사 신도로 본지를 열심이 돕고 있는 지문자 보살님도 소개해 주었다. 정법심 보살은 인도여행, 북한사찰순례, 실크로드 순례에 동참한 후원자이다. 최일당.태고심 부부는 본지에 숭산스님과 불타사 관련 자료를 많이 제공하였다. 불타사 신도인 김승한 거사와 한마음선원 임백풍 거사는 본지 구독자 확보에 큰 도움이 주었다. 필라델피아 화엄사 지문자 보살님은 연꽃축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또 미주현대불교에서 기획하고 있는 미국불교사 관련 책 발행, 300호 기념행사에도 후원을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구독자를 구해주는데 앞장서고 있다.
지문자 보살
최숙희 보살
필자로 큰 도움을 준 조성내 박사, 최숙희 보살, 최미자 보살, 이원익 법사, 송광섭 박사 임우재, 스텔라 박, 북가주 배경순 보살, 그리고 홍성미 뉴욕 취재기자와 한국의 전현자 기자
여러 번에 걸쳐 언급했지만 미주현대불교는 창간호부터 필자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미주현대불교는 필자에게 원고료를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특히 교통비가 들어가는 취재기자에게는 될 수 있으면 지급하려고 한다. 하지만 원고비를 사양한 중요한 필자들이 있었는데 칼럼을 쓰는 조성내 박사, 이원익 법사, 해군사관학교 교수 출신인 미주현대불교 전문 취재기자 역을 한 송광섭 박사, ‘중부 아함경’을 번역하여 연재한 법해 최숙희 보살님 그리고 수필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취재기자 일도 한 샌디에이고 거주 최미자 보살님이다. 정신과 의사인 조성내 박사는 미주현대불교 원고를 쓰기 위해 매달 최소 4-5권의 책을 읽으면서 원고를 쓴 기간이 20년 가까이 된다. 2004년 미주전법 40주년 행사 겸 미주현대불교 창간 15주년 기념행사 때 필자대표로 인사를 하기도 했다. 조 박사님은 한 번도 원고마감일은 넘긴 적이 없고 매월 초에 정확하게 원고를 보내주셨다. 조 박사님의 글은 딱딱한 불교잡지에 미국생활과 기독교 등에 대해 재미있는 내용을 소개해 주어 구독자 확보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원익 법사는 LA불교 활성화를 위해 태고사, 재불련, 불사모 등의 단체에서 아주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미주현대불교뿐만 아니라 LA에서 발행되는 일간지에도 많은 글을 발표한 미주한국불교계에서 가장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현재 이원익 법사의 글은 스텔라 박, 홍성미씨의 글과 함께 미주현대불교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송광섭 박사는 한국 해군사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미국의 미시건 주, 메렐렌드 주를 거쳐 현재는 켈리포니아 몬트레이에 살고 있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지역으로 삼보사 근교이다.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는 미국에서 불교가 가장 활성화된 지역이다. 이것에 그 유명한 일본 조동종의 샌프란시스코 선원이 있고 일본 정토진종의 미국해외포교 본부도 있다. 그 외에도 이곳에는 삼장법사 중국 선화스님이 세운 만불사 등 많은 불교단체와 출판사들이 있다. 미국불교의 본류라 볼 수 있는 이 지역을 재대로 보도하지 못해 매우 아쉬워하면서 시간이 지나갔는데 송 박사가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뒤부터 약 2년 정도 걸쳐 이 지역 사찰과 불교단체, 출판사 등을 보도할 수 있었다. 송 박사는 이 지역 뿐만 아니라 콜로라도, 보스톤 근교, 뉴욕, 워싱턴 DC, 오레곤 주 등 미주 전지역을 다니면서 본지가 필요한 취재기사를 내보냈다. 때로는 필자와 동행하여 다니면서 취재를 함께 하면서 미국불교 포교와 미주현대불교 발전을 위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최미자 보살은 약 10년 정도 미주현대불교에 취재와 인터뷰, 수필 등을 기고하였다. 현재는 집에서 수행하며 수필을 쓰는 저작 활동을 하고 있다.
김연문 거사
임우재씨는 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하였다. 출중한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뉴욕에 장엄사를 건립한 심가정 거사의 ‘금강경의 연구’ 남희근 선생의 한문 저서들을 수년에 걸쳐 번역하여 매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번역비를 받지 않고 써준 ‘금강경의 연구’는 연재되는 동안 발송이 늦어지면 ‘왜 잡지가 안오느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임 선생의 번역 글을 읽으려는 독자들이었다. 미주현대불교 300호 발행 동안 가장 큰 반응을 일으킨 글이라고 생각한다. ‘금강경의 연구’는 미주현대불교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첫 번째 책이기도 하다.
본지 필자에서 스텔라 박씨를 빼 놓으면 안될 것이다. LA에서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스텔라씨는 원래 연세대학교 교지인 연세춘추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LA에서도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한 전문 글쟁이다. 본지 필자 중에 학창시절부터 글쓰기 훈련을 해온 유일한 필자인데 칼럼을 주로 쓰고 있지만 때로는 편집부의 요청으로 인터뷰와 사찰취재도 한다. 스텔라씨가 쓴 글들은 학자부터 보살님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본지와 인연을 맺은 것도 10년쯤 될 것이다. 2013년 조계종 미동부해외특별교구와 미주현대불교가 공동으로 주최한 ‘미주한국불교의 미래방향을 모색하는 세미나’에 스텔라 씨가 쓴 논문 성격의 글인 ‘미주 일본 조동종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일본 조동종 연구에 아주 좋은 글이다.
현재 북가주에 거주하고 있는 배경순 보살은 5-6년을 이 지역의 취재기자로 활동하면서 때로는 후원회장처럼 활동을 하였다. 미주현대불교가 원하는 기자와 활동가를 겸한 모범적인 기자 상을 보여주면서 이 지역에서 매우 열심히 활동을 하였는데 아들이 사는 시애틀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배경순 보살의 공백이 매우 컸으며 지금까지도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다시 북가주로 이사와서 살고있다.
본지 한국취재 전현자 기자와 뉴욕 취재 홍성미 기자는 비슷한 시기인 2012년부터 미주현대불교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홍성미 기자는 콜롬비아대학교에서 아동미술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홍성미 기자의 글을 자세하게 읽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앞으로는 미주현대불교가 기획하고 있는‘ 미국의 명상 붐’의 주필로 활동할 예정이다. 한국의 유명 무명 불교인들을 소개하는 전현자 기자는 조계종 국제포교사로 남편 김재성 법사와 함께 ‘명상의 집 자애’를 운영하는 명상지도자이다. 한국 불교계에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나기 힘든 스님들을 비롯하여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인재들을 찾아내서 본지에 소개해 주고 있다.
이외에 미주현대불교에 좋은 글을 싣게 해준 정희수 목사도 자주 생각나는 필자였다. 한국의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한 정희수 목사는 변선환 제자였다.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석사를 하였고 메디슨의 위스콘신 주립대에서 불교학으로 박사를 하였다. 정 목사는 서양 불교인들의 사상과 활동 저서들을 정리하여 한국의‘대중불교’에 연재하였는데 이 원고를 미주현대불교에 소개하도록 해 주었다. 이 뿐만 아니라 새로운 원고를 써 주기도 하였다. 현재 정 목사는 시카고에서 감독관(비솝)으로 있다. 정 목사와 함께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불교학을 공부한 천장길 박사도 번역도 해 주었는데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필라델피아 화엄사 법장스님, 뉴욕 백림사 혜성스님, 대연불보정사 대산스님 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인 인연.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창간 때부터 지속적으로 인연이 있는 스님은 백림사 혜성스님과 필라델피아 화엄사 법장스님, 대연불보정사 대산스님이다. 법장스님은 뉴욕의 상운사에서 포교활동을 하였고 콜로라도 용화사를 거쳐 필라 화엄사를 창건하여 수행과 포교를 하고 있는데 이 스님과 혜성스님, 대산스님은 미주현대불교에 꾸준하게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고 있다.
재가 신자들로는 창간때부터 현재까지 가장 가까이 있는 뉴욕의 김연문 거사가 미주현대불교의 가장 큰 주주이다. 하와이의 차형권, 김덕조 법사, 아리조나 안응환 거사도 미주현대불교와 인연의 끈은 아주 굵고 길다. 켈리포니아는 구독자도 많고 후원자도 많다. L.A의 김진모 후원회장, 강안서 보살님, 서성애 약사님, 최준식, 송정섭 거사님, 그리고 최한의원의 최선길 박사님은 광고후원을 꾸준하게 해주는 것 외에도 필자의 건강을 보살펴주고 또 물건도 사주고 부탁하는 일들을 대부분 들어주고 있다. 북가주의 신철길, 이윤우 거사 등도 오랜 인연이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뿐만 아니라 적게 사는 지역에도 미주현대불교는 배달되고 있다. 시애틀의 배성원, 네바다 방 대덕화 포교사, 네브라스카의 홍미애 보살님, 켄사스 주의 이경수 보살님, 텍사스 주의 문귀순, 김경옥 보살님, 플로리다의 김정각성 보살님, 뉴욕주의 이형재.이복자 보살 부부, 이강혜, 정성애, 재임, 보살님 등도 오래 된 후원자들이다. 이중에는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고 이제는 연락이 끊긴 사람도 있다. 미주현대불교는 이러한 많은 분들의 인연의 줄로 만들어진 거미줄 위에 있다. 이 인연의 줄을 촘촘히 할 새로운 인연이 필요하다. 구독은 인연의 시작이고 구독자는 미주현대불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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