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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찬미
이번 주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의 마지막 주인 대림 제4주입니다. 이제 성당은 성탄
축제를 위해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주일의 미사에 네 개의 대림초 중 하얀색 초가 불을 밝힙니다. 물론
우리 공동체가 속한 St. Mary 성당은 대림환이 크리스마스환이 되면서 크리스마스트리와 함께 성탄을
맞기 때문에 보라색 초에 불을 밝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성탄 밤미사에서 흰색초에 불을 밝히게 됩니다.
몇몇 성당에서는 이사이의 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사야 예언서의 예언에 근거해서
마태오 복음서에 실린 예수님의 족보를 보여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1)."리고 예언했고,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빗대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드신 내용을
따라 중세 교회에서는 아담처럼 잠이 든 다윗의
아버지 이사이의 옆구리에서 나무가 자라 많은
가지가 뻗어 나온 것을 볼 수 있는데, 가지마다
예수님의 조상들이 그려져 있으며, 그 나무의
꼭대기에 활짝 핀 꽃이 있고 그 위에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의 성당에서는 대림 시기가 되면
어린이들을 위해 빈 나무 가지에 매 주일
미사에서 성경 인물들의 상징을 하나 씩 거는
형태로 이사이의 나무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린이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듣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알게
합니다. 물론 평상시에 집에서 꾸준히 성경의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기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창세기 창조 설화를 의미하는 지구, 아담과
하와를 상징하는 사과와 뱀, 노아의 무지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만난 천막, 야곱이 꿈에서 본 천사의
사다리, 요셉의 소매가 긴 옷, 모세 임을 알게 하는 십계명 석판, 약속의 땅을 의미하는 포도송이 등
장식하고 있는 것들 만 보더라도 성경의 이야기들이 떠오르게 해 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타우랑가에서는
마운트 망가누이 성당에서 예쁘게 꾸며진 이사이의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구유 장식은 가톨릭 교회 성탄 축일의 가장 특색있는 장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말구유에 뉘여지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루카 2,12). 오리게네스(185~254)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탄생 유적지를 방문했으며, 예루살렘에서 구유에 대한 경배가 거행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이러한 마굿간에서의 예수 탄생은 2세기 초에서 3세기에 걸친 박해 시대에 이르러
그림이나 모자이크로 표현되었습니다. 오늘날 카타콤바의 여러 곳에서 박해 시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구유의 모습이 발견됩니다. 구유 공경은 사적으로 이미 베들레헴에서 시작됐고 그 베들레헴 구유가
로마로 전해진 것입니다.
지난 주 분홍색 초를 보면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가 무르익었음을 알 수 있었다면, 이번 주는 하얀 초가
불을 밝히며 그때가 가득 찼음을 알립니다. 대림 시기가 시작되면 대림환을 시작으로 성당은 성탄을
맞이하기 위한 장식을 시작합니다. 제대를 중심으로 하나둘씩 장식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 중심에
우리는 성탄 구유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엔 그냥 마굿간이 들어 서고, 마구간의 지붕 위에 큰 별이 걸리고, 마구간 안에는 소와 나귀, 그리고
양 등 여러 가축들이 마굿간에 들어서고 나서, 중앙에 구유가 놓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마리아와 요셉이
구유 옆에 자리를 하고, 장식된 별 아래 천사를 장식하고, 그 후 목동이 자리를 잡습니다. 이렇게
대림 제3주를 거치며 분위기가 무르익고, 드디어 때가 이르러 대림 제4주 차에 아기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장식을 끝내게 됩니다. 드디어 때가 차서 12월 24일 밤이 되면 성탄 전야 미사를 시작하기 전
구유 예절을 거행하여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모시게 됩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이 오심을 기뻐하는
성탄 축제가 시작되고, 해를 넘겨 1월 8일경 주님 공현 대축일에 동방의 박사들을 마구간 안에 배치하며
성탄 축제를 마감합니다. 위의 사진은 아직 아기 예수님이 오지 않으신 구유의 모습입니다.
현재 로마의 성모 대성당에는 예수가 탄생한 구유가 모셔져 있습니다. 5개의 무화과 나무 판자로 만들어진
이 구유는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테오도르 1세 교황(642~649)이 모셔온 것입니다. 6세기경 로마에서도
하고 있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1223년 그레치오 성당에 베들레헴의 외양간을 본뜬 마구간을 만들어
공개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당시 예수님께서 궁핍 속에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에 새롭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레치오로 돌아온 프란치스코 성인은
말구유에서의 예수 탄생을 생생히 재현하여 신자들에게 성탄의 신비를 깨닫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호노리오 3세 교황(1216~1227)의 허락을 받아 구유를 만들고 소와 나귀를 아기 예수 옆에 배치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교황의 허락을 받고 대중 앞에 공개한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호노리오 3세는 이단에 특히
단호했던 교황이었는데, 성탄 구유를 승인함으로써 우상에 대한 논란을 일축하고 교회의 공식적인 공경
대상이 되게 인정 합니다.
교황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성 프란치스코는 성당 옆의 동굴에 최초의 구유를 꾸몄고, 성경의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 백성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이사 1,3)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에 근거하여 아기 예수님 옆에 소와 나귀를 배치하여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10)."는 요한복음사가의 한탄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시며, 소와 나귀 보다 나은
인간이 되자고 호소한 것입니다. 그 후 다른 가축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는데 양은 단골로 등장하는
가축입니다.
성탄 트리가 성경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면, 성탄 구유 역시 성경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구유가 있던 곳의 지명은 '빵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베들레헴'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양식인
성체를 이루는 빵이 되시기 위해 태어나신 예수님의 운명을 한마디로 표현해주는 지명인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예수님 옆의 소는 구약 시대 속죄 제물로 사용했던 가축입니다. 특히 소는 정결한 음식이었으며,
하느님과 화해를 위한 소중한 제물이었습니다.
나귀는 소중한 운송 수단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고 가셨으며, 구약에서는 주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주시어 발라암이 죽지 않도록 이끌었습니다(민수 22,22-35).
양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하느님의 어린양', 즉 예수님께서 당하실 희생을 알려주는 동물입니다.
별은 빛으로 오신 주님을 상징하며, 그 빛이 동방의 세 박사들의 길을 안내하듯 우리의 인생 또한
안전하게 거룩한 곳으로 안내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징표인 것이죠.
천사는 우리가 미사 때 대영광송에서 노래하는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하느님의 전령들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어린 예수의 보호자이며, 잠시도 율법 아래 놓인 자들로부터 보호의 손길을 멈출 수
없어 만삭의 마리아를 베들레헴까지 데리고 가야만 했던 성가정의 보호자인 그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의로움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비난과 비방 일색인 현대의 삶에서 약혼녀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아 남모르게 파혼을 하려고 했던 의로운 인물,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나자렛에서 약 160km나 떨어진 곳 까지 데려가면서까지 함께 있고자 한 지극한 보호자, 요셉
그리고 옆에 다소곳이 앉은 마리아.
목숨을 건 잉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조한 여인, 그렇게 목숨을 걸 정도로 인류를 사랑하여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잉태했건만 아직도 일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로부터 비난받는
비련의 여인, 그리고 그녀가 낳을 왕 중의 왕이 눕혀질 소밥통 구유. 그렇습니다. 성탄 구유는 이렇듯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와 오시게 된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우리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목숨을 건 희생과 뼈를 깎는 용서, 그리고 빛 만 바라보는
단호함, 오로지 찬미, 어떤 경우에도 감사를 안고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 축일을 통해 프란치스코가 감명을 받았던 것은 단순함, 겸손함과 가난이었습니다. 많은
방식으로 성탄은 프란치스코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개념 형성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본 구유를 통해 성 프란치스코는 '육화의 겸손'에 관해 깊은 이해를 하게
됩니다. 이를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하늘의 가장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거룩하며 영광스러운 이 '말씀'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동정녀 마리아의 태 속에서 인간의
살과 우리의 연약함을 받으셨습니다. 말씀은 모든 것 위에 가장 복 받은 동정녀이신 어머니와 함께 가난을
선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거룩한 말씀께서 자발적으로, 마리아와 함께 삶의 한 형태로서 가난을 선택한
것입니다."
단순함, 가난, 그리고 겸손 이 세 가지는 프란치스코에겐 예수님의 전 삶을 보여주는 표징들이었고, 그런 삶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이는 성찬례의 기념이기도 하며, 이 육화의 신비는 구유뿐 아니라 성찬례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매 미사에서 '작은 빵 조각'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아들이 숨어 계신
자리입니다. 크리스마스의 기념, 성찬례의 기념, 마리아의 모범과 요셉의 의로움 모두 프란치스코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가난과 겸손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 인간이 되고
물질이 되는 육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가난이라는 말입니다. 매 미사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은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탄 구유를 만드는 일은 '하느님의 친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유를 만드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가운데 태어나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심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이끄시기 위해서 우리의 신께서 비천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람이 신이 되도록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하며, 인성과 신성의
놀라운 교환을 설명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됨으로써 우리 인간도 하느님의 신적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곧 태어난 구세주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크리스마스를 통한
육화의 신비는 또한 파스카 신비를 향하며 영원한 생명의 시발점이기도 한 것입니다.
옛날 깊은 산중에 나무 세 그루가 살고 있었습니다. 올리브 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소나무였습니다. 이들은
각자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왕궁에 들어가 왕이 눕는 침대가 되고 싶었습니다.
참나무는 바다를 누비는 큰 군함이 되고 싶었습니다.
소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늘 푸르름을 자랑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숲 속으로 나무꾼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곤 도끼로 나무들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소나무만 남고
두 나무는 숲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야 꿈을 이룰 순간이 왔구나 하고 기뻐하며 어서 세상으로
나가기를 고대했습니다. 서로 헤어지며 각자의 꿈을 이루기를 기원하며 말입니다. 홀로 남겨진 소나무는 그래도
언젠가는 자신도 쓰일 것이라 생각하고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말구유가 되었습니다. 너무 슬픈 올리브 나무는 매일매일 한숨과 눈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마음을 고쳐 먹고 자신이 그들을 배불린다는 사실에 기뻐하기 시작했습니다.
참나무는 어선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용맹하게 전투에 나가 싸우고 싶었던 참나무는 비린내 나는 생선과 늘
함께하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부가 고기를 많이 잡고 나서는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비린내에 찌든 자신도 꼭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고 어부들의 안전을 위해 애쓰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홀로 남겨진 소나무는 어느 폭풍우가 불던 날 벼락에 맞아 까맣게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꿈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을 본 나무꾼은 장작으로 쓸 생각으로 산에서 가지고 내려와 장작으로 쓸 나무들을 쌓아
놓는 곳에 던져 넣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더 이상의 희망도 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에겐 한 가지,
그나마 자신이 태워져 사람들을 따듯하게 해 주고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절망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세대도 여러 차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올리브 나무 구유에는 아기 하나가 눕혀졌습니다. 세 사람이 와서 왕 중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어선에 한 젊은이가 올라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소나무는 쌓여있던 나무 사이에서 끌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피투성이 젊은이가 자신을 짊어지고 가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자신으로 만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주님! 어떤 분은 왕자로 태어나 출가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배 계급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부를 이룩하고 종교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가난하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철저한 패배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끝까지 당신께 순종하고
목숨 바쳐 따랐습니다. 우리의 처지가 어떠해도 예수님처럼 주님께 오로지 찬미와 감사만을 드리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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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타가 자가격리 시설 예약에 늦어
정부로부터 입국을 거절당해 날짜를 맞추지 못했지만 현재 다행히도 무사히 자가격리 중이며 성탄 이브에
맞춰 격리가 풀릴 예정이라고 하니 각 가정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하는데는 지장이 없기를
기도해봅니다.'
언젠가 세월 지나 코비드에서 해방되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땐 그랬었지" 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요? ^^
에궁~~
왜 여기다가 이 댓글을 달았을까요?
다음 글 'Santus Nicolaus' 에 단다는 것이 그만....실수했네요.
+ 예수님 찬미
해마다 이맘 때 쯤이면 어린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줄 성탄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고심하시죠.
쇼핑몰에 있는 산타 할아버지의 도움을 얻기도 하고 은근 슬쩍 아이의 마음을 떠보기도 하지요.
그리고 성탄 전날 밤 자고 있는 자녀에게 들킬까 조심조심 선물을 살짝 놓고 나오곤 하죠.
그 순간 이미 엄마, 아빠는 산타가 된 것이죠. 하지만 산타는 전설이라고 합니다.
아니요! 산타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산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타입니다. 세상은 산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호의와 자비, 그리고 자선과 관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항상 제 모자란 글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좋은 댓글로 용기를 주시는 율리타님은 저의 산타이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