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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만사(臺灣史) 책을 읽으며,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영화 세디크발레(賽德克巴來)를 다운 받아 보게 되었다.
사진: 영화 세디크발레(賽德克巴來)
Seediq Bale(賽德克巴來)
스펠 이렇게 쓰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략 ‘시디그 발레’로 읽고 싶은 듯,
인터넷 검색하면 대부분 그렇게 나온다. 그러나 영화 보며 발음 들으니
‘세디크 발레’에 가깝다.
모를 일은 ‘어째서 이런 영화를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았는지? 다.
아마 상영 시간이 너무 길어-276분 즉 4시간 36분- 회전이 느리고,
그렇다고 요금 더블 받자니 그건 좀 아닐 것 같고… 해서 인지?
난 영화 사이트에서 270원 내고 다운 받아 보았는데,
극장이니 2만원 내라! 그러면 기분은 덜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들어가 보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으리라.
어쨌던 괜히 밤 10시 넘어 보기 시작하여,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1, 2 부 나뉘어 있어, 1부만 보고 자리라 했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그만큼 긴장감 있게 진행 되어 도중에 도저히 그만 볼 수가 없었다.
배경으로 대만의 고산 지대 절경이 펼쳐 지니 영상미는 짐작이 갈 것이고,
거의 매 프레임마다 사람 목을 베니, 헐리우드 잔인 영화는 저리 가라다.
사진: 주인공이 폭포 앞에 있는 모습. 영화 배경이 대개 이렇다.
사진: 해골. 두개골의 주인은 ‘머리 사냥’을 당했던 것이다.
이런 장면이 거의 매 프레임마다 나온다.
머리 사냥에 이골이 난 부족이라 영화 시작부터 머리 베더니
끝까지 그렇다.
제작비가 대만돈(Taiwan NT dollar) 6억이라니 우리 돈 200 억 정도 든 것이다.
영화 자체로 충분히 아니 넘치도록 재미있지만 그래도 배경 설명 해 본다.
청일 전쟁으로 대만 할양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대만 섬을 일본에 할양한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이 시모노세키(下關) 가서 회담 끝에 넘긴 것이다.
사진: 하관 조약 서명. 李經方 은 이홍장의 아들이다.
청일전쟁은 일본과 중국이 아니라, 일본과 북양군벌이 싸운 거나 마찬가지다.
일본은 종전(終戰) 회담 대표로 북양대신 중당 이홍장이 오면 좋겠다고 한다.
이에 이홍장이 하관(下關)까지 오는데, 춘범루(春帆樓)에서 회담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본 청년이 이홍장을 저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일본의 암살 전통은 길기도 하여라)
일본 조야는 새파랗게 질린다.
회담 시작하며 기고만장(氣高萬丈)한 일본은 무리한 요구를 다 들이댄다.
육군은 요동을 원하고, 해군은 대만을 원하고, 또 어떤 집단은 뭘 원하고.
그걸 일단 다 들이대고 본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이 오라 해 놓고, 자기 땅에서 자기 청년에게 저격 당했으니
국제 여론 상 변명이 불가능한 일로, 이홍장이 웬만한 자빠져도 받아 주어야
하는 상황으로 반전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홍장은 그 생각까지는 하지 못한 채 일본 요구 대로 하관 조약을 체결한다.
당시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井上馨, 우리나라 공사로 온 적도 있는 인물) 회고록에;
(그 저격 때문에) 얼마나 가슴을 조렸는지?
엄청난 전비를 쓰며 전쟁에 이겼으나, 그 결과물을 다 날리게 생긴 마당인데,
다행히(?) 이홍장이 일본 조건을 받아 들이더라는 소회가 실려 있다.
이때가 ‘아편전쟁’부터 거의 2세대가 흘러 외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이홍장은 당대 청나라 최고의 인물인데도 본질은 잘 몰랐던 듯하다.
이홍장 정도의 인물이 그러니, 우리가 구한말 때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런 까닭으로 위 하관 조약의 서명자가 이홍장의 아들-이경방인 것이다.
함께 할양된 요동반도는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토해 내지만
대만은 그대로 접수(?)한다.
영화에 청나라가 대만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 대만섬은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불침항모(不侵航母)격이다.
그런데 청나라-중국은 대만섬의 전략적 가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정씨 왕조-정성공의 손자 정극상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이 1683년인데,
그 후에도 중국-청나라 조정은 대만섬에 무관심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모를 수 있을까? 할 정도인데,
중국이 대만섬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은 19세기 말 열강,
프랑스와 일본이 대만의 할양을 자꾸 요구하면서다.
‘나는 잘 모르지만, 남이 탐내니 결국 중요한 거 아니겠니?’ 한 것이다.
헌책방이나 중고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 보면 표정 관리 잘 해야 한다.
‘이거 꼭 사야지!’ 하는 마음 들키면, 값이 마구 올라가기 마련이다.
깨닫기도 잠깐 대만섬을 일본에 할양하는데, 배신감 느끼기는 대만인들이다.
청나라에 혜택 본 것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나라 인데, 어느 날 갑자기
이제부터 일본땅-일본 사람 하라니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대만민주국(臺灣民主國)
이에 대만의 엘리트들이 모여 대만민주국(臺灣民主國)의 성립을 선포하고,
초대 총통으로 청나라의 대만 마지막 순무(巡撫) 당경숭(唐景崧)을 추대한다.
중국 사람들이 잘 하고 또 좋아하는 일이 도장이니,
대만민주국총통지인(臺灣民主國總統之印)의 인장부터 새기고,
호랑이가 그려 진 국기도 만든다. 중화민국이 성립하는 신해년
-1911년 보다 16년 앞서 대만에 민주 국가가 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 당경숭(唐景崧)은 청나라 관리지, 대만에서
뭘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전혀 없어 기회 보아 대만을 빠져 나온다.
사진: 청나라가 대만을 떠나는 장면. 붉은 모자가 당경숭(唐景崧) 아닐까?
대만민주국총통 도장은 놔 둔 채, 청나라 대만 순무 인장만 들고 갔다고.
일본군 진주
처음(1895년) 일본은 근위사단(近衛師團) 하나 보내면 대만 점령이 다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대만 항쟁이 시작되니 1개 사단 가지고는 턱도 없어, 다시 1개 사단
더 보내어 겨우 진압한다.
사진: 일본군 입성 장면
영화는 이런 식으로 주인공의 투쟁을 항일 쪽으로 몰아가려 하지만,
대만 원주민 입장에서 볼 때 한인(漢人)과 일인(日人)의 차이가 있을까?
어느 쪽이던 자기네 땅에 들어와 사냥터 뺏어 가는 무리 아닐까?
잘 만든 영화지만 감독의 의도에 다 찬성 해 줄 필요는 없다.
원주민(原住民)
이제 영화의 본질-대만 원주민 이야기를 해 보자.
지금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대만섬이 아득한 옛날부터
중국 영토인 양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신화(?)일 뿐이다.
대만섬에 한인(漢人)들이 들어가 살기 시작하는 것은
아무리 일러도 정성공의 대만 정복(?) 17세기 중반,
우리나라로 치면 효종, 현종 연간이다.
그 이전엔 해적이나 왜구들이 출몰했을 뿐이다.
중국 대륙에서 대만섬까지 거리는 최근접점 기준으로 130 km 다.
빙하기 해수면이 내려 갔을 때는 육지와 이어졌으니 걸어서 건널 수 있고,
해협이 바다에 잠긴 뒤라도 원시적 항해술로도 충분히 도달 가능한 거리다.
따라서 아득한 옛날부터 대만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살았지만, 거기 사람들은 한인(漢人)과 문화-언어와 풍속이 완전히 달랐다.
오스트로네시아(Austronesia)
남양 군도-남태평양 일대에 퍼진 언어에 오스트로네시아 어족(語族))이 있다.
보통 어족(language family) 아래에 서브(subfamily-語派)가 있고
그 서브 아래 다시 서브(sub-subfamily-준어파(準語派 )가 있다.
오스트로네시아 어족(language family)엔 4개 어파(語派;subfamily), 959개 언어가 있다.
4개 어파 중 하나가 말레이폴리네시아(Malayo-Polynesian) 어파(subfamily)로,
그 아래 모두 945개 언어가 남양 일대에 널리 퍼졌다.
그런데 4개 어파 중 나머지 셋은 대만섬에만 있다.
오스트로네시아 어족(語族) 4개 어파 중 셋이 대만 섬에만 있고,
대만 원주민 종족 간 언어 거리가 말레이와 수마트라 언어보다 멀다는 것은,
대만 섬이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출발지라는 뜻이다.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중심점이 대만이고,
그 언어가 남양 전체에 퍼졌다고,
대만섬을 떠난 사람들이 남태평양을 다 정복,
인종적으로 남양 선주민을 대치(代置) 했다는 뜻은 될 수 없다.
언어와 인종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브라질 사람들의 인골을 분석해서는
브라질에서 포르투갈 어를 쓰는지를 짐작할 수 없을지 모른다.
브라질 인구 중 포르투갈 계는 소수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브라질이 포르투갈어를 쓰는 것은 그 언어 형성기에
포르투갈 어를 쓰는 사람들이 주도적 역할을 한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종 분석으로는 미국에서 영어를 쓰는 것이 필연이 아닐 지 모른다.
유럽어의 대부분이 아리아 계통 언어라고, 아리아 인들이 유럽을 완전
정복했다고는 보기 어렵고, 유럽어 형성기에 중요 역할을 한 것뿐이다.
그 반증으로 피레네 산맥 바스크 어는 다른 유럽어와 전혀 관계가 없다.
하지만 바스크 사람들 생긴 거는 다른 유럽과 별 차이 없다.
아리아 어가 퍼질 때 바스크 까지는 들어가지 못하여 언어가 남았을 것이다.
대만 원주민, 지금은 40만 정도로 대만 인구의 2%가 채 안되지만
언어학적, 인류학적으로는 연구 가치가 대단히 높다.
원주민(原住民)
이렇든 17세기 중엽 정성공 이전부터 대만에서 살던 사람들이 원주민인데,
고산족(高山族), 고사족(高砂族), 번인(蕃人), 만인(蠻人) 등으로도 불렸다.
그런데 그 이름들이 본인들에게는 썩 유쾌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번인(蕃人), 만인(蠻人)이야 비칭(卑稱)이니 그렇다지만 고산족은 뭐가 나쁜지?
아무튼 1984년 대만 원주민 권리 회복 운동이 일어난 이후,
공식-법률 상 명칭은 산지동포(山地同胞), 원주민(原住民) 원주민족(原住民族)이다.
그러나 대륙-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아직 고산족으로 부른다.
원주민=고산족(高山族)의 등식이지만 평포족(平浦族)도 있다.
이름은 평포, 고산 이라도, 평포족이 산에서 살기도 했고,
고산족 중에도 평지에 사는 무리가 있었다.
평포족은 비교적 한화(漢化)가 진행되었다고 익은 번-숙번(熟蕃),
고산족은 아직 동화되지 않은 날것이라고 생번(生蕃)이라고도 했다.
중국 역사를 보면 여진족을 생여진, 숙여진으로 나누던 시절도 있었다.
생(生)이나 숙(熟)이나 대상인 당자가 들으면 고약한 기분일 텐데,
한문화에 교화되어야 할 야만인이라는 시각에서 나온 이름 아니겠는가?
숙번(熟蕃) 평포족은 문화적으로 한화(漢化)되고, 또 한인들과 결혼으로
혈통이 섞였으니 구분이 무의미하고, 현재 대만에서 원주민 대우(?)를
받는 것은 생번(生蕃)-고산족이다.
‘원주민 대우’라 함은 원주민으로 지정하여 각종 권익을 보장하는 것인데,
국민 대회 대표에 원주민 할당 정원이 있고, 또 헌법에 다음과 같은 선언이
들어가 있다.
….국가는…적극적으로 원주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킨다.
국가는 민족의 요구에 의하여 원주민족의 지위와 정치적인 참여를 보장하며,
그 교육, 문화, 수리, 위생, 의료, 경제, 토지와 사회복리사업에 있어 보장하여
그 발전에 기여하고 이를 법으로 정한다…운운 (1998 대만수정헌법 제 10조)
무사사건(霧社事件; 中-우써, 日-무샤 )
바로 영화 ‘세디크 발리’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다.
1930년 대만 원주민-세디크(賽德克)족이 반란(?)을 일으킨다.
발단은 일본 군경의 대만 원주민 멸시가 원인이었다.
일본은 원주민을 번인(蕃人) 또는 생번(生蕃; 위의 글분 참조)등으로 부르며
야만인 대우를 하였다. (영화 보면 아예 대 놓고 야만인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대만에서 시간에 따른 원주민 지위 변화를 살펴 본다.
(1) (섬의) 유일한 주인; 1620년 이전
(2) (섬) 대부분의 주인: 1621-1661, 네덜란드와 스페인 통치시기
(3) (섬) 절반의 주인; 1661-1875. 정성공 일가와 이어 청나라가 다스리던 시기.
(4) (섬)의 부분적 주인; 1875-1930, 청조 말기와 일본의 식민지 시기
(5) 주인 지위 완전 상실: 1930년 무사사건(霧社事件) 이후
5번에 나오는 무사사건(霧社事件; 우써)이 바로 영화의 배경 사건이다.
대만 고산족 분류를 8, 9 또는 10개로 하는데 그 중 태아족(泰雅族)이 있다.
한자로 쓰면 굉장히 멋있으나 부르기는 아타얄(Atayal)로 하는 모양이다.
현재 대만 북부에 약 9만 정도가 사는데, 고산족 중 분포 면적이 가장 넓어
대만 전체 산지의 3분지 1을 차지한다.
우리의 영화 주인공 세디크(Seedig) 족은 아타얄의 1파 인 듯.
사진: 세디크(賽德克)족.
원주민 치고는 옷을 너무 깨끗하고 좋게 입혀 놓은 것 아닌지? 모르겠다.
아타얄은 살고 있던 땅이 개발되면서 이주 및 노동을 강요당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 군경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사진: 영화에서 세디크 족이 목재를 나르는 장면.
저렇게 힘들고 가져 가도 돈 얼마 쳐 주지 않고,
그나마 중국인이 파는 술 한잔 마셔 없애는 듯.
1930년 10월 9일
순찰 중이던 일본인 경관 가츠히코 요시무라는 아타얄 족의 족장
루다오 바이의 손자 결혼식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다.
사진: 영화 주인공 루다오 바이 (세디크의 족장이다)
신랑이 포도주를 따라 경관에게 친절히 권하지만,
요시무라는 ‘금수의 피로 더럽혀 진 손’으로 따르는 잔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한다.
훗날 요시무라의 증언은 ‘비위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체면 때문에 거듭 잔을 권하던 족장 손자를 요시무라가 곤봉으로 때리자,
옆에 있던 일족이 들고 일어나 요시무라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음 날 족장 손자는 경찰서를 찾아가 사죄와 함께 사과의 뜻으로
포도주를 바치려 하나 거절 당한다. 이제 일본 군경과 원주민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한다.
10월 27일,
세디크 족장 루다오 바이가 1,200명의 전사를 조직해
무사(霧社) 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운동회 보러 온 일본인들을 습격하여
134명의 일본인과 2명의 대만인이 살해되고, 215명이 부상당한다.
머리 자르는데 이골이 난 종족이라, 시신의 머리가 대부분 없다.
경찰서, 우체국 및 관청 등이 습격, 개인 화기와 탄약이 탈취되기도 한다.
일본군의 보복은 즉각적이었다.
경찰과 군대로 토벌대가 조직되고, 이간질 정책으로 아타얄과 적대 관계인
타 부족을 꼬드기고, 이탈한 아타얄 족도 포섭한다.
11월 중순
일본군은 공중에서 독가스가 주입된 산탄을 살포한다.
사진: 일본군 비행기.
저렇게 이상하게 타고서는 수류탄과 가스탄을 손으로 살포한다.
이때 일본은 아직 화생방전 준비가 덜 되었는데, 원주민 상대로 실험한 듯.
12월 1일
족장이 자살하지만, 봉기는 더 지속되어 총 50일 동안 저항이 계속되었다.
일본 기록은 약 700명의 아타얄이 죽거나 자살했으며, 500명이 항복했다.
추가로 약 200명의 항복한 아타얄이 일본 군측 아타얄 손에 죽었다.
일본은 항복 아타얄의 신변 보호 책임이 있으면서도 학살을 방관한 것이다.
이 원주민들은 최근까지도 다 같이 하나의 ‘에스닉’이란 관념이 없었다.
언어 거리도 멀고,풍속도 제가끔 이고, 일본인보다 옆 부족이 더 가깝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옛날 브라질 과라니 족을 백인들이 학살하는 영화를
보았는데 거기서도 과라니를 잡은 것은 바로 옆 부족이었다.
남은 생존자들은 작은 보호 구역에 갇혀 엄중한 감시하에 놓인다.
사건 전 무사(霧社)는 일본 지배의 효율성을 자랑하는 지구로 평가되던 만큼,
일본은 충격에 빠졌으며, 원주민 정책을 무단에서 문화 통치로 변환하여,
원주민의 호칭을 반징(蕃人)에서 고사 족으로 바꾸고 조선, 만주인 등과 같은
외지인과 동렬로 놓는다.
대만을 접수한 국민당 정부는 일본이 만들어 놓은 무사(霧社) 사건의
일본인 희생 추모비를 치우고, 대신 원주민 희생자 추모비를 세운다.
대만 학자들은 무사사건(霧社事件) 명칭을 무사기의(霧社起義)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영화는 항일(抗日)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지만,
세디크(賽德克) 족 눈에 한인(漢人)이라고 더 좋아 보였을까?
원주민이 중국에 귀속감을 느껴 본 적은 없었으리라.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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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렇군요 아주 무서울것같은 영화에 대작이군요 한번 보고싶은 마음은 들지만`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