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5 Jul;90:136-43. doi: 10.1016/j.appet.2015.03.010. Epub 2015 Mar 12.
Thea Toft Hansen, Anders Sjödin, [...], and Sanne Kellebjerg Korndal
Manipulation of food's macronutrient composition in order to reduce energy content without compromising satiating capacity may be helpful in body weight control. For cheeses, substituting fat with protein may provide such opportunity. We aimed at examining the acute effect of cheeses with different macronutrient compositions on accumulated energy intake and subjective appetite sensation. A total of thirty-nine normal-weight (average BMI 24·4 kg/m2) men and women completed the partly double-blind, randomised crossover study with high-protein/low-fat (HP/LF, 696 kJ), high-protein/high-fat (HP/HF, 976 kJ) and low-protein/high-fat (LP/HF, 771 kJ) cheeses. After overnight fasting, 80 g cheese were served with 70 g bread, 132 g juice and 125 g coffee/tea/water. Ad libitum spaghetti bolognaise was served after 3 h and energy intake assessed. Subjective appetite ratings were assessed using visual analogue scales. Composite appetite scores were calculated and evaluated relatively to energy intake.
또 칼로리는 서로 다른 비율로 발생한다. 예를들어 지방과 단백질의 칼로리 발생비율이 다르다. 그러므로 고단백 음식을 먹는것도 체중 감량속도를 놓이는 방법의 하나다. 다이어트 원리를 소개하는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임상적으로 관찰한 몇가지 방법들을 덤으로 알아보자.
빈속에 설탕을 먹는 것은
체중감량에 대단히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왜 그럴까?
몸이 아주 빠르게 당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반면
대사는
그만큼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체내에 지방으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작업의 하나로
이 프로그램을 일상속에 도입할때
설탕과 단음식을 피해야 한다.
처음부터 결과가 빠르게 나타나기를 바랄텐데 앞서 이것을 제대로 실천하면 만족감을 얻고 모종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 품고 있던 이미지가 실제의 모습으로 구현되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당분 함유량이 높은 음식은
피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공복에는 특히 더 그래야 한다.
당분이
인슐린 분비를 자극하면
혈당이 급격하게 낮아져
허기가 다시 느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사과정만으로도 단백질은
칼로리의 삼분의 일이
연소된다.
그러므로
100칼로리의 당분은
지방 100칼로리에 필적하지만
100칼로리의 과도한 단백질 가운데서
지방으로 전환되는 것은 66칼로리에 지나지 않는다.
고단백 식사를 하면
33%가 줄어드는 것이다.
하지만 통풍환자에게는 주의해야 한다. 단적인 증거로 육식동물들은 호리호리하다.
그렇다면
채식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채식주의자들도
당분과 전분을 피하고
고단백 식단을 지키는게 좋다.
방법은
저항을 내려놓아
허기와 식욕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더이상 악순환을 느끼고
그것을 통제하려는
악순환에 익숙해져 있다.
허기가 일어나면
허기와 함께 죄책감까지 느끼다가
포만감에 대한 기대로 과식을 하고
다시 죄책감을 느끼는
끝없는 자멸적 악순환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 순환을 물리치는 유일한 길은
굴하지 않고
이것을 뛰어넘어 초월하는 것이다.
이 순환에서 벗어나면
식욕과 허기가 사라져
결코 배고픔을 경험하지 않는 상태를
체험한다.
그러면 마음은 물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난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사실 마음의 이런 말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 일단 이 기법을 실천하면 식사를 기다릴때보다 먹는 행위 자체에서 식욕이 생겨난다.
허기나 식욕을 느끼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일단 먹기 시작하면 식욕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럴때 먹는 즐거움은 그 어느때보다 크다.
나도 지금은
먹는 행위자체를
전보다 더 즐긴다.
음식을 먹어도
더이상 죄책감이나
자책감이 따라붙지 않는다.
너무 많은 칼로리를 섭취하여
살이 찌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으므로
먹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배가 고프지 않을때
오히려 음식을
더욱 잘 즐길 수 있다.
한입 베어무는 바로 그 순간 치즈 샌드위치를 즐기기 시작한다. 배가 고프지 않을때도 치즈 샌드위치를 집어들고 한입 베어 물면 바로 거기에 즐거움이 있다. 즐거움을 내던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나는
즐거움과 기쁨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즐거움은 증대시켜야 한다.
이 기법을 실천하면
누구나 자신의 미학적 꿈에 부합하는
몸을 갖게 된다.
이로 인해
정당한 자부심과 즐거움,
기쁨을 느낄 뿐만 아니라
먹는 행위 자체에서도
커다란 행복감을 얻을 수 있다.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는 먹고도 허기를 느끼는 악순환이다.
우리는
의지력이나 도덕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건화, 행동양식의 희생자다.
어떤 동물이든
이런식으로
조건화될 수 있다.
우리도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화되어 있다.
이런 조건화는
우리의 인격이나
자아존중감과 아무 상관이 없다.
방종이나 자기애적 구강욕구, 구강 공격성, 구강 수동성 같은 정신분석이론들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 사회가 선호해 온 아주 간단하고도 일차적인 유형의 조건화와 관계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사회적인 조건화속에서 이런 양식들을 습득했다. 이게 전부다. 아이가 이 양식의 형성에서 하는 역할은 살펴보면 음식섭취 양식 전체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몸을 경험하는 것은 마음이고
마음을 경험하는 것은
의식이다.
그러므로
흔히 '허기'라 부르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의식에서 경험된다.
그러면
의식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 걸까?
위속에서
경험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믿음체계에 불과하다.
허기는
사실 모든 곳에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경험된다.
허기를 위가 경험한다는 생각은
어린시절에 형성된
하나의 믿음체계일 뿐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몸은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일어나는 일들은
일반적인 영역에서
더욱 넓게 경험된다.
통증이나 병, 허기같은
신체적인 증상으로 인한 고통을
언제든 내려놓는 기법이 또 있다.
바로
이 고통이
신체적 증상에 불과함을
자각하는 것이다.
고통은
사실 일반적이고 확산된 방식으로
모든 곳에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영역에서
경험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강력한 믿음체계 때문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부터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감각의 에너지에 대한
저항을 내려 놓으면
이 에너지는 널리 확산되다
결국 사라져 버린다.
의식지도 아랫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차원의 느낌들이 일어난다. 식욕, 허기, 포만의 순환을 관통하는 욕망의 단계로 올라가 보면 이 단계는 125의 에너지 장을 지니고 있으며 부정적인 방향을 향한다. 삶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에너지 장과 어울리는 감정은 결핍감과 갈망이며, 이 장에서 온갖 형태의 중독들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체중문제를
음식중독이라고 부르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맞다.
결핍감과 욕망, 갈망이야말로
이 부정적 에너지 장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 의식 속에서는
노예화의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단계의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자라고 느낀다.
그리고
에너지 장이 아래를 향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들을 갖는다.
음식과 허기,
포만감의 전체과정과
연관되어 있는 것도
이런 부정적인 느낌이다.
허기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고
허기를 넘어서면
용기의 단계로 올라가
자발적인 직시 속에서
자부심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가
250의 단계에서
이 악순환을 끊으면
초연한 상태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의식속에서는
풀려남의 과정이 일어난다.
이제는
에너지 장의 방향이
위를 향하면서
기분을 한결 좋게 만들어주는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에너지 장속에는
많은 힘이 들어있다.
그러면
초연한 상태에서는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음식을
먹어도 먹지 않아도 좋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다.
이럴때
누군가 '지금 뭐든 드시고 싶으세요?"라고
물으면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어질 것이다.
글쎄요. 뭔가 대접하고 싶으면 주세요. 그럼 뭘 드시고 싶으세요. 생선? 마카로니? 삶은 콩? 음 뭐든 좋아요. 식용이나 허기를 이런식으로 다루는 차원에 이르면 사실상 특정 음식에 더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저녁에 스테이크를 먹어도 좋고 다른 걸 먹어도 상관없어요라고 말하게 된다. 어느쪽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이것은 비로소 허기와 식욕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의미다. 이런 태도의 한가지 특징은 자유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말하는 것일까?
프로그램이나 조건화의 지배로부터
악순환의 희생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다.
또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노예화의 과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이런 감각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느낌을 갖기 시작한다.
실제로 자발적인 의지를 갖고 기법을 활용하면 310의 단계로 올라가 훨씬 좋은 감정을 갖게 된다.
이런 감각들이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의식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진동에 불과함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음식이나 몸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전부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리학도 본질적으로 이런 감각들이 의식의 장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진동이며, 이 진동을 변화시킬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일단 이것을 인식하면 전보다 더욱 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의식의 장에서
아주 흥미로운
또 다른 양상이 전개된다.
이 양상도
아주 유익하다.
여러분 내면에서도
이 양상을 충분히 관찰할 수있다.
나도 내면에서 이런 양상을 알아차리고 주시한 적이 있다. 과거에는 허기와 식욕, 포만감, 죄책감의 순환에 휘둘렸다. 이로 인해 식이요법을 하고 체중을 감량하리라던 온갖 좋은 의도도 순식간에 창박으로 달아나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에는 자기혐오와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섭식장애가 심각한 이들은 존종 이런 경험을 한다. 화장실에 들어가 먹을 것을 전부 토해내고는 자기혐오와 비난, 죄책감, 심지어는우울증에 자살충돌까지 느낀다. 이런 상태들은 모두 아주 심각한 상황을 불러올 수 있다.
이럴때
우리는 내면에서는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식사를 위해
자리를 앉았을때
몸무게를 줄이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 내면의 어른뿐이다.
반면에 내
면의 어린아이는
언제나 허기를 느낀다.
"심리게임"의 저자이자 교류분석의 창시자인 "에릭번 박사"는 과거에 이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내면의 어린아이와 어른, 부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적있다. 내면의 어린아이와 어른, 부모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세가지 목소리와 같다. 내면의 어린아이는 바람을 이루고 싶어 하는 반면 어른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교육을 받은 존재다. 마지막으로 부모는 벌을 주고 도덕적으로 구는 성향이 있다. 또 내면의 부모는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일깨워준다. 식탁에 앉거나 냉장고를 향해 걸어갈때 내면의 어른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접어들고 내면의 어린아이가 상황을 지배한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식이요법이나 몸무게, 칼로리에 대해 알까?
전혀 모른다. 어린아이 의식에는 그저 "나는 먹고싶어. 배불리 이제됐어"라는 생각만 들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내면의 어린아이가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냉장고를 향해 돌진한다.
그럼
냉장고 안을 뒤적이는 존재는 누구일까?
역시
내면의 어린아이다.
뜨거운 퍼지 선디를 두번이나 주문하고 그레이비 소스를 곁들인 감자를 두접시나 먹어치우는 존재는 누구일까? 역시 내면의 어린아이다.
이렇게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채 내면의 어린아이를 만족시켜주고 나면, 즉 식사가 끝나고 나면 어린아이는 사라져 버린다. 먹을만큼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이 자리를 누가 차지할까?
부모가 들어와 꾸짖는다.
"어쩜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니?
어쩌자고 두그릇이나 해치운 거야?
거기에다 파이까지 먹어?
파이위에 아이스크림은 왜 또 얹어 먹은거야?
칼로리 생각은 안해?
넌 정말 멍청하고 마음도 너무 약해.
의지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아. 자존감도 없고"
이때
우리는
우리를 질책하는
내면의 성난 부모에게 지배받는다.
그런데
이 성난 부모는
누구를 질책하는 것일까?
물론 내면의 어린아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면의 어른은
내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음식을 먹는 동안이나 그 후에도 내면의 어른은 그 자리에 없었다. 내면의 아이와 부모가 이 식사 프로그램 전체를 떠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식습관이 이둘에게서 시작되었으므로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식습관은 아이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니
아이가 음식을 먹을때
그 옆에 부모말고 누가 앉아 있었겠는가?
물론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아이와 부모가 번갈아 가면서 식습관 전체를 지배한다. 이런 식습관에 대응하려면 이 식습관이 작동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자각하기만 해도 이런 습관은 바뀌기 시작한다. 이제 자신에게 보내는 글을 적은 쪽지를 식탁이나 냉장고에 붙여두고 내면의 어른을 의식적으로 불러내 내면의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기는
어른이 지배하는 곳이야.
그런데 어른은 먹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써"
실제로 내면의 어른은 칼로리와 식이요법, 건강한 식사양식을 잘 알고 있다. 나도 식사시간이 되면 내면의 어른을 식탁으로 불러내 이렇게 말한다. "이제 여기는 내면의 어른이 있는거야" 그러고는 내면의 아이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이렇게 내면의 어른과 함께 하면 과식하지 않으며 식사를 마친 후 내면의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럴때 모종의 저항이나 자기통제는 필요하지 않다. 그저 자각만 하면 된다.
식탁에 앉았을때
내면의 어른을 불러내고
자각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저녁식탁에 앉을때도
내면의 어린아이가
튀어나온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와우 저 으깬 감자좀봐. 산더미같아. 그레이비 소스도 있고. 내면의 어린아이는 이렇게 환호성을 지른다. 식탁에 앉아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들의 내면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두눈이 놀라움으로 갑자기 휘둥그레지면서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다섯살 꼬마 말고
누구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다른 예로 심각한 표정의 사업가가 서류가방을 들고 카페테리아로 들어선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드디어 냅킨을 앞에 두고 자리에 앉는다. 이때 그의 표정을 살펴보면 냅킨을 집어드는 순간 이미 다른 누군가가 그의 영혼을 점령하고 있다. 작은 꼬마가 이미 식사를 즐길 만반의 준비를 하고 거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순간
그는 "오! 너무 많이 먹었잖아"라고 소리친다.
그 순간
이자리에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남자는 찌뿌린 얼굴로 식당을 나서며 자신을 질책한다. 그러면서 속으로 섭취한 칼로리를 계산해본다. 의사가 하루에 900칼로리만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저녁 한끼로 무려 3800칼로리나 먹어치웠다. 다음주 화요일까지는 굶어야 할 판이다. 어떻게 버틸지 막막하다.
자각상태를 유지하면
이런 자멸적인 양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냉장고 문에
"어른만 열수 있음"이라고
적어서 작게 붙여두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면
거기에 누가 있는지
잘 알아차리고
자각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물론 어른도 먹는 것을 굉장히 즐긴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이성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이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할때 혈당수치가 변덕스럽게 오르락 내리락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의식 속에서 혈당의 저하는 흔히 허기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빈속에 뜨거운 퍼지 선딩을 먹으면
혈당이 갑자기 치솟으면서
아드레날린과 인슐린이 다량으로 분비되어
혈당이 다시 급격하게 저하되기 쉽다.
그러면
배가 고픈것이 아닌데도
이 상태를 허기와 연관짓는다.
위가 여전히 꽉 차있고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칼로리를 보유하고 있는데도
혈당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다시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단백 음식을
가능한 많이 섭취하면
훨씬 수월하게
이 프로그램을 실천할 수 있다.
고단백 식이를 하면
혈당이 상대적으로
안정적 수치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혈당의 급격한 저하를 방지하면
당장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느낌도 사라져
이 프로그램을 실천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
피하는 것이 좋다.
어떤 프로그램을 실천하든
우리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고통이 뒤따른다면
어떤 프로그램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칼로리를 계산하고
삶의 즐거움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프로그램은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식욕을 충족시키고
과식으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고 나서는 자신에게 벌을 주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다. 얼마동안 마치 죄수처럼 빵과 물만 먹는 것이다. 이렇게 충분히 벌을 주고 나면 죄책감은 사라져 버리지만 과거의 식습관이 다시 살아난다.
극단을 오가는
이런 불균형에서
과식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벌주기 위해
빵과 물만 먹는 양식에서
과식과 방탕에 푹빠져 있다가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징벌하기 위해
스스로 즐거움을 없애버리는
극단적인 흔들림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
즐거움을 없애버리는 것은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물론 방탕도 마찬가지다. 그보다는 의식의 기법들을 통해 이것들을 초월해서 둘의 중간지점을 유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래야 문제를 뛰어넘어 내면의 어른이 상황을 지배하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프로그램도
수월하고 즐겁게 실천하고
평생 우리를 괴롭혔던 것을 뛰어넘고
해결했음을 깨닫고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 기법을 실천한 첫날 나는 약 45분간 자리에 앉아서 이 감각들을 다루었다. 둘째날에는 20분, 셋째날에는 10분, 넷째날에는 4분간 그렇게 했다. 그 후로는 여러해 동안 이기법을 실행하는데 들인 시간이 총 한시간을 넘지 않는다.
'먼저 스톱워치를 켜고
자리에 앉아 이 기법을 실행한 다음
허기가 사라지면 스톱워치를 확인한다.
아마 10년동안 총 1시간도 소요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고 고통을 경험할 필요도 없다. 의지력은 전혀 필요치 않다. 대신 자발성을 이용해야한다. 자발성이 310단계에 있는 긍정적이고 강력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의지력을 이용한다는 것은
저항한다는 의미이고
저항은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있는데다
힘도 125로 약하다.
그러나
자발성과 수용을 이용하면
500에 가까운 행복에 이를 수 있다.
기쁨의 상태에서는
자신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느낌이 들게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몸도 개운해지고 몸을 행복하게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 기법의 효과를 가속화시키는 또 다른 방법은 자신의 활동을 관찰하는 것이다.
운동은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일찍 일어나 미용체조를 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라들이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여도 따라 할 수 있는 횟수는 얼마 안된다. 아마 나흘때 되는 날에는 열정이 식어서 자신도 모르게 과거와 똑같은 양식을 답습하게 될것이다.
운동이
멋진 활동이고
행복감을 불러오는 것은 맞다.
하지만
체중감량을 위해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운동의 또 다른 진실도
알 것이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의 차고에는 운동기구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을 것이다.
내가 설명한 기법은 운동과 달리 노력도 덜 들어가고 실제로 효과도 좋다. 나중에는 너무 날씬해져서 고민스러워질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랬다. 위의 기법이 효과가 너무 좋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과식과 죄책감의 악순환과 더불어 식욕과 허기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아침은 물론이고 점심을 먹는 것까지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온종일 분주하게 일하다가 먹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했다.
가끔은
식사시간이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떠오르기도 한다.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만히 앉아서
허기를 다룰때처럼
저항을 내려 놓는다.
그러다보면
"아침을 먹어야해"
점심을 먹어야해,
저녁을 먹어야해"와 같은 생각들이
문화적 조건들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런 생각들에는 어떤 실제성도 없다. 온종일 식사를 하지 않는 것도 그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식사를 하지 않고
그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며칠을 보낸적이 있다.
한번은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식사를 잊은 적도 있다.
여러가지 일들을
정신없이 처리하다가
문득 며칠동안 식사를 안한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
확인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식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식구들은 내가 너무 말랐다며 걱정을 했다. 그 후로는 식사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려 했다. 그래서 식사를 제때 하도록 프로그램을 약간 수정했다. 이처럼 이 기법은 대단히 효과적이며 커다란 행복감까지 안겨다 준다.
널리 적용할 수 있는 의식의 기법은 또 있다. 사실 이제까지 설명한 모든 기법은 여러가지 문제에 응용할 수 있다.
먼저 자신이 원하는 유형의 몸을 그리며
그 몸이 불러올
느낌들을 상상해본다.
그런 다음
삶에서 자기 모습에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던 때를
떠올려본다.
이제
자신이 원하는 몸을 상상하면서
기쁨의 감정을 다시 일깨운다.
예를들어 호리호리한 몸을 원한다면 날씬한 모습의 자신을 상상하면서 이런 자신을 사랑해준다. 그러다 새로운 프로그램이 깔렸다는 확신이 들면 이제는 이런 모습도 내려놓는다.
미래에 갖게 될 몸의 모습을 입력하고 나면
마음은 그런 방향으로
저절로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냥 미래의 자기 모습을 사랑하고
놓아주기만 하면 된다.
원한다면
그 모습 밑에
몸무게를 적어두는 것도 좋다.
그리고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 와 몸이 이렇게 날씬하고
활동적이라니 정말 환상적이야.
이런 몸을 가지니 기분도 좋군.
이런 몸을 가진 내가정말 사랑스러워"
연구 결과들을 봐도 이런 심상요법에는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이때 자신을 몸과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 몸이 곧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엄연히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과 몸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아주 중요하다. 자동차와 집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저 몸을 갖고 있을 뿐이다.
몸도
차나 집, 애완동물과 같다.
몸을 이렇게 보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시각이다.
"봐! 나의 작은 애완동물이야.
나를 실어다 주는 자전거, 자동차,
애완동물 같은게 내몸이지"
이런 시각은 나는 곧 몸이다라는 시각과는 다르다. 내가 곧 몸이라면 나는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몸무게가 늘어나면 바로 내가 뚱뚱한 거라고 생각하고 내게 잘못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명상을 통해
큰 나를 약간만 인식해도
나는 몸을 경험하는 자아지
몸 자체는 아님을 깨닫게 된다.
몸이 스스로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몸은 마음속에서 경험될 뿐이며 마음은 의식에서 경험되고 의식은 자각이라는 장에 의해 경험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넘어선 존재인 동시에 몸을 인식하는 자다. 우리의 실체와 몸은 별개인 것이다.
몸은
마음속의 생각을
반영할 뿐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속에 있는 것이
진짜 문제다.
우리가 할일은
의식의
진동패턴을 바꾸는 것이다.
몸은 명령받은 일을 자동적으로 수행할 뿐이다. 몸에는 마음이 없으므로 생각을 못한다. 마음은 본래의 내게 있고 몸은 이 마음이 주문한 일을 수행할 뿐이다.
이 심상요법을 이용하면
몸과의 관계를
즐거운 것으로 변화시키고
몸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다.
계속 내려놓으며
이 기법을 실천하면
몸이 더욱 가볍게 느껴진다.
몸은
사실 무게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에
점차 무게가 없는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러다
얼마후 의식의 상위단계로 올라가면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거의 의식하지 않게 된다.
의식지도를 다른 시각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체중문제를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파괴적인 감정패턴으로 인해 체중문제를 어떻게 영속화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감정들이 체중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잘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사실 체중문제에 대한 반응이며
때로는 필연적인 결과 혹은
병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체중문제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왔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책감(30)의 아주 낮은 단계에서 이 문제를 대해왔다. 그러나 죄책감의 에너지 장은 그 힘이 아주 미약하다. 체중이나 알코올 혹은 관계문제를 죄책감의 단계에서 다루면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얼마나 될까? 사랑의 단계에서 500달러를 사용할 수 있다면 죄책감의 단계에서 쓸수 있는 양은 30달러밖에 안된다. 30달러로는 어떤 문제도 별 진전을 이루지 못한다. 게다가 에너지 장의 성격도 부정적이다. 자기혐오와 함께 문제 전체를 부정적으로 느끼게 된다는 의미다. 의식속에서도 실제로 파고의 과정이 진행된다. 체중문제나 방종으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죄책감의 단계에서 문제를 다루지 못해도 무감정의 단계로 이동한다.
그런데 50의 에너지 장은 절망의 감정도 동반한다. 내 경우는 정말 가망이 없어. 다이어트란 다이어트는 다 해봤어. 이제 더이상 문제를 이야기할 기운도 없어. 이 문제 때문에 나는 망했어. 그냥 체념하고 포기할래"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망없다라는 절망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
다음은 슬픔의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낙담, 의기소침과 함께 우울과 후회의 감정을 경험한다. 체중문제와 이것이 불러올 결과들에 대한 두려움도 나타난다. 아마 심장마비로 죽고 말거야. 과체중이 나를 죽게 만들거야라는 생각처럼 모두 부정적인 느낌들이다. 이처럼 이 단계에서는 근심과 불안, 공포로 가득차 과체중때문에 관계와 미래 모두가 망가져버릴거야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자아존중감이 줄어들기 때문에 체중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방에 틀어박힌다. 그리고 이 에너지 장으로 인해 부족한 존재라고 느끼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보충한다. 사실 전혀 부족한 사람이 아닌데도 말이다. 체중문제에 대해 그들 스스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서 그 부정적인 측면이 이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 뿐이다.
욕망의 단계(125)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했다. 이 단계는 갈망과 바람, 욕망을 포함하며 이 모든 것의 이면에서 노예화의 과정이 진행된다.
다음의 단계는 분노(150)다. 자신의 체중문제로 화가 나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체중문제에 분개하며 불만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150의 에너지 단계가 효과적이므로 죄책감이나 절망보다는 화를 이용할때 이 문제를 더욱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다.
자신의 체중문제에 충분히 분노를 느끼는 이들은 자부심(175)의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 이 단계는 더욱 많은 에너지를 부여해 준다. 자부심을 통해서 성공적인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이로 인해 용기의 단계로 올라간다.
용기의 단계는 매우 효과적인 몇가지 도구들을 제공해준다. 이 단계에서는 이 도구들을 실천해볼 용기도 생겨난다. 죄책감(30)이나 무감정(50)에 비해 용기의 단계(200)에서는 더욱 많은 힘을 갖게 된다. 따라서 문제를 직시하고 대처하며 다룰 수 있고 이로 인해 더욱 힘있는 존재가 된다. 이 지점까지는 사실 문제를 다루는 법을 몰랐다. 방법을 알았더라면 그것들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놓아버림 기법들을 이용하면
문제 전체와 거리를 둘 수 있다.
몸무게가 여전해도 문제 없고
그렇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긍정적인 기분을 유지하고
자발성의 단계로 상승한다.
죄책감이나 슬픔의 단계와 비교할때 자발성의 단계는 훨씬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 이 기법에 공감하고 실천하면서 자신에게 얼마나 힘이 있는지 알게 된다.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리라는 목적을 지니고 있어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또 자신에게
충분한 능력이 있음을 느끼면서
자신감도 얻는다.
그렇게 변화가 일어나
사랑하기의 상태로
들어간다.
몸을 나와 동일시하지 않고
몸이 나가 아님을 알기때문에
자신과 몸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고 싶은 욕망이 생겨난다.
왼쪽 다리를 잃든 오른 쪽 다리를 잃든 나는 여전히 나다. 두 귀를 잃어도 나는 변함없이 나다. 이처럼 진정한 나만이 나이며 몸이 곧 나는 아님을 드디어 깨닫는다. 몸무게가 80킬로그램이든 35킬로그램이든 진정한 나의 성질과 본질은 몸과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몸을 사랑하는 법을 터득한다. 몸을 진정으로 존중해주고 몸이 재미있는 작은 마리오네트와 같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행복한 인형과 같다고 보는 것도 몸과 관계를 맺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 단계에서는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기쁨을 경험한다.
하지만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도
몸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전체성의 입장에서
존재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경험이 실제로 일어나는 자리를 의식하면 '경험"이 비국부적이고 확산적이며 주관적인 것임을 깨닫는다. 위통이나 팽만, 궤양같은 국부적인 현상대신에 경험의 편재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의식적인 존재가 나의 본질임을 깨닫는다.
또
의식이 모든 곳에 있기 때문에
존재를 비공간적인 것으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의식의 편재성과 전체성안에서 이 행복한 인형은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할일을 자발적으로 즐겁게 해나간다. 의도를 가져도 자발적으로 가질 뿐이다. 관찰을 해보면 모든 행위는 물론 심지어 생각도 자발적이고 자율적이다. (B 리벳같은 신경과학자들의 연구도 이것을 입증해준다). 자신의 존재를 가치있게 여기고 자신이 본질적으로 위대하고 광대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살아있음의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즐거운 무언가를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몸을 받아들인다.
기쁨을 만끽하고 시도하고
즐겁게 데리고 놀 수 있는 것으로
몸을 생각하는 것이다.
며칠만에
이 식용과 허기의 순환에서 벗어나고 나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다른 조처를 취할 필요도 없다.
몇백 칼로리를 덜기 위해 일반적인 콜라대신 다이어트 콜라를 마신다는 건 그냥 상식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선택은 상식에 휘둘리는 것과는 다르다.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책감에 지배받는 것과도 다르다.
다른 효과적인 방법은
일정수준이상으로
몸무게가 넘어가는 걸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들어 55킬로그램을 기준치로 정하면 과거의 양식이 되돌아와 어쩌다 56킬로그램이 나가도 곧 다시 이 기법을 적용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기법을 실행하면 쉽게 이런 악순환을 놓아버릴 수 있다. 한두번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처음 허기가 일어나면 먹기를 건너뛰고 냉장고를 향해 간다. 하지만 내면의 어른을 데리고 가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문을 열때마다 잘 보이게 냉장고 안에 쪽지를 붙여두거나 마음속에서 자신의 어른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다. 그러면 내면의 어린아이와 어른 가운데 누구의 팔로 냉장고 안을 더듬을 것인지 쉽게 선택할 수 있다. 어른을 배제한 채 냉장고 안의 온갖 것들에 손을 가져다 댈 내면의 어린아이는 물리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아주 즐거운 경험이 되고,
이런 경험속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다.
자신을 치유하는 모든 기법의 근본은 자기 사랑의 방법들을 터득하는 것이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소중하게 아껴주는 것이다. 그러면 큰 나는 자신의 작은 몸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와 너와 지내는게 즐거워. 너 정말 재미있는 친구야"라고 말한다. 몸이 혼자서 저절로 움직인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에고가
우리를 속였다는 것도
알게 된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면
몸이 따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자동적인 성질을 갖고 있어서
몸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부정적인 양식에서
해방시키고 나면
몸은 자신을 아주 잘 다룬다.
실험을 통해 연구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먹을 식단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해 보았다. 그 결과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균형잡힌 식단을 선택했다.
본성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면서
몸이 그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몸속의 자연스러운 존재는
몸의 영양학적 필요을
자동적으로 해결해 준다.
사회에서 주입된
프로그램들을 제거하면
몸의 건강한 자가 치유력이
주도권을 쥔다.
그러면
몸은 자신에게 필요하고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스스로를 돌본다.
몸은 이런 일을 아주 잘 수행한다.
그러므로
자연속의 신성을,
이 행성의 아름다움속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몸을
믿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몸은
자신만의 내적 지혜를 가지고 있다.
사회가 주입한 인위적인 조건화를 제거하면
몸의 이 천부적인 내적지혜가 발현된다.
그러면
살아있과 기쁨,
가벼움을 느낄 수 있다.
언제나 기분이 밝다.
더불어 몸무게 문제도 저절로 해결된다.
이런 상태에 이르는데 필요한 것은
기법을 실행하는 몇분의 시간뿐이다.
그러면
몇년동안
기쁜 보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몸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고
몸을 사랑하고
몸을 아끼고
몸에게 필요한
모든 사랑과 관심을 주어야 한다.
몸은
곧 내가 아니라
내게 속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몸은
아주 사랑스러운 소유물이다.
그러므로
갖고 있는 동안
몸을 만끽해야 한다.
위 방법대로 대 했는데도 효과가 없으면 어떡하죠?
온갖 방법을 다 써봤는데도 여전히 과체중이며 어떡하나요?
상황이 이렇다면 우순순위를 바꿔야 할때다. 여러세대에 걸쳐 내려온 가족의 유전적 양식이 있을 수 있다. 생명을 위협할정도가 아니라면 몸무게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몸무게보다는
사랑스럽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더 좋다.
몇 사람만 예를들면 윈스턴 처칠이나 여러세대의 오페라 스타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테디 루즈벨트, 유럽의 군주와 귀족들처럼 역사를바꾼 위대한 사람들 중에 과체중이었던 사람들이 많다. 이들의 문제도 유전적인 것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체중문제에 강박적으로 골몰하는 것보다는 육중해도 행복하게 체중문제를 그냥 무시해버리는 편이 좋다.
이 행성을 떠날 때
몸을 갖고 가는 것도 아니고,
천상에서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올바른 의식이 체중도 지배 할 수 있네요
그러게요.
몸
감각(오감)
마음(생각)
의식
의식을 주재하는 힘, 우주 의식, 신의식
인간의 조건화된 욕망, 중독을 어떻게 쉽게 "소거"할 수 있는가?
이 주제는 인생의 화두였는데...
이렇게 쉽게... 해결하는구나.. 놓아버림으로...
그러므로 자연속의 신성을, 이 행성의 아름다움속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몸을 믿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몸은 자신만의 내적이 지혜를 가지고 있다. 사회가 주입한 인위적인 조건화를 제거하면 몸의 이 천부적인 내적지혜가 발현된다. 그러면 살아있과 기쁨, 가벼움을 느낄 수 있다. 언제나 기분이 밝다. 더불어 몸무게 문제도 저절로 해결된다. 이런 상태에 이르는데 필요한 것은 기법을 실행하는 몇분의 시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