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순간들
임병식 rbs1144@daum.net
아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생각하니 그간 간병을 해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 세월이 작잖이 22년이었다. 중환자를 자택에서 돌보는 일은 여간 쉽지 않는 일이다. 위기를 넘긴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일이 아내가 식사 후 큰 눈깔사탕을 먹다가 그만 목에 걸린 일이다. 내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돌봐주는 요양보호사가 다급하게 호출했다. 사탕이 목에 걸렸는지 숨을 재대로 쉬질 못한 다는 것이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수년전에 지인이 외 손주를 돌보다가 사탕을 먹인 일이 스쳐갔다. 그때 아이는 사탕이 목에 걸려 질식사를 하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서 아내의 얼굴을 살펴보니 안면이 벌겋게 달아오른 가운데 ‘꺼억 꺼억’소리만 내고 있었다. 나를 달려가 허리를 앞으로 굽힌 후 한손으로 명치끝을 밀어 올리며 다른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토하도록 유도를 했다. 그런 행동을 수차례 반복하자 마침내 목에 걸렸던 사탕이 토사물과 함께 튀어나왔다.
그것은 예비적인 상식이 뒷받침이 되었다. 지인이 그런 비극을 당한 것을 보고 ‘이러면 되는데’하고 생각해 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방병원에서 집사람을 2년간 입원 시킨 후 물리치료법을 배웠다. 매일 오후시간이면 물리치료를 받는데 그때마다 보조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손과 발을 펴주고 허리운동 시키는 것을 습득했다. 그밖에도 나는 30여 년 전 침술학원을 다녀 수료증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참 ‘침구사’를 양성하여 외국에 내보낸다는 정부방침이 알려진 때였다. 그때 공중 보건학을 비롯한 응급치료요법, 경혈치료법을 배웠던 것이다.
그런 위기를 넘긴 후 또 한 차례의 고비가 찾아왔다. 요양보호사가 목욕을 시키다가 그만 귓속에 물이 들어가고 만 것이다. 그것은 염증이 생기면서 발열을 하여 귀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환자전용의 콜택시를 불러 개인 이빈후과를 찾아갔다.
그런데 살펴보던 의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일러준 대로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지금을 귓속이 부어서 정확한 상태를 볼 수 없으며 처방한 염증 치료 약를 먹고 3,4일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러는 순간이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 복불쌍행(福不雙行)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화가 거듭 닥치고 만 것이었다.
내가 콜택시를 불러놓고 약을 지으러 가는 사이 차가 금방 도착을 했는지 돌아오니 환자가 벌써 태워져 있었다. 조금도 의심 않고 앞자리 요양보호사 옆에 앉았다. 처음 올 때와는 달리 운전기사가 다른 사람이었으나 그사이 교대를 했거니 생각했다.
한데 차가 집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비포장 길을 달리는 것이 아닌가. 어디를 가느냐고 하니 변두리 마을 화양을 간다고 한다. 그때서야 다른 차를 탔다는 걸 알았다. 꼬인 것은 알고 보니 병원에서 호출하던 시각에 다른 환자도 차를 부른 것이었다.
그 시행착오는 심각한 후유증을 불러왔다. 차가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 받은 충격으로 엉치 뼈를 다치고 만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다시 찾아간 병원에서는 엑스레이를 찍어보더니 자기로서는 해줄 방법이 없고 대형병원을 가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 결심을 했다. 이미 다른 것으로 중환의 상태인데 이리저리 환자를 끌고 다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상비약으로 갖추고 있는 뜸을 놓았다. 통증은 현저히 줄어들고 나중에는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왔다.
한편, 귓속이 부풀어오른 것도 더는 병원을 찾지 않았다. 물이 들어가서 염증이 생겼다면 수술을 할 것이 아니라 소염제를 먹여서 부기만 가라앉게 해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심을 시키고 소독한 약솜으로 가볍게 닦아내주었다.
여기서 내가 느낀 것은 어떤 상황에 처하여 보호자가 절대로 겁먹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보호자가 당황하면 심리적으로 약해 질대로 약해진 환자는 멘붕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절망상태에서도 안도감을 가지도록 했다.
그런데 뒤늦게 찾아온 독감을 물리쳐 이겨낼 수가 없었다. 일하던 요양보호사가 그만 두고 새 사람이 들어왔는데 상태가 수상쩍었다.
간헐적으로 기침을 해 마스크를 쓰도록 요구했다. 그런데도 자기는 마스크를 쓰고는 답답해서 일을 못한다고 거부했다. 불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최근들어 요양보호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은지라 그냥 잘 돌보아 주라고만 당부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느낌은 다르지 않아서 집사람이 기어기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처음은 미열이 나더니 차츰 오한이 들면서 식은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주사를 맞히고 약을 타왔다. 그런대도 낫아지기는 커녕 상태가 악화되었다. 그런 와중이다. 외국에 나가있는 동생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조금 있다가 마카오에 휴양을 가는데 형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르니 동행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렵겠다 했더니 그래도 한번 재고해 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일순간이나마 환자에게 속 알머리 없는 말을 하게 되었다.
“동생이 다녀가라고 하는데 한번 갔다 올까?”
물으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자기가 자기 몸 상태를 잘 알 것이며, 되돌아보면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지고 있었는데, 다녀오라고 고개를 끄덕이다니. 오직 안타까웠으면 그리했을까.
집사람은 각일각 상태가 악화되었다. 숨기지 하루 전인 밤 11시경, 상태가 위급하다는 생각에 서울에 거주하는 큰 아들에게 전화를 넣었다. 물을 넘기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무래도 심상치 않으니 대기를 하라고 했다. 그 사이에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의사인 친구에게 물으니 그럴 때는 가볍게 등을 두들겨주는 게 좋다고 좋다는 것이다. 그 말은 너무나 한가하게 들렸다. 응급실에 갈 생각을 하고 119를 부르면서 이번에는 좀 더 다급한 상태를 알렸다. 만약의 경우에 임종을 지켜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1시 20분경. 응급실에 도착하자 채혈과 엑스레이부터 찍었다. 산소마스클 씌어놓으니 상태는 더욱 위급해 보였다. 네 시 반경에 두 아들이 도착했다. 서울에서 밤을 새워 달려온 것이었다.
“아이들이 왔어요. 눈을 떠 봐요”
“어머니. 어머니”
외쳐 부르자 감았던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눈동자가 초롱하고 맑았다.
“아들 알아보겠지요?”
눈을 두어 차례 깜빡 거렸다. 그런 후로 아내를 눈을 뜨지 못했다. 극적으로 아들을 상면하고 두 아들들로 하여금 임종을 하도록 하고서 눈을 감았다.
집사람은 초창기 병원에서 퇴원하고서 뇌졸중으로 인해 수족을 전혀 쓰지 못한 상태에서도 하는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눈은 이상이 없고 귀는 열려있으며 정신은 그런대로 맑아서 집안일에 신경을 많이 썼다. 식수를 끓일 때 시간을 알려주거나 내가 외출을 할 시간이면 시계를 보고 있다가 알려주었다. 신경을 쓴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문단속 하는 일과, 계절 따라 옷 갈아입는 일, 장롱의 환기까지도 신경을 썼다.
나는 이런 아내를 집으로 데려온 후로는 재활운동을 꾸준히 시켰다. 그래서 마지막 숨을 거둔 순간까지도 손발의 마비상태를 최대한 막아냈다. 특히 칫솔질에 신경을 써서 충치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아마도 70대 노인의 건치심사를 했다면 상을 탔을 것이다.
아내는 특히 양치에 신경을 썼는데 요양보호사는 그것을 못마땅해 했다. 대강 슬슬 해도 되는데 까다롭게 군 다면 악 소문을 내는 바람에 마지막에는 사람을 구하는데 많은 애로를 겪었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느끼는 소회는 이 세상에 환자보호자 만큼 약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 살아도 잘못한 것은 환자나 보호자 탓으로 돌아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입원을 해도 오래토록 하지 말고 장병에 시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속에 유행하는 말처럼 9988234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나니 허망한데, 비교적 긴 간병생활을 하며 보냈지만 잘해주지 못한 것만 후회로 남는다. 나의 50대 청춘이 아등바등 보내는 동안 어느덧 80문턱에 이르고 말았다.
방문은 열면 허전한 기운만 감돌고 옆구리는 시려오기만 한다. (2024)
첫댓글 22년 애환의 길목에 아로새겨진 우여곡절의 사연들이 마침내 선생님의 반 가슴에 그리움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군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조차 선생님 인고의 세월 앞에서는 한낱 말의 성찬에 지나지 않네요 허전한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어찌 노력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힘내시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아내 간병'에 대한 글을 연재해주겠다고 하여 써놓은 작품에 이것을 한편더 추가햇습니다.
실질적으로 닥친 위기와 절망, 내가 몸을써서 부딪친 실감나는 상황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생각하면 아찔하고 가슴 미어지는 순간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