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창고지기 이후안디에고
흥부가 기가 막혀! 어릴 적 왕십리 산동네에선 어른들로부터 착한아이로 불리어졌는데, 장가들고 돈과 명예를 쫓아 높은 곳을 오르려 발버둥 치는 과정을 통해 난 나쁜 어른으로 변질되어 갔다. 한탕주의에 빠져 허황된 꿈을 현실로 살다보니 종국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사업도, 가정도, 지인과의 관계까지도 풍비박산이 났다. 남들에게 각광받는 진열장 속의 도자기를 바랬더니 세상 길바닥에 버려져 산산조각으로 깨진 항아리 신세로 전락했다. 사면초가에 직면 서럽도록 외롭던 밤 뚫린 곳은 하늘 뿐! 사방으로 뻗쳐진 땅에서는 철저히 고립된 나의 존재. 채권자(은행포함)들을 피해 타지에서 숨어 잡부로 노역하던 그 때, 난 내 발로 성당을 찾아 교리를 받고 영세를 받았다. 아이들이 있는 서울로는 갈 수가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채무, 도피처로 택한 곳이 충복 옥천에 있는 무의탁 무료노인요양원이었다. 그곳에선 이 몸 숨길 수 있었고 무료로 숙식이 해결되니 상주봉사자를 자처했다. 어린시절 품위 있고 멋진 왕자를 꿈꾸었던 착한아이는 시골 요양원에서 장애우들과 어울려 뒹굴며 서울의 삶을 잊은 채 치매노인 환자들과 낮과 밤을 함께하는 가족이 되어 단순한 기쁨을 누리며 지내는 4년을 보냈다.
사방이 온통 걱정이었던 나는 벼랑 끝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의 내 삶은 사방이 온통 행복이다. 내게 있어 시련은 축복이었고, 은총이었다. 내가 부서지고 망가지지 않았다면 나와 예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 분은 산산조각이 난 내 지난 인생길을 이제는 당신의 빛으로 비추시어 상처의 조각들을 알록달록 빤짝이는 보석으로 변화시켜 주셨다. 내가 잘 보관된 귀한 도자기로 있었다면 내 삶, 얼마나 싱겁고 밋밋했을까? 위를 향하던 도자기가 아래로 떨어져 깨진 항아리가 되고나서야 나는 진정한 아래로 부터의 영성을 접하게 되었고 비로소 난 작품이 된 셈이다. 왕자가 되어 군림하고픈 나를 깨뜨리시어 가난한 자 도망자로 만드시고 병든 이들 곁에서 그들을 수발하는 봉사자로 세워주셨으니 그 분의 능력은 놀랍기만 하다. 내 자아가 죽고 그 분 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다보니 나의 일상은 나날이 카나의 기적이다. 그 분의 오묘하고 섬세하신 이끄심이 내게 있어서는 경이로울 뿐이다. 그로부터(1998년) 지금까지 이십여 년. 나의 변함없는 케렌시아는 예수님이다.
2002년 봄 강남시립병원(현:서울의료원)에서 원목봉사 하던 내게 모 회사의 중역으로 있으며 잘 나가던 대자가 걱정스레 묻던 말 “대부님은 노후를 위해 보험 몇 개나 들었어요?” 알다시피 난 난파당한 배가 아니던가. 돈 버는 일은 마다하고 시립병원에서 행려노숙 환자들과 벗하며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호스피스 활동 및 무료장례지원 봉사하는 대부가 그의 눈에는 대책 없고 안타깝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힘주어 대답했다. ‘응, 난 절대 부도나지 않을 생명보험 딱 한 가지 들었다네’ 자네가 든 모든 보험은 사망사고 후 자네가 직접 수령할 수 있는가? 난 내가 직접 혜택을 받는다네. 생각해 보게. 자네가 죽은 후 자네가 소유한 모든 것은 남의 것일세. 내가 죽는다면 내 소유한 모든 것 또한 살아 있는 이들의 것이 되지만, 살아서 내가 남에게 베푼 자선 및 선행은 오롯이 나의 몫이라네. 마태25장 최후의 심판에 그 해답이 있지아니한가! 그 보험금은 누구도 훔쳐갈 수 없다네. 그 보험료 납부를 위해 난 오늘도 여기에 있지. 그 부자 대자는 이해할 듯 모른다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나는 확신한다. 나의 무대책이 그분이 마련하시는 상대책 이란 것을. 성경에서의 황금율(마태7.12)은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내 영혼을 위한 가장 확실한 생명보험이다. 시키는 일을 하고 세상에서 댓가를 받는 것은 이방인들도 한다. 시켜서 일하는 자는 노예이다.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이는 스스로 한다. 행복논리는 너무도 간단하다. 주인의 마음에 감동을 심는 것. 그럼, 주인 것은 내 것이 된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 분이 사신다고. ‘손님이 불러서 가는 것은 심부름이고, 손님이 부르기 전에 가는 것은 서비스다’ 우리는 남을 위해 서비스 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해 봉사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쉬운 길을 예수님이 신계명으로 알려 주셨다, 이웃을 누구처럼 사랑하라고 바로 네 몸처럼. 곧 그가 나인 셈이다.
이기적인 삶은 홀로 만족하지만, 이타적인 삶은 더불어 행복하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단순한 기쁨」에서 피에르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다. 세상에서는 참 행복을 찾을 수도 구할 수도 없다. 교회의 가르침 안에 충실해야 만이 행복 보물찾기의 지름길로 들어설 수 있다. 소금이 자기 형체를 녹이지 아니하고 어찌 짠 맛을 낼 수 있는가! 세상 빛은 높은 곳에 달려 자신을 뽐내지만, 촛불은 자신의 키를 낮춰가며 오래도록 세상 어둠을 밝힌다. 소금과 촛불은 공통점이 있다. 소리 없이 녹고 조용히 빛난다. 자신을 죽여가며 세상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자랑하지 아니한다. 그와 같이 남을 위한 사랑과 헌신도 자신이 봉사자라고 자칭하는 순간 그는 진정한 봉사자가 아니다. 나는 호스피스 활동을 할 때, 임종을 지켜보고 장례까지 유가족과 함께하면 그 분들이 고마워 어쩔 줄 모른다. 그럴 적마다 일관되게 대답한다. ‘아닙니다. 제가 봉사한 것이 아니라, 고인께서 제 영혼의 유익을 위해 하늘에 공덕을 쌓을 수 있도록 죽기까지 자신의 온 몸을 제게 내어맡겨 주셨습니다. 고로 그분이 저를 위한 진전한 봉사자였습니다. 도리어 제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표현할 길 없이 감사해 하시는 유가족을 뒤로하고 돌아설 때 나는 행복하다. 뭐라 규정지울 수 없는 행복, 저울로도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 살아계실 때는 호스피스 활동으로, 돌아가신 뒤는 상장례지도사로서의 몫을 행한다. 고인에게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예우를 올려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내게 있어 고인의 주검은 시신이 아니라, 바로 조금 전까지 성령께서 머물러 계셨던 궁전이기 때문이다.
어느 책에 ‘수박에게 박수를’이란 제목의 글이 있었다. 혼자 먹기 위해 머리만 한 큰 수박을 사 들고 가는 사람은 드물다. 잘라 놓은 수박 한 쪽을 들고 자기 방에 들어가 먹는 사람 또한 드물다. 귤 사과 배 등은 혼자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데 수박은 그렇지가 않다. 다른 과일과 달리 수박만의 강점이 있다. 그건 바로 가족을 모이게 하는 힘이다. 보라! 여기에 수박의 위대함이 있다. 자신을 조각내어 아낌없이 나눔을 할 때 공동체는 살아난다. 나를 기꺼이 주어라, 그럼 여럿이 행복해 진다. 그들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는 나는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해 짐은 물론이다. 사회나 교회 안에서나 수박 같은 일꾼을 필요로 한다. 소금이란 봉사의 명찰을 달고 들어와 남들의 수고를 올라타고 앉아 고소함을 풍기는 깨소금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짠 맛?으로 넓히고자 금호동 산꼭대기에 ‘소금창고1004’라는 작은 사랑나눔 공동체를 운영한다. 지난 5월에는 서강대 예수회센터 대성당에서 소금창고 9주년기념 음악회도 열렸었다.
2년 전 봄 지방에서 고독한 50대 중반의 형제가 소금창고를 찾아 무작정 상경했다. 작은 창고에 재울 곳이 없어 인근 고시원을 얻어 숙소로 정해 주었다. 그를 통해 고시원 독거입소자들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안타까운 마음에 매주 한 번씩 그가 고시원을 탈출하던 금년 9월까지 꾸준히 전체 고시원 입소자들을 위해 새로운 반찬을 제공해 주었다. 어느 날 밤 신장결석으로 119차에 실려 입원했을 때 병원비도 마련할 길 없는 그를 위해 수소문하여 구청에서 긴급의료비지원을 받아 퇴원시켰고, 그 후 우울증세를 보인 그를 신경정신과 진료를 시키며 관할 주민센터를 통해 수급자로 지정되도록 도와주었다. 지난 폭염, 창문도 없는 고시원(월24만원) 찜통더위 잠 못 잔다기에 우린 창고 옆 지하방(보300-월30)을 얻어 거처를 옮겨주었다. 그 형제가 얼마 전 봉투를 건네준다. ‘자기는 이런 사랑 처음 받아본다며 지금 무척 행복하다고 이 돈은 생계비 아껴 모아둔 것이라며 가난한 소금창고 기금으로 쓰라고'한다. 7월 중순경 남부구치소에서 출소한 젊은 형제가 오갈 데 없다는 연락을 받고 내가 우리 집에 하룻밤 재웠다하니, 그 형제도 자기가 조카처럼 돌보겠다며 지금은 데리고 함께 생활하고 있다. 나눔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넓혀지는 것. 행복은 나누면 줄어듦이 아니라 배가되어 진다. 이 지하방을 우리는 '나그네의 집' 이라고 내면에서 명명했다. 사람 눈엔 무작정 상경, 하느님 뜻 안에서는 또 다른 작은 공동체를 탄생시킨 이유 있는 상경이었다. 돌이켜보면 온통 행복요소들이다. 그를 통해 우리가 도운 것 보다 그를 통하여 배운 것이 훨씬 더 많음을 느꼈다.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 덕분에 나는 동사무소와 구청을 들락거리며 긴급복지기금도 연결해 주는 등, 행정적 지식을 많이 습득했다. 이 또한 행복한 작업 아닌가! ‘달이 지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있기 때문이다.'-내가 너면 그것은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