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술원 화백에 대하여 필자가 국동리에서 어려서 본 이야기 보따리입니다
정술원화백은 공주시 탄천면 국동리에서 평생을 거주하였다.
당시에는 일본 인들에 의해 벼슬관직이 결정되어 농사를 안지으면 살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집안에는 때거리가 없어 그림을 365일 쉴새 없이 그려야 수요자측인 농촌의 경우에 보리수확때 보리 3말과 벼수확때 벼3말식 받아가며 그림을 그려주기를 요청하는 집에 가서 그림을 그려 주며 그린그림을 벽과 천정에 부쳐주기도하었다. 얼마나 그일이 힘드렀을까?
몸과 목, 손을 얼마나 혹사시켰는지? 현재 화가들은 상상조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 많은 그림을 그려주어야 받는 수익이 현금도 아니고 곡물(방아간에 안거친곡물)로 그림품삯을 받었다.
그리고 년 4~5회정도 그림 품평회가 있었다. 그때는 시인과 문신文臣과 화백들이 국동 술원화백 댁에 모여서 시주를 나누며 그림속에 詩文넣기를 하는 것을 필자는 직접보았다.
이럴때는 현재의 소그룹 작품 품평회와 같이 매우 재미있는 시간 이었다
그리고 정술원화백은 부여군 임천면에 한의원 댁(조남화 부친)에 년년이 자주가시어 그림을 그려주고 집안에 천정과 벽에 많이 사용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리하여 한의원 집 아드님인 조남화 화백도 정술원 화백의 화술기법을 배워서 현재 백여종의 그림을 남겨놓고 영면하였다.
조남화(모산) 화백은 국전 등에 입선하였으며, 그림과 한문해설 등에 대하여 대전과 공주, 부여 등지역에서 명성(1950~2000)이 이 매우 높았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작품 몇점 중 魚躍干淵을 소개한다.
조남화의 작품(1994년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魚躍干淵어약간연/고기들이 연못 속에서 방패를 가려 띌때
和平之家화평지가/집안에는 평화를 이루고
萬事亨通만사형통/모든일이 잘이루어진다
甲戌初冬갑술초동/ 갑술년(1994년) 초 겨울
寶文山下 牟山 作/보문산하 모산작
조남화(趙南華): 백제의 고도 부여 출생(1925~2003), 호는 牟山모산, 전주사범학교 졸업, 6.25 참전 육군장교(대위), 충남고등학교등 초중고교사, 영면 후 전라북도 임실호국원에 안치, 작품으로 수종의 그림이 있으며 국전등에서 여러번 입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