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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 시대가 종료되고 지구열탕화 시대가 도래했다”는 UN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의 말처럼, 지속적인 기온 상승으로 인한 생태 위기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이에 생태선교신학자 조명미 박사를 찾았다. 조 박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화해를 지향하는 생태선교신학 연구: ‘생태적 화해’(Eco-reconciliation)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2023년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는 2023년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됐다. 현재는 구파발교회 교육목사로 다음 세대와 함께 생태적 화해를 실천하고 있다. 다음은 4월 19일 100주년기념교회에서 진행된 조 박사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생태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두 가지 이유에서 관심을 갖게 됐다. 첫째는 박사 과정에서 한 학기 동안 생태 신학을 접하면서 ‘생태적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둘째는 코로나 팬데믹 당시 산처럼 쌓인 일회용 배달 용기, 스티로폼 등을 보면서 위기 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여리고성과 같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주제라는 생각에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생태 신학을 연구하려고 할 때 용기가 필요했다. 급한 기질과 성격으로 빠른 결과와 성과를 중시하는 사람인 내게 신학계 주변부에 위치할 뿐 아니라 결과물을 내기가 쉽지 않은 생태 신학은 매력적이지 않았다. 더구나 생태 신학을 연구한다면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시간이 있었다.
‘생태적 수치심’은 무엇인가?
‘생태적 수치심’은 예수회 신부이며 영성신학자인 토마스 클락이 제시한 개념으로, 지구를 약탈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의미한다. 인간이 창조 세계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연을 대상화, 수단화, 주변화시킴으로 자연과의 사귐과 공존의 공동체성을 상실시킨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이러한 ‘생태적 수치심’은 병적인 형태가 아니라 건전한 형태의 수치심으로 일종의 은총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생명을 존중하고 정의와 평화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변혁을 가져오게 하는 회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생태 신학의 연구 동향에 대해 소개하자면?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사물 신학’ 혹은 ‘물의 신학’(Theology of Things)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생태 사물 신학》(공저 전현식·김은혜 등)에 의하면, 사물 신학은 ‘생명’으로 존재들을 조망하던 사유의 습관을 근본적으로 재고하려는 시도로, 유기체가 아닌 존재들, 즉 어떤 ‘물’(物, Things)을 고려한다. 이런 존재가 생태계뿐만 아니라 기후 체계(살아 있는 유기체는 아니지만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고 반응하는 시스템)와 같은 ‘물’과 얽혀 있음을 염두에 둔다. 예를 들면 바이러스와 같이, 생명체도 유기체도 아니지만 생명과 관련이 깊은 물질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인간이나 유기체가 아닌 바이러스가 어떤 행위의 주체임을 인식하면서, 인간을 이러한 바이러스와 같은 물질과 얽혀 살고 있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박사 학위 논문의 연구 목적에 대해 소개하자면?
1960년대부터 생태 관련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생태 위기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개선되지 않았고, 교회에서도 생태 위기에 대해서 언급하거나 생태 위기를 극복하려는 방안을 실천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논문에서 이 원인을 규명하고자 했다.
연구 결과 그 원인은 기존 생태선교 신학 연구들이 자연을 대상화한 인간 중심적인 접근이었고, 인간의 생활방식 일부를 단순히 자연친화적으로 변경하려는 대중적인 접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인식과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생태선교 신학, 자연과 인간 사이의 균열된 관계를 회복하고 나아가 모든 창조 세계의 회복을 위한 준거 틀로서 ‘생태적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생태적 화해의 관점에서 생태선교 신학을 재구성하려고 했다.
부차적으로는 생태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선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창조 세계의 회복이 교회의 책임이라는 것, 이를 위해 교회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었다.
논문에서 기후 위기, 환경 위기, 생태 위기라는 용어를 구분해 사용하는데, 어떻게 다른가? 지금 현재 지구의 생태 위기는 어느 정도인가?
‘기후 위기’는 말 그대로 기후 자체의 급격한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기후 자체의 변화의 폭과 양상이 어떤 일정한 패턴에서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표현한다. ‘환경 위기’는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파괴를 의미한다. 환경이라는 용어 자체가 고리, 두름을 뜻하는 ‘환’(環)과 지경, 경계를 가리키는 ‘경’(境)이 결합된 단어로 ‘둘러쌈’을 의미하기 때문에 뭔가 중심이 전제돼 있는 개념이다. 그 중심에 인간이 전제돼 있다. 이처럼 ‘기후 위기’와 ‘환경 위기’는 용어 자체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분리돼 있어, 인간이 포함되지 않은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반면 ‘생태 위기’는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 파괴 현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모든 생명 시스템의 위기다. 나아가 모든 창조 세계의 위기,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위기 등 보다 본질적인 위기를 의미한다.
현재 지구는 인간의 자연 파괴, 자연의 역습, 인간의 파괴 가속화 등으로 가해와 피해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인간과 자연의 파괴, 멸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 자연과의 교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논문에서 생태 위기의 가장 강력한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로 인한 지배 문화, 소비 문화, 경쟁 문화를 꼽았다. 이에 대해 설명하자면?
우리 삶 가운데 깊숙이 내재하는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율성에 대한 절대 신뢰가 있다. 시장에 대한 국가권력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 결과 경쟁 만능주의, 승자 독식의 원리가 철저하게 지배되는 개념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을 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됐지만, 양극화, 계급화, 사사화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경쟁한다. 산후조리원 경쟁, 입시 경쟁, 입사 경쟁, 승진 경쟁, 청약 경쟁, 납골당 경쟁을 통해 더 좋은 위치, 더 나은 자리를 선점하려 한다. 이는 타인을 나의 이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 이겨서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보게 한다. 소비도 타인과의 차별화, 우월을 과시하기 위한 탐욕적 집착을 조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창조 세계, 특별히 자연은 “주인이 없는 재화”로 여겨져 지배의 대상, 소비의 대상, 경쟁의 대상, 착취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문화는 교회 안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개교회 이기주의도 그 예다. 우리 교회 번영을 우선하며 연대하지 않을뿐더러 작은 교회가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논문에서 제시한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 ‘생태적 화해’란 무엇인가?
‘생태적 화해’는 자연이나 인간,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번영이 아닌 상호 간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모든 지구 생명체가 상호 간에 호의적 관계를 지속하며 사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 세계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인식하여 자연과 인간의 불통, 갈등, 소외의 관계를 공생과 조화의 관계로 갱신하고 자연과 인간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선교로써 모든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으로도 정의될 수 있다.
‘생태적 화해’가 중요한 이유는 현재 자연과 인간, 창조 세계의 관계가 단절되고 파괴된 갈등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인간이 창조 세계의 군림적 존재가 아니라, 창조 세계의 일부라는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 모든 창조 세계가 인간의 이웃, 동료임을 인식해야 한다.
‘생태적 화해’를 위해 어떤 실천이 필요한가?
첫째, ‘생태적 화해’를 실천하기 위해서 인간과 자연이 서로 대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인간이 점유했던 공간을 다시 자연에게 의도적으로 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주차장을 텃밭으로 만든다거나 옥상 정원을 만들어 자연을 만나는 공간을 조성해야 한다.
둘째, 모든 그리스도인이 ‘생태적 화해’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각성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은 물론, 만물을 화해시키는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를 기억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만물의 화해를 위한 변혁적 삶, 문화를 만들어 내도록 육성해야 한다.
셋째, 연대가 필요하다. ‘생태적 화해’를 혼자 이루기는 어렵다. 개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녹색교회 운동과 같은 네트워크를 형성해 함께 실천할 때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섬기고 있는 구파발교회에서 ‘생태적 화해’를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개교회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면?
‘생태 감수성’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구파발교회에서 미취학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창조 세계에 우리가 잘못한 부분이 있어요. 우리 하늘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볼까요?”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늘아 미안해”라고 말했다. 진심으로 자연에게 말을 걸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생태 감수성’을 키워 줄 필요가 있다. 자연, 모든 식물과 동물이 우리의 이웃이며 함께해야 할 동료라는 의식을 심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구파발교회에서는 지난 3월, ‘토요생태학교’를 진행했다. 아이들과 교회 옥상에 상추, 딸기, 방울토마토를 심었다.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생명이 주는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다. 또한 ‘토요생태학교’에서는 밭에 필요한 흙과 모종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을 재활용했고, 모두 개인 물통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는 분명 번거로운 일이지만, 이를 통해 ‘생태적 화해’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문화가 정착한다.
이처럼 ‘생태 감수성’을 위해 교회 공간을 자연과 대면하고 화해하는 공간으로 조성했으면 좋겠다. 경제성이나 효율성을 따져 공간을 사용하는 대신, ‘생태 감수성’을 위해 텃밭을 만들고, 식물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
생태선교신학자로서 한국 교회를 위한 조언의 말씀 부탁한다.
창조 세계와 관련한 ‘생태 감수성’ 교육과 ‘생태적 화해’는 교회만이 할 수 있다. 환경부 및 지자체에서 여러 가지 교육 영상을 제작하지만 실제로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 줄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또한 교회 구성원의 대상을 확장해야 한다. 식물도, 특별히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교회 마당의 나무들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구성원을 인간으로 제한하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교회 부흥 이면에 감춰진 탐욕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교회가 어쩌면 더 지배하고, 더 경쟁하고, 더 소비하는 주체가 아닌지 돌아보고, 경쟁 구도에서 탈출해야 한다. 독주, 독식이 아니라 연합하기 위해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소박해져야 한다. 그렇게 자연을 돌아볼 여력을 가지고 함께 연대하고 공생하면 좋겠다.
첫댓글 우리 그리스도인이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