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번 걸어보고 싶었던 아쿠아플래닛 뒷편 해안도로에는 올레길 10코스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제주도 동남쪽 바닷가들의 특성이긴 하지만 여기도 빌레라는 현무암 바위들이 거대하게 깔려있습니다. 여기 해안가 산책로는 성산일출봉을 옆에 두고 호사스런 눈도장을 계속 찍으며 걸어갈 수 있어 마음이 벅찹니다.
대학시절, 제주도 꼭 와보고싶어 알바비용 모아서 왔던 뱃길을 이용한 홀로 여행. 택시를 탔을리는 없는데 주로 버스타고 다녔었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협재 쪽에서 하숙비슷하게 하면서 며칠있다가 어찌어찌 들렸던 성산일출봉! 그 때만 해도 성산일출봉 분화구까지 내려갈 수 있었고 분화구를 수북히 덮었던 억새인지 그야말로 초록물결들이 휘몰아치는 그 곳을 한없이 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벌써 4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성산일출봉은 제 청춘의 표상이자 환상이자 늘 옆에 두고싶은 액자 속의 풍경입니다. 그런 성산일출봉을 아주 가까이 두고 살고있으니 그냥 바라만 보아도 늘 감격입니다. 그 뒤로 성산일출봉은 숱하게 올랐지만 홀로 초록물결에 잠겨서 분화구를 둥글게 돌던 그 때의 초연함은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이있습니다. 많이 외롭고 힘들었던 대학시절의 보상이란 이런거구나! 했던 스스로 위로여행...
오늘 지치도록 성산일출봉을 내내 바라보며 걷는 길은 초장에는 약간 난항이었습니다. 늘 차로만 돌던 섭지코지 주변을 걷자하니 준이의 반발이 만만치 않습니다. 반발하는 걸 억지로 내리게 했더니 손을 바지 속으로 더 집어넣고... 준이의 부정감정이 강해지는 날에는 그냥 놔두어야 하는데 손빼라고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항정도가 장난아닙니다. 익히 알고있고 익숙한 반항행동이지만 가끔 적응이 안될 때가 있습니다.
준이와 저의 날카로운 대립을 딱 눈치챈 태균이역시 중재기술이 최고! 준이를 잘 달래가며 손잡게하고 데리고 옵니다. 태균이는 역시 평화주의자입니다. 태균이 덕에 둘다 마음이 풀어지니 준이녀석 내 눈과 마주칠 때마다 바지 속으로 일부러 손을 더 넣으며 저를 굴복시키려 합니다. 녀석, 제대로 문제만 없었다면 한 끗발했을 녀석입니다.
성산일출봉이 잡힌 사진들은 오늘의 행군을 보람차게 합니다. 그 맞은편 해안산책로에 이토록 빌레들이 넓게 절경으로 있었을 줄이야... 역시 걸어야 잡을 수 있는 풍경들이 너무 많습니다.
섭지코지로 바로 갈 수 있는 작은 둔덕에는 제주도 동쪽에 그토록 세다고 하는 하늬바람 때문인지 나무들이 모두 바다 반대방향으로 누워있습니다. 누워있는 정도가 거의 땅에 닿을 지경입니다. 이것 역시 자연 속의 자연스런 모습들입니다. 특히 식물들은 환경적응의 달인들이라 살아남기 위한 지혜는 인간보다 뛰어납니다.
일전에 왔다가 봐두었던 섭지코지 뒷편 해안도로 끝의 작은 바닷물 놀이터. 섭지코지에서 걷기를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랜드스윙 쪽으로 빠지니 드물게 드물게 사람들이 언덕 위에서 사진찍기 바쁩니다. 우리가 놀고 있는 바딧가까지 진입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간혹 우리가 놀고있는 현장은 노출되기는 하지만 가까이 오는 사람이 없으니 신나는 물놀이는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렸네요.
상강이라고 서리가 내리는 절기가 오늘이라는데 제주도는 지난 며칠보다도 더 덥고 따뜻해서 물놀이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태균이까지 한참 물놀이에 심취했네요.
매일 놀고 먹는 일이 일상이 되어가니 이만한 팔자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까지 넉넉해집니다. 완이와 저는 가볍게 건너오는 바위투성이 해변가를 준이가 헤매고 있는 것을 보니 웃음도 나고 결국 제가 달려가서 손잡고 끄집어 내주었습니다. 어디를 디뎌야 할 지 일일이 발자국을 찍어주어야 했던 준이의 눈문제...
만보씩 걷게 되면서 큰 변화는 준이의 식성에 변화가 생겼다는 기쁜 일. 귤과 사과를 먹겠다고 하고 그리고 오징어의 맛을 알고나서 너무 좋아합니다. 어제는 해물짬뽕을 해주었는데 오징어를 다 건져먹기까지... 해물이라면 질색팔색이었는데 이제 곧 해물을 즐길 날이 오지싶습니다. 만보행군이 준 큰 선물인 듯 합니다. 만보행군 중에 오징어 꽤 씹어댔더니 보람이 있네요!
첫댓글 절경에 눈호강이 넘쳐 감사를 전합니다.
준이씨 문제가 그토록 많은지 점점 알게 되니, 왜 그토록 활동을 싫어했는지 이해됩니다.
현무암도 가볍게 걸을 정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식성도 확장되니 발전을 기대해 봅니다.
역시 태균형님, 최고입니다. 준이의 신뢰를 백퍼 확보한 태균씨 대단합니다.
베낭 메고 운동화 신고 걷는 완이 모습만 봐도 흐뭇합니다.
시월 하순의 물놀이를 위해 날씨가 특별히 배려한듯한 느낌이 듭니다.
오늘 용인 가시네요. 퇴균씨 병원 나들이 무사히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