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을 타거나 거슬러가도/靑石 전 성훈
장마의 계절, 통상 6월 하순에 시작하여 7월 한 달 가까이 비와 함께 생활하는 시기이다. 초목의 새싹을 움트게 하는 봄비는 누구나 반가워하며 기다린다. 한가롭게 풀을 뜯는 누런 황소 등허리를 가로지르며 지난날의 추억을 일깨워주고 마음을 풍요롭게 적셔주며 지나가는 비도, 조금은 애절한 듯한 가을의 모습을 재촉하는 늦여름의 소나기도 무더위를 식혀주는 한 바탕 축제를 연출하기에 고맙기 그지없다. 하지만 구질구질하고 빚쟁이처럼 끈질기게 찾아오는 장맛비는 소낙비나 봄비처럼 보고 싶은 반가운 손님은 아니다. 장마철이 되어 매일 비가 내리면 집을 나설 때는 귀찮아도 우산을 챙겨야 한다. 지금 당장 내리지 않더라고 언제 갑자기 쏟아질지 그 누구도 모른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우산을 챙기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실물을 보지 못하여 잘 알지 못하겠지만, 바람이 불면 금방 휙하고 뒤집어져서 망가지고 쓸 수 없었던 지우산이나 비닐우산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연일 내리는 빗줄기에 땅도 눅눅하고 집안 공기도 습도가 높아서 찐득찐득해지면 덩달아 마음도 상쾌하거나 개운하지 않고 조금은 쳐지고 무거워지는 듯 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라앉은 기분을 바꾸려고 집을 나서 중랑천을 걷는다.
밤새 쏟아진 장대비 탓에 맑고 깨끗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중랑천은 온통 흙탕물 투성이다. 창동교 다리 아래에서 큰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흘러가는 흙탕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흙탕물 속에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그러다가 뭔가 움직이는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바라보니 오리 한 마리가 물의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밑으로 내려간다. 왜 저 오리는 혼자서 움직이는 걸까? 가족을 위해서 먹을 것을 준비하려는 아빠 오리인가 아니면 엄마 오리일까, 그도 아니면 혼자서 물장난을 치려고 나온 장난꾸러기 오리새끼일까?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자연의 힘에 체념하고 떠내려가고 있는 것일까? 중랑천 흙탕물 속에는 오리만 있는 게 아니다.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왜가리 한 마리도 가장자리 물가에서 뭔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 표정이다. 물에 들어갈 수 없는 까치들은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며 장난을 치다가 가느다란 나뭇가지 앉아서 느긋한 표정으로 오리와 왜가리를 바라본다.
물에 떠내려가는 오리를 보면서 세상과 더불어 사는 자세를 생각해 본다.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고 거슬러 올라가려면 커다란 용기와 끝없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흐름에 역행하지 말고 자연의 이치처럼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게 순리이자 삶의 지혜라고도 한다. 과연 시류에 따라 순응하는 게 바람직하고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나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사람은 관점이 다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목적이 다르고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과 목표도 다양하다. 누구에게는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며 옳다고 여기는 방식이 다른 이에게는 아주 이상하고 기이하게 보이기도 한다. 한 개인의 삶의 자세를 옳고 그르다고 쉽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세상살이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질곡어린 삶같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키고 섞여 있기 때문이다. 반목과 편견에 사로잡혀서 혼자만 혹은 우리 편만 옳다고 주장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면 할수록 세상은 날이 갈수록 삭막해지고 각박해질 뿐이다. 너와 나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세상이 너와 내가, 우리가 함께 손잡고 살아갈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끝없이 내릴 것 같은 비도 언젠가는 개이기 마련이다. 모진 비바람의 천둥과 번개 속에서도 해는 뜨고 지고 달도 뜨고 진다. 장마 속에서도 간간히 비추는 햇볕과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하늘을 쳐다보고 휴우 하고 내뱉으며 땅을 바라보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금 이 순간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먼 길을 떠날 나그네의 순박하고 경건한 마음을 기억하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오늘 하루를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자. ‘카르페 디엠’, (2022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