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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사라진 정의 3:16~17
16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17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과 짐승 3:18~22
18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19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곳으로 가거니와
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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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재판하거나 정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습니다. 모든 소망하는 일과 행사에 때가 있으니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모두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이 자기 일을 즐거워함이 좋음은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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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6,17절 의인과 악인을 모두 심판하십니다. 공의가 드러나야 할 재판장에 불의와 부패가 있습니다. 정의가 실행되는 곳에서도 불의한 악이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의인과 악인을 모두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9:1).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선악 간에 심판하시고 정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진실이 이기고 악이 무너지는 그 날이 더디게만 보여도, 분명 오고 있습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8,19절 죽음 앞에서 인간과 짐승은 다르지 않습니다. 지혜자와 우매자의 죽음이 일반인 것처럼(2:16), 사람과 짐승의 운명이 똑같이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인간과 짐승에게 ‘동일한 호흡’이 있고, 호흡이 멈추고 죽는 것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의 결국이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는 사실 뿐입니다. 결국, 삶의 한계를 모르거나 무시하면 짐승과 똑같아지고 맙니다. 끝없이 성장과 욕망을 추구하는 세상의 흐름에 제동을 걸고 인간의 유한함을 늘 묵상합시다.
20,21절 죽음 이후의 일은 인간의 지식 너머에 있습니다. 인간과 짐승이 다 같은 곳에서 왔고, 다 한 곳을 향해 갑니다. 동일한 호흡을 가졌을 뿐 아니라, 동일한 요소(흙)로 지음받았습니다.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간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전도자는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죽음 후에 영혼이 ‘어디로 가느냐’ 묻기보다, 살아 있는 지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있는지 자문해야 하지 않을까요?
22절 자신의 일을 즐거워하며 사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죽음 뒤에 일어날 일을 데리고 다니며 보여 줄 자가 없으니, 오늘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고 자기 일을 즐거워하며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삶과 즐거움의 몫을 미루고 있는 건 아닌가요? 지금보다 중요한 시간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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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3:16~17)
이 세상에서 완벽한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곳은 없습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정의와 공의가
바로 실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재판하는 곳에도, 정의를 행하는 곳에도 불의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재판은 사회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재판하는 곳에서조차 뇌물이나 권력에 따라 굽은
판결이 나온다면 사회의 부패상은 말로 할 수 없는 지경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정의가
시행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심판의 때에 모든 의인과 악인의 행위를 공의로 판결하십니다.
의인에게는 상으로 보상하시고 악인에게는 징벌로 보응하십니다.
세상의 판결은 공의롭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합니다.
- 묵상 질문: 전도자는 정의를 외치는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했나요?
- 적용 질문: 세상의 불의를 볼 때 어떻게 반응하나요?
공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판결을 기다리나요?
사람과 짐승의 유사점(3:18~22)
이 세상에서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동일하게 무력한 존재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그 몸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사람과 짐승이 궁극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사람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지만 짐승은 땅으로 내려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사람에게는 죽음이
삶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인생에게 정해진 운명이지만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 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안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루하루의 삶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 묵상 질문: 사람과 짐승의 끝이 어떻게 다른가요?
- 적용 질문: 이 땅에서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을 어떻게 준비하나요?
오늘의 기도
제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바로잡으려는 그릇된 정의감과 공명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의로운 재판장 되신 하나님께 모든 판단과 심판을 맡기며,
날마다 말씀으로 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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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하는 곳과 정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습니다. 정하신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 사람과 짐승이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 당하는 일도 같고, 죽는 것도 같습니다. 목숨이 하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갑니다.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하기에 주어진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인생은 한없이 덧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알게 하시려고 짐승과 사람을 비교하게 하셨습니다. 짐승이 태어나서 죽는 것처럼 사람도 누구나 죽습니다. 결국 흙으로 돌아가 사라진다면 그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헛된 인생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무엇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 또한 덧없을 뿐입니다. 전도자는 그저 현실을 즐기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만족하며 그것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내세가 어떠한지를 아는 사람에게도 지금 주어진 일을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소유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살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성공과 실패를 소유와 결과에만 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패배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성취한 소수는 한순간 만족하지만 그 성취를 지켜야 하기에 늘 불안함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실패한 다수는 열등감과 시기심 속에 불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기쁨을 얻으려고 일하기보다 일하는 과정을 기뻐하는 법을 배운다면 더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람은 일할 수 있는 기회와 과정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받은 돈이 10달란트인지, 1달란트인지로 성공의 가능성을 따지지 말고, 열매 맺어가는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의 즐거움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의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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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22 같은 죽음 같지만 죽음 이후는 다릅니다.
말씀요약: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다.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신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둘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 가지만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간다.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는 것은 없다.
묵상:
지혜자인 전도자가 해 아래에서 잘못된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1.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다고 하신다.(16)
2.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다고 하신다.(16)
이 세상에서 재판은 가장 공정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다.
해 아래에서의 재판은 뇌물이나 권력이나 정권에 따라서도 굽어 질 수 있다.
공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곳, 정의가 실현 되어야 하는 곳에서도 악을 행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정의를 행하는 곳에서도 악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결론적으로 해 아래에서는 온전한 정의가 실현 될수가 없고 공정한 재판이 있을 수 없다.
지혜자인 전도자의 고백은 공평무사하게 정의가 이루어져야 할 세상에
불의가 판치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하고(16)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시고(17)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17) .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하다.
이 세상에서는 불의가 판을 치는 것 같고 악이 득세를 하는 것 같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지만 하나도 부러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공정한 재판 매우 정의로운 판결이 언제 일어나는가? 누가 하시는가?
이것은 성경 말씀이 알려 주시는 정답이다.
하나님이 때를 정하시면 불의한 인생이 끝이다.
끝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뇌물이나 권력이나 정권에 의해서 굽어 질 수 없는 반듯한 판결이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사람과 짐승이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19)
사람이 짐승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것도 허무하다고 말씀하신다.(19)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 것 처럼 짐승도 죽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19)
사람과 짐승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
같은 점은 둘다 죽는 것이라고 앞에서 보았다.
또 같은 점은 둘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흙으로 돌아간다.(20)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인생의 혼은 위로 가지만 짐승의 혼은 아래로 간다.(21)
인간은 죽으면 돌고돌아 짐승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으신다.
동물이 죽어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 난다고도 성경은 말씀하지 않는다.
중요한 문제는 사람에게 죽음이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자살하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인생에게 정해진 운명이지만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히9:27)
그러므로 죽은 이후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그럼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22)
이것이 내 인생 삶의 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와 지혜와 명예와 수 많은 처첩을 거느려 보았던 솔로몬의 생각에도
자기 일을 즐거워 하는 것 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하신다.
내가 하는 일에 즐거움과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족하면서 살자.
적용: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 내가 명심해야 할 진리는
1.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2. 내가 하는 일에 즐거워하며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심판의 자리에도 악이 있고 의의 자리에도 범죄가 있는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불의와 굽어진 판결에 대하여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께 모든 최후의 판단을 맡깁니다.
세상의 판단과 판결은 공의롭지 못해도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하심을 믿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죽음 이후에도 분명한 심판이 있음을 깨닫고
내가 하는 일에 즐거워하며 자족하기를 원하나이다.
성령님 내 삶에 큰 기쁨들을 허락하여 주시 옵소서.
매 순간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모든 일을 즐겁게 감당하게 하옵소서.
최후의 심판자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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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3:16~22절)
❝인생을 행복으로 만들어 가는 삶❞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행복이 있음을 믿고, 그분 안에서 인생을 즐겁게 보내야 합니다.
✔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불의한 세상에 낙심하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16~17절).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악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16절).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의인도 악인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악이 만연합니다. 심지어는 가장 정의로워야 할 재판정조차 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눈 앞에서 보여 지고 있는 작금의 이 나라의 형태를 보면 마음이 착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이 땅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정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며, 그때 의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비록 불의한 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힘을 바탕으로 하여 정죄 받지 않고 기세등등하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 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악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올바른 나라가 세워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아가야 합니다. 내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살아가지 말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땅의 소망은 교회이며,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불의한 세상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함으로 세상 앞에 부끄럽지 않은 행복한 인생으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 하루를 살아도 믿음으로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18~21절).
하나님은 인생이 한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사람이 짐승과 마찬가지라며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짐승이 태어나서 죽는 것처럼 사람도 누구나 죽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둘 다 숨을 쉬지 않고는 못사는 것처럼 사람이라고 해서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으니, 이 역시 헛되다(19절)는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사람이 죽은 이후에는 짐승과 다르기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없기에 그 기대는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20~21절)입니다. 결국 죽음 이후 인간과 짐승의 운명이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전도자의 고백입니다.
인간도 짐승도 일반으로 죽어 사라지기에 모두가 헛될 뿐입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기에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덧없는 인생,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믿음으로 산다면 그렇게 믿음으로 행한 것들이 하나님 나라에 흔적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언제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이웃을 위해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통해 행복한 인생으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 영원한 안식을 확신하며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22절).
전도자는 제 손으로 수고해 얻은 것을 즐기는 것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람마다 누릴 몫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다음에 어찌 될지를 알려 줄 자가 없습니다. 인간이 죽음 이후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은 곧, 현재 주어진 삶에서 즐거워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을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응이며,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가장 지혜로운 길이라고 전도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 이후에 영원한 안식의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믿음을 연단하고 주의 나라를 소망하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삶이지만 그럼에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 안에서 매 순간 즐거워하며 알차게 보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안식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고난이 있더라도 인내하며 살아가므로 행복한 인생으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세상이 아무리 불의하고 허망하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자답게 하루를 살아도 믿음 안에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전 3:16~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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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이 형통한 세상
인류의 역사 속에서,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보다 더 형통하고 잘 되는 일은 계속해서 있어 왔습니다. 악인이 형통한 세상을 볼 때, 권선징악이라는 말이 무가치하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과거 일제의 치하에서 나라와 민족을 팔았던 친일파는 부유하게 사는데,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의 집은 너무나도 가난하게 사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볼 때, 악인이 형통한 세상은 너무나도 실망스럽습니다.
솔로몬이 바라본 세상
지혜의 왕인 솔로몬이 바라본 세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솔로몬 역시 공의와 악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세상사를 모두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솔로몬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1. 의인이나 악인이나 심판을 받는 일이 일반이다.
먼저, 솔로몬은 재판정에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해야 하는 곳에도 악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16절을 통하여, 정의가 있어야 할 재판의 자리에 뇌물과 비리가 가득하여,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이 생겨나는 모습을 솔로몬은 보았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그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고 풀려나는 불의함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정의가 넘쳐야만 하는 재판하는 곳에 오히려 악이 넘쳐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이처럼 악과 불의만이 가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비록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어도,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전도서 3:17,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결국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니, 모든 공의와 불의는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때가 있으니, 지금 세상에 악이 가득하더라도 성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인내하라고 권면합니다. 세상에는 죄악이 관영해도 공의의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심을 믿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오늘을 살아갑시다.
2. 사람이나 짐승이나 당하는 일이 일반이다.
솔로몬이 깨달은 또 한가지의 사실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당하는 일, 즉 죽음이라는 것은 모두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19절을 통하여, 우리는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난 것처럼 생각하지만 결국 사람이나 짐승이나 동일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뿐이라고 솔로몬은 말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짐승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니 인간이 아무리 자만해도 짐승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21절을 통하여 인간과 짐승이 동일하게 죽음을 맞이해도 그 이후에 대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전도서 3: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흔히, 인간의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땅 아래로 가게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조차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고 솔로몬이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분명하게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특별한 은혜의 선물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불합리한 세상 속에서 해야 할 일
솔로몬은 공의와 악이 뒤섞여 있는 불합리해 보이는 현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 사람과 짐승은 결국 동일하게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불합리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전도서 3: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솔로몬은 22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몫이 있다고 말합니다. 수고하고 땀 흘려 정직하게 소득을 얻는데서 오는 즐거움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몫입니다. 부정과 부패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성실하게 감당하는 성도가 진정 행복한 성도입니다.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가 인생을 가장 잘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불합리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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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속한 짐승이 흙으로 돌아가고, 본래의 거룩을 회복하지 못한 하나님의 생기는 그들을 위해 준비된 곳으로 던져져야 합니다. 반면에 거룩을 회복한 하나님의 형상과 생기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실재하는 천국에 인도되어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이면 짐승대로, 그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된 인간은 그 인간대로, 영생을 알고 하나님의 형상과 생기를 완전히 회복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해 아래 사는 동안에 자기에게 주어진 자신의 몫과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자로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 말입니다(2:24).
죽음이 집행되고 나면 그 뒤에 세상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없습니다. 이미 모든 심의를 통해 심판이 선고되었고 이제 주께서 재림하셔서 이를 최종 선고하시고 집행하는 일이 남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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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3:1~22)
범사에는 기한과 때가 있다. 여호와께서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즐겁게 행하는 것이 바른 선택이다.
불공평해 보이는 현실(전3:16-22)
이세상은 가끔가다가 불공평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즉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잘 안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잘 해결되는 것을 보게된다. 전도자는 이러한 인생사에 대해 말하면서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로를 받을 방법은 없는가?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질 것인가?
1)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함
전도자는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져야할 법정에서 악이 성행한다고 묘사한다(전3:16). 이것은 죄악에 물든 인간들에 의해 생겨난 결과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세상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은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전3:17). 이땅에서 행해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게될때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 전도자는 악이 성행하는 현실속에서의 인간들은 짐승과 다를바 없다고 말한다(전3:18). 그러면서도 구별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전3:21). 결국 인간은 특별하게 창조되었으며 (창2:19),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이 결코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2) 자기 일에 즐거워 함
결국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인간은 스스로 이세상의 문제들을 제어할수 없을뿐 아니라 이세상의 어떤 것들로도 죽음을 당해야하는 운명을 바꿀수 없다. 따라서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야 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소유하여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일이 불공평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가운데 미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할 것이다.
무엇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가? 삶의 모든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음을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알수 없다. 그러나 인류의 전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계획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때 위로를 얻을수 있다. 그리고 철학적 관점으로 볼때 다른 피조물과도 특별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겸허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결국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때와 그 때를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가 핵심입니다. 해 아래 삶은 불의한 재판, 공평하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때가 인생들에게는 시험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죽음이 공평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이런 공평한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인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인생이 내 몫입니다. 내게 주신 달란트입니다. 이것을 믿고 하나님 심판의 때를 기다리되 오늘을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자, 다시 2:24절을 주목해 봅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아멘
3:12~13절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그럽니다.
그리고 오늘 3:22절에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의 가장 좋은 태도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주신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꾸 분에 넘치는 욕심을 품게 되면 나도 괴롭고 내 주변 사람도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축복하는 일이 아니라면 욕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불의가 활개 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도 쉽지 않은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서 자기 일을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서 심판할 날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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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3:16~22
전도서에서는 선악의 경계선이 선명하지 않다. 올바른 재판이 행해져야 하는 곳에도 악이 존재하고 의인과 악인, 지혜와 무지 사이에도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또한 죽음앞에서는 지혜자와 우매자가 별반 다르지 않고 인간과 동물도 차이가 없다. 전도자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떠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전도자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는 분명하다. 인간들이 주장하는 정의에도 악이 있어 그 차이가 불명확하지만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불공평한 이 세상이 헛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전도자는 현실에서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조언한다. 인간의 한계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무하하심을 반증한다면, 하나님을 기억하고 현재의 삶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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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바라보며 살라 (전도서 3장 16-21절)
<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 >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는 정의와 사랑이 잘 시현되지 않는 것이다. 솔로몬 때도 그랬다. 솔로몬은 노래했다.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16절).” 사회 유지의 밑거름인 재판관의 재판에 악이 있으면 그 사회는 바르게 될 수 없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전 다음으로 신성해야 하는 곳이 재판정이다. 문제는 인간 재판정에서 정의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최후로 기댈 곳은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심판자이기에 심판을 통해 의인에게는 상을 내리시고 악인에게는 벌을 내리신다(17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가 온전히 이뤄질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기를 힘쓰라.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빠지고 사람의 죄대로 시험하고 심판하면 사람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게 된다(18-20절). 왜 하나님은 가끔 고난과 기도제목을 주시는가? 겸손을 도전하시기 위해서다.
사람은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태평양을 혼자 수영해서 건널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태평양을 건너려면 큰 배나 비행기를 타야 하듯이 천국 길을 잘 가려면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한다.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은 두 배로 불충분한 것이고 스스로 자신감이 충만한 것도 두 배로 텅 빈 것이다. 항상 부족함을 자인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작게 사용하셔도 감사와 기쁨을 잃지 말라. 그때 은혜와 평안과 축복이 넘치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겸손한 태도’는 보이지만 ‘겸손한 사람’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겸손한 마음도 없이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자기 위치를 알고 자기 위치를 지키라. 조금 높아지고 잘 된다고 자기 위치를 망각하면 인생에 위기가 찾아온다. 자기 위치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는 겸손한 심령이 될 때 내적인 평안이 찾아오고 외적인 평화도 찾아온다. 겸손은 축복을 담는 최적의 그릇이다.
< 천국을 바라보며 살라 >
사람과 짐승이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그 혼이 위로 올라간다(21절). 그런 상황에서 천국 시민권자가 된 것은 희망의 원천이다. 자국에서 여행 허락을 내주는 것이 여권이고 상대국에서 입국을 받아주겠다고 허락하는 것이 비자다. 국력이 있으면 상대국에서 언제나 오라고 비자를 면제해 주지만 국력이 없으면 일자리를 구하러 오고 다른 손해를 끼치러 올 것 같다고 해서 받아주지 않고 입국 검사를 할 때도 까다롭게 대한다.
국력이 약한 나라에서 오면 박사도 천시하며 무슨 검사를 한다고 때로는 옷도 벗긴다. 국력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나라 여권으로 세계 대부분의 나라를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해외에 갈 때는 특히 여권을 조심하라. 한국 여권이 상당한 값에 매매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국 시민권도 상당한 힘과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여권이 미국 시민권자의 여권이다. 그러나 천국 시민권은 지구상의 어떤 시민권보다 좋은 것이다. 왜 예수 믿는 것이 좋은가? 천국 시민권이 생기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존재다. 그의 고향은 천국이고 그가 돌아갈 곳도 천국이다. 천국 시민권이 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스리고 보호하고 지켜주시는 백성이 된다.
미국에 가는 한국 이민자들은 처음 1년은 한국 뉴스를 별로 안 본다. 그러다가 점점 보면서 때로는 한국 거주자보다 한국 소식을 더 잘 안다. 향수 때문이다. 천국 시민권자도 영적인 향수로 말씀을 그리워하며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큰 기쁨을 얻는다. 예배에 힘써 참여하고 늘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 때 하루하루가 행복한 날이 되고 인생 문제의 해답을 얻으면서 결국 삶이 형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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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와 정의 (16-17절)
이 세상은 공의를 원하지만 공의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그곳에도 여전히 불의가 넘치고 정의로울 것이라고 생각한 곳에는 악이 넘치는 모순됨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평가하는 의인도 역시 죄성에서 자유할 수 없는 연약함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공의와 정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인간들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고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허망한 결과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행하든지 어느자리에서나 공의와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우리가 행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판단받게 되기때문입니다.
묵상하기
내가 서 있는 곳을 공의롭고 정의롭게 하고자 힘쓰는가?
2. 죽음이 끝이 아닌 인생 (18-22절)
죽음이라는 문제만 본다면 사람과 짐승은 한가지 입니다. 그러나 짐승과 우리가 다른 것은 짐승은 죽음 그 자체가 끝이지만 인간에게는 죽음 이후에 새로운 곳이 존재함을 알기에 이것이 차이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의 죽음 이후의 삶을 분명하게 설명하거나 보여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시간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후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 가장 가치롭게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삶은 내게 주어진 시간과 일이 있는 시간동안 그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백성은 죽음 이후에 펼쳐질 참된 소망을 알기에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참된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부활의 참된 소망안에 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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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별하십시요
전도서3:16-4:3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4:1-3절)
세상에서 일어나는 선한 일을 보면 세상이 아름다운 것 같지만 그것은 잠시요, 우리들의 눈 앞에 수없이 많은 악이 난무한 것을 봅니다. 그래서 차라리 나지 않은 것이 가장 복되다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돈이 돈을 벌고, 가난이 상속이 되는 것은 우리를 비참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강해지기 위해 악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3:16)
가장 정직해야 하는 재판정이 악이 우세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서 사람들은 당혹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체념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니 그 악에 동참하며 살고 있습니다. 차마 악하지 못해서 돈을 못버는 것이 아니라, 그런 기회가 없어서 악하지 않을 뿐입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17절)
세상의 악을 보면 그것이 전부인 것 같으나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세상속에서도 바르게 살면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도 하나님이 다스리시기 때문에 선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압니다. 세상의 악에 대해 심판이 있다는 것을. 이 심판은 현세와 내세 모두를 포함합니다. 사람들은 악이 흥할 때만을 봅니다. 악도 무너지고 또 다른 악이 서는 것인데 서 있는 악만을 봅니다.
무너진 악을 보지 못하고 흥하고 있는 악만을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 악이 그 시대가 끝날 때 당하는 추락를 볼수 있어야 합니다. 악에 대한 현세에서의 하나님의 심판과 내세에서의 심판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그 심판을 보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심중에 이르기를'입니다. 세상이 돌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것을 분별해야하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못하고 생각함이 없이 그 속에 있으면 넘어집니다. 나도 모르게 넘어집니다. 우리는 항상 분별하며 살아야합니다. 이 세상은 악이 난무하며 그것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18절)
악이 그토록 판을 치는 것은 그들을 부러워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깨달으라고 있는 것입니다. 악을 보고 그들의 길의 패망을 예견하며 불쌍해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 악이 오히려 자신의 선망의 길이 됩니다. 악의 화려함을 보고 선망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악의 흥함은 오히려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를 깨닫게 하는 도구임을 알아야합니다. 악이 때로 성공하는 이유는 그것이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이 너무 쉬우면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지요. 시험은 깨어있을 때 준비한 자가 잘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답을 정답처럼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처럼, 악이 성공하는 것으로 함정을 만든 것이지요. 그러나 오답은 오답일 뿐입니다. 그럴듯하게 보일 뿐 실제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을 짐승의 영혼과도 구별하지 못하는 그들이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