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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八正道, Eightfold Right Path; Aṭṭhaṅgiko Sammā Magga)
붓다(Buddha; 석가모니 부처님)가 설(설명)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가는 여덟(八)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 팔정도(八正道, Eightfold Right Path; Aṭṭhaṅgiko Sammā Magga)'의 여덟 부분과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Bhāvan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길, 도로’를 뜻하는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막가(Magga)’는 단수형이다. 이것은 여덟 부분이 전체로서 하나의 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 따라, 팔정도의 영어 번역인 'Eightfold Right Path'에서도 길(Path)을 복수가 아닌 단수로 표현한다. 붓다가 누누이 강조하여 가르쳤듯이,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은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방식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즉, 팔정도의 여덟 부분이 조건에 따라 서로 상호 의존한 방식의 수행으로 전체적인 길(정각으로 가는 길)의 계발이 진행된다.
달리 표현하면, 팔정도는 정각으로 가는 팔차선 도로이다. 정견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하여 완성한 후에 정사유를 계발하고, 정사유를 완성한 후에 정어를 계발하는 식의 직렬 방식의 일차선 도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직렬 방식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조건에 따라 서로 상호 의존해서 팔정도의 여덟 부분이 함께 발전향상하는 병렬 방식의 수행이다.
1. 정견(正見; Sammā Diṭṭhi), Rightly View(바르게 봄)
정견(正見)은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딧티(Diṭṭhi)'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정(正)으로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삼마(Sammā)는 붓다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바르게, 여실히(사실과 꼭 같이,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我, ego)가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상(我相; '나我ego'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에고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완전히(또는 온전히) 바르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rightly(바르게), thoroughly(완전히, 철저히), properly(똑바로, 제대로, 올바로, 정확히); in the right way(올바른 방식으로), as it ought to be, best, perfectly(완전히, 온전히, 완벽하게)' 등으로 번역한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견(見)으로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딧티(Diṭṭhi)는 붓다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봄, 관찰, 통찰(깊은 관찰), 조사; 앎, 이해, 견해 또는 신념, 믿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view(보다, 봄), observe(관찰), insight(통찰), investigate(조사), speculative opinion, speculation(고찰, 견해), dogma(신조), theory, belief(신념)' 등으로 번역한다.
요컨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삼마(Sammā; 正) 딧티(Diṭṭhi; 見), 정견(正見)'은 '바르게, 여실히(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我, ego)가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상(我相; '나我ego'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에고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완전히(또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바르게' '봄, 관찰함, 통찰(깊이/꿰뚫어 관찰)함, 조사함, 앎, 이해함, 견해/신념을 가짐'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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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 즉, 정각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팔정도;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계발하는 수행은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방식의 수행이기 때문에 여덟 부분의 순서는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어쨌든,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처음 시작은 '지식 차원의 정견(正見)을 계발하는 수행'이다.
요컨대,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의 첫 단계인 '지식 차원의 정견(正見)을 계발하는 수행'은,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상태;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 즉 '우리가 괴로움의 굴레에 어떻게 빠져드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근원적으로 완전히 벗어나서(해탈해서)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리(진실한 이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실천, 즉 '정각(해탈, 열반)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을 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에 대한 붓다의 바른 가르침(바른 설법; 正法)을
정견(正見; 바르게 보고 읽음 또는 들음)하여 생기는 지식 차원의 지혜(문혜聞慧, 들은 지혜; 수타 마야 빤냐)를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는 수행 단계이다.
지식 차원의 정견(正見; 바른 앎/이해/견해)이라해도 정견(正見; 바른 앎/이해/견해)은 매우 중요하다. 바른 앎(이해, 견해)이 서 있어야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바른 앎(이해, 견해)은 붓다가 강조하셨듯이,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포섭하는 사성제에 대해서 처음에는 머리로 공부하여 피상적이나마 지식 차원의 바른 앎(이해, 견해; 正見)을 가지는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바른 앎(이해, 견해; 正見)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자들이여, 괴로움(고苦, 둑카; 생명의 근원적 괴로움)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이해하고), 괴로움의 생성(집集, 근원; 근본 원인)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이해하고), 괴로움의 소멸(멸滅; 정각, 해탈, 열반)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이해하고), 괴로움의 소멸(정각,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도道; 팔정도)에 대하여 바르게 알면(이해하면), 수행자들이여 이것을 바른 앎(이해, 견해; 正見)이라고 한다”
- <분별경; 위방가경(Vibhanga Sutta), 상윳따니까야, S44.1.1.8>
붓다의 모든 가르침(설법)은 사성제(‘고집멸도’성제)로 포섭되고, 사성제는 팔정도(도성제)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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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정견(正見)'과 '깊은 정견(正見)'
습관에는 얕은 습관과 깊은 습관이 있다.
착각에는 얕은 착각과 깊은 착각이 있다.
세뇌에는 얕은 세뇌와 깊은 세뇌가 있다.
무지에는 얕은 무지와 깊은 무지가 있다.
지혜에는 '얕은 지혜(지식 차원의 지혜; 문혜聞慧-들은 지혜, 사혜思慧-사유 지혜)'와 '깊은 지혜(경험 차원의 지혜; 수혜修慧-수행 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가 있다.
관찰에는 '얕은(피상적인) 관찰'과 '깊은 관찰'(통찰)이 있다.
앎(이해)에는 '얕은 앎(지식 차원의 이해)'과 '깊은 앎(경험 차원의 이해)'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팔정도, 즉 '정견(正見; 바른 봄/관찰/통찰, 앎/이해/견해),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사유) ·· 정념(正念; 바른 사띠), 정정(正定 ; 바른 삼매)'에는 '얕은 정견(正見) ···· 정정(正定)'과 '깊은 정견(正見) ···· 정정(正定)'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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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정견(正見; 바른 봄/관찰/통찰, 앎/이해/견해) 바와나(계발 수행)’는
붓다의 바른 가르침(바른 설법; 正法)을 지식 차원에서 바르게 이해한 피상적인 얕은 앎(이해, 견해), 피상적인 얕은 봄, ‘지식 차원의 얕은 정견’에서 시작하여,
팔정도의 각 부분과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한 수행, 즉 실라(정어·정업·정명 바와나)-사마타(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정사유 바와나)의 바른 실천을 통해서,
궁극에는 무명(인식의 착각, 전도된 생각)을 완전히 극복하고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상태;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여실히(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꿰뚫어 완전히(온전히) 바르게 봄, 즉 '통찰경험 차원의 깊은 정견’으로 발전 향상하는 바와나(계발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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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무상정등각(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 줄임말로 정각)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시고 난 후, 자신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암중모색하여 완성한 수행의 경험을 시행착오를 빼고 '경험적+합리적'(=과학적)으로 정리하여 자신과 같은 '깨달은 자(붓다, 부처)가 되는 또는 무상정등각(정각)에 도달하는 여덟(八)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을 줄임말로 '팔정도'라고 이름 붙이시고, 그 바른 길(팔정도)을 바와나(Bhāvanā, 계발; 열고 발전향상)하는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몸과 마음의 '행(行)을 닦음(修)'이라는 뜻을 지닌 '수행(修行)'은 '경작하다,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다'라는 뜻을 지닌,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바와나(Bhāvanā)'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영어 경전에서는 'meditation(명상 수행), mental development(정신 계발), developing by means of meditation, cultivation by mind, culture(경작하다, 배양하다), increase(향상하다, 상승하다)' 등으로 번역한다.
우리에게는 수행이라는 말이 매우 익숙하니 바와나는 '계발 수행', 팔정도 바와나는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 또는 '정각(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을 계발하는 수행'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하다.
2. 정사유(正思惟; Sammā Saṅkappa), Rightly Thought(바르게 생각함)
정사유(正思惟 또는 정사正思)는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상깝빠(Saṅkapp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상깝빠(Saṅkappa)는 붓다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생각, 사유, 분석'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thought(생각, 사고, 사유), analysis(분석), intention, purpose, plan' 등으로 번역한다.
3. 정어(正語; Sammā Vācā), Rightly Speech(바르게 말함)
정어(正語)는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와짜(Vācā)'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와짜(Vācā)는 '언어; 말 또는 문자(글)를 수단으로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뜻이다. 영어 경전에서는 'speech(말하기), saying, voice(말로 나타내다, 표현하다), word(단어, 말을 골라 표현하다)' 등으로 번역한다.
언어(와짜)는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한 이래 인간의 감각 기관(기능)을 통한 물질적(육체적) 정신적인 일체의 경험 – 붓다가 설법 시 사용한 용어(불교 용어)로 말하면 12처(=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감각 기능인 6근 + 그 대상인 6경)의 일체 경험 – 을 기호화(개념화)한 것이다. 언어는 실제가 아니라 실제의 근사치(개념)일 뿐이다. 실제에 가까운 것도 있지만 실제와 아주 먼 것도 있다.
언어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언어로 학습 당하는 사람들의 식(識;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과 생각을 세뇌하고(길들이고) 지배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언어)을 학습한(배워 익힌) 이후에는 생각도 일종의 말(언어)이다. 생각은 내면의 말, 내면의 해설이기 때문이다.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미국사람은 미국말로 생각을 한다. 말(언어)에는 힘이 있다. 어떤 말(언어)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식(의식+무의식)과 생각과 감정이 바뀌게 된다. 그것이 선순환이든 악순환이든..
4. 정업(正業; Sammā Kammanta), Rightly Doing(바르게 행동함)
정업(正業)은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깜만따(Kammant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깜만따(kammanta)는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업(業), 행위(行為), 작업(作業), 작위(作爲)' 등으로 번역하고, 영어 경전에서는 'doing(함, 행동), acting(행위), working(활동); work, business, occupation, profession' 등으로 번역한다.
행(行; 행위)에는 이른바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三行)가 있다. 즉 (1) '마음, 생각, 뜻, 의지, 의도'가 몸(身)으로 표현된 행(행위, 행동). (2) '마음, 생각, 뜻, 의지, 의도'가 말(口)로 표현된 행. (3) '마음, 생각, 뜻, 의지, 의도'(意) 자체의 행인데, 행(行; 행위)을 하게 되면 거기엔 반드시 업(業; 깜마kamma, 카르마karma)이 지어지게 된다. 그래서 업(業)을 행위라고도 한다. 붓다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업(業)은 행위뿐 아니라 행위로 인해 형성되는 습관과 습성(습관의 경향성)을 포함한다. 업력(業力; kammanta bala)이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에 의해서 형성되는 잠재력 또는 관성력(慣性力; 습관慣/습성性의 힘力)으로 업(業)의 과보를 만들어내는 힘(力)이 있다.
정업(正業; 바른 업/행위, 습관/습성)은 단순히 몸의 바른 행위(업, 습관/습성)가 아니라 '신구의(身口意)의 불선한 삼업(三業)'이 지어지지 않는 바른 행위(업, 습관/습성)를 말한다. 업이 지어지는 행위를 ‘유위(有爲)의 행(行)’이라고 하고, 업이 지어지지 않는 행위를 ‘무위(無爲)의 행(行)’이라고 한다. '유위(有爲)의 행(行)'은 아상(我相; ‘나我ego’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에고심)이 개입된 행위이고, '무위(無爲)의 행(行)'은 아상(我相; ‘나我ego’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에고심)이 개입되지 않은 행위, 달리 표현하면 '무아(無我)의 행(行)'이다. 무아(無我)의 행(行; 행위)은 그 결과에 아무런 흔적, 즉 아(我)의 업(業)이 없다.
5. 정명(正命; Sammā Ajīva), Rightly Living(바르게 삶, 생활함)
정명(正命)은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아지와(Ajīva)'를 한문(중국어)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목숨 명(命)’으로 번역하는 아지와(Ajīva)는 붓다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삶, 생활, 생계'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living(삶), livelihood(생계, 살림), mode of living(삶의 형태, 방법, 상태), subsistence(생활, 호구지책, 생존 수단)' 등으로 번역한다.
요컨대, 붓다가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팔정도 바와나 중에서 '실라((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계발 수행), 즉 ’정어(바른 말/언어)•정업(바른 업/행위/습관/습성)•정명(바른 삶/생활)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는 수행'은
태어나면서부터 무명(무지)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관습적으로 길들여지는 언어(말)•행위(습관/습성)•생활(삶)에서 벗어나, 궁극에는 무명(실상과 진리를 여실히 모르는 무지; 인식의 착각, 전도된 생각)을 극복하고 아상((我相; ‘나我ego’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에고심)과 아집(我執; ‘나我’에 대한 집착執) 없이 항상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고, (냄새, 맛, 감촉을) 바르게 느끼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하며 사는(생활하는) 것으로 발전향상하는 수행이다.
6. 정정진(正精進; Sammā Vāyāma), Rightly Striving(바르게 노력함)
정정진(正精進 또는 정근正勤)은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와야마(Vāyām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와야마(vāyāma)는 영어 경전에서 'striving(정진, 분투, 노력), effort(노력, 수고), exertion(노력, 전력, 분발), endeavour(애씀)' 등으로 번역한다.
붓다가 팔정도의 한 부분으로 가르치신 정정진(바른 노력)은 아상(我相; '나我ego‘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에고심) 과 아집(我執; ‘나我’에 대한 집착執)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바르게 살려는 노력, 달리 표현하면, 아상(我相; '나我ego'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에고심)과 아집(我執; ‘나我’에 대한 집착執)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더 많이 '놓아버리는' 노력이다.
특히 '사마디(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계발 수행)'(=사마타)로 바른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수행이 점점 깊어질수록 자기(我) 의지의 표현인 노력조차도 점점 더 많이 ‘놓아버리는’ 것이 바른 노력(정정진)이다. 왜냐하면, 수행이 깊어질수록 자기(我)의 노력조차도 미세한 집착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초선정 삼매에 들어선 이후의 단계에서는 얼마나 더 많이 놓아버리고 얼마나 더 마음('수상행식' 작용)이 고요해지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궁극에는 다 놓아버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생멸하는) '수상행식' 작용(마음)이 고요히 멈출 때까지(상수멸을 성취할 때까지)...
요컨대, 바른 수행(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은 자기(我)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 아(我)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아(我)의 자기주장인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깊어질수록 그 아(我)의 의지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자기(我) 의지의 표현인 노력조차도 더 많이 놓아버리는 것, 그것이 ‘바른 노력(정정진)’이다.
붓다가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실라•사마타•위빠사나)를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하여 바르게 실천하면 수행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편안하고 행복하다. 물론 몸과 마음(식識; 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에 배어있는 탁한(불선한) 습관으로 인한 수행 초기의 어려움은 개인차에 따라 누구나 어느 정도 있다. 초심자는 대부분 좌선수행 초기에 다리, 허리, 어깨 등에 통증 감각(통각)이 발생한다. 평상시의 생활 습관에 따라 개인차가 있지만 그 통증이 상상보다 좀 강하다. 이런 통증 감각은 좌선수행 자세(가부좌 또는 평좌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똑바르게 앉아 있는 좌선 자세)에 몸이 적응하느라 생기는 것, 즉 좌선자세에 맞게끔 몸의 세포가 재배치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몸이 좌선자세에 적응이 끝나면 이런 통증 감각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몸이 편안해진다.
7. 정념(正念; Sammā Sati), Rightly Sati(바르게 알아차림)
정념(正念)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사띠(Sati)'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사띠(Sati)는 한문 경전에서 ‘념(念, 생각할 념; 마음에 둠, 기억함), 억념(憶念; 단단히 기억함), 기억(記憶), 념주(念住; 마음에 둠)’ 등으로 번역하고, 영어 경전에서는 ‘'mindfulness(주의깊음, 마음챙김), memory(기억함), recognition(알아차림), consciousness(알아챔, 지각함), wakefulness(깨어있음) of mind, lucidity(밝음) of mind’ 등으로 번역한다.
념(念)은 '지금(今)+마음(心)'의 합성어로 사띠(Sati)의 대표적인 한문 번역이다. 사띠(Sati)를 한글로 번역하면, 지금(현재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또는 작용)을 ‘마음챙겨 전념하여(바르게 기억하여 또는 바르게 새겨) 알아차림' 정도로 표현하면 붓다가 가르치신 의미와 유사하다.
붓다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사띠(Sati)는 '마음챙김, 전념함, (되)새김, 기억함, 빠자나(Pajāna;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 빤냐로 봄/앎), 마음챙겨 알아차림, 깨어있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붓다의 가르침(설법)에서 사띠(Sati)는 '사띠(Sati) 빠자나(Pajāna)'의 준말, 즉 빠자나(Pajāna; 알아차림)를 포함한 의미로 대부분 사용되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사띠(Sati; 마음챙김, 전념함, 기억함)와 빠자나(Pajāna; 알아차림)‘로 분리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정념(正念)이라고 한역하는 ’삼마사띠(Sammā-Sati)‘도 대부분 삼빠자나(Sam-Pajāna; 대상에 대한 바른 알아차림, 바른 앎/이해, 분명한 이해)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삼마사띠(Sammā-Sati, 正念; 바른 마음챙김/전념)와 삼빠자나(Sam-Pajāna, 正知; 바른 알아차림)‘로 분리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붓다가 가르치신 '삼마사띠(Samma-Sati)'를 한문으로 번역할 때, ’정념지(正念知)‘ 또는 '정전념(正專念, 정억념正憶念) + 정지(正知)'로 번역하는 것이 붓다가 가르치신 사띠의 두 가지 측면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즉, 삼마사띠(Samma-Sati) = <대상에 대한 바른 전념(正專念, 正憶念; 대상에 대해 바르게 전념함/마음챙김)> + <대상에 대한 바른 알아차림(正知, 삼빠자나Sam-Pajāna)>
‘얕은(rough, 거친, 무딘) 사띠’와 ‘깊은(fine, 섬세한, 예리한) 사띠’
사마타 수행을 가르치지 않는 수행쎈터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위빠사나 명상쎈터에서는 식사 중에도 알아차리면서 먹으라고 가르치지만, 배고파서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기 바쁜 (몸과 마음의) 상태에서는 알아차림이 없거나 매우 거친 알아차림이 있을 뿐이다. 어느 정도 허기가 사라지고 나서야 ‘내가 허겁지겁 식사를 하고 있었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된다. 사실 준비단계(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 ‘fine한 사띠’를 준비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일상생활 중에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를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
'사마타 = 사마디(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 = 정정진(바른 노력)·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 계발 수행'을 통해서, 비록 바른 선정(초선정~제4선정) 삼매에 들지는 못했더라도, 어느 정도라도 fine한 사띠가 계발된 상태라야 일상생활 중에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붓다가 가르친 바른 선정(초선정~제4선정) 삼매에 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일상수행에서의 사마타'는 쉽게 말하자면 사띠(깨어있음, 마음챙김, 알아차림, 마음챙겨 알아차림) 능력을 어느 정도라도 fine하게(섬세하게, 예리하게)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고요할수록 더 잘 알아차려지고 더 잘 알아차릴수록 마음이 점점 더 고요해지고 생각이 좀 느려지고 이렇게 마음이 조금 비워진다. 이렇게 마음이 좀 비워지고 좀 고요히 집중되면서 fine한 사띠 능력이 어느 정도라도 좀 계발된 상태가 되어야 '일상수행에서의 위빠사나', 즉 일상생활에서 ‘신수심법’ 또는 ‘오감각과 생각, 감정’을 관찰(이어서 사띠)하는 수행을 비로소(어느 정도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
8. 정정(正定; Sammā Samādhi), Rightly Samādhi(바르게 고요집중함)
정정(正定)은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사마디(Samādhi)'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정(定)은 사마디(Samādhi)를 한문으로 의역한 것이고, 삼매(三昧) 또는 삼마지(三摩地)는 사마디(Samādhi)를 한문으로 음역(음사)한 것이다.
사마디(Samadhi)는 한문 경전에서 ‘정(定; 고요히 머뭄), 삼매(三昧), 사마지(三摩地), 등지(等持), 심일경(心一境; 마음이 하나로 모여진 경지), 정신통일(精神統一)’ 등으로 번역한다. 영어 경전에서는 ‘concentration(집중); lit. 'the (mental) state of being firmly fixed', one-pointedness of the mind, absorption(전념), ecstasy(황홀경, 무아지경, 무아의 경지)’ 등으로 번역하고, 사마디(Samadhi, 삼매)의 의미를 'a concentrated(집중된), self-collected(고요한), intent state(몰두 상태) of mind and meditation, which, concomitant(동반하는) with right living(바른 삶/생활), is a necessary condition(필요조건) to the attainment(도달) of higher wisdom(고차원의 지혜) and emancipation(해탈)'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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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디(삼매)를 '몰아(沒我) 고요집중' 정도로 표현하면 붓다가 설(설명)하신 의미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
삼매는 '한 가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를 말한다. 보통 독서삼매에 빠졌다고 할 때, 독서에 대한 정신집중으로 고요한 상태에 빠졌다는 의미이다. 깨어있는 상태로 고요한 것이지 졸면서 고요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하나의 대상에 심취하여 어느 순간 자기(我)를 잊어버리면 그 무아지경(無我之境, 沒我之境, 삼매)의 행복은 매우 크다. 독서삼매라든가 진짜 삼매와 약간 닮은 상태조차도 매우 행복하다. 음악이나 춤 등에 빠져서 어느 순간 자기를 잊어버리고 어느 정도라도 근사 삼매(무아지경, 몰아지경)의 기쁨과 행복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은 그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한다. 수행이 깊어지면서 경험하는 진짜 바른 삼매(삼마 사마디, 정정正定)는 그 기쁨(삐띠)과 행복(수카)이 더욱 더 크고(至福) 차원이 높다.
삼매는 일상의식으로는 알 수도 없고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지극한 행복(至福), 신성한 황홀경, 마음의 청정함, 청정한 성스러움, 비이원성, 궁극성, 시간의 멈춤, 시공(시간-공간) 초월 등의 느낌이 부수적으로 동반되는 체험이므로, 그 체험은 수행자를 압도한다.
그러나 삼매에서 나온 후 그 체험이 서서히 잦아들어 사라지고 다시 일상의식으로 돌아오면, 다시 번뇌가 되살아난다.
삼매의 경험(지극한 행복, 무아지경의 신성한 황홀경 등)은 절대자, 신, 신격화된 부처, 예수, 알라, 브라만, 샤머니즘의 장군신, 조로아스터교(중국에서는 불을 숭상한다 해서 배화교라 불렸다)의 거룩한 불의 신 .. 등의 은총이나 강림 따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경험(신비체험)이 아니라,
언제 하든(BC 500년에 하든 AD 2017년에 하든), 어디서 하든(인도에서 하든 한국에서 하든 미국에서 하든), 누가 하든 상관 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과학적 경험처럼, 언제 하든 어디서 하든 누가 하든 상관 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에게나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마음의 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대한 경험이므로 일종의 과학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은 아니다.
삼매(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들어가면 외부의 오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물질 감각, 신체 감각)이 전혀 인식되지 않고(전오식 사라짐; 오감각으로부터의 해탈?) '나(我) 또는 내 몸'이 사라진 듯이 느껴진다. 무아(無我)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自)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자아의식, 아상我相)'이 삼매 상태에서는 한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여기서 몰아(沒我)는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 또는 자아(自我; 스스로自 '나我'라는) 의식이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잠길 몰沒) 상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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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삼매(사마디; 몰아 고요집중) 상태를 경험하게 하는 수행(수련, 훈련)을 '사마디(삼매) 바와나(계발 수행) = 사마타'라고 지칭했다. 붓다는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수행)'의 측면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여 가르치셨는데, 삼매(사마디) 계발 수행을 지칭하는 사마타(사마디 바와나)는 '정정진(바른 노력/정진)·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 바와나(계발 수행)를 통칭한 것이다.
'사띠(알아차림) 초점 확립 계발 수행'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정정진(바른 정진)·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 계발 수행’(사마타)을 통해서 사띠(알아차림) 대상의 범위를 점점 줄여가면 마침내 사띠(알아차림)의 초점이 하나로 모여져 고요히 집중되는 삼매(몰아 고요집중) 상태의 첫 단계인 초선정 삼매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바른 관찰, 통찰)·정사유(바른 사유, 분석) 바와나(계발 수행), 즉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위빠사나)를 통해서 바와나빤냐(수행지혜, 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를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는데 필요한 초강력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과 우빽카(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는 초선정 삼매 상태에서부터 계발되는데 4선정(네 번째 단계의 선정) 삼매 상태에서 극대로 개발된다. 삼매에 들었다 나오면 삼매 상태에서 계발된 초강력 고요집중의 사띠(알아차림) 능력이 '한시적'으로 유지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약해진다.
삼매에서 계발되는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은 삼매의 깊이와 수행자가 처한 주변상황(경계)에 따라 다르지만 4선정 삼매 상태에 들었다 나온 경우 길게는 수 일 동안 '한시적'으로 유지된다.
붓다가 강조하셨듯이, 사마타의 삼매에서 나온 후 법열(法悅; 삼매 체험으로 생기는 무아지경의 황홀경)에 취해서 허송세월하지 말고, 삼매 상태에서 나온 '직후'에 사마타에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알아차림) 능력과 탐진치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난 평정심(우빽카;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를 이용해서 사념처(身受心法, 달리 표현하면 자신과 세상)를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통찰)-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하여 바른 지혜(빤냐/반야;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여/깊이 관찰하여/꿰뚫어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 통찰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위빠사나)을 해야만 한다.
자신과 세상의 실상과 진리를 여러 가지(4념처)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통찰)·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하는 위빠사나를 하다가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이 약해지거나 더 강력한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이 필요해지면 수행자는 하시라도 사마타(사마디 바와나; 삼매 계발 수행)를 하고 더 깊은 삼매를 계발한다.
사마타는 위빠사나를 계발(열고 발전향상) 시키고 발전향상된 위빠사나는 사마타를 발전향상 시킨다. 붓다가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팔정도 바와나, 즉 실라(戒; 정어·정업·정명) • 사마디(定; 정정진·정념·정정) • 빤냐(慧; 정견·정사유) 바와나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방식'의 바와나(계발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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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만 하는 수행자는 하급 수행자다.
몸으로만 하는 수행자는 중급 수행자다.
머리와 몸으로 하는 수행자야 말로 상급 수행자다."
- 붓다(석가모니 부처님)
붓다는 지혜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는 단계에 따라, 지혜(빤야/반야)를 세 단계의 세 종류의 지혜, 즉 수타빤냐(들은 지혜; 문혜聞慧), 찐따빤냐(사유지혜; 사혜思慧), 바와나빤냐(수행지혜; 수혜修慧)로 분류했다.
우선 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자(붓다, 부처)의 바른 가르침, 즉 연기의 실상과 진리에 대한 지식 차원의 바른 설법(법法을 설명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실천(정각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을 계발하는 수행; 팔정도 바와나)에 대한 바른 가르침(바른 설법; 正法)을 듣거나 읽어서 갖게 되는 수타빤냐(들은 지혜; 聞慧), 그리고 듣거나 읽은 것을 바르게 사유해서 갖게 되는 찐따빤냐(사유지혜; 思慧)를 스스로 계발(열고 발전향상)한다.
이렇게 붓다의 바른 가르침(바른 설법; 正法)을 바르게 배우고(듣고, 보고/읽고) 바르게 사유해서 문혜聞慧와 사혜思慧를 계발(바와나)하는 것이 팔정도 바와나의 첫 단계인 머리로 하는 '지식 차원의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이다.
다음 단계(지식의 실천 단계; 경험 차원의 단계)로 문혜와 사혜를 바탕으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를 통해서 청정한 삶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마타(사마디/삼매 바와나; 정정진·정념·정정 계발 수행), 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 바와나;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정사유 계발 수행)를 바르게 실천해서 바와나빤냐(수혜修慧, 수행지혜/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를 스스로 계발한다.
지식 차원의 지혜(들은 지혜와 사유지혜)를 넘어선 경험 차원의 지혜인 바와나빤냐(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가 모든 사람을 완전한 깨달음(완전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경지로 이끄는 궁극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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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의 진행 단계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1) 머리로 하는 지식 차원의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 단계
(2) 몸으로 하는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 단계
(3) 몸으로 하는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 단계
; 사마타 = 사마디 바와나, 선정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
(4) 몸과 머리로 하는 경험 차원의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 단계
; 위빠사나 =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 바와나빤냐(수행지혜/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를 계발하는 수행
(5) 몸과 머리로 하는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완성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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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석가모니 부처님)는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를 '여덟 개의 바큇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순환하며 구르는 것'에 비유하셨다. 훗날 여덟 개의 바큇살로 이루어진 법륜(法輪; 법의 바퀴)은 불교(佛敎; 부처님 가르침)의 상징(symbol)이 되었다.
마치 여덟 개의 바큇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순환'하며 구르듯이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사마타('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를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방식으로 반복 '순환'해서 바르게 실천함으로써 팔정도의 여덟 부분(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발전 향상하여 결국에는 팔정도 전체의 완성과 함께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고,
동시에 바른 지혜(반야/빤냐;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와 바른 사랑(자비/멧따-까루나; '나我ego'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을 완성하여 완전한 자유(해탈; 모든 번뇌, 괴로움, 苦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를 완성하여 정각을 이룬 후에 팔정도(완성된 팔정도)는 더 이상 계발해야하는 길이 아니라 그냥(그 모양 그대로) 생활 또는 삶 그 자체가 된다. 붓다께서는 입멸하시는 순간까지 생활화된 팔정도(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를 항상 실천하셨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정정(正定; Sammā Samādhi)에 드신 상태에서 입멸(무여열반, 대반열반)하셨다.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를 비롯하여 팔정도 바와나를 완성하여 정각을 증득한 많은 아라한들(이른바 천이백 아라한) 중에서 '생사에도 선악에도 그 무엇에도 걸림 없는 대자유'를 얻었다고 여느 선사나 도사들처럼 저잣거리에서 고성방가하며 막행막식한 사람(팔정도에서 벗어난 생활을 한 사람)은 한 분도 없다.
붓다께서 입멸(무여열반, 대반열반; Mahā Pari Nibbāna)하시는 순간까지 항상 실천하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가르침(설법; 초전법륜경 ~ 대반열반경)의 시작과 끝은 팔정도이다. 꼰단냐를 비롯한 최초의 다섯 제자들에게 정각을 성취하는 바른 길(팔정도)을 가르치신 초전법륜의 사성제('고집멸도'성제) 가르침을 시작으로 마지막 제자인 수밧타에게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실천을 간곡히 당부하시는 마지막 가르침까지,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가르침의 시작과 끝은 '깨달은 사람(붓다, 부처)이 되는 또는 정각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 팔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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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용기를 내어 붓다가 가르치신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첫 걸음을 내디뎌 봅시다.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자유와 평화, 나와 너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완전한 행복의 경지를 향해서! 수 없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걸음마를 배우고 익히는 어린 아기처럼 . .
모든 존재가
붓다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following the Buddha's sammā Dhamma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벗어나기를, 해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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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좌) : TIME Magagine Cover, 'The Science of Meditation, Meditation(바와나; 계발 수행 또는 명상 수행)의 과학’
붓다는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난 후, 자신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한 수행의 경험을 시행착오를 빼고 '경험적+합리적'(=과학적)으로 정리하여 자신과 같은 '깨달은 자(붓다, 부처)가 되는 또는 정각에 도달하는 여덟(八)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을 줄임말로 '팔정도'라고 이름 붙이고, 그 바른 길(팔정도)을 바와나(계발; 열고 발전향상)하는 '팔정도 바와나'(팔정도 계발 수행)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사진(우상) : 팔정도의 여덟 부분, 정견(正見; 삼마Sammā 딧티Diṭṭhi) · 정사(正思 또는 정사유正思惟; 삼마 상깝빠Saṅkappa) · 정어(正語; 삼마 와짜Vācā) · 정업(正業; 삼마 깜만따Kammanta) · 정명(正命; 삼마 아지와Ajīva) · 정근(正勤 또는 정정진正精進; 삼마 와야마Vāyāma) · 정념(正念; 삼마 사띠Sati) · 정정(正定; 삼마 사마디Samādhi)
사진(우하) : 붓다는 팔정도의 여덟 부분을 '바와나(Bhāvanā; 계발 수행)'의 관점에서 실라(Morality, 계戒; 정어·정업·정명) • 사마디(Concentration, 정定; 정정진·정념·정정) • 빤냐(Wisdom, 혜慧; 정견·정사유) 세 그룹으로 그룹핑하고,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사마디 바와나'를 사마타,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 바와나'를 위빠사나라고 이름 붙였다. ('실라 바와나'는 그냥 실라)
사진(우중) :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는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를 '여덟 개의 바큇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순환하며 구르는 것'에 비유했다. 훗날 여덟 개의 바큇살로 이루어진 법륜(法輪; 법의 바퀴)은 불교(佛敎; 부처님 가르침)의 상징(symbol)이 되었다.
마치 여덟 개의 바큇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순환'하며 구르듯이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사마타('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를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방식으로 반복 '순환'해서 바르게 실천함으로써 팔정도의 여덟 부분(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발전 향상하여 결국에는 팔정도 전체의 완성과 함께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고,
동시에 바른 지혜(반야/빤냐;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와 바른 사랑(자비/멧따-까루나; '나我ego'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을 완성하여 완전한 자유(해탈; 모든 번뇌, 괴로움, 苦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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