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지정사항 ; 지방기념물 제 30호
위치 ; 제주시 화북1동 5755번지(=길을 포함한 번지임) 화북1동 3957-9번지의 길 건너 서쪽.
유형 ; 비석(선정비)
시대 ; 조선
오현학원 동쪽 동제원 4거리에서 화북으로 400여m 내려가면 길 서쪽에 13기의 비석이 서 있다. 화북포구는 옛날부터 육지와의 교통중심지였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벼슬아치들이 많았고, 그에 따라 선정비를 많이 세우게 된 것이다. 왼(남)쪽에서부터 비석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있는 비석들은 원래는 화북 지역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던 것을 후대에 와서 한 곳에 전부 모아 세웠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세운 연대별로 순서를 정해 놓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비석의 크기 순으로 다시 세운 것 같다. 1976년 9월 9일 비석군사적지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①牧使沈相演淸德善政碑
앞면 좌우에 작은 글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마멸되어 판독불능이고, 뒷면에도 마찬가지여서 확실하지 않다. 받침돌은 머리가 거북 모양이고 4개의 발과 꼬리의 표현이 확실하게 되어 있다. 재임기간 인조16년(1638) 6월∼인조18년 9월. 이 때부터 목사가 방어사를 겸하도록 높여졌다. 특별한 치적은 기록된 것이 없다.(증보 제주통사 440쪽)
②牧使洪公圭去思碑
'洪'자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쪼아낸 자국이 있다. (다른 비석에도 성(姓)씨마다 쪼아낸 흔적이 있다) 뒷면에는 정해사월 일 拱北이라 되어 있다. 받침돌은 개머리 모양에 몸통은 발 다리 등을 나타내지 않았다. 재임기간 고종21년(1884) 12월∼고종 23년 5월. 연희각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증보 제주통사 467쪽)
③□□□□□□□□□忘(思)碑
특이한 석질의 비석이라 풍화마멸이 심하여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앞면 좌우에도 글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왼쪽에는 '‥‥堵' 자 하나만 보이고 오른쪽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비각이 있는데 왼쪽 기둥으로 세운 판석은 ⅔ 높이에서 횡으로 깨어졌고, 오른쪽 판석은 ¼ 높이에서 2개를 연결하여 설치했다. 건립년대 및 재임기간 미상
④牧使具公載龍去思碑
앞면에 작은 글씨로 '滄溟萬里 漢拏千峰 賴我明府 更添重重'이라 새겨졌고, 비각이 있으며 비각 뒷 판석 안쪽 좌우에도 글씨가 있는데 오른쪽에 '咸豊七年丁巳十二月二十五日庶'라 하여 건립 날짜를 밝혔고, 왼쪽에는 글자의 왼쪽 ½이 가려져서 판독이 불가능하다. 석질이 퇴적암류의 누런 무늬가 있는 돌인데 단단하게 보이지 않으나 풍화마멸이 오히려 적다.
구재룡 겸방어사는 1839년 3월에 부임하였다가 1841년 3월에 파직되었다. 그 이유는 영국 선박이 가파도에 정박하며 소를 약탈해 갔을 때 대정현감이 그들을 불러 조사하지 않았다고 조정에 보고했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목사가 평상시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여 대정현감과 함께 파직한 것이다. 사건의 전말을 보면 다음과 같다. 1840년 12월 영국 선박 2척이 가파도에 와서 총을 쏘며 소들을 약탈하여갔다. 이 때 전라감사 이목연은 제주목사의 장계를 비변사에 올려 대정현감 강계우를 파직하도록 하였다. 비변사에서 보고하기를 '야만인의 배가 바다에 출몰하는 것은 저들의 교활한 습성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를 막아야 할 병사들이 비록 훈련을 게을리 했다고 책망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섬 주위의 포구와 항만을 굳건히 방어하고 경계하도록 살펴야 함이 본시 당연한 일입니다. 하물며 저들은 40명에 불과하였는데 어쩐 일인지 먼저 겁을 먹고 도망가서 흩어졌으니 변방을 지킬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이들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제주목사 구재룡도 함께 파직하소서' 하였다.(증보 제주통사 196쪽)
그러나 그는 錢 500여냥을 마련하여 호적을 작성할 때의 인구미(人口米, 수수료)로 충당하도록 하였고 정의현과 대정현의 수세곽(水稅藿)과 제주목의 일용곽(日用藿)을 없애는 등 정사가 번거롭지 않고 부역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이 추모하였다고 한다. 비석의 건립년대는 道光 辛丑(1841) 十二月이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85㎝, 너비 41㎝, 두께 13㎝이다.(북제주군 비석총람 678쪽, 증보 제주통사 463쪽)
⑤察理李相公奎遠淸德碑
앞면에 '四載居官 漢拏山下 三邑安堵 一碣而已'라 새겼으며 갓돌이 있다. 재임기간 고종28년(1891) 9월∼고종31년 9월. 이규원 찰리사겸방어사는 흉년이 들자 김응병·이시영·송두옥·채구석 등으로 하여금 곡식을 내놓도록 하여 구휼하였다. 군부대신으로 발령받아 갔다.(증보 제주통사 468쪽)
⑥牧使尹公久東淸德善政碑
'尹'자는 거의 쪼아내어 겨우 판독할 수 있는 정도이고 '東'자는 약간 마멸된 상태이다. 뒷면에 '嘉慶二十三年戊寅二月 日 別刀'라 새겨져 있다. 순조18년 2월 건립, 재임기간 순조15년(1815) 5월∼순조17년 10월. 윤구동 겸방어사는 재임중에 그는 공피전 1800냥을 마련하여 외국 선박이 표류하였을 때 공궤하는 비용으로 비치하였는데 뒤에 이를 환모(還牟) 1088석으로 바꾸어 창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또 순조 17년에는 본도에 흉년이 들자 육지에서 곡식을 들여와 도민을 구휼하였는데 이 때에 還耗條 2500석을 미리 준비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등 청렴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형조참의로 전출되었다.(북제주군 비석총람 666쪽, 증보 제주통사 461쪽)
⑦牧使李公源達恤民善政碑
뒷면에 '道光二十年五月 日 別刀里'라 새겨져 있다. '源'자 왼쪽 앞면에서 뒷면으로 동그란 구멍이 난 것을 시멘트로 막아 놓았다. 헌종6년(1804) 5월 건립, 재임기간 헌종3년(1837) 11월∼헌종5년 3월. (북제주군 비석총람 678쪽)
⑧牧使張公寅植恤民善政碑
'張'자는 약간 쪼아낸 흔적이 있고 '寅'자와 '植'자 사이에서 비스듬하게 깨어진 것을 붙였다. 뒷면에는 '別刀里 咸豊元年二月 日'이라 되어 있다. 장인식 겸방어사는 무관으로 헌종14년(1848) 3월에 부임하여 철종원년(1850) 6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재임중 그는 본주(本州) 환곡(還穀)이 너무 많음을 비변사(備邊司)에 보고하여 이를 절반으로 줄였고, 수세전(水稅錢)을 혁파하고 장세미(場稅米) 60석을 보민고(補民庫)에 떼어다 붙였다. 외통방(外通房)을 설치하여 양몽재(養蒙齋)라 편액하고 지인(知印 = 향리로서 地方官의 官印을 맡아보는 사람)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포정문(布政門) 밖에 금종각(金鐘閣)을 세웠는가 하면 정의향교를 성안으로 이건하였다. 삼성사(三姓祠)에 숭보당(崇報堂)을 세워 재생을 두었고, 북사장(北射場)에 심고당(審固堂)을 세웠으며, 南·西·右 3학당을 부활시켰다. 의사묘(義士廟)를 정의서당에 세워 오흥태(吳興泰)를 사향(司享)하였으며, 이예연(李禮延)을 영혜사(永惠祠)에 종향(從享)하였다. 문과 초시를 設行하고 군비를 보충하여 갖추었다. 서원의 산앙문(山仰門)을 새로 세웠고, 귤림서원묘정비(橘林書院廟庭碑), 3읍의 진별저고(賑別儲庫) 등도 세웠다. 春秋로 海神祭를 設行하고 各庫의 반리목(反利木)을 혁파하였다. (북제주군 비석총람 666∼667쪽, 증보 제주통사 464쪽)
⑨牧使(李)公玄功恤民善政碑
성씨를 쪼아내어 판독이 불가능하고 뒷면에는 '癸丑六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재임기간 철종1년(1850) 6월∼철종2년 7월. 관덕정을 중수하였으나 전임지에서 있었던 일로 파직되었다.(증보 제주통사 464쪽)
⑩判官高公景晙去思碑
뒷면에 '壬辰六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재임기간 고종20년(1883)∼고종22년 4월. 제주판관으로 봉직할 당시 극심한 흉년으로 기근에 처해 있는 백성이 부담할 환곡을 녹봉으로 감하여 주었다. 지평으로 전출되었다.(북제주군 비석총람 814쪽, 증보 제주통사 467쪽) 고경준은 철종14년(1863)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부정자(承政院副正字),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선략장군(宣略將軍),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병조 및 예조 좌랑(兵曹禮曹佐郞),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 전라도사(全羅都事), 종친부정전적(宗親府正典籍), 제주판관(濟州判官) 등 많은 직을 역임한 사람이다.(濟州鄕校誌 731쪽)
⑪牧使白公希洙恤民善政碑
백희수의 재임기간은 철종2년(1851) 7월∼철종4년 12월이다. 비의 후면에는 '甲寅五月'이라 새기고 있어 그가 떠난 이듬해인 철종5년(1854)에 세운 것이다. 비신의 높이는 76cm, 너비는 윗부분 38.5cm, 아랫부분 32cm, 두께는 윗부분 11.5cm, 아랫부분 10cm이다. 백희수 겸방어사는 철종 2년(1851) 7월에 부임하여 동왕 4년(1853) 12월에 교체되어 갔다. 그 업적으로는 부임하는 해 가을에 흉년이 들자 별저미(別儲米)와 내탕전(內帑錢) 1천냥을 조정에 요청하여 빈궁한 백성들을 진휼하였고, 이 외에도 귤림당의 개건과 유생 姜琦奭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암 김정의 유허비각을 세운 것을 들 수 있다.(북제주군 비석총람 667쪽)
⑫牧使任公憲大去思碑
앞뒤좌우면에 아무 글씨도 없다. 건립년대 미상, 재임기간은 철종13년(1862) 2월∼철종14년 1월인데 그의 임기 중에 강제검의 난이 일어나 파직되었다. 임기중 임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파직된 사람에 대한 선정비가 세워졌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 일이므로 재임 기간 중에 선정비를 세우도록 했거나 아부하는 아랫것들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년대를 써 놓지 않은 것도 그런 상황을 짐작케 한다. 강제검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1860년 3월 암행어사 심동신(沈東臣)이 와서 정우현(鄭愚鉉) 목사의 비리를 적발하고 파직한 바 있었다. 그런데 1862년 도임한 임헌대 방어사도 여전히 특정인의 청탁을 받아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고 그 부담을 농민들에게 떠넘겨 징수하였다. 한 예로 목장운영비인 장세(場稅)를 농민들에게 좁쌀로 내도록 부과하였는데 힘있는 지위를 얻은 자에게는 부과하지 않고 힘없는 농민들에게는 그들의 몫까지 더하여 징수하였다.
1862년 10월 지금의 안덕면 서광리에 살던 강제검(姜悌儉)과 제주목에 살던 김흥채(金興采) 등이 그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석구·장환·김석란·김연홍·박흥열·현재득 등도 호응하여 삼읍의 농민을 이끌고 같은 해 10월 18일 제주성문을 부수고 관청으로 몰려들었다. 임헌대는 당황하여 동헌 깊숙이 숨어 버렸고, 백성들은 곡식 창고를 부수고 쌀을 꺼내어 나누고 관청의 문서들을 불살랐다. 이 때 백성들의 원망을 샀던 아전 김종주·김성수·김석한 등이 백성들에 의해 맞아죽었고, 김석룡은 자결하였다. 이 광경을 본 임헌대는 화북으로 도망가서 민가에 숨고 이 사실을 급히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부호군 이건필(李建弼)을 안핵겸찰리사(按 兼察理使)로 보내어 사태를 수습하였다. 임헌대는 파직되어 초산으로 유배되고 판관 구원조도 파직되었다. 1863년 정기원(鄭岐源)을 제주목사로 파견하고, 같은 해 2월 강제검과 김흥채는 목을 베어 저자에 내걸고 장환도 목을 베었다. 김연홍·박흥열·현재득은 절도에 유배하였고, 이유락·강팽록·김석구·조명순·김석란·김두일 등은 다른 도에 유배하였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과거를 베풀고 문과에 송상순·김병순(수)·신재호·고경준·한석윤 그리고 무과에 양제하 등 38명을 합격시켜서 전시에 나가도록 하였다.(증보 제주통사 200∼201쪽)
⑬助防將洪公在昱去思碑
앞면에 助防將洪公在昱去思碑란 글씨만 새겨져 있고
뒤좌우면에 아무 글씨도 없다. 건립년대 및 재임기간 미상.
《작성 2005.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