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겨자씨 예수의 영성입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내 안에 우주적인 하나님의 얼을 담은 화엄적 그리스도!
우주적인 겨자씨로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소서.
겨자씨 신앙
겨자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존재 가운데 속에 하나님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저 왔다가 그저 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겨자씨 속에 우주의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우주 생명의 모든 창조 진화의 과정이 다 들어 있습니다. 피어날 하나님의 생명이 모두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 자녀(아들)임을 자각하였습니다. 예수처럼 자기 안의 겨자씨 생명을 자각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아들, 딸)입니다. 이것이 거듭남, 참 깨달음, 원 복음(기쁜소식 복된 소식 Good News)입니다. 이러한 원래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버지(어머니)로 모시고 형제자매로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시작하는 겨자씨처럼 작은 하나님나라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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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귀고 있습니까?
(기도-말씀묵상)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살리는 천명 수행)
제로점(Zero Dot) 의식의 축복 제로점 의식은 겨자씨 생명의식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신학)
서울 사는 덕으로 여러 가지 편리한 이익이 있음을 알면서도 큰 손실중 하나가 밤하늘 별들을 보수 없게된지 오래라는 사실이다. 하늘이 맑은 초가을 초저녁에, 희미하게 깜박거리는 금성을 비롯한 몇개의 별들을 헤아려 보다가도, 그것들 마져 금방 보이지 않게 된다. 대도시 상공을 덮고있는 두꺼운 미세 먼지층과 공기 오염물질 때문이다. 중동 아라비아 사막에서 밤하늘이나, 지리산 노고단에서 보는 여름밤의 총총한 별들이 그립다.
아폴로계획의 일환으로 1969년에 성취한 지구인의 달 착륙기념 대형사진을 구해서 거실에 걸어놓고 아쉬움을 달랜다. 달표면이 넓게 펼쳐저 있고, 지구라고 부르는 녹색행성은 저 멀리서 캄캄한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엷은 청록색 축구공처럼 좀 외롭게 떠있는 모습을 달 표면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이 사진을 좋아한다.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두가지 부정하지 못하는 엄연한 사실을 재확인하곤 한다. 허허막막한 대우주 시공간 속에 떠있는 녹색별 지구는 우주속에서 한개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생각하는 나의 생명자체도 최장 20년 안에 지구 흙속에 묻힐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른바 제로점 의식(Zero-Dot Consciousness)이 나를 모든 구속에서 해방시킨다.
기하학에서 점이란 위치만 있고 크기나 질량이 없는 기호적 표식이라고 중학교 때 배웠다. 지구표면에 사는 우리들은 지구가 큰 별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우주 속에서 보면 지구는 글자그대로 한개 점이다. 태양계 마져도 한 점과 같다. 하물며 그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연약한 생물체로서 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자전하면서 공전하는 지구의 황도 운행이, 동일한 자리에서 진동하고 있는 점운동과 같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제로점의식이 나로하여금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현기증만 느끼게 하지 않고, 존재의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도록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
이 제로점 의식이 내게주는 자유와 해방감은 무엇보다도 나를 ‘공작인’(호모파베르)으로서의 엄숙한 의무감에서 해방시켜 ‘놀이하는 인간’(호모루덴스)에로 자유감정을 선물로 준다. 그리하여 루터가 경고했던 공로의식과 성취욕망과 그 강박관념에서 나를 해방시켜준다.노동의 신성성과 의무감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러나, 물질재화의 생산분배를 목적으로하는 경제활동으로서의 노동일반은 현대인 모두를 ‘경제동물’로 전락시켰다. 그렇지만,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보노라면, 한국에서 가장 비싸다는 서울강남구에 있는 20억이상 값나간다는 30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나의 청춘세월을 낭비하지 않았던 지난세월의 나의 선택에 대하여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나만이 아니라 단독주택 전세방을 살고있는 동포들에게도 기죽고 살아갈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알고보면 모두 한 개의 점안에서 진동하는 원자들이니까 말이다.
철학자 막스 쉘러가 쓴 『우주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최재희선생이 우리말로 번역한 문고판 명저를 대학생 시절에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에 예수회신부 떼이야르 샤르뎅의 『인간현상』과 함석헌 옹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서론부분을 읽으면서 천체물리학적 관점에서 생물진화론적 관점으로 나의 의식의 지향점을 돌리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세분의 공통점은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허허막막한 대우주속에서, 한 개의 점과 다를바 없는 지구 행성 안에서, 춤추는 소립자같은 인간생명일지라도, 그 나이가 45억년 내지 35억년 먹은 놈이니까 경이로운 눈으로 봐야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제로점 의식’을 또렷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앙리 베르그송이 그의 명저 『창조적 진화』에서 거듭강조하는 ‘생명적인 것의 특징’에 주목하게 된다. 아직도 한국 보수적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세기 제1장 그대로 창조론을 믿는 모양이지만, 진화론적 창조신앙이야말로 창조주 하느님의 오묘한 능력을 더욱더 절감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창조과학회’까지 조직하여 35억년 달려온 생명의 대파노라마를 보지못하게 하는 그들의 독단은 어디에서 오는가? 생명의 진화가 몇천년 몇만년만에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단위가 적어도 몇천만년 몇억년을 거쳐오면서 자연선택이라고 과학자가 말하는 그 변화가 ‘점진적이고 누적적으로’이루어져 왔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생각 못하는 상상력의 빈곤에서 유래한다. 그것도 그럴것이 하루살이 모기가 코끼리 일생을 이해못하듯이, 인간의 시간의식은 고작해야 몇천년 단위나 백만년 단위 이하인 것이지, 그 이상은 실감이 나지않는 추상적 숫자가 되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제로점의식이 내게 가져다주는 둘째 축복은 단연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사랑이다. 지금 65억 지구촌 동료인간들이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조립식 공산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조상대대로 35억년 길고 험난한 생명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온 연어떼들처럼 놀랍게 살아남은 결실물이라는 사실이다. 함석헌의 시구절을 인용하여 노래한다면 사람의마음은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도 모든 형상의 어미니”이다. 인간 생명만이 아니라, 인간종과 더불어 지구촌을 공유하는 다른 생명의 종(種)들이 또한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계획이 경제동물들의 독단과 독선이라는 것이다. 정치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종교신념이 다르다고, 피부색갈이 다르다고, 생명을 함부로 죽이거나 해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계원로중 한분이셨던 장공 김재준 목사가 85세경에 여신도들에게 내려준 휘호의 세글자가 < 生命․平和 ․正義 > 였다는 사실은 깊이 음미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제로점의식이 내게 가져다준 세 번째 큰 축복은 오랫동안 내 안에서 충돌해왔고 나를 괴롭혔던 서로 다른 두가지 견해 곧 인간정신의 초월능력 기원에 관한 실재관의충돌을 화해시켜주는 축복이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하여 독일관념론을 거쳐 현대 헤겔과 훗서얼에 이르는 ‘선험적 주체의 초월론’은 인간정신능력이 지닌 시공초월능력과 자기반성적 사유능력이 인간 본성에 갖춰져있는 선험적 능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의 불성론(佛性論)이나 유학의 심학(心學)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입장이다. 다른한편, 인간정신의 역사성과 시간성에 주목하거나 발달심리학에 정직하려는 사상계열은 고대 헤라클레토스로부터 현대 하이데거와 화이트헤드에 이르기까지, 인간정신의 자기초월능력은 삶의 경험적 과정과 세계구조 속에서 후험적으로 형성되고 구성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제로점의식에서 생각해보면, 두가지 견해는 모두 상대방 견해가 말하려는 근본취지의 어느요소를 받아드릴 때, 더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사람은 ‘세계-내-존재’이다. 세계없이, 삶의 경험없이 유아독존적인 주체적 자기초월능력이란 공허하다. 그러나, 아무리 자연의 자기조직원리와 기능을 현상학적으로 강조하더라도, 35억년동안 ‘점진적으로 누적적으로 생명진화’를 달려온 결과물로서 인간정신의 자기초월능력과 영혼의 영험성이 ‘우연과 필연’의 두 가지 주사위 법칙만으로 가능했다고 믿는 것은 자연과학의 한계초월행위로서 과학적 독단이라고 느껴진다. 35억년 진화기간은 그만두고서라도, 내 엄마의 자궁에서 세포분열을 시작한 그 작은 운동이, 20-30년이라는 찰나같은 시간을 지나면서, 자기를 낳아준 온 우주를 한개 점으로 파악하는 그 정신능력으로 인하여 우주를 도리혀 품고도 남는 현상이 신묘하다. 구상선생님의 <풀꽃과 더불어> 마지막 시구가 생각난다 :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이제 여기 존재한다.”
<겨자씨?>
인간의 욕망은 위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고귀한 욕망은 성령의 욕망입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면,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욕망은 스스로 절제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갈등과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성령을 따라 사는 하나님 아들딸의 욕망이 확실하게 느껴지는가 입니다. 의식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의식을 포함한 전 존재의 문제입니다.
예수는 성령의 욕망을 따라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흥미진진한 도전입니다.
내면의 하나님 아들딸의 겨자씨 욕망(=믿음, 영, 하나님의 의, 도)이
귀하의 삶을 인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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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자.>
기도를 할 땐,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에
조그만 죄도 고백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있게 되는데
그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정말 이 세상 모든 것에 거룩하지 않는 게 없을 것 같아요.
또 혼자 있더라도 긴장감을 놓지 않고 '정신줄'을 붙잡고 있을 수 있는 거 같아요.
제가 한번 실천해 보겠습니다.
- 종로학원 씨알모임 참가학생 후기중에서
씨알의 정신은 겨자씨예수정신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씨알도사 : 씨알예수
씨알은 새롭게 태어난 사람, 용서받은 사람이다.
씨알은 오늘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사는 사람이다.
귀한 오늘 하루를 산다.
요즘 인문학이 실용성(즉, 돈벌이에 도움)이 없어서 인문학 강좌에 관심이 없다.
'벽이 없는 사람'이라는 시에서 쓴 것처럼 씨알은 항상 열려 있다.
씨알은 열려 있는 사람, 하늘과 통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겐 확 뚫리는 것이 쉽지 않다.
마음이 편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생명 아니겠는가?
그걸 마음이 뚫렸다고 표현한 것이다.
씨알은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자기가 누리자는 것이 아니다.
이웃에게 주는 것이다.
씨알은 스스로 하는 존재다.
씨알모임에 참여하는 재수생이 이 말을 듣고 집에서 실천하니 엄마가 놀라더라는 것이다.
20년 동안 집에서 스스로 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수를 하면서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고 이불을 개고 한 것이다.
<씨알담쟁이> 시를 쓰면서 생각나기도 했지만.
설악산에 가서 바위 위에 서 있는 소나무에서 생명의 거룩함을 보았다.
고난을 뚫고 나온 나무.
공부도 출세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사람이 되는 길이어야 한다.
씨알 속에는 하늘 뜻이 담겨 있다.
나는 모든 경전보다 마음에 새겨 있는 경전, 내심경(內心經)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마음 속에 새겨진 하늘의 뜻을 밝혀 아는 것이 명상이다.
경전에 대한 풀이를 듣고 나서도 자기 소리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제소리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제일이고, 그 다음엔 자기 목소리이다.
퀘이커 모임에선 침묵 집회를 하는데 그중에 성령의 감응이 있는 사람이 말을 한다.
이 말은 그들은 실험이라고 하는데 말을 한 사람은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씨알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중개자를 두지 않는다. 하나님과 직통으로 통한다.
씨알은 중간에 관리자를 두지 않고 제 손으로, 노동하고 스스로 벌어서 먹는 사람이다.
기층 민중이야말로 살아있는 예수다.
공부도 씨알답게 살려면 자기 소질을 밝혀서 등한히 하면 안된다.
씨알은 빛이다. 생명이다. 오늘 우리의 젊은이들, 재수생을 보면 자기 모멸감, 열등감, 죄악 등 어둠이 많다. 부모와 의사 소통이 안되는 아이들이 많다.
유영모 선생은 "내가 인류의 생명의 끝이다."라고 하셨다. 내가 인류 생명의 맨 마지막 끝이라고 생각하고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종말론적 삶. 헌신, 열정 등.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자는 뜻같음)
사람 노릇 잘하려면 사람이 창조된 본래의 모습 그대로 살면 된다.
어떤 분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분은 우리가 본래가 부처라고 한다.
씨알 속에 생명이 들어 있으니 각자 개성에 따라 씩식하게 기쁨으로 생명을 싹 틔우고 열매를 맺어, 그 열맹를 이웃에게 주라는 것이다.
씨알이 생명을 틔우려면 자기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게 마음이 하늘에 뚫리는 것이다.
스스로 깨쳐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요한1서 3장 9절을 보면 하나님의 씨앗이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이란 자기가 자라서 하나님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깊게 파고 들어서 드러낸 사람이다.
불교에서 남을 돕는 것을 보시라고 하는데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시를 하는지를 의식하지 않고 해야 최고라고 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보다, 세금을 많이 내서 그것이 사회적으로 복지가 향상되게 하는 것이 낫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생명을 꽃피워야 한다.
노자의 상선약수 (上善若水)
두보의 춘야희우 (春夜喜雨)
이 말들이 다 숨어 있는 성인을 말하는 것이라서 내가 즐기는 글들이다.
가온찍기란 마음의 중심을 화살을 쏘듯이 뚫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사람이 마음이 편하고 뚫려야 하는 것이 모든 도의 궁극의 경지이다.
강화도에서 마을학교를 해달라는 요청이 왓는데 가르치기보다 각자 속에 있는 것을 비추라고 말했다.
스스로 깨우치게 하라.
씨알사상의 핵심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씨알- 생명, 참생명
참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옛날엔 공부는 사람되려고 했다.
씨알의 상징적 의미는 직립인간으로서 땅에서 기어다니다가 하늘을 우러르는 존재가 되었다는 데 있다.
뱀은 땅에 배를 맞대고 기어다님.
(왜 기독교에서 사탄을 뱀에다 비유를 할까? 땅, 즉 육체. 육적인 탐욕과 원초적 본능과 연관지어서 그렇다.
유명모는 사탄, 죄를 불교의 삼독. 탐진치로 설명했다)
정신 마음이 확 뚫려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마음이 뚫린 사람이다.
모든 종교의 핵심은 마음이 편안한 데 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것이 궁극에는 하늘과 뚫려야 한다.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언제나 존재의 충만함과 지고의 희열을 맛본다.
그는 생명의 근원과 결합되어 있어, 이웃이든, 자연이든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있음을 발견한다.
씨알이 주체이면서 우주적 존재이다.
2011. 12. 2.
씨알지기 양성과정 1기생 4학기 마지막 강의를 듣고
수강생 늦비 안창도 씀
<참고자료>
씨알: 벽이 없는 사람
사람은 벽을 높이 쌓을수록 안전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안에 갇혀 살게 된다. 벽중에 제일 높은 벽은 교만의 벽이다.
교만이 자기를 앞세우는 걸 넘어서서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지경에 이르르면 결국 인간관계는 끊어지고, 삶은 피폐해 진다.
이기심의 벽 또한 사람을 자기 감옥에 가두어 두는 무서운 벽이다. 사람이 마음이든 말이든 생각이든 삶이든 재물이든 주고 받을 줄을 모르면 스스로 외로운 섬이 된다.
벽을 허물고 열린 존재가 되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모든 차별의 벽, 편견의 벽, 애증의 벽을 허물려면, 먼저 열림의 근원인 참 마음, 영의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껍데기는 위대해 보여도 결국 허물어지는 것이다.
영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로 열려있는 사람은 확 트여 막힐 것이 없기에 답답함이 없다. 거리낄 것이 없기에, 그를 자유인이라고 한다.
씨알은 세상이 만든 벽이든, 스스로 만든 벽이든, 일체의 벽을 넘어서서 서로 소통하고 상생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학식이든, 재물이든, 지위든, 종교든, 그것이 자기를 높이려는 수단이 되면, 모두 벽이 되어 자기를 막고, 겸손히 베풀려는 수단이 되면, 사랑의 열린 통로가 된다.
씨알은 항상 열려 있다. 사람에게든, 자연에게든, 하늘에게도, 지식이든 종교든 일체의 것들에 대해
씨알선언
나는 우주창조의 첫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생명의 알멩이, 씨알입니다.
내 가슴 속에는 생명을 생명답게 살라는 거룩한 하늘의 뜻이 새겨져 있고,
어떠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생명의 힘이 있읍니다.
나는 땅을 뚫고 나오는 씨알입니다.
나는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어떤 시련도 내 속에서 타오르는 빛을 끌 수가 없고, 어둠은 나를 이길 수 없읍니다.
나는 온 우주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유지하는 씨알입니다. 나의 존재가 온 우주 보다 더 가치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생명다움을 지키지 못할 때 나는 온 우주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살리려고 애쓰는 이 모든 이들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항상 감사하며 내 존재를 통해 하늘의 뜻을 이 땅에 드러내는 씨알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 열매를 맺는 씨알입니다.
나는 사랑입니다. 나에게는 미움이 없읍니다.
나는 씨알이기에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기쁨입니다.
내 생명의 여린 싹은 하늘 바람에 흔들리며 춤추고 노래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나는 나의 삶과 나의 일과, 나의 이웃을 기쁨으로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씨알입니다.
살아있음은 언제나 기쁨이며 감사입니다.
고난과 시련 조차도 생명을 풍성하고 의미있게 하려는 신의 은총인 까닭에,
씨알의 노래를 멈출 수 없읍니다.
씨알: 거듭난 사람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늘에서 받은 깨끗한 씨알 생명, 본래 모습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청정한 생명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에 물들어 더렵혀 졌다.
그러므로 한번 크게 씻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크게 씻으려면 자기가 걸치고 있던 모든 옷들을 - 욕망이든, 생각이든, 습관이든 그 무엇이든 - 남김없이 벗고, 발가벗은 몸으로 하늘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하늘에서 오는 진리의 영으로 투명한 영혼이 드러나기까지 씻음을 받아야 한다. 씻음을 받고 말갛게 떠오르는 자기의 참모습을 되찾는 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난 사람은 하늘에서 오는 순결하고 거룩한 영을 받게 된다. 진리의 영, 성령을 받아 오직 그 영에 따라 사는 것이 씨알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없이는 참 생명을 살 수 없다.
씨알이 참 생명을 사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라 한다. 씨알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간다.
겨자씨 하나가 싹이터서 큰 나무가 되듯이, 작은 씨알 하나가 거듭날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에 이 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은 없다.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발이 더렵혀 질 수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발을 씻어야 하는데 이를 수행이라 한다.
자기를 비우고 하늘과 통함으로써 하늘에서 오는 영으로 몸과 마음과 말과 생각과 행동과 영혼을 씻는 것이 수행이다.
거듭난 생명은 싹이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 그 달콤하고 향기로운 열매를 이웃에게 바친다. 그런다는 의식도 없이 생명의 원리에 따라 그렇게 사는 것이다. 사람이 할 일 중에서 이 보다 더 위대하고 기쁜 일은 없다.
씨알의 하루
달랑 배낭 하나 매고
그 속에 사랑하는 마음 하나 넣고
소풍 나온 듯 가볍게 하루를 산다.
씨알의 삶
하늘에서 오는 생명의 말씀 하나,
그것을 첫사랑 편지처럼 가슴에 적어,
영원히 변치 않을 순결한 사랑의 마음 하나로.
그 말씀을 몸으로 살자는 것이 인생이다.
씨알의 노래
날마다 영혼의 지성소로 간다.
세속의 신발을 벗고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님의 거룩함으로 씻김을 받기위해 발가벗는다.
님의 신령한 기운이 바람처럼 온몸을 휘감으면
이 몸은 갈대피리가 되어
님에게 새 노래를 지어 바친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님이 주신 사랑 노래뿐이다.
목놓아 불러도 들릴 것 같지 않은 시끄러운 세상 한복판에서
님의 사랑 노래를 몸으로 부른다.
씨알의 얼굴
얼굴에서 얼이 빛나는 사람은
걸어다니는 복음이다
그는 그의 얼굴하나로 온 세상을 빛나게하고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전파한다
거짓 얼굴은 가꾸면 가꿀수록 추해진
거룩한 얼이 드러낼 때 사람은 비로서 아름다와지는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
귀는 신에게 이르는 영혼의 통로,
입은 신의 전령
코는 거룩한 목숨의 지성소
얼굴은 하나님의 형상
열린 씨알
어느 날 창문이 활짝 열렸어요
햇살이 그렇게 찬란하고,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줄 몰랐어요.
내가 빛인지 빛이 나인지, 내가 바람인지 바람이 나인지
알 수 없었어요.
창문 하나 사이로 세상은 너무나 달랐어요.
하늘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지 예전엔 몰랐어요.
영혼의 열린 창으로,
신령한 말씀이, 신비한 기운이, 순결한 사랑이
빛처럼 바람처럼 쏟아져 들어와요.
그러니 어찌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어여쁜 그대여, 창밖에 꽃잎이 눈처럼 날리고 있어요.
숲 속에서
숲 속에 있는 것들은 다 거룩하다.
속물 하나가 걸어 들어와도 넉넉히 거룩하게 만든다.
숲속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가지 끝에 물올라 싹을 틔우는 나무처럼
내 영혼에서도 하늘 새싹이 돋아난다.
숲 속에 오래 머물면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푸른 하늘을 날며 노래하는 새 한 마리뿐이다.
기도하고 서있는 거룩한 나무들 옆에 서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나도 나무가 된다.
이 봄에 신비한 숲에서는
예술가 하나님의 창조 작업이 한창이다.
나도 풀피리라도 불어야겠다.
깨달은 씨알
깨어보니 내 자리가 없어졌다.
내 몸도 나도 보이지 않는다.
새장을 벗어나 훌쩍 날아보니 무한한 창공이다.
몸이 없으니 지켜야 할 것도 없고
욕망할 것도 없다.
무한한 허공 속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한 점 씨알뿐이다.
푸른 하늘 바람이 시원하다.
사랑은 옹달 샘물처럼 맑고 영혼은 무한히 자유롭다.
옹근 씨알
물러나 깊은 곳에 숨어사는 씨알은 아름답다.
깊고 깊은 하나님 품에 꼭꼭 숨어서
하나님의 동산 구석 어디선가
수줍은 미소로 들꽃처럼 피어있는 씨알은 아름답다.
가을 햇살에 몸을 말리고 서있는 벌거벗은 나무처럼
세속의 물기가 빠져나가고
가난한 영혼만 남은 씨알은 아름답다.
이제 무얼 해야겠다는 의식도 없이
물처럼 흘러
어느 마른 땅 한구석이라도 적셔
꽃을 피우는 씨알은 아름답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은 자라서 어린이가 된다.
넓고 푸른 바닷가에서 노는 어린아이처럼
삶을 놀이터로 만든 씨알은 아름답다.
이미 마음속에 길이 있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하늘 길이 보인다.
그 길을 힘들이지 않고 소풍 나온듯
느긋하게 가벼웁게
가는 사람,
이미 영혼의 산에 오른 씨알은 아름답다.
씨알도사
노자를 읽으면서 깊이깊이 깨닫게 되는 것은
노자는 바로, 이름도 없이 숨어서 약하고 어리석은 듯,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하늘의 도에 통한 씨알도사라는 것이다.
씨알도사는 가지고 쌓으려 하지않고 자기를 비우고 또 비워, 물처럼 항상 자기를 쏟아,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함으로써 만물을 살려내는 사람이다.
씨알도사는 가식적이거나 위선적이지 않고, 자기를 내세우거나 거만하지 않으며,
억지로 작위적으로 무슨 업적을 세우려하지 않고, 들꽃처럼 어느 구석에 숨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기 존재를 그 향기로 말할 뿐이다.
씨알도사는 자신만의 거룩한 세계를 갖기 위해 속세를 떠난 사람이 아니고,
세상의 한복판에 살면서 항상 이웃과 더불어 잘 지내고, 그 풍속을 즐기는 낭만적인 사람이다.
씨알도사는 하늘이 자기에게 준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 일이 지니는 본질적 가치에만 충실할 뿐,
그 일이 주는 부대적 가치에는 관심이 없다.
예컨데, 씨알도사인 농부는 사과나무 한그루를 길러도
그 사과가 햇살과 바람같은 하늘의 기운과 흙과 물과 자양분 같은 땅의 기운과
자신의 땀과 노력이 결합된 우주적 산물로 알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이렇듯 도를 닦아 하늘의 도에 통한 사람은
걱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거만함도 없고 비굴함도 없고,
오직 기쁨으로 자기를 바쳐 이웃을 위해, 이웃과 더불어 존재할 뿐이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무한경쟁 속에서 오직 남을 이기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이런 야만적인 자본주의 시대에, 나는 감히 우리가 그런 싸움을 중단하고
영혼과 정신과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써,
노자가 말하는 씨알도사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참된 구원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 글쓴이: 홍성한
글쓴이 소개: 61세. 서울대 사대 교육학과 졸, 전직 교사, 전두환 정권때 한울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으로 투옥, 현 씨알재단 운영위원, 현 씨알공동체 운영위원, 종로학원 씨알모임 인도자 로 현재 강화도에 귀촌하여 사시고, 길희성 교수님이 강화도에 세우신 <심도학사尋道學舍>에서 학생으로, 강사로 참여중.
<춘야희우>
두보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때맞은 비 시절을 알아,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이 봄에 내리니 만물이 소생하는구나!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비는 바람 따라 이 밤에 몰래 스며들어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신다.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 들길엔 구름 얕게 드리워 어둑어둑하고,
江船火獨明(강선화독명) 강 위의 조각배 외로운 등불 깜박인다.
曉看紅濕處(효간홍자처) 이른 아침 분홍빛으로 젖은 곳 보이니,
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금관성에는 꽃이 활짝 피었네!
春夜喜雨(춘야희우): 봄 밤을 적시는 단비
두보의 시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절제되어 있다.
두보가 살아온 삶 자체가 그러하다.
전란,기근 등으로 좌절의 끝을 경험한 그의 평화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지도 모른다.
두보는 말년을 자연에 흠뻑 젖어 살았다고 한다.
청빈하게 살아온 그의 삶만큼이나
두보의 시는 소박하다..고
라고 인터넷에선 시를 해석하나,
홍성환 씨알님은 때를 모르게 저홀로 핀 꽃처럼
우리네 도(道)란, 혹은 믿음이란 그렇게 은밀히 깨닫게 되고 성숙케 되는 것이 아닐런지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를 쓴 두보도 생각치 못한 시의 경지를 홍 씨알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숨어 있는 예수'처럼
첫 번째 종교개혁이 성직자의 손에만 있던 성경을 평신도의 손에 넘긴 사건이었다면, 오늘날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두 번째 종교개혁은 아직도 성직자의 손에만 있는 사역을 평신도의 손에 넘겨 평신도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주체적 사역자가 되게 하는 데 있다.<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가치kingdom's value 내면화>
가. 겨자씨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이며, 주님이 설계한 이 땅의 작은 하나
님나라입니다.(마태복음 13장 31-32절)
나. 겨자씨나라에 새로 출석하는 성도는 예외없이 겨자씨나라 사역 비전에 대한
교육과정을 수료해야 합니다. :
(내용: 뉴스앤조이 링크)
1. 겨자씨나라 복음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3796
2. 예수는 누구인가?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3843
3. 겨자씨 영성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3089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4955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5284
4. 겨자씨나라 생활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3858
5. 다문화, 다종교 사회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3869
(특강) 목회 정신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4150
創造主의 卑下, 자기 부정 통치자(統治者; ruler)나 지도자(指導者: leader)가 지녀야 할 아주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자기부정(自己否定: self-denial)이다. 여기 자기부정은 비움과 낮춤이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나눔과 세움을 목적한다. 놀랍게도 우주와 인류 사회의 진정한 주인(主人)이며 통치자인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구원주와 만유의 주(主)인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자기부정의 모범을 직접 보여 주었다. 자기부정이 모든 통치 철학과 리더십의 핵심 정신임을 강조한다.
자신의 기쁜 뜻에 따라 창세 전에 세워진 작정(엡1:4-5절)대로 하나님은 천지(天地)와 그 가운데 만물(萬物)을 창조했다(창1장, 계4:11절).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기 직전 말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절) 여기 인간 창조 목적이 잘 기술된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후 말했다(창1:27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절) 이를‘문화 명령’또는 ‘문화 사명’(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른다. 이 명령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의 일 -‘만물 통치’- 은 피조물 인간의 일이 되었다. 앞으로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 인간을 대리 통치자 즉 지도자로 내세워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대리 통치권 덕분에 피조물 인간은 신(神)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을 비우고 낮춤으로 가능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 존재하는 수직적(垂直的)이고 종속적(從屬的)인 상하(上下) 관계를 고려한다면 하나님의 비움과 낮춤은 인간에게 향한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은총이었다.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하나님은 당연히 그렇게 사랑해야 했다. 문화사명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은 하나님 나라 신학과 통치 철학 또는 리더십에 관련하여 자기부정이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창설했고 그곳에 인간이 살도록 조치했다(창2:8절). 그리고 아담에게 명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절) 선악과 규례라는 명령을 받아드림으로 아담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호6:7절). 이 계약을 언약(言約: covenant)이라고 부른다. 언약의 조건은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면 언약의 약속은 아담이 지상 낙원 에덴에서 계속 사는 것이다. 계약은 대등한 관계에서만 맺어진다. 그러나 이 언약 체결에서 당사자들 사이 차이는 너무나 크다. 한 쪽은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다른 쪽은 그의 피조물 아담이었다. 언약 체결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은 또 다시 자신을 비우고 아담 수준으로 낮추어야 했다. 이 덕분에 인간은 하나님과 대등한 언약 당사자가 되었다.
창조 언약은 흙에서 난 비천한 존재인 인간을 하나님 앞에 영광스런 인격적 존재로 세웠다. 이 점에서 창조 언약은 인류에게 쌍방적이며 조건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 언약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선악과 규례라는 언약(言約)도 하나님 나라 신학과 통치 철학 또는 리더십에 관련하여 자기부정이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선지자 이사야는 앞으로 나타날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해 소개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43:7절) 구원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뜻이다(고후5:17절). 그렇다면 이 성구는 타락 이전 인류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였는가를 간접적으로 잘 설명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은총(恩寵)은 물론 쌍방적이며 조건적인 언약(言約)에 기반을 두고 인류와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 이 사랑을 위해 하나님은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야 했다. 이것은 인류 사회의 모든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이 따라야 할 리더십이다. 이들은 사랑의 동기에 바탕을 두고 은총과 계약이라는 두 관계에 기반을 둔 문화 사명(창1:28절)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아담의 타락 후 이 개념들은 동서(東西) 세계로 각각 나뉘며 발전했다. 동양 문화에선 은총이 지배 개념이다. 그러므로 동양 사회는 수직적이며 종속적이며 높은 자의 은총에 주로 의존한다. 반면 서구 문화에선 계약이 지배 개념이다. 그러므로 서구 사회는 수평적이며 평등한 계약 관계에 근거한다.
농업 시대까지 인류 사회는 주로 지도자에 의존하며 발전했다. 이 때까지 은총 문화가 세계를 지배했다. 18세기 이전 동양 사회가 서구 사회보다 앞선 이유였다. 그러나 산업 시대 이후부터 한 사람 지도자에 의존하는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렸다. 이 때부터 계약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서구 사회가 동양 사회를 앞서기 시작한 이유였다. 나라나 사회 개발의 초기 단계에서 한 사람의 능력 있고 강력한 지도자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류 사회가 발전하여 세분화되고 다원화(多元化)될수록 지도자보다 공동체 구성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 이 때는 servant-leadership이 더 요구된다. 즉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代理) 통치자로서 인류 사회의 공동 번영을 위해 종(從)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의식을 뜻한다. 그럼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말하는 성경적인 통치 철학 또는 리더십은 무엇인가? 통치자 또는 리더는 하나님의 대리자(代理者)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의식을 갖고 은총은 물론 계약에 기반을 두고 구성원들과 관계해야 한다. 우선 지도자는 모든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공유(共有)할 수 있는 목적을 사랑의 동기에서 세워야 한다. 이 목적 달성에 기쁘게 참여하도록 구성원들을 세워주는 반면 자신은 비우고 낮춰야 한다. 이 비움과 낮춤은 자신이 가진 권력과 권세를 지혜롭게 나누어줌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 나눔은 동시에 계약 관계에 의해 공적(公的)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이 계약에 따라 지도자와 구성원들 사이 인격적인 평등이 보장된다. 이렇게 지도자는 아래 사람들을 세워준 후 사랑으로 격려하여 일을 잘하도록 도와주고 공동체가 목표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경영하는 매니저(manager) 역할을 한다. 문화 사명의 은총(恩寵) 사상과 선악과 규례라는 언약(言約) 사상이 가르치는 통치 철학이나 리더십은 세상 조직만 아니라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타락 이전 교회와 세상은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의 통치 철학이나 리더십은 인간 대리자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나 교회 역사가 증명하듯이 하나님은 항상 인간 지도자들을 통해 세상과 교회를 지금까지 통치하기 때문이다(롬13:1-2절). 그렇다면 교회나 세상의 지도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 원리를 본(本)으로 삼아야 한다. 인간 통치자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도록 권력과 권한을 분산하는 것 – 이것이 성경적인 리더십이다. 통치자나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恩賜)에 따라 몸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지체(肢體)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성경의 지체이론(고전12:12-27절)에서 잘 설명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후진적(後進的)인 분야는 정치와 교육과 종교이다. 이들 분야에서 유교의 가르침인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가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며 그 만큼 지도자들은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권위를 부정하기 싫어한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을 비우고 낮출 때 권력 분산은 가능하며 그 때 이들 분야도 발전할 것이다. 그 동반 효과로 경제 분야를 비롯한 사회 전반이 더욱 발전할 것이다. 이 모두 권세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지도자들이 부정할 때 가능하다.
자기부정은 인간 사회와 교회의 성장을 약속한다. 아울러 성화(聖化)와 목회(牧會)의 최절정(最絶頂)에 달하도록 돕는다. 교회개혁과 신앙 삶을 위한 자기부정(쿰란, 장창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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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돌팔이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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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이 떠난 자가 돌팔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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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락경 목사는 비정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학력적인 자격보다 희생 정신과 성령이 충만한 영적인 자격을 갖췄다. ⓒ뉴스앤조이 유영 | 2011년 8월 16일 KBS 아침마당에 임락경 목사님이 출연하였다. 그분은 자신 스스로 돌팔이 목사라고 했다. 중학교 중퇴하고 목사가 되었으니 초등학교 학력으로 목사가 된 것으로 돌팔이 목사라는 것이다. 정규 신학교에 갈 수 없어서 비정규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희생과 섬김 정신으로 평생을 헌 옷만 입고 살았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의 이력이었다. 임락경 목사는 30년째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는 사회 복지가이자 유기농 농부 겸 민간요법을 개발하였다. 17살 때부터 빛고을 동광원에서 이현필 씨의 가르침을 받으며 결핵 환자들과 15년을 지냈고 군인으로 복무했던 강원도 화천에 터를 잡아 1980년부터 시골 교회를 꾸려 가면서 중증 장애인 등 30여 명을 돌보는 한편 유기농 된장과 간장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가장 아름다운 이력은 '맨발의 성자'로 불렸던 이현필(1913~1964)의 제자가 되어 영성 수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며 결핵 환자와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경력과 저술도 화려하다. 정농회 회장, 북한강유기농업운동연합 초대회장, 화천군 친환경농업인연합회 초대회장, 상지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감리교 제2연수원에서 '임락경의 건강교실'을 10년째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세상을 쟁기질하는 바보들의 시골집 이야기>, <돌팔이 잔소리>, <촌놈 임락경의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 <흥부처럼 먹어라 그래야 병 안 난다> 등이 있다고 소개되었다.
사람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진다는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생애를 변화시킨 첫걸음은 교회였고 목사님이었으며 성경이었다. 목사님의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보니까 비록 무인가 신학교 출신 돌팔이 목사이지만 자기도 목사가 되어 있었고 이웃을 돌보는 사람으로 변하여 있었다는 간증이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진정으로 예수님을 닮아 가는 목사님이셨다. 그분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 실천하는 목사님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목사란 무엇인가?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후 총회에서 시행하는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여 1개 년 이상 교역에 종사하고 노회 고시에 합격하고 청빙을 받은 자라야 한다(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제15장)." 이것은 한 교단의 목사의 자격이다. 성경에서 직분을 줄 때의 자격하고는 많이 다르다. 성경에서의 자격은 오로지 '믿음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 6:3, 5)'이였다. 현 헌법에 나타난 목사의 자격을 부인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그런 학력적인 자격을 가졌는가보다는 초대교회가 보여 준 '믿음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영적인 자격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학력을 요구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학력을 넘어 학위로 욕구를 채우려는 사욕에 사로잡혀 있다. 목사를 초빙할 때 먼저 학력, 학위를 따진다. 박사 학위가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박사 학위를 우려먹는다. "우리 목사님은 박사 출신이야" 하고 말이다.
학위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어느 분이 말했다. 박사 중에는 그래도 독일 박사를 알아준단다. 제대로 논문도 쓰고 학위를 받기 때문이란다. 가짜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여튼 그렇다고 치고 박사라는 것이 무엇이냐? 먼저 간 선배들이 써 놓은 자료들을 검색하고 발췌하여 간추려서 틀에 맞게 만들어서 학위를 따는 것이 아니던가? 거기에 자신의 창작물이 있던가? 있다면 몇 개나 있던가? 그저 먼저 써 놓은 논문이나 서적의 수집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으로 평생을 우려먹고 사는 것이 아니던가? 필자도 교수를 하다가 보니까 박사 학위를 몇 개 가지고 있는데 글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요새 더욱더 바울 사도의 말씀이 감동적으로 와 닿는다. 진짜 사도 중의 사도요 간증 중의 간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이런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목회자의 자격이 아니겠는가?
교회들이 담임목사님을 초빙할 때 박사 학위를 선호하는 것은 어차피 성령 충만하지 않을 것이니 겉모양이라도 화려한 사람을 세워 우리 교회 체면을 구기지나 말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문제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은 주님의 영이기 때문이요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며 성령이 거하지 않는다면 더는 교회도 아니요 목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하신 일은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신 일이다(창 1:2).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며 하나하나 창조하시면서 '좋았더라, 좋았더라'를 연발하셨다. 거룩하신 성령님이신 하나님의 영이 동참했을 때 비로소 '좋았더라'가 나온다는 이야기다. 창조 세계에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운행하셨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운행하셨다.
"예언(성경)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그리고 그리스도인 안에도 성령님이 운행하셔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값(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의 피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거주할 때 탐욕스런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순수하게 주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신자나 목회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돌팔이 신자나 돌팔이 목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돌팔이인가 아닌가? 그것이 문제로다. | |
다. 겨자씨나라 일반 사역자로 활동하고자 하는 분에 한하여
1. 성경통독반 졸업 - 60분*80주
; 키 워드-하나님나라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
2. 매월 영성 도서 1권 읽은 후, 서평 작성 제출(12권 이상, 각 A41장)
; 필독-*한국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이학준, 새물결플러스)
*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
*나와 너(마르틴 부버, 대한기독교서회)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헨리나우웬, IVP)
*신학과 사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대천덕, CUP)
세상이 묻고 진리가 답하다 A Place for Truth(IVP, 달라스 윌라드 편)
*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한길사)
씨알사상(박재순, 나녹)
씨알 함석헌 평전(이치석, 시대의창)
예수의 정치학(존 하워드 요더, IVP)
하나님의 정치(짐 월리스, 청림),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바꾸는 7가지 방법
*자존감, 친밀함(이무석, 비전과리더쉽)
*예수전(김규항, 돌베개)
*새로운 교회가 온다(마이클 프로스트, IVP)
*설교란 무엇인가(정용섭, 홍성사)
삶이 메시지다(김기석, 포이에마)
정의론(존 롤즈, 이학사)
무엇이 정의인가?(이택광외, 마티),
-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이 던진 도덕적 딜레마 정의와 민주주의, 계급적대, 폭력의 문제
*인간의 관계 경험과 하나님 경험(한국심리치료연구소)
정신분석학의 위협 앞에 선 기독교 신앙(돌토, 다산글방)
*역사와 해석(안병무, 한국신학연구소)
*수도생활의 향기(엄두섭, 은성출판사)
예수의 생애(르낭, 창)
기독교의 심장(마커스 보그. 한국기독교연구소),
*기독교조직신학V-종말론(김균진, 연세대학교 출판부)
빛나는 밤(십자가의 성 요한, 분도출판사)
신은 뇌 속에 갇히지 않는다(21세기북스)
*교회개혁과 신앙 삶을 위한 자기부정(쿰란, 장창수)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정태인외, 철수와영희)
대한민국 욕망 보고서(신승철, 당대) 생태철학
3. 사역자 영성 훈련(3박 4일) 졸업
: 동양적 기독교 영성I
4. 기독교 세계사 특강 수강 소감문 제출(A4용지 2장)
; 필독-세계기독교 평사(조효근, 들소리)
5. 사역자 서약서 제출 - 별도 서식
라. 전문사역자, 해외선교사 또는 독립적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분에 한하여
1. 인터넷선교사대학교 신학대학원 http://www.iwmu.com/database/main.php , 느헤미야 신학연구원 http://www.nics.or.kr/, http://igojesus.or.kr/sub02.html
길르앗문화원 상담신학원 등 수강(선택)
2. 상담학개론서 독후감 및 정신분석학 특강 수강 소감문 제출(A4 각 1장)
;필독-*대상관계이론과 정신병리학(Frank Summers, 한국심리치료연구소)
3. 겨자씨나라 영성형성 아카데미 과정 졸업 - 이론과 실제 60분*50주, 2박 3일*2회 : 동양적 기독교 영성II
4. 겨자씨나라 설립 및 운영계획서 제출(A4 용지 4장)
마. 기타 특수사역자(예술선교, 스포츠선교,치유선교, 교육선교, 기타 직업선교 등)로 활동하고자 하는 분에 한하여
- 해당 분야의 사역계획서 제출(A4 용지 4장)
바. 공통사항
사람을 세우는 것이 참 성전건축이라는 겨자씨나라 정신에 따라, 모든 사역자들을 위해, 운영(장학)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특별헌금 등 적극적인 지원방안을 강구합니다.
- 목사 안수는 의무사항이 아닙니다. 단, 전문성과 영성의 구비만을 강조합니다.
- 훈련후, 모든 사역자는 원칙적으로 자비량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 겨자씨나라식구, 사역자 그리고 겨자씨나라 인터넷 말씀묵상나눔이 및 관심이는 매년 12월 첫 주 설립기념모임(겸 그 해 송년 모임)에 참석하여, 수행 및 사역에 대한 나눔(sharing)에 참여해야 합니다. 단, 해외거주자에게는 형편을 고려하고, 운영위원회 결의를 거쳐, 여비실비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할 수 있습니다.
사. 기타 신앙, 영성형성 도서
균형잡힌 신앙인을 위한 독서목록: 박철수목사추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 休)이 있는 모임
無自我 생활, 萬人 사역
나 하나 바로 서는 것이 개혁의 모든 것이며,
한 사람 바로 세우는 겨자씨운동, 사역의 모든 것이다.
영성형성 참고자료
첫댓글 새신님이 천기님인가요~???
네. 안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