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여행블로거기자단
 
 
 
카페 게시글
경상도 추천여행지 스크랩 [경북/영양] 가난한 부자들을 위한 정신교육지침 마을, 두들마을 #3-2
길손旅客 추천 0 조회 66 11.04.15 12: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정신까지도 아름다운 마을을 만나다.

영양 두들마을 #3-2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전통을 이어 오면서

정신을 버리지 않는 마을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을 실천하는

양반네를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현재에 이르러 귀감이 되는 우리네 선조의 대민정신,

아울러 고택과 함께 할 수 있는 산책으로 추천할 수 있는 두들마을입니다.

 

 

고택의 빛이 좋은 두들 마을 유우당

 

두들마을,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 선생이 1640년 터를 잡은 곳으로, 시대의 훌륭한 학자와 시인, 독립운동가등을 배출한 마을이다.

마을에는 석계고택, 석계초당등의 전통가옥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전되어 있으며 다시 중수하면서도 크게 넓히거나 하려하게 장식하지 않는다. 옛 모습 그대로 재현을 하고 있다. '마을 들머리에 화매천이 흐르고, 나즈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곳으로 시냇물이 산태극, 불태극으로 굽이 돌아 시냇물과 맞닿은 언덕머리에 자리한다' 하여 '두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석계 이시명(석계 이시명, 1590~1674)선생,

퇴계의 전통학맥을 이은 석계선생은 생원에 올랐으나 입신양명에는 뜻을 두지 않고 지절을 지키며, 일생을 학문 연구에 바친 학자다. 조선조 영남 명문가로 손 꼽히는 운악 이함의 셋째 아들로 1636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치욕에 대명절의의 뜻으로 고향을 떠나 산간벽지였던 영양으로 들어오게 된다. 맑은 시냇가 바위 위에 터를 잡고 '석계초당'이라 하였고, 이후 조정의 벼슬을 모두 거부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석계 선생이라 부르게 된다.

 

남편 못지 않은 훌륭한 학자이자, 재령이씨 가문을 명가로 만든 인물, '정부인 장씨'가 있다.

석계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가를 이어 가는데, 그 뒤에는 정부인 장씨, 장계향(1598~1680)선생이 있다. 탁월한 부덕과 식견, 온유함을 두루 갖춘 정부인 장씨는 석계 선생의 아내이자, 조선 중기 대학자 경당 장흥효 선생으로 석계 선생의 스승이자 경당 선생의 무남독녀 외동딸이다. 결혼 무렵의 석계선생은 1남1녀를 두고 사별한 상태로 스승인 경당은 자신의 외동딸을 애제자와 혼인을 시킨 것이다. 이로 19세에 결혼하여 60년 세월동안 모두 7남3녀의 훌륭하게 길러낸 여성군자다. 말년, 3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국가적 지도자에게 부여하는 산림으로 불림을 받으며 이조판서를 지내자, 법전에 따라 정부인의 품계를 받게 된다. 시, 서, 화에 능하였으며, 또한 자손들을 위해 쓴 요리책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을 완성했다. 작가 이문열의 13대 할머니이기도 한 정부인 장씨는 1999년 11월의 문화인물로도 선정 된 바 있다. 

 

훌륭한 부모, 그리고 훌륭하게 자라난 후손들, 7산림(七山林) 7현자(七賢者)

두 선생의 아래에서 지낸 후손들 역시 훌륭하게 자라게 되니,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은 국가적 지도자에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아 이조판서를 지낸다. 산림이란,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연구한 사람으로 나라의 부름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또한 퇴계 선생의 학통을 전승한 학자들로 석계 선생과 맏아즐 정묵재 이상일, 둘째 존재 이휘일, 넷째 항재 이숭일과 손자 고제 말, 밀암 재를 두고 7산림이라 부르며, 학행이 뛰어난 영남학파의 중심 인불로 석계 선생과 정부인 장씨, 그리고 일곱아들을 7현자라 이른다.     

 

 

좌)광산문학연구소, 우) 정부인장씨예절관

 

 

노블리스 오블리제,

두들마을 석계선생과 정부인 장씨의 삶의 흔적을 살펴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떠 오르게 된다. 운암 선생의 가르침인 "지고 밑져라"라는 말처럼,

가난한 백성을 위해 늘 대문과 고방을 열었던 청빈가로도 알려진다. 이는 소설 '선택'에서 임진왜란이 나자 집의 청고를 풀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데도 앞장섰다고도 알려져 있다. 부유하였으며 권력을 쥐고 있는 양반세도가였으나 타락하지 않았으며, 민초들을 위하는 대민정신 이 머저 였다. 부자이기에 권력자이기에 실행에 옮겼던 옮은 행동과 가치관을 가졌던 이함선생의 삶을 엿 볼수 있다.

지금의 되먹지 못한 정치나부랭이 호로새퀴들은 쥐새키 똥치우는데만 급급하니, 소귀에 경읽기요, 어불성설로 과연 새겨나 들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두들마을에서 눈여겨 볼것이 하나 있으니,

고택의 앙와다. 보통 지붕 기와의 마감으로 앙와를 쓰는데, 두들마을의 고택에는 이러한 앙와가 없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무언가 허전한 모습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수백년 재령이씨의 전통이라 한다.

그 이유의 첫째가 '미완의 작품을 남기어 놓는다'라는 뜻을 담는다. 곧 겸손을 뜩하는 의미로 아직도 이 집은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두번째는 '수수함'을 가지기 위함이다. 사치스럽지 않은 청빈가로서의 선비의 마음을 고택의 앙와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득 두들마을을 돌아 보며 느낄 수 있는 청빈, 대민, 그리고 학자와 시인들의 삶, 가기에 더하여 고택의 아름다움을 한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영양으로의 여행,

두들마을로의 산책을 적극 추천한다.

   

 

정부인 장씨 예절관

정부인 장씨의 삶을 살펴 볼수 있는 곳으로, 경당 장흥효의 무남독녀로 경당의 제자 석계와 혼인을 하였다. 이로서 재령 이씨 가문을 명가로 만든 인물로 시, 서, 화에 능했던 문인이자, 여성군자다. 예절관은 정부인 장씨의 이름을 딴 예절관으로 2005년 10월 준공되었으며, 강당과 전시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고, 주방을 두고 있다.

2006년부터는 '음식디미방'에 쓰인 조리법대로 전통음식을 오늘에 재형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며, 학생과 성인들을 대상으로 예절교육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석계고택(石溪古宅, 도민속자료 제91호)

조선조 인조와 현종 연간의 학자 석계 이시명선생의 고택이다. 대명절의를 지킨다는 뜻으로 병자호란 이후 세상과의 인연을 끓고 영양으로 들어와 석계위에 집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 하였다. 안동 대명동에서 석계선생이 돌아가시자, 넷째 아들이 이숭일이 모친 정부인 장씨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와 선인의 옛터를 중수하고 당호를 항재라 하였다.

'一'자형의 사랑채와 안채를 흙담으로 막아 허실감을 메우고 '뜰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여, 사랑채에는 대문을 중심으로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두었다.

 

 

 

 

석천서당(石川書堂, 도문화재자료 제79호)

석계선생이 영해부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초당을 짓고 유생과 자손들을 가르친 곳으로 영조46년(1771년0에 고쳐 지으며 당호를 석천서당이라 했다. 이후 고종28년(1891년)에 중건한 모습이 현재의 모습에 이른다.

서당에는 대산 이상정이 쓴 석천서당기를 비롯하여 석계기, 갈암 이현일 및 남곡 권해의 차운, 운악대훈, 좌해 이수영의 중수기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안릉세전, 석계선생문집, 정부인장씨실기, 정묵재선생문집, 항재선생문집, 냉천집등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석천서당에 걸려 있는 시판의 내용

"석양녘 귀로 길 어둡기만 한데,

홀로 가는 길 더욱 깊고 험하니 수심만 가득하구나.

디집은 어디엔가 사립문 닫혀 있고,

구름 덮힌 산기슭만 석계물가에 빙 둘렀네"

 

 

 

유우당(惟宇堂, 도 문화재자료 제285호)

석계 선생의 둘째형인 이상도 선생이 지은 살림집으로 몽구 이병각 시인의 생가다. 유우당이라는 이름은 이상도 선생의 첫째 아들 이기찬의 호를 따른 것이다.

몽구 이병각(1910~1941)은 항일시인으로 1930년대 중반에 문단에 등장하여 활발한 활약을 했다. 조지훈, 오일도, 조세림과 함께 항일 애국시인으로 활약하였다.

사당과 함게 전형적인 민가 건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사당은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두들마을 병암고택

현재 한옥민박체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5~6인용 방과 3~4인용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체험료는 4만원에서 6만원으로 안방과 사랑방, 문간방등으로 구분 되어진다.

 

길손이 머물던 병암고택의 안방으로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유일의 방이며, 어른 대여섯은 넉근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

 

 

by 박수동 

www.gilson.asia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