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 :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벧후1:5-7, 약1:26-27)
2024.9.1, 김상수목사(안흥교회)
경건과 경건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르다. 예전에 남대문 상가에 욕쟁이로 소문난 어느 권사가 있었다. 그 권사는 새벽에 지방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가게에서 물건을 구경만하고 그냥 나가면, 그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꼭 한 마디를 덧붙였다고 한다.
“내가 권사만 아니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오래 전에 경기도 모(某)처에 신령한 은사를 받고 신유와 예언기도를 해준다는 어느 집사가 있었다. 그분이 기도해주는 모습을 보았던 사람들에 말해 의하면, 그분은 자기에게 기도를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신경질적으로 반말이나 욕설에 가까운 폭력적인 표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고 한다. 심지어 며칠간 성령께서 잠도 못자게 했다고 하면서 얼굴이 헐쑥해져 있기도 했다. 그래서 그 말을 전해 준 분에게 “그런 모습들은 성경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그 분에게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몇 개월 후에 불발된 기도응답과 돈 문제로 몇 사람에게 고소당해서 경찰에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황당했던 것은 그분에게 기도를 받으러 갔던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는 커녕 “OOO는 사람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 당시에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없었던 종교인들과 유사한 모습이 아닐까? 이러 종류의 모습들은 경건이 아니라, 경건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 반대되는 일도 있었다. 서산에서 사역할 때의 일이다. 주중에 낮 시간에 혼자 교회에 나와서 나지막하게 찬송을 부르면서 자주 이곳저곳을 청소하는 어느 권사님이 계셨다. 멀리서 들으면 나지막한 찬송소리가 마치 천사의 노래처럼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에게 “아무도 안하는데, 왜 권사님만 이렇게 혼자 나와서 청소 하세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무도 안하니까 제가 하죠.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교회도 내 집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매일 내 집을 청소하는 것처럼, 당연히 교회도 청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와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꼭 천사 같아요”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랬더니 70세에 가까운 권사님이 목덜미까지 빨게 지면서 수줍은 듯이 웃으셨다. 경건과 경건처럼 보이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오늘 본문 말씀인 베드로후서 1장 6절 말씀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성도들이 더욱 힘써야할 신앙적인 덕목들을 열거하면서,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고 강조했다.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그토록 강조했던 경건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쓰인 경건(유세베이아)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근신하는 것을 뜻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삶이나 태도는 경건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모든 것보다 위에 놓고, 섬기려는 특징을 보인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늘 최우선을 두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도의 경건한 삶을 청교도 신학의 거장인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종교 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경건이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하려는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여주동행(與主同行)이 성경적인 경건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은 관계적이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고(사랑), 그 다음은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이웃, 자신)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주신 자연환경과도 올바른 관계(보호, 보존, 관리)를 갖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세 가지가 성경적인 경건의 방향이다.
그렇기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도답지 않은 열매가 계속해서 맺힌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지를 체크해 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바로 야고보서(JAMES)이다. 이들 중에서 이 시간에는 특히 사람과의 관계(이웃과 자신)에 대한 부분을 좀 더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오늘의 또 하나의 본문인 야고보서 1장 26-27절 말씀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의 방향을 좀 더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다. 다함께 읽어 보자.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6-27)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역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지 못하고 더러운 경건도 있다는 말씀도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지 못하고 더러운 경건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것(=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말, 덕스럽지 않은 말이나 말투 등)과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자신에 대해서 정직하지 못함, 위선, 가면)(26절),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27절) 그리고 자신을 세속에 방치하면서 지키지 않는 것이다(27절).
본설교자는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질문해 보았다. “그럼 나는 경건한가?” 대답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그러면서 재차 질문했다. “그러면 경건해지려고 노력은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여러분은 어떤가? 우리 모두는 완벽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특히 성도들 사이에는 더욱) 환란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몸이 아픈 분들도 많고, 마음이 아픈 사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또는 영적으로 아픈 사람도 있다. 각 사람의 상황에 맞게 돌아보고, 격려하고, 그의 필요를 섬기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천만관객을 동원한 영화중에 [명량]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 보면, 이순신 장군의 배가 선두에서 싸우다가 회오리치는 울돌목 물결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가 절망적으로 생각할 그때 일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작은 배를 몰고 와서, 밧줄을 연결하고 대장선을 구해내는 장면이 있다.
** 명량해전, 물살을 빠져나오는 장면 - https://www.youtube.com/watch?v=Y2kRId45dhM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도 온갖 종류의 회오리치는 세상 풍파와 죄악의 물결 속으로 빠져가는 사람들을 모두가 힘을 합해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배처럼 리더의 배가 빠져갈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환란에 처할 수도 있다. 그때 중보기도와 사랑의 밧줄들을 연결하고 힘을 다해 끌어내야 한다. 이것이 “환란 중에 돌아보는” 올바른 경건의 모습이다.
그런데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을 보면, 경건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만 끝나지 않는다. 성경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성결하고 정직할 것을 강조한다. 사실이 이것이 더 근본적인 것일 수 있다.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6-27)
“또 자기를 지켜”라는 말씀은 역으로 나를 세속에 물들이고, 하나님으로 부터는 멀어지게 하려고 공격하는 존재가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분명히 있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누구인가? 우선 가장 먼저 마귀 사탄의 미혹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자신 자신을 자꾸 죄에 방치하고, 마귀의 미혹에 방치하는 것이다. 죄는 중독성이 있다. 자꾸 죄를 허용하면, 나중에는 생각이 마비되고, 영적인 감각이 무뎌져서 오히려 죄를 즐기면서 중독이 된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 말씀에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했다. 여기서 쓰인 “지킬만한 것(미쉬마르)”은 ‘둘레에 울타리를 치다’, ‘둘러막다,’는 뜻이 있다. 폭우로 내린 물이 고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땅을 높이든지, 울타리나 제방을 쳐야 한다. 그런데 시편 119편 11절 말씀에 보면, 우리의 마음에 쳐야할 울타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말씀의 울타리, 제방).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성도는 경건해 보이려는 사람이 아니라,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열매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성결한 관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동네, 지인, 성도들과는 더욱)과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성결하고 정직해 지기를 힘쓰자. 이렇게 될 수 있도록 매일 마음과 생각 속에 말씀의 울타리를 단단히 치자.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