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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와 함께하는 사목 스태프
이 글은 <가톨릭평론> 39호(2023년 봄)에 실린 글입니다. - 편집자
사목 스태프로 살아가기
전국의 모든 성당이 난리다, 큰일이 났다고 다들 개탄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냐면 ‘청소년·청년 미사에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팬데믹 장기화 때문에 그렇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인구수 감소로 당연히 줄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청소년·청년이 줄어서 큰일이라는 이 말은 20년 전에도 들었고, 앞으로도 교회가 계속되는 한 계속 따라다닐 말일 것이다.
교회는 청소년·청년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그들의 성장과 신앙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왜 교회를 떠나는지, 왜 교회에 흥미를 잃어 가는지에 대해선 원론적인 이야기와 땜질식 처방만 할 뿐, 그 해결책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작은 경험과 보잘것없는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나는 지금 평신도 선교사로서 생활성가를 작곡하고 노래한다. 평범한 교회 청년이 그랬듯, 20대를 성당에서 교리교사를 하며 지냈고, 학교나 집보다 성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본당(성당)에서 초등부 중고등부를 가리지 않고 토요일과 일요일엔 미사와 교리 교육을 했고, 평일엔 교사회합을 핑계로, 때로는 신부님이나 사무장님의 호출을 핑계로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는 시기를 보냈다. 30여 년 전 주일학교는 말 그대로 전성기였다. 우리 성당은 신자 수 1500여 명의 작은 성당이었음에도 여름신앙 학교에 버스 3대를 대절해서 갔고, 미사에 청소년이 100명 이상 나왔다. 교사는 초중고등부 합쳐서 30명이 넘었고, 겨울에 하는 성탄제는 동네의 작은 축제였다. 그렇게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던 중 성가제에 나가게 되었고 상을 받으면서 <PBC> 라디오에 출연도 하고 앨범도 내게 되면서 자연스레 성당은 내 삶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주일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연차가 쌓이다 보니 자연스레 지구활동, 교구활동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음악 피정 진행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 권성일)
당시 서울대교구에서 진행하던 청소년 큰 잔치에서 음악을 담당하기도 하고, 액션송 앨범 1, 2집에 참여하면서 청소년에 대한 좀 더 넓은 시선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뒤로 교구에서 하는 각종 연수에서 전례음악을 담당했기에 자연스레 참가하게 되었고, 당시 서울은 조재연 신부님이 청소년 주일학교 사목을 하던 시기라 양질의 연수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 생활성가 가수로 활동하면서 신자들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교회의 정확한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교리신학원을 졸업했다. 이렇게 장황하게 나에 관해 이야기한 이유는 앞으로 본당 안에서 사목 스태프로 활동했던 경험을 이야기할 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내가 선교사로 활동했던 본당들은 대체로 주임신부 혼자 사목하는 본당이었다. 기본적으로 도시의 본당들은 사목회, 총구역, 성가대, 전례단, 꾸리아, 울뜨레아, ME, 성찬 봉사자회, 노인대학, 연령회, 성모 회 등 본당 신부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수십 개 단체가 있다. 한 달에 한 번 회합에 들어간다 해도 사제 혼자서 감당하기 버겁다. 게다가 미사도 집전하고 고해성사뿐만 아니라 혼인면담, 집이나 차 축복 같은 사제가 아니면 안 되는 일들이 워낙 많기에 주일학교는 사제의 관심과 사랑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내가 담당했던 부분은 주일학교와 청년의 사목 동반자와 예비신자 교리, 그리고 오래전부터 해 왔던 성가대 지휘였다.
한마음 야외 음악 피정 모습. (사진 제공 = 권성일)
청소년 사목
오래전부터 주임신부 혼자 사목해 왔던 본당의 특징은 주일학교 교사들이 많은 결정을 사제와 충분한 상의 없이 예전의 관례대로 진행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사목해 왔던 사제가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탓에 교사끼리 결정하고 예산을 신청하고 교리나 행사를 하는 데 익숙했던 것이다. 제일 처음 했던 것은 보고를 체계화하는 일이었다. 교사들이 해 보고 싶은 것을 물었고, 해 왔던 부분을 점검해서 본당의 형편이나 상황에 맞게 조율하고, 그것을 토대로 보고서를 만들어서 주임 신부에게 보고했다. 처음에 교사들의 반응은 ‘우리끼리 잘하는데 방해자가 나타났군’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대화하며 교사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 연례 행사처럼 해 오던 일을 줄이거나 없애고 교사들의 시간 상황이나 형편에 맞게 합의해서 고치고, 예산이 들어 지레 겁먹고 포기했던 일을 주임신부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아내면서 조금씩 교사들과 신뢰 관계를 쌓아 갔다.
일례로 매주 교리를 하는 것에 상당히 힘들어 하는 교사들을 위해, 처음에는 2주에 한 번 나중에는 한 달에 한 번, 내가 전체 교리를 진행해 주어 교사들의 교리에 대한 부담을 덜어 주었다. 매번 동네에 마실 가는 수준이었던 야외 교리를 영화 관람, 자전거 타기, 놀이공원 가기, 성지 순례 등으로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교사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바로 ‘교리’인데, 사실 주일학교에 필요한 교리는 미사 시간에 강론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교사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교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리라 판단해서 꼭 필요한 교리는 내가 전체 교리 시간을 할애하고, 우선 미사 강론에 집중할 수 있게 하고(물론 본당 신부님께서 강론을 굉장히 재밌게 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학생들과 관계성에 맞추는 프로그램을 하게 했다.
사실 교구에서 하는 교육을 보면 꽤 짜임새 있게 학생들의 심리나 생활에 맞는 교리에 관한 연수를 하는데, 교사들이 왠지 지구나 교구에 있는 교육에 참가하는 비중이 작아, 지구나 교구에서 하는 교육이나 연수에 참가할 수 있게 배려를 많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들과 관계가 중요하기에 평상시에 연락들을 많이 하도록 독려했다. 주임신부와 관계도 중요하기에 모르는 것은 주임신부에게 여쭤 볼 수 있는 만남이나 자기 신상에 변화가 생기는 경우 꼭 주임신부와 면담을 할 수 있게 미리 신부님께 정보를 많이 드렸다. 그런 환경이 조성되면서 교사나 학생과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신부님께 미리 드린 정보로 때로는 신부님이 먼저 다가서실 수 있도록 한 것이 꽤 효과가 좋았다.
주일학교 제주도 여행. (사진 제공 = 권성일)
주일학교는 우선 학생들이 나와야 한다. 2000년 초반 동네에 보습 학원이라는 학생 진공청소기가 생겨난 이후 교회는 학원과 싸움에서 점점 지기 시작했다. 매번 바뀌는 입시제도는 청소년을 입시지옥으로 몰아갔고, 부모들 역시 신앙보다는 입시나 성적에 올인하면서 주일학교는 점점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예전에는 간식을 먹으러라도 왔지만, 지금은 굳이 성당이 아니어도 먹거리가 넘쳐나고, 굳이 주일학교에 가지 않더라도 결핍을 느끼지 않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왜 교회를 멀리하는지 고민하던 중 지금 아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고, 결론은 ‘신앙’과 ‘환대’였다. 우리 어른의 가장 큰 착각은 아이들은 신앙이 없어서 그저 재밌게 놀게 해 주고 먹을 것을 많이 주면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른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뜨거운 마음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고 확신한다. 다만 자신들이 잘 모를 뿐 그 아이들에게 신앙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해 준 어른들이 더 문제다.
그래서 일단은 아이들이 오고 싶은 성당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부님께서는 부임하시자마자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익혀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교사들은 아이들이 성당에 오면 무조건 환대해 주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성당에 너희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려고 교사들은 회합이나 준비를 하다가도 학생들이 오는 시간보다 먼저 나가서 아이들을 맞이했고, 미사가 끝난 후에도 하나씩 일일이 배웅해 주도록 하고, 학생들에게 절대 화내거나 야단치지 못하게 다짐하고 또 했다. 교사들은 형처럼 언니처럼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혼을 내고 잘못을 지적하는 일은 내가 도맡아 했다. 사실 혼내고 야단치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왜 혼이 나는지 왜 지적을 받는지 정확하게 이해시켜야 하고, 풀어 가는 것도 감정의 상처 없이 인정하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참 많이 울기도 하고 대들기도 했지만 혼낼 때는 냉정하게 혼내고 버릇 없이 구는 것도 야단을 많이 쳤다. 혼내고 야단치면 다시는 안 나올 듯하다가도, 끊임없이 이해시키고 대화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오고는 한다. 혼이 나는 기준과 선을 정확히 알려 주면 웬만하면 다시는 실수하지 않는 것도 참 착한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다. 몇 주간 보이지 않는 아이가 있으면 학교 앞에 가서 기다렸다가 만나고 오기도 했고, 동네 PC방이나 노래방에 가서 찾아오기도 했다.
주일학교 일본 성지 순례 모습. (사진 제공 = 권성일)
그렇게 관계를 잘 형성한 후 한 것은 전례의 기쁨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청소년 미사에 참례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대부분 잘 알 것이다. 삐딱하게 서거나 앞 의자에 손을 의지하는 모습, 미사 틈틈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모습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왜 그럴까? 이들에게 전례는 그저 최소한의 신앙생활의 마지노선이고 재미없고 지루한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맛없는 밥을 억지로 먹는 듯한 느낌이라면 이해가 빠를 듯하다. 그런 아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다. 내 장기인 성가를 통해 먼저 접근했다. 사실 아이들이 성가를 부르지 않는 이유는 노래를 잘 모르거나 분위기 자체가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 피정이나 교리 시간을 이용해 성가를 여러 곡 가르치고 신부님의 도움으로 밴드도 구성해서 역동적인 전례 분위기를 만들었다. 또한 아이들과 타협하면서 미사시간에 기도손(합장)을 하기로 하고, 전례 시간에 휴대폰도 만지지 않기로 약속했고, 교사들이 계속 함께 옆에서 아이들을 격려하면서 미사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신부님도 그 모습이 좋았는지 강론 시간을 통해 가끔 파격적인 선물을 주면서 아이들이 전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청소년이 늘어나고 본당 어른들의 관심도 높아지면서 신부님께서 계획한 대로 여름 행사를 제주도, 일본 성지 순례로 다녀오기도 하고 겨울엔 스키장이나 또래끼리 MT도 보내 주었다. 물론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두어서 미사와 교리를 분리해서 출석 체크를 꾸준히 해 출결 상황에 따라 참가비에 차등을 두거나 자격에 제한을 두는 방법을 이용하면 서 조금씩 주일학교는 성장해 갈 수 있었다.
청소년 음악 캠프 진행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 권성일)
청년사목
청년들이 성당에 소원한 이유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학업을 핑계로 한두 번 빠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냉담하는 경우가 많다. 성인이 되어 대학에 가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바쁘기도 하고 삶의 여유도 없다 보니 더더욱 성당에 가기 힘든 경우가 참 많다. 그러다 여러 계기로―부모님의 권유, 친구, 이성 등―성당에 다시 나오기 시작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거나 청년회 활동을 하는 청년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들 중에는 다시 학창시절에 주일학교를 경험했던 친구들과 아예 활동 자체가 처음인 친구들로 나뉜다. 이렇게 모인 청년은 각 부서에서 활동하거나 시간 내기 어려운 친구들은 미사에만 참례하면서 주위를 맴돌거나 하는데, 대부분 주일 미사를 마치고 뒤풀이하며 술자리를 갖거나 부서별로 때로는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어울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성당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 일종의 동아리나 친목 모임 수준으로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남녀가 모인 곳이다 보니 서로 사귀다 헤어지면 안 나와 버리고, 또 의견 충돌이 있거나 가치의 차이를 보이면 쉽게 나오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당 뒤풀이가 많아지고 술도 잘 사 주면 확 숫자가 늘어났다가 시들해지면 확 빠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고민했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들에게 필요한 건 친교나 모임이 아니라 ‘위로’와 ‘쉼’ 그리고 ‘정체성’이었다.
청년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중고등학교보다 더 격해진 경쟁 안에서 지쳐서였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 늘어나면서 더해지는 부담감과 한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지쳐 가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갑갑함을 느끼기에 하느님에게 의지하려고 오는 것이었다.
떼제 기도 모습. (사진 제공 = 권성일)
처음 시작한 것은 기도모임이었다. 내가 가진 능력을 이용해 소박하게 떼제 기도를 시작했다. 참여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함께 모여 기도하고 삶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하고 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두 번째로는 청년신앙 강좌를 시작했다. 첫영성체를 정점으로 교리 지식은 내리막길을 걷는다고 한다. 나이가 들고 이성이 발달하면서 부딪치는 믿음과 이성 간의 충돌에 스스로 반문하다 믿음을 거두는 경우도 많다. 의외로 청년들은 궁금한 것이 많았고 때마침 유행하던 '유캣Youcat' 시리즈를 교재로 삼아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바른 신앙의 길을 모색했다.
근 10여 년 사이에 본당에서 활동하는 청년의 평균 연령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아실까 모르겠다. 결혼하는 연령대가 많이 늦어지고 또 사회적으로 자립하는 나이가 점점 늦춰지면서 자연스레 본당 청년의 중 심 활동 연령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늘어났다. 물론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새로 들어오는 20대 초반 청년들과 어쩔 수 없는 세대 갈등이나 활동하는 기간이 10년을 넘어 버린 탓에, 스스로 관성의 굴레에 빠져 신앙생활이 종교 활동으로 변해 버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세대가 약간은 분리될 수 있도록 20대들을 위해서는 복사단을, 30대를 위해서는 레지오를 만들어 나름 신앙의 정체성을 찾게 도와주었고 성가대나 전례단은 구분 없이 다양한 역할로 활동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청년 피정은 기도할 수 있게, 성주간 등 본당의 특별한 전례 때 청년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신앙의 위로와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하면서 본당 청년 공동체가 단단해지도록 했다.
성당 청년 밴드 구성원들과 함께. (사진 제공 = 권성일)
예비신자 교리
예비신자 교리는 우리 교회의 선교 사명을 완수해 가는 첫 단계이며 하느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소중한 시작이다. 예비신자들은 주위의 권면에 따라 오는 경우도 있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호기심이나 호감에 스스로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예비신자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비춰질지 물어보고 이야기해 보니 그들의 첫인상은 거룩함과 동시에 차가움이었다. 전례에 참례하면서 느끼는 거룩함과 동시에 낯선 이방인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잡하고 심오한 교리를 가르치기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 주고, 하느님의 존재를 알려 주기보다는 느끼게 해 주는 데 힘쓰고자 했다. 교리 시간엔 최대한 쉬운 언어로 접근하고 교리 전후에 삶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노력했고, 쉬운 숙제를 꼭 내 주고 질문을 많이 유도하는 방법을 적용했다. 그리고 특별히 청년 예비신자반은 청년 레지오에서 관리하게 했고, 교리가 끝난 후 자연스레 청년 활동으로 유도하면서 떠나는 청년보다 들어오는 청년이 많을 수 있도록 했더니 청년회도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성가를 통한 공동체 활성화
성가대는 성가를 통해 봉사하는 단체인데, 가끔은 성가대와 합창단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전례는 노래가 없어도 가능하다. 하지만 성가가 함께할 경우 전례의 감동은 두 배가 되고, 신자들 역시 전례에 깊게 빠져들게 해 준다. 그렇게 성가대는 전례 때 신자들이 하느님께 더 깊이 다가갈 수 있게 해 주는 보조 역할을 맡는데, 그 역할과 기능상 많은 연습이 필요하기에 때로는 전례의 본질보다는 그 기능에 매몰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내가 지휘했던 성가대는 대부분 깨졌다가 다시 모이는 곳이었다. 많 은 성가대를 보면 경력이 오래된 사람 중에 옛 관습에 젖어서 변화를 싫어 하기도 하고, 종종 텃세 아닌 텃세를 부리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본당 신부의 사목 방침에 맞서는 경우도 있고, 지휘자와 단원 간의 갈 등이나 단원 사이의 갈등으로 회복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런 결과로 해체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면서 한동안 성가대 없이 전례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성가대를 지휘할 때 원칙을 세워 놓는다. 단원의 노래 실력을 서로 평가하지 말 것, 본당의 스케줄에 맞출 것,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바로바로 이야기할 것, 기본인 전례에 충실하고 그 외 의 것은 유연하게 할 것 등을 약속받는다. 그리고 연습시간과 전례를 즐겁게 할 수 있게 해 주면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가다 보면 다시 예전의 영광을 찾게 되곤 한다. 성가대의 역할과 본질을 알고 느낄 때 더 기쁘게 봉사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본당의 전례를 위해 내가 잘할 수 있는 성가를 통해 평일 미사 한 대를 찬양 미사로 하면서 신자들과 함께하기도 하고, 성시간을 성가와 묵상을 통해 진행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그리고 성체의 신비에 깊게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성가대 연주회 모습. (사진 제공 = 권성일)
공동체와 함께하는 본당사목 스태프
나는 본당에서 선교사로 불리기보다는 ‘권쌤’으로 통한다. 청소년과 청년에게는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아빠처럼 다가가려고 하고 어르신에게는 아들처럼 동생처럼 다가가려고 노력해 왔다. 신자들이 성당에 오면 반겨 주는 사람이 있고 존중받고 사랑받는다고 느낄 수 있게 하려고 한다. 가끔 "쌤 저 결혼해요"라고 오는 메시지를 받거나 "쌤 저 취업했어요"라는 연락 등을 통해 내가 함께했던 아이들과 청년들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볼 때면, 그들과 나의 만남이 하느님의 큰 축복이 었음을 느끼며 감사의 마음을 갖곤 한다.
우리는 지금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라는 길의 중간 여정 중에 있다. ‘시노달리타스’에 대해서 관심이 있지 않는 한 잘 모른다. 내가 느낀 ‘시노달리타스’의 정신은 ‘행복’이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시노달리타스’이고, 그 길에서 뒤처지는 사람은 끌어 주고 앞서가는 사람은 천천히 발을 맞추면서, 교회 구성원끼리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성당 문 바깥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하느님의 존재를 잊고 치열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사는 하느님은 한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살피시는 분이다. 그렇기에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환대해 주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세상에서는 조금 처지고 무시당하고 억울한 이들을 교회는 위로해 주어야 하고, 그들에게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어야 한다. 교회가 사교 장소가 아닌 친교 장소가 되어야 하고, 복음 정신처럼 높은 자는 낮아지고 낮은 자가 대접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은 가이드가 있는 여정이다. ‘성령’이라는 가이드의 보호와 협조 아래 상처 입거나 다치는 사람 없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하느님나라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본당 사목이라는 것이 누구 하나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가 각자의 직분을 통해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사용할 때 예수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봤으면 좋겠다. 모두의 신앙생활 역시 하느님께 바라기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살피고, 교회에 무언가를 바라기 전에 내가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 역시 교회의 평신도 선교사로 신자들, 특별히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어 건강한 신앙인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권성일
평신도 선교사이자 생활성가 가수 겸 작곡가다. 서울대교구 성현동, 의정부교구 송산 성당 선교사로 활동했고, 사당동, 하계동, 행당동, 중계본동, 화곡본동 등 청년·교중 성가대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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