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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월) 학복협 청년사역자훈련학교 제10기
청년사역자의 자기 관리 –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님
예수님을 잘 믿는 방법
1. 보이지 아니하는 예수님이 보이는분 처럼 바라보면
2. 혼자있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면
3. 보이는 교인이 있을 때 예수님을
4. 돈보다 예수님이 좋으면
5. 예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이야기 연연하지 않으면
6. 어려운일이 생겼을 때 근심하지 않는다면
7. 괴롭히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8. 목회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9. 은퇴할 때 아무 미련없이 교회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목회에 초점을 잘 맞추는 것,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규모가 크거나, 유명한 목회자에게 배우는 것에 약간 문제가 있다. 어느 대장장이가 여행을 가면서 조수에게 말편자 100개 만들라고 작업지시를 하고 갔다. 몇일 뒤에 돌아왔더니 말편자를 만들어놨다. 기가막힌 것은 자기가 만들라고 한 대로 안만든 것이다. 조수가 난감해했다. 알아보니, 주인이 준 본을 가지고 본을 만들었고, 두 번째는 자기가 만든대로 본을 떠서 보고, 50번째는 49번째 것을 보고, 그러니 마지막 말편자는 너무 다른 것이 나왔다. 조수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항상 원형을 보고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원형과 가까운 말편자가 만들어진다.
지금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를 배우려고 하면서, 이와 같은 우를 범한다. 사람 쫓아다니다보니 어느덧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른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의 실수,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다.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려는 것이다. 학교가면 우등생, 직장가면 사장, 장사하면 부자되어야겠다. 목사하면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어야겠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잘 몰랐다. 성경에 어디도 교회성장에 대한 개념이 없다. 처음부터 성경책을 펼쳐놓고 거기서 목회를 배워야 한다. 사람에게서 배우니 교회성장이라는 미혹이 온 것이다. 왜냐하면 눈치채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회성장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예배당도 크고, 교인도 많아지고 그런 논리대로. 단 하나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를 점검을 안 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성장시키라는 말을 점검안했다. 1980년대 한국교회는 교회성장 열풍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골교회 목사님들도 바인더 하나씩 들고 와서 교회성장을 배웠다. 정신없이 교회성장에 매달려있다가 한국교회가 이제야 반성을 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온전히 정신을 차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전에 전도사님이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리오다”부르니 제발 다른 것 부르자고 했음. 신학교 말미에 관심은 임지이다. “아골골짝 빈들”은 버린 종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목회에 대한 내 생각이 말씀으로부터 온 것인지, 사람에게 온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교회성장이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교회성장 독을 품고 사역하면 실제로 효과가 있으나, 보기가 안좋다.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는, 교인들은 그런 카리스마에 자신도 모르게 빠지게 되기도 한다. 이런 문제들이 겹쳐서 한국교회가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다. 대안으로 작은 교회 운동이 나왔다. 이것역시 성경을 보고 찾아야 한다. 성경에 작은 교회를 만들라고 했나. 우리는 항상 어디로부터 답을 얻어야 하나? 주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
목회의 유익을 나누고 싶지 않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목회의 모델이라 할 수 없다.
하나 제시하고 싶은 것은 주 예수님을 잘 믿자는 것이다. 그것만 가지고 목회를 했다는 것이다. 내가 목회했던 것이 여러분에게 모델이 될 수 없다. 주님이 여러분을 통하여 일하신다. 초점은 주 예수님이다. 나는 목회를 잘한다는 말을 들으나, 이해가 안간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셨는데 정말 어렵게 목회하는 것을 봤다. 저렇게 힘든 것이 목회라면 하기 싫다. 청년관 기관사역을 잠깐 하다, 개척교회를 하며 건물을 지으시다 어머니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교인들은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당신이 힘들면 아들한테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나한테 신학교를 가라고 했다. 신학교를 가고 목사안수를 받을 때 기쁨이 아니었다. 목사안수를 받기 전날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도망갈 용기가 없어서 목사가 되었다. 안수식때 옆에 전도사님은 펑펑 울었는데, 뭐가 감격스러운지 이해가 안갔다. 나는 안수받고 꼼짝없이 매인몸이다. 그러다보니 목회하다가 힘들면 당연한 것이다. 목사가 그런 것이다. 교인이 누가 나를 힘들게 하면 반가운 느낌도 든다. 그때 만났던 김장로님이 다시 내 앞에 온 것이다. 어머니를 힘들게 하던 홍권사님이 다시 내 앞에 온 것이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나. 나는 그게 당연한 것이다. 아버지가 목회하던 것을 보니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당연히 그렇지요. 누가 나에게 잘해주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나는 교인들이 아버지 있을때하는 말과 아버지 없을때하는 말이 얼마나 다른지 보았다. 아버지가 교인의 진짜 모습을 보면 아버지가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있었다. 목사 아들은 다 보인다. 잘보이려는 사람을 보면 의심이 든다. 양복을 해준다고 하면, 괜히 내 마음흔들지 말라고. 양복해주겠다는데 양복 안받으니 그 교인이 떠났다. 나는 대접받는게 힘들다.
교회가 부흥하면 이상한 일이다. 두려운일이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가 부흥이 안되서 금식을 한다. 나는 교회가 부흥이 되면 금식을 한다. 힘들면 당연한 거고, 대접받으면 잘되면 이상한 거고, 이렇게 마음태도를 가지면 된다. 어릴때부터 아버지 목회를 보며 힘들었던 것을 보며, 어머니 신학교때 돌아가심. 이제 60가까이 되었는데 부부가 살아있는게 감사하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주변 동료들이 목회잘한다고 한다.
힘든 것은 당연한 것이고, 대접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예수님이 부르실 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다. 예외가 없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
그러니 힘든 것은 이상한 일이다. 목회 임지 없는게 당연한 거다. 사례비 못받는게 당연한 것이다. 자기부인, 자기십자가. 어떤때는 사례비 못받았다. 당연한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큰 교회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하셨는데, 부목사로 부임했을 때 교회에서 사례비를 안주는 것이다. 아버지로 들었던 것이 목회자는 돈이야기를 하면 안된다해서 사례비를 못받았다. 두 달동안 못 받았다. 세 번째 달에도 못받았다. 넉달째 사례비를 안줬다. 육개월째 되었는데, 재정장로님이 쫓아오셨다. 목사님 사례비를 안드렸는데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게 교회에 소문이 퍼졌다. 이 목사님은 목사 중에 목사가 되었다. 그 순간부터 담임목사님보다 더 권위가 생겼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게 풀리기 시작했다. 서울의 큰 교회에서 청빙이 왔다. 다들 보증을 서서 모시고 갔다. 사람 심리가 참 이상하다. 고생하는데도 당연하게 여기고, 힘든 것도 당연하게 여기고, 이런 사람이 목회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가 목회 힘들게 하는걸 목회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도바울은 진짜였다. 빌3:7-9을 보면 누가 사례를 안주고 어렵게 한 것도 아닌데, 자기 스스로 유익한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 용변보고 물내릴 때 느낌이 어떤가? 아까운 사람 없다. 여러분도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 칭찬받고, 대접받고, 높아지고 싶고, 그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까. 사도바울은 진짜였다. 억지로 버려도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배설물처럼 버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 예수님을 진짜 믿게 된 것. 이것이 핵심이다. 자기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르는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 하셨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심이다. 그거 하나를 약속해주시면서 자기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라 한 것이다. 돈 1억씩 나눠주고, 100만원씩 걷는다. 그럼 200만원도 내놓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시고, 내 안에 자기를 부인하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시다.
십 몇 년전 선한목자교회 올 때 끔찍한 상황이었다. 부채는 100억이었고, 교인은 500명 남았고, 본당완공을 위해 100억이 더 필요했다. 그것을 감당하고,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그 전에 교회는 1400명이고 분위기도 좋았다. 전임자는 교인에 의해서 강제로 쫓겨났다. 1년동안 담임자리를 못구해서, 장로님들이 담임하고 계셨던 교회에 담임자리로 왔다. 하나님이 여러 길을 주실 때 속으면 안된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될 가능성이 많다. 내가 보이에 좋은길, 내가 보기에 잘되는 길이 지나고 보면 나를 발목잡는 길이다. 헤브론 산지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이다. 우리가 무슨 힘으로 고생스러운 길을 택해 갈까, 예수님을 알면 된다. 고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선택하면 된다.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니까 어려운 길을 갈 수 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잘 믿으라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가 착각하는 것이 예수님만 믿어서 부족하다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 믿는것만 가지고 부족해서, 뭔가를 찾고 있다면 굉장히 착각하는 것이다. 다시 물어야 한다. 예수님을 진짜 믿기는 해 봤나?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다. 다 믿는데 예수 믿는것만 가지고 무슨 변별이 있는가? 다르다. 스티븐 브라운. 리폼 설교학교수. <다 알았다고 생각한 이후 내가 > 서론에서 본인이 신학교 교수로 목사로 설교도 하고 강연도 하고, 책도 썼는데,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쳤던 믿음, 고백, 지식들이 하나님에 대한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늦게 깨달았다. 자기는 복음적, ,개혁적, 정통적 신학자로 소개했지만, 기독교 역사의 신조를 믿고, 성경 전체가 진리라고 썼다. 그런데 아무리 정통적인 신학이라도, 아무리 정확한 명제라고 할 지라도 충분하지 않더라. 그것이 자신을 주님과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만들어주는 보장이 아니더라. 그렇다고 주님과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더라.
가사만 있는 노래와 똑같더라. 노래에는 가사가 있고, 곡조가 있다. 정통신학, 완벽한 교리는 가사와 같다. 그런데 가사를 안다고 노래를 들은 것인가. 거기에 곡조가 있어야 노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그동안 가사에만 집착을 해왔다. 진짜 복음이 말하는 아름다운 경험을 못해본 것이다. 예수님 믿는 자에게 나오는 감탄의 삶. 자기가 늦게서야 곡조를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가사가 아닌 노래를 가르치고 싶다. 복음이 노래라면, 진리는 가사이다. 곡조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이다.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이다. 한국교회에는 대부분의 노래가 가사에 집착을 하고, 끝내버린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무엇이 빠진 것 같다. 복음은 있는데 감격이 없다.
복음에는 세 고리가 있다. 하나는 지식이다. 지식적인 차원. 두 번째는 누림이다. 복음의 실제를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적으로 아나, 경험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세 번째는 사명이다. 하나님의 사명을 전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함께 간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복음을 지식적으로 알고 바로 사명으로 건너간다. 신학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정확한 복음을 가르치고 바로 사역을 가르친다. 그러니 문제가 생긴다. 사랑을 배워서 설교했지만, 믿음을 배워서 설교했지만, 믿음의 역사는 안나타난다. 이게 안나타나서, 다 지친다.
왜 복음을 전하는데 반응이 없나. 누림이 없는 것이다. 복음 진리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격 자체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식으로도 배워야 하지만, 인격적인 관계에서 배우는 것이 항상 같이 가야 한다. 그래야 이 복음이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마7:23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냈지만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아마 여기도 그렇게 될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는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면서도 그 이름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자가 있었다. 얼마든지 지금도 그럴 수 있다. 그들의 특징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불법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주님을 지식으로 아는 것 가지고는 극복못한다.
감리교 총회할 때 선거권자를 많게 하자. 총대가 적으니 돈선거를 하지 않느냐. 안건이 모든 목사가 선거권자가 되게 하자. 반대발언 하신 목사님이 이미 타락한 사람들만 타락시킵시다. 본인도 아는 것이다. 우리가 타락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목사가 된 젊은 목사들을 선거판에 끌여들여서 타락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이런일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설교한 사람들도 한다는 것이다. 불법을 어떻게 행할 수 있나.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가 안되니까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셨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어떻게 그러나.
음란물 이기는 것을 보라. 혼자 있을 때 음란물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도 없을때가 가능한 사람이 있고, 불가능한 사람이 있다.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많아도, 음란물에 대한 유혹을 못이긴다. 음란물이 얼마나 유혹이 되는지는 육신의 연약함, 본능의 자극. 음란물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 한 가지는 혼자 있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수치스러워서 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신 것이다. 이것을 진짜 믿으면 이길 수 있다. 불법을 행한 자들은 실제로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관계하는 사람은 큰 능력이 없어도, 불법도 못한다. 그래서 목회할 때 교인들에게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 4년전부터 영성일기를 강조. 초점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이 실제가 되게하기 위한 훈련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밤에 잘 때까지 실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진짜 마음에 영접했으니까 그것을 매일 체크하라는 것이다. 혼자는 힘드니까 나눔방을 만들어줬다. 인터넷 웹사이트, 휴대폰 어플. 매일 일기를 올리면 나눔방 식구들끼리 나눠어보고 댓글달아주며 격려해준다. 초점은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 것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분이다. 이것이 설교로만 들었지 실제가 잘 안된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그렇다. 우리의 관심에 예수님이 없다. 목회, 사역, 능력, 성공이 관심이다. 인격이신 그 분에게 관심이 없다. 그렇게 훈련을 안받았기 때문이다. 신학교에서는 지식적으로 배웠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못받았다. 목회자와 교인과의 차이는 지식이 차이뿐이다. 그래서 삶이 안바뀌는 크리스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예수님을 내 삶에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모시지 않으면 내 삶은 안바뀐다. 내 의지로 안바뀐다. 나는 예수님과 옛사람이 죽었고,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새생명을 얻은 사람, 예수님을 내 삶에 왕으로 진짜로 모신 사람, 그런 사람은 삶이 바뀐다. 예수님의 종인데, 여러분은 삶이 바뀌었는가. 만약에 삶이 안바뀌었다면 문제는 하나다. 마음에 예수님이 와 계시다면.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살면 힘들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다면. 생각, 감정,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신데. 예수님 믿으면 삶이 바뀌나? 당연히 바뀐다.
왜 안바뀌나? 예수님을 진짜로 마음에 영접한게 아니다. 영접기도를 했을지는 모르지만, 내 마음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진짜로 믿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 주일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영성일기 쓰라고 한지 4년이 지났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나 자신이 가장 큰 변화이다. 올해 59살인데, 내 삶에 이렇게 큰 변화가 최근에 일어난 적이 없다. 나이가 들면 굳어지게 되는데, 젊을때는 젊은 총기, 신선함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 추해지는데. 감사한 것은 지난 5년동안 나 자신이 많이 바뀌었다. 이유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시도해본 것이다. 내가 가장 열심히 써보려고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가 주님을 어떻게 생각해보았는지 체크해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믿어지는 역사. 나만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영성일기 쓰라고 하면 힘들다고 한다. 처음 양치질 하라고 하면 애들이 힘들어한다. 그런데 이것이 나에게 익숙해지면, 편해진다.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지 않는데 계속 체크하라고 하면 힘들다. 그런데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면 힘들어진다. 부목사님들의 일기를 읽는다. 서로 댓글을 달아준다. 처음에는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일기를 나누자니까 얼굴이 노래졌다. 이제는 장로님들하고 일기를 나눈다.
성령이 코이노니아가 일어난다.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코이노니아. 한국교회는 이것이 깨져있다. 영성일기를 쓰고 나누면서 성령께서 목사와 장로 사이에 하나되어 역사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부목사님 사모들끼리 관계가 묘하다. 4년을 끌어오니까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지난주 500명정도가 모였다. 매일 영성일기를 쓴다. 하용조 목사님이 이런 강의를 했다. 찬양할 때 손들고 찬양하는데 7년이 걸렸다. 우리는 예배할 때 일어나고, 손들고 찬양하고 이것은 당연하다. 이런 예배때 찬양과 경배를 드린게 온누리교회에서 시작한 것이다. QT하는 것을 중간에 포기할뻔 했다. 일대일 양육 불가능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선한목자교회에서 4년 정도 영성일기. 영성일기 사이트에 45,000명이 가입해있다. 지금 한국교회의 과제는 무엇으로 한국교회를 부흥시킬까. 주님과의 살아있는 친밀함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예배나 어느때나. 청년들에게 정말 제대로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다. 그 예수님을 믿으라. 예수님을 바라보아라. 예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가르치면서 믿으라니까 안믿어진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심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전혀 안믿어진다. 그러니 교회는 나오는데 마음은 음란의 종이다. 이렇게 하려면 청년사역자 스스로 예수님과의 친밀함에 눈이 띄어야 한다.
하루는 기가 막힌 하루이다. 나와 같이 멍에를 메고, 배우라. 다 주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주님이 각자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점에 초점을 맞춰보라. 반드시 써보아라. 마음속에 뭔가 느낌이 온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구나. 분명히 들은것과 희미하게 메모한 것 중에 어느것이 오래가는가? 희미하게 메모한 것이다. 들은 것은 기억안난다. 기록이 얼마나 놀라운지. 하나님이 크게 쓰신 사람은 다 일기를 썼다. 일기라는 것이 주님과의 관계를 얼마나 놀랍게 매듭지어 가시는지.
성령님이 우리 안에 그렇게 역사하시는데, 담아내야 한다. 영성일기가 그릇이다. 하나님이 매일매일 주신 것을 기록에 남겨놓으면, 그릇에 담겨서 보관이 된다. 쓰지 않으면 받고 흘려보내는 것이다. 아무리 폭포같은 물이 쏟아져도, 그릇이 없으면, 다 지나고 없어져 버린다.
주님과의 교제, 주님과의 동행, 주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해보라. 청년들을 그렇게 훈련시켜라. 청년들을 사람의 제자로 만들지 말라. 청년들을 예수님에게로 묶어줘야 한다. 청년들을 예수님 안에 계신 것과 그들의 주인되신 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엄청난 일들을 주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신다.
청년사역자의 자기관리는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교리는 능력이 없다. 인격적으로 만난 주님이 내 삶을 뒤바꾼다.
나를 통해서 청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이루신다.
** 동신교회 청년부 한가람 목사님의 도움으로 녹취록에 가까운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