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隋)나라 대운하를 건설한 양제(604~618)
문제는 장안 옆에 별도로 대흥(大興)성을 건설하고 수도로 정하였으나 식량 공급이 어려웠다. 이에 대흥에서 동관(潼關)까지 광통거(廣通渠)를 건설하였다(584). 다음의 양제는 낙양 서원(西苑)에서 산양(山陽)까지 통제거(通濟渠, 605), 산양에서 강도〔江都, 양주(揚州)〕까지 한구〔邗溝, 산양독(山陽瀆)이라고도 함, 605〕,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하여 판저(坂渚)에서 탁군(涿郡)까지 영제거(永濟渠, 609), 그리고 경구(京口)에서 여항(餘杭)까지 강남하(江南河, 611)를 건설하였다. 운하는 모두 새롭게 판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강물을 연결시켜 놓은 것으로 약 4~5천 리에 달하는 공사였다. 이로 인하여 남북의 교통이 편리하여 중앙 집권 강화에 도움을 주는 등 정치와 국방, 물자 교류, 경제와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중국의 중요한 5대 수계〔황하(黃河), 회화(淮河), 장강(長江), 전당강(錢塘江), 해하(海河)〕가 연결되어 수해 방지와 농지의 관개에도 유리하여 농업 생산이 증가되었고, 남북조의 호한 문화가 융합하여 중국 문화의 동아시아화를 가져왔다.
또, 문제는 북방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운하 연변과 교통 요지에 관창(官倉)과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서경(西京)의 태창(太倉), 동경(東京)의 함가창(含嘉倉)과 낙구창(洛口倉), 화주(華州)의 영풍창(永豊倉), 섬주(陝州)의 태원창(太原倉) 등에는 벼가 많게는 천만 석, 적게는 수백만 석을 비축할 수 있었다. 문제 말년에 천하의 창고에 보관된 식량만으로 50~60년을 공급할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문제는 돌궐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변방 지역에 수십여 개의 성채를 쌓고, 영무(靈武)에서 삭방(朔方)까지 여러 차례 장성을 수축하였다. 또, 양제 때에도 유림(榆林)에서 자하(紫河)까지의 장성을 수축하였고, 낙양에서 태행산을 넘어 병주(并州)까지 치도(馳道), 유림에서 계성(薊城)까지 어도(御道)를 건설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운하의 건설 (중국사, 2008.6.20, 미래엔)
분열과 항쟁으로 남북조 시대의 중국에서는 북방 유목민이 지배하던 화북에서 강력한 황제권을 구축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책이 시도되었다. 그중에서 선비족인 북주(北周)의 외척 양견(楊堅)이 581년에 북주를 타도하여 수(隋)를 건국하고, 589년에 남조의 진(陳)을 병합하여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이때 양견을 도와 진을 멸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은 둘째 아들 광(廣)이었다. 그는 진을 공격하는 총사령관으로서 51만 8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나가 단숨에 진을 쓰러뜨리고, 한나라 이래 4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이 공적으로 광은 맏아들인 용(勇)을 제치고 황태자의 자리에 앉았다.
원래 문제(文帝), 곧 양견은 장남인 용을 황태자로 정했으나, 용과 광의 어머니인 독고 황후에 의해 광이 황태자가 되었다. 독고 황후는 온순한 장남을 못마땅해 하고, 무용이 뛰어난 둘째 아들을 더 사랑하였다. 이리하여 600년에 용은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대신 광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로부터 2년 후에 황후는 사망하고, 문제는 멸망한 진의 황녀였던 선화(宣華)부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2년 후인 604년, 문제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 옆에서는 선화부인이 간병을 하고 있었다. 7월 어느 아침, 선화부인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문제 옆을 떠났다. 그때 태자 광은 부인에게 다가와 폭행을 하려 하였다. 부인은 놀라 문제에게 "태자가 버릇없이 굽니다"하고 소리쳤다. 문제는 모든 것을 눈치챘다. 그는 신하에게 "용을 부르라"고 일렀다. 용을 다시 태자로 봉하려는 것이다. 그때 광이 용보다 먼저 문제에게 들어가, 모든 신하들을 별실로 물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문제는 갑자기 죽었다. 그러나 후세의 역사서는 태자 광이 문제를 시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제(광)는 백성들의 불평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큰 사업을 벌여 실적을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국내적으로는 중국을 남북으로 잇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북방의 방어 진지인 만리장성을 보수 · 건설하며, 대외적으로는 주변 지역에 영토를 확대하여 한의 무제 시대와 맞먹는 대제국을 수립하려 하였다.
중국에는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중국에서 남북의 교통수단을 나타내는 말이다. 화북에서는 말을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중심을 이루었고, 화중과 화남에서는 배를 이용하는 내륙 수운이 중심을 이루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전국 시대부터 각지에 관개사업과 운수를 위한 운하를 만들었으나, 남북조 시대의 전쟁과 혼란으로 수많은 운하가 파괴되었다.
문제도 양자강과 회하를 잇는 산양독(山陽瀆)을 완성시킨 바 있다. 양제는 그 사업을 이어 100만 명의 농민을 동원해서 5개월 동안 작업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황하에서 동북으로 뚫린 영제거(永濟渠)와 황하에서 회하를 잇는 통제거(通濟渠) 및 양자강에서 전당강을 잇는 강남하(江南河)가 개통되었다. 이들 운하의 전체 길이는 1,900㎞에 이르며, 그 너비는 30m 내지 60m에 이른다. 이는 그야말로 대공사로서, 만리장성 ·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 3대 토목 공사 중 하나로 꼽힌다.
양제는 운하가 완성되자 용선(龍船)을 비롯한 수많은 호화선을 건조하여 미녀를 태우고 술잔치를 벌이면서 강남에 유람하였다. 605년에 갓 완성된 통제거에서 하남(낙양)으로부터 강도(양주)까지 유람한 양제의 행차는 그 호화로움으로 후세까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수천 척의 배에 후궁들과 고관들을 태운 선단은 그 길이가 200리에 이르렀고, 배를 끌기 위해 동원된 인부만도 8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양제가 탄 용선의 길이는 200장(丈)(약 606m), 높이는 4장 5척(尺)(약13.6m)에 이르는 4층짜리 배로서, 방이 100개 이상이었다.
강도에의 행차가 있고 나서 2년 후 양제는 이번에는 육로로 북방 행차에 나섰다. 태행산맥(太行山脈)을 횡단하는 마찻길이 개설되고, 유림(楡林)에서 동으로 뻗은 장성을 쌓았다. 이 공사에 100만 명이 징발되었고, 인부의 사망률이 50~60%에 이르렀다. 이 만리장성은 황하부터 서쪽을 제외한 현존하는 장성(명 때 건조)의 위치와 거의 같다.
양제는 남방의 임읍(林邑, 참파)을 병합하였고, 동방의 유구(流求, 대만)와 남방의 적토국(赤土國)으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적토국은 수마트라에 있던 스리비자야 왕국이다.
양제는 이 영토 확대 작업의 끝맺음으로 612년부터 3회에 걸친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였다. 한 무제 시대의 대제국을 실현하려 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무제가 위만조선을 쓰러뜨리고 한사군을 설치한 이래 400년 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쳐왔으나, 중국이 분열한 동안인 313년에 고구려가 중국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독립의 깃발을 내걸었다.
113만 대군과 200만의 수송대를 이끈 제1차 친정 이후 614년까지 3회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은 모두 양제의 실패로 끝났다. 양제의 '바다를 뽑고 산을 옮기더라도 승리하리라'는 각오는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등으로 참담하게 좌절당한 것이다.
양제의 한반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돌궐족이 반기를 들었다. 양제는 그들의 포위를 뚫고 서울로 돌아왔다가 즉시 용선을 출동시켜 보다 안전한 남쪽 강도로 향하였다. 강도에 머물기 2년째인 618년, 양제는 그 비와 자식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근위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본 허무한 최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 왕조의 창건과 몰락 - 대운하를 건설한 양제(604년 ~ 618년)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2010.8.13,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