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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묵상글 들 ( 부활 8부 수요일-어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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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8부 수요일-어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부활 2주 수요일-20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구원을 받을 것인가, 심판을 받을 것인가?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지 오늘 우리는 요구받습니다.
둘 중의 어느 것을 선택할 거냐고 요구받으면
우리는 당연히 구원을 선택하지 심판을 선택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의 우리는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면 심판을 받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심판을 받았습니까?
개신교 신자들은 아주 당당히 구원을 받았다고 얘기하고,
어떤 때는 무례할 정도로 우리에게 구원받았는지 묻는데
우리도 그들처럼 구원받고 있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구원을 받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구원은 받아야지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하느님께서 안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안 받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당신이 오셨다고 얘기하시니
하느님이 구원을 주시는데도 우리가 안 받는 게 되는 거지요.
오늘 주님 말씀을 분석해보면 주님은 마치 우편배달부와 같습니다.
우편배달부가 편지나 소포를 가져오면 그것을 우리가 수령해야하는데
우리가 수취인거부를 하면 아무리 배달이 되어도 수령이 안 되는 거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외 없이 모두에게 구원을 분명히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배달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확실한 구원배달부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구원을 수취인거부를 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취인거부를 한다면 왜 할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첫째는 구원이 구원을 필요치 않은 경우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이 필요치 않고,
충분히 행복치 않더라도 이 세상의 성공을 꿈꾸는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실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심지어 신자들조차 하느님의 구원이 아닌 다른 구원,
세상에서의 구원, 세속적인 구원을 찾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구원을 받지 않고 자기가 얻으려는 경우입니다.
구원이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얻는 거라는
그런 믿음과 그런 자세를 지닌 사람은
하느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원치도 찾지도 않겠지요.
사실 하느님의 구원이라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을 원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구원을 그저 잘 받아들일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심판을 받는 것에 대해 봐야 하는데
구원을 받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 거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을 선택하지 않음이 곧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을 선택하지 않음이 곧 심판을 선택하는 거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아무도 심판을 선택치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선택치 않는데 하느님께서 주시시기에
어쩔 수 없이 심판받는 거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을 좋아서 선택치는 않지만 선택하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께서 심판치 않으시는데도 심판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얘깁니다.
사랑의 충고를 미움의 꾸지람이라고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고
은총으로 주시는 고통을 벌이라고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인간 간의 다른 오해도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하지만
구원과 심판의 오해는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함을 생각게 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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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임과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그런데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체제의 자기중심의 이기주의를 같은 것들 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이며,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이처럼,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 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피앗’의 응답이 구원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양손을 못에 내어주고 가슴을 열어 창을 받아들이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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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비록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 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 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된 것이 심판입니다. 하늘로부터 또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보다 무서운 심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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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요즘에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학교에서 예방접종을 맞았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주사는 너무나 큰 공포였습니다. 막상 맞고 나면 별것 아닌데, 맞기 직전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결핵 예방주사인 불주사 맞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냥 보통 주사 맞는 것도 힘든데, 주삿바늘을 알코올 불에 소독하여 접종하는 주사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당시는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일회용 주사기 대신 유리 주삿바늘을 소독해서 재사용했던 것입니다). 차례대로 나와 주사를 맞는데, 제 접종 차례는 반에서 거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제 앞에 있는 친구들이 주사를 맞고 비명을 지르고, 또 울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제 차례가 가까워지면서 공포심도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제일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 맨 처음 주사를 맞은 아이일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은 더 커집니다. 따라서 걱정을 빨리 내려놓는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바로 먼저 마주하면서,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걱정을 마주하면 별거 아닐 때가 더 많았습니다. 주사 맞는 것처럼 말이지요.
세상 안에서 걱정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만 하면 아마 걱정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만 갑니다. 따라서 빨리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걱정을 줄이고 힘차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약한 내게 힘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인 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즉, 심판이 아닌 구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심판을 먼저 생각하며 걱정합니다. 이제까지 지은 죄의 무게를 생각하면, 구원보다는 심판에 더 가까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구원에 맞춰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집니다. 걱정하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그분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고 그분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세상에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한 것이었지만,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된 자비만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굳은 믿음과 진정한 참회로 주님과 늘 함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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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라. 나에게 잃은 것을 한탄하는 시간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하는 시간이 부족할 뿐이다(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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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바라보는가? 시간을 잊고 있는가?
“시간이 참 빠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시간을 의식하고 바라보고 있으면 천천히 가는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시간을 잊고 있으면 빨리 지나갑니다.
어느 책에서 ‘세상에서 가장 시간 안 가는 3대 케이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컵라면 익기를 기다리는 시간, 플랭크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시간, 전역을 기다리는 시간.
이 시간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시간을 의식하고 바라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결국, 시간이 너무 빨라서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시간을 의식하지 않으니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시간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시간을 바라보며 중요한 것을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다 여유있게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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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16-21: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줄곧 그분의 마음을 상해 드렸는데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을 위해 그분은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귀중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이 헐벗고 나그네 되었을 때도 우리는 못 본 체했고, 무엇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오신다. 첫 번째 오심은 이미 지났고 지금 계속되고 있으며, 두 번째는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이 첫 번째 오심은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두 번째 오시기 전까지는 심판하시는 대신에 용서를 베푸시며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8절)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심판받을 필요가 없고, 믿지 않는 자들은 불신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판은 이미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판받을 사람들은 하느님께 충실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유혹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기도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은 이러하다. 그들은 어둠을 떠나 빛으로 달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다. 빛이 자신에게 오는데도 빛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신이 눈이 먼 것을 빛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원이나 멸망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21절)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선행이다. 선은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선은 당연히 드러나며 그것을 기뻐한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나아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빛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선행하고, 단식하고 베풂으로써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바른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다. 여기서 올바른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감사드리며 기쁘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며, 빛의 자녀로 영광의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즉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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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6-21).”
1)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착하고, 죄 안 짓고,
순하고, 말을 잘 들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45).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자녀’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당신의 집으로 들어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마태 18,14).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구원받기를 포기하거나,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을 가리킵니다.
2) <외아들을 내주시어>
이 말씀의 표현만 보면,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고,
아들 예수님에게만 모든 짐을 떠맡기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요한 10,30),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내주신 일은 당신 자신을 내주신 일과 같습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아들들이 모두 집에 들어와서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뿐입니다.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이 떠났다가 뉘우치고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아들을 내버려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밖’에 있는 큰아들을 타이르기 위해서 간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는 분명히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기 전에도, 떠난 후에도,
작은아들을 타이르기 위해서 무척 애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작은아들을 찾아가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타이르고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은아들이 죄를 뉘우친 것은 단순히 ‘배고픔’ 때문만은 아니고,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모든 사람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애를 쓰신 일은,
사실상 아버지 하느님께서 애를 쓰신 일입니다.
3)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먼 고장으로 떠난 것은
방탕하게 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루카 15,13).
분명히,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작은아들 자신이 떠났습니다.
그것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모습입니다.
큰아들의 경우, 방탕하게 살다가 온 작은아들에게 아버지가 벌을 내리기는커녕
잔치를 벌이는 것이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는데(루카 15,28),
분명히, 아버지가 큰아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큰아들 자신이 안 들어갔습니다.
그 모습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선택한) 모습입니다.
4)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말을 보면(루카 15,29-30),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아버지가 너무 쉽게 작은아들을 용서하고
잔치를 벌인 일 때문만은 아니고, 자기가 친구들과 즐기지도 못하고
종처럼 일만 한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처럼 방탕하게 살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는 불평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작은아들은 행동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고,
큰아들은 마음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작은아들만 죄를 지었다고 판단하겠지만,
하느님의 기준으로는 행동으로 죄를 지었든지 마음으로 죄를 지었든지 간에
두 아들이 똑같은 죄인입니다(마태 5,28).
화를 내면서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큰아들의 모습은,
“빛을 미워하면서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 모습이고,
그 모습은 그의 내부에 ‘악’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이렇게 타이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1-32).”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는 말은,
아버지가 큰아들을 종처럼 부려먹은 것은 아니라는 것과
친구들과 세속적으로 즐기는 것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말입니다.
(세속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영원한 행복을
비교한다면, 세속의 즐거움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라는 말에는,
만일에 큰아들이 끝까지 화를 내면서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면,
큰아들도 ‘죽은 아들(잃은 아들)’이 된다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라는 말은, 세속의 헛된 즐거움에 빠지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라는 권고입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는다면,
자기가 화를 낸 것이 잘못이었음을 뉘우칠 것이고, 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5)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작은아들은 악을 저지르는 동안에는 ‘아버지의 집’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빛을 미워하면서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회개한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부터 했습니다(루카 15,18).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은,
진리를 실천하면서 빛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회개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갈 것입니다.
따라서 ‘빛을 향해서’(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일 자체가
‘구원의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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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2017년 4월 26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 부활을 전후해서 조명을 받는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입니다. 사도들과 연결된 이 경비병들의 유래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느혜미야시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지시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던 일꾼들이
방꾼들로부터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경비병 역할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느헤 4,22-23)
로마의 통치자들의 경비병들과 구분되는 성전의 경비병들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빌라도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마태 27,65-66)
성전을 중심으로 대사제는 사두가이파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사도 7,17)
사두가이파는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과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정치, 종교, 경제적으로
기득권을 갖고 있는 세력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의 경비병들도 지휘제체에
대해서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성전 경비병들에 대한 확실한 기원이나 체제,역할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고의회까지 불려갔던 사도들이 유대 지도자들에게서 풀려났다가 다시 그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 다시 말해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 진 것입니다.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사제들은 경비병으로부터 사도들이 없어진 것에 대한 보고를 받고
서로 의논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사도들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자 경비대장은 부하들과 함께 군중을 자극하지 않고 사도들을 데려옵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하느님 사랑과 세상 구원에 대한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6-17)
우리는 하느님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에 부치셨는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받아들이고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지만 그 반대의 사람에게는
심판이 따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빛과 어둠에 대한 메시지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18-19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던 성전에서 권력을 누리던 사두가이들, 율법실천에 전부를
걸었던 바리사이들, 백성들의 신앙에 중심이었던 대사제, 그들은 결국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구세주와 그분을 따르는 사도들과 교우들은 그들 종교를 거스르는 정통 종교의
위배자일 뿐입니다. 그들 중에 많은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 약속의 땅, 성전에서
구원을 결국 따돌리고 외면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표현대로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욕심과 이기적인 것, 그리고 익숙해지는 타성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고착에서 자유로움을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역동적이고 새로움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생명의 특징은 한 자리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약한 것은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이고 사랑이라면
좋을 텐데요.
세상에 고정된 것들에 길들여지는 것인데 그 안을 더 들여다보면 편해지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드라운 심장이 아니라 돌처럼 차갑고 이기적인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에게 철저함은 있지만 돌처럼 차가운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그들에게는 배려도 포용도 없이 윈리 원칙만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이들은 굳을 대로 굳은 윈칙이 그 삶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조심해야 할 것은 기도하는 것에도 어떤 틀에, 어떤 시간에 매여 있으면
그 사람도 고착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어디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움 가운데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고 그 안에서 친교를 가진 것입니다.
어떤 틀이 아니지요.
기도 시간이 자기 만족이어서는 안됩니다. 바리사인들만큼 틀에 맞추어 기도하고
단식한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요? 그들은 내놓으라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에, 종교의 틀에 스스로 갇혀서 끝내 나오지를 못했을 뿐 아니라 결국
하느님의 아들을 배척하고 참다운 구원을 외면 한 것입니다.
사도들을 박해하며 감옥에 넣는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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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말씀입니까? 믿는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비둘기 모양의 성령께서 내려오시며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르 1,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시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본성으로 모든 것을내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 내어 주시는 분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까지 내어 주십니다.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시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를 닮은 아드님께서는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찾아 만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것을 온전히 내어 주십니다. 마침내 당신 생애의 결정체인 몸을 내어 주실 뿐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 주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그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우리는 이제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아파하는 이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께서 저를 죽기까지 사랑하심을 받아들입니다.’라는 뜻으로 십자 성호를 그어 몸에 새깁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아멘.”이라고 응답함으로써 ‘저도 이웃에게 나아가 내어 주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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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빛과 어둠이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최고 의회가 군중의 기세에 눌려 마지못해 풀어주었던 사도들을
다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주님의 천사가 이들을 감쪽같이 탈옥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남들을 구해 주면서 자기자신은 구하지 못한다.”고
유다인들로부터 조롱을 받으신 적이 있는데,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수난을 참아 받으시더니 당신의 일을 하는 사도들이 위험에 닥치자 얼른 천사들을 시켜 구해내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이제는 베드로와 요한만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 두려움 없이 확신에 차서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과 경비대장 등 악인들은 예수님을 기세좋게
죽여 버렸을 때의 상황과는 딴판으로 막심한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복음은 빛과 어둠으로 갈리는 심판적 상황임을 알려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맞이한 소수의 아나빔들은 구원을 받고 빛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한 다수의 군중과 극소수 악인들은
빛을 찾지 못하고 어둠에 남아 있는 그 자체로 심판의 벌을 받았습니다.
재판을 받으시던 예수님을 빌라도가 죄도 없어 보여서 풀어 주려 하는데도 굳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협박하던 유다인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 라고
호언장담했었는데, 과연 예수 사후 한 세대 만에 이스라엘은 독립항쟁을 일으켰다가 로마군에게 철저하게
짓밟혀 나라는 멸망당하고 백성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2천 년을 떠돌이로 지내야 했습니다.
2천 년 동안의 난민 생활이 심판의 벌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심판적 상황이고 심판으로 말미암은 벌이라 하더라도,
심판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교회가 끼어들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이어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부름받았음을 자부해 온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일에 너무도 경솔하게 끼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고대로부터 중세와 근세를 거쳐 현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까지
반유다이즘은 기승을 부렸고 그 중심에 역대 교황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러한 태도를 역사적 과오로 인정하고 사과한 후,
1964년에 바오로 6세 교황은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유다교 지도자들과 화해를 청했고
2000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그 길을 걸었습니다.
이미 1993년에 바티칸과 이스라엘 공화국 사이에 오랜 반목을 깨고 공식 외교관계도 수립한 후였습니다.
과거에 교회는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서거나 가담한 죄로 유다인들이 하느님과의 신의를 저버렸다는
판단 아래 유다교를 폐기된 종교로 간주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신약성서도 부인하는 유다인들을
공공연하게 박해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해 왔던 종래의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심지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창세기에서 요셉이 했던
표현을 빌려서 유다인들을 “우리의 형들”(창세 45,4)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야곱이 낳은 열두 아들로부터 비롯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교회는 넷째였던 유다 지파 출신의
예수님을 믿는 영적인 후손들이지만 유다교는 그 위로 세 명의 형들의 육적인 후손이라는 까닭에서입니다.
심지어 그는 “가톨릭 신자들은 영적인 유다인”이라고까지 지칭하며 화해를 이끌었습니다.
반유다주의가 가장 극심했던 폴란드 출신 교황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니까 교회 안의 반유다 분위기는 가라앉았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를 일컬을 때,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단정적인 표현보다는 ‘참이스라엘’이라는
다소 유보적이면서 모호한 표현을 공식적으로 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현재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할 때마다
유다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역사상 처음으로 선택하셨다는
역사성의 엄중함 때문이고, 언젠가는 당신의 선택이 지닌 정당성을 보여주시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유다인들이 당면한 과제는 가톨릭교회나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아랍 이슬람 신자들과의 해묵은 원한을 푸는 일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종교적으로도 이 문제는 꼬일 대로 꼬여 있어서 여간해서는 풀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를 쓰는 약 4백 명의 가톨릭 공동체가 있습니다
(1955년 설립. ‘Saint James 가톨릭 연합’).
이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유다적 뿌리와 함께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다인이었다는
정체성을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이 양쪽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유다인과 아랍인 사이의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에서 평화와 정의,
용서와 화해를 위해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과 이사악의 후손인 유다인도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현실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명쾌하게 가르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폭력과 증오에 의지하는 한 우리 모두가 악의 어두운 감옥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류는 정의와 평화, 용서와 화해라는 밝은 세상으로 다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옛날 당신 사도들을 감옥에서 구해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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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사유하는 커피’가 있습니다. 제가 즐겨 읽는 지면입니다. 커피를 통해서 철학적인, 문학적인, 신학적인 주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3월 21일 지면에는 ‘커피에서는 부활이 무엇일까?’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의미를 헤아리지 않고 활용하다가 영영 본뜻에서 멀어진 단어들을 소개하였습니다. ‘마누라’는 조선 시대에는 임금을 이르는 극존칭어였다고 합니다.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에는 ‘왕, 왕대비, 세자, 세자빈’ 등 궁중의 높은 인물을 뜻하는 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표현이 되었지만 요즘 부부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족하(足下)’는 상대보다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었습니다. 폐하, 전하, 저하와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요즘은 형제재매의 자식을 부르는 ‘조카’가 되었습니다. ‘서방님’도 벼슬하지 못하고 책방에서 공부하는 사람에서 남편을 일컫다가 남편의 동생을 이르는 호칭으로 쓰임이 바뀌었습니다. 장인과 장모가 사위를 부르는 호칭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말은 시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부활((Resurrection of Christ)입니다. 부활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복권(Reinstate)과 사면(Clemency)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억울하게 벼슬에서 쫓겨났거나, 감옥에 갇혔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을 후대에 사면하거나, 직위를 복권하기도 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이 중세에 다시 등장하여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바뀌는 재생을 뜻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있습니다. 르네상스는 근대 서구사회의 사상과 철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패션과 문화, 예술, 건축에서 회상, 회고, 추억이라는 뜻의 복고(Retrospect)가 있습니다.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과거의 체제, 전통 등을 그리워하여 그것을 본뜨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감각을 현대와 접목하여 현대적 감성에 맞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보는 ‘부활(賦活)’은 공매도 부활, 비트코인 부활, 트럼프 부활과 같은 말로 사용됩니다. 그런 부활은 활력을 주고, 생기를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復活)’과는 한글 표기와 발음은 같지만 뜻은 다른 말입니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부활은 묵은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히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소생(蘇生)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선은 언제나 악을 이긴다.”는 이치를 말해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단순히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거듭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부활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은 과학과 이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부활은 체험과 삶의 영역입니다. 미사전례에서 사제는 ‘신앙의 신비여!’라고 경문을 읽습니다. 교우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 받으소서.’라고 응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권능과 힘을 가지셨지만 오직 그 힘과 권능을 사랑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사용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힘을 가졌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매를 맞았을 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진리가 사도들을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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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은 선물이자 선택이다
- 빛이냐 어둠이냐, 생명이냐 죽음이냐, 진리냐 거짓이냐 -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어제는 빛과 생명이 넘치는 신록의 기쁨 가득한 참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향기롭고 신선한 공기만 호흡해도 배부른 느낌에 행복했습니다. 태령산 중턱에서 찍은 무아의 집 전경도 참 아름다워 사진을 찍어 도반과 나눴습니다.
“아, 그곳도 봄이 아름답네요!”
답신을 받았습니다. 봄은 요셉수도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여기 무아의 집도 아름답고 나라 곳곳이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바로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심을 입증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아름다운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물이자 선택입니다.
구원도 선물이자 선택입니다.
선물을 잘 분별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선택하면 누구나 구원이요 행복입니다. 방금 화답송 후렴 몇 구절도 선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무지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아름다운 찬미의 시편 선물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하느님 선물중의 선물이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 서두가 입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도 새삼 구원은 선물이자 선택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선물이신 예수님을 믿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때는 구원이지만 마음을 닫고 믿지 않을 때는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내리신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을 닫고 믿지 않아 자초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심판을 선택한 무지한 내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분별의 지혜를 그렇게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정말 무지의 어둠이, 무지의 악이 문제입니다. 동방 영성에서는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를 마음의 병이라 합니다. 하여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회개의 겸손과 지혜가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임을 깨닫게 됩니다. 무지의 정체는 다음 대목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무지에 병들어, 무지에 눈이 멀어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도 있듯이 악을 행하다 보면 악이 악인줄 모릅니다. 하여 말 그대로 악순환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빛이 아닌 어둠으로,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나아갑니다.
어찌보면 인간의 부정적 본질 같은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어두움은 우리의 원죄일 수 있습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도 바로 무지를 뜻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능가하는 무지의 탐욕의 바이러스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입니다. 생명과 빛, 진리를 향한 원초적 영적 본능을 지닌 원래의 인간이요 이를 회복하기 위한 회개입니다. ‘회개의 빛’이, ‘주님의 빛’이 ‘무아無我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낼 때 비로소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진리의 삶입니다. 더불어 두려움의 어둠도 사라집니다.
사실 어둠의 비밀이 많을수록 두려움도 점점 커집니다. 하여 고백성사를 통해 회개하고 비밀의 어둠을 덜어내는 것이 영적 건강을 위해서 필수입니다. 비밀의 어둠이 사라질수록 두려움도 사라져 투명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더욱 주님을 닮아갑니다. 바로 진리와 빛이자 생명이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일치할수록 빛과 생명, 진리로 충만한 행복한 구원의 삶이요, 저절로 무지의 어둠과 두려움은 사라져 무지의 병은 치유됩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궁극의 처방은, 답은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궁극의 영적 싸움의 본질은 빛과 어두움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긴적은 없습니다.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이 그 적나라한 영적싸움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빛이신 주님께 속한 사도들과 어둠에 속한 대사제와 동조자들 사이에 대결입니다. 결과는 사도들의 승리, 빛의 승리입니다.
사도들은 밤중에 주님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와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였고, 적대자들은 사도들을 붙잡아 왔으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 못했으니 결국 사도들의 승리, 빛의 승리, 주님의 승리, 민심의 승리였습니다. 흡사 빛에 포위된 어둠처럼 대사제와 동조자들의 처지가 참 초라해 보입니다.
구원은 선물이자 선택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빛과 생명, 진리이신 예수님을 날마다 선택하여 믿고 사랑하여 닮아갈 수록 우리 역시 빛과 생명, 진리로 충만한 행복한 삶이요, 이는 우리 모두의 궁극의 소망이자 목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무리 고백해도 늘 새로운 예수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의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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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구원의 골자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 구절이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우리 구원의 시작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우리가 구원받는 조건은 믿음이라는 의미지요.
당신의 생명을 헐어 우리를 지으신 창조가 그랬던 것처럼, 구원 역시 희생의 사랑, 비우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창조와 마찬가지로 구원도 주님과 우리의 역동적인 상호 관계 안에서 완성되어 갑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만물을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시고 피조물은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처럼, 주님은 목숨을 바쳐 구원하시고 우리는 그분을 충실히 믿고 따름으로써 구원을 얻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불신과 심판은 전후 관계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엉켜있습니다. 은총으로 허락된 믿음의 기회 앞에서 완고히 믿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는 스스로 구원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과 다름없지요. 스스로를 어둠에 가두고 자기중심적인 오만을 고수하는 자체가 어둠과 죄악을 구원의 자리에 놓았다는 뜻입니다. 심판이 멸망을 부르는 게 아니라 불신 상태가 이미 심판받았음을 증거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1)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는 빛을 향합니다. 예수님이 곧 빛이시지요. 믿음은 우리를 빛 가운데에 머무르게 합니다. 비록 자기 허물과 삶의 고통 때문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어도, 주님을 믿기에 희망할 수 있고, 그분 사랑을 알기에 그 자신도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합니다. 믿는 이는 믿음으로써 이미 구원 상태를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의 모습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여라.' 이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사도 5,20)
"감옥"은 어둠의 영역을, "이른 아침 성전"은 빛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기득권자들의 시기심으로 어둠에 갇힌 그들을 주님의 천사가 다시 빛으로 꺼내어 주지요.
그런데 권력에 의해 합법적으로 풀려난 상태가 아니라면 조용히 숨는 것이 후일을 도모하며 안전을 지키는 상식일 터인데 제자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천사가 일러준 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공적인 장소로 되돌아가 말씀을 선포하지요. 빛을 선택하는 이에게 투옥이나 박해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빛 한가운데 서서 빛이신 분을 선포하는 이들로 인해 수석 사제들은 몹시 당황해합니다. 그들이 아는 "무식하고 평범한" 이들이 빛 안에서 그 자신이 빛이 되어 있음을 목도하는 자체가 적잖은 충격이니까요.
빛이 어둠을 동요시키고 있습니다. 이 동요가 구원으로 이어지려면, 그들이 기득권 유지에 골몰하며 진리에 귀를 막을 것이 아니라 새로움으로 인해 진동하고 균열을 일으키는 내면을 직시하고, 빛이 스며들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모든 것의 시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출발점만 정확히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빛 안에 있습니다. 구원에 머무는 구원의 상태를 누리는 중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따뜻한 봄햇살을 받으며 산책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빛살처럼 쏟아지는 주님의 사랑을 믿고, 믿기에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때로는 아프고 힘겨워도 우리가 받는 사랑이 있어 멈추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이 빛이시고 진리이시니, 우리가 아무리 부족한 죄인이어도 그분 안에서는 우리가 충만하고 온전하답니다. 빛 안에서 빛이 되어 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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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3,19)
'빛으로 나아가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대화하시면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사람들, 그래서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않은 사람들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게 큰 사랑인데도,
그 큰사랑에로 나아가지 않은 사람들의 배은망덕한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바로 나요 우리들이 아닌가?
배은망덕한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지적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겠다고, 영원한 생명을 믿겠다고 굳게 약속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이는 우리들은 아닌지?
오늘 복음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이들,
빛이신 예수님보다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들을 더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오늘 독서(사도5,17-26)를 보니,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하지만 빛이신 주님의 천사들이 사도들을 구해냅니다.
그렇습니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사람들처럼 시기심에 가득 차 있고, 분노와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담대하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빛이신 주님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우리는 주님께서 파견하신 '또 하나의 사도들'입니다.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내가 먼저 빛이 되고, 빛이신 주님, 생명이신 주님을 세상에 전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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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진리는
살아있다.
진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진리에 속한
진리의
사람들이다.
생생한
진리의
말씀이
우리 삶에
울려퍼진다.
진리는
아는 것보다
시작하는
실천에 있다.
진리는
아름답고
강하다.
눈을 뜨게
하고 닫힌
마음을
열어준다.
아프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이
참된 진리이다.
이와같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진리의 참된
본질이다.
하느님의
뜻은
진리의
실천이다.
우리와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일하는
진리의 삶이다.
모두를
살리는
진리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진리의 실천이다.
진리의
빛안에
살고있는
우리들
삶이다.
진리를 먹고
자라나는
우리들
시간이다.
사랑의 실천이
진리이며
참된 빛이다.
사랑으로
나가야 할
부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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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악을 저지르는 자’와 ‘진리를 실천하는 자’: 육체를 살리려는 자와 영혼을 살리려는 자
오늘 복음에도 역시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이 대화의 핵심은 ‘성령으로 새로 남’입니다. 새로 나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이 구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악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은 빛으로 나아옵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악을 저지르는 자’와 ‘진리를 실천하는 자’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누가 악을 저지르는 자이고, 누가 진리를 실천하는 자일까요? 결국, 진리를 실천하는 자는 빛에 머물게 되고 악을 실천하는 자는 어둠 속에 머물게 됩니다.
고양이 ‘준팔이’는 버려진 고양이 보호소에서 석 달 넘게 먹지도 않고 밖으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억지로 음식을 넣어도 토하고 뱉어냅니다. 몸무게는 발견될 당시의 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주인에게 버려졌다는 마음의 병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살려는 의지가 없어서 자발적 거식증에 걸린 것입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먹는 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이때 준팔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뮤지컬 배우 배다해 씨입니다.
“고양이가 밥을 안 먹을 정도면 자기가 죽겠다는 마음을 거의 먹은 상태랑 다름없거든요. 한 명은 널 버렸을지 몰라도 널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다해 씨는 준팔이를 처음 만났을 때 생각보다 더 말라있는 준팔이를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날수록 준팔이는 자신의 몸을 맡기기도 하고 손을 내밀기도 합니다. 몸이 약해서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지만 다해 씨가 와 있을 때는 편안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렇게 지낸 1주일 뒤 준팔이는 스스로 다해 씨를 향해 먼저 다가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먹이는 거부합니다. 목소리를 통해 보지 못할 때도 준팔이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렇게 두 주일이 지나자 준팔이는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삼 개월 만에 처음으로 먹이를 먹게 됩니다. 더 감사한 것은 준팔이가 다른 고양이 친구들과 사람들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처: ‘주인 잃고 단식 중인 고양이, 준팔이’, 유튜브 채널, ‘SBS STORY’]
고양이 보호소에는 버려진 고양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다해 씨의 관심을 끈 것은 준팔이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배다해 씨가 줄 수 있는 것을 찾는 고양이는 준팔이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고양이들은 준팔이의 음식까지 뺏어 먹습니다. 그러나 준팔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사랑이 아니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랑을 찾으니 사랑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것이 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영혼도 살려고 하고 육체도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영혼은 사랑을 먹어야만 살고 육체는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만약 영혼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준팔이처럼 육체를 살리는 데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혹은 육체를 살리려고 하는 자는 하느님 사랑에 관심이 없습니다. 영혼은 하늘에서 온 것이고 육체는 땅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복합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안에는 이미 어떤 긴장이 깃들어 있으며,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 일종의 싸움이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실상 죄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며, 죄의 결과 중의 하나이자, 동시에 죄를 확증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영적 투쟁의 일부분이다.”(2516)
육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육체의 욕망이 생존 이상으로 높아지면 영혼의 생존에 신경 쓸 에너지까지 빼앗깁니다. 따라서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육의 생존에 치중하는 사람과 영혼의 생존에 치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영혼의 생존을 위해 사랑이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고 그것과 상관없이 육체의 생존에만 치중하는 사람은 어둠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고 영혼이 바라는 사랑을 찾는 사람이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심판에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행복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영원히 살고 행복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인 행복과 육체적인 생존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사랑이 갑니다. 사람은 40일 밥은 굶어도 사랑은 단 3일 굶어도 죽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이란 영화에서 사형수 윤수는 자신을 사랑해 준 유일한 유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는 게 지옥 같았는데…. 내…. 살고 싶어졌습니다.”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을 보고 올라오는 물고기는 오징어밖에 없습니다. 생존도 중요하지만 빛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빛이 아니면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없어야 합니다. 육체를 살리느라 사랑을 찾는 것을 잊지 맙시다. 심지어 고양이도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리가 먹을 것, 누릴 것, 세상 것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며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판은 사랑을 바라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사람이 십자가 사랑으로 나아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보다 큰 사랑이 없고 이것보다 큰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악이란 육체의 행복에만 치중하며 영혼은 돌보지 않는 삶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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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사람!
겨우내 화분에 갇혀 지내던 수선화들을 성모상 옆으로 옮겨 심었습니다. 때맞춰 단비까지 흠뻑 내리니, 친구들도 숨통이 좀 트이는지 환한 미소를 짓는 듯 합니다. 수선화들을 옮겨심으면서 존경하는 정호승 시인의 불멸의 명시, ‘수선화에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 공연히 울려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는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수선화 친구들을 성모상 옆으로 옮겨심고 나니 튤립 친구들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습니다. 대자연의 신비와 위대함 앞에 입을 다물수 없었습니다. ‘몇 송이 노란 수선화가 이리도 큰 기쁨을 선사하는데, 나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있는가? 미소를 머금게 하는가?’ 하는 생각에 급 부끄러움이 다가왔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장기화로 인해 다들 힘겨워하는 이 시대, 서로가 서로에게 한 송이 어여쁜 수선화 같은 존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사람...
아무나 그런 사람이 될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복음 3장 7절)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날때, 신앙 안에서,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날때, 얻을 수 있는 은총과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은 얼굴 색깔부터 다릅니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이 벌써 다릅니다. 지극히 호의적이고 따뜻합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이 있으니,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느님 나라를 누리고 살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어떤 면에서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은 평생 소원을 성취한 사람들이니 더 이상 이 세상에 여한이 없습니다.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내것을 내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관대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소유한 바를 아낌없이 나눕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행전 4장 32~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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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은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무서운 공포심이 떠오른다는 게 일반적일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가만 보면 세상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신의 양심에 반해서도 일말의 거리낌도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세상 법이 엄하다고 하더라도 조금의 두려움도 가지지 않습니다. 이런 원리도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종교적으로 말하는 심판에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부분도 있지만 이건 조금 성질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심판의 개념은 아주 단순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함으로써 빚어진 결과가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둠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왜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걸까요? 악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다시 말해 죄를 저지르지만 않으면 어둠을 사랑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됩니다. 악을 저지르게 되었을 땐 악한 성질의 표양이 빛으로 나아가게 되면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빛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어둠이라는 죄의 속성은 빛이신 하느님으로 나아가는 것을 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달 말일에 저는 대전에서 한 수녀님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사실 이 수녀님을 알게 된 것은 작년에 알게 되었습니다. 외국에 계실 때 우연히 제 카페에 있는 글을 보신 후에 저에게 메일이 와서 인연이 되어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에서 10년 동안 영성심리학에 대해 공부를 하신 분인데 제가 부탁을 드려서 만난 것입니다. 마침 지금은 한국에 잠시 계셔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실제 수녀님도 저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심리에 대한 연구와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특히나 이것도 일반적인 것도 포함하지만 신앙인 영성에 관련된 분야라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본 것이지만 제가 올린 영성적인 글이 수녀님께는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었나 봅니다. 사실 수녀님께서 메일을 보내셨을 때 수녀님이라는 사실을 먼저 밝히셨고 마침 수녀님이 나름 연구하는 분야가 있는데 그 대상인 표본이 되어줄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사실 조금 황당했습니다만 몇 번 메일을 통해 주고받으면서 오히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측면이 많아 그동안 메일만으로 연락을 취하다가 이번에 수녀님을 만나 한번 상담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났습니다.
이분은 한국에 계신 분이 아니고 로마에 있는 수녀원에 계십니다. 이번에 저는 이 수녀님을 통해 약 5시간 정도의 만남을 가졌지만 2시간 정도는 수녀님으로부터 3시간 동안 상담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일종의 신앙 강의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들었습니다. 이번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수녀님은 10년 동안 이 분야에 대해 죽어라고 공부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전에 독일에서 개신교 신학을 4년 공부하신 후에 로마에서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해서 그때 수녀님으로부터 들은 내용의 일부분 중 아주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서 하나 언급해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건 굳이 심리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철학이나 동양철학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진짜 자기의 모습과 거짓의 모습 이렇게 나눌 수가 있습니다.
실제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남과 공존하며 살기 위해서는 때로는 협력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지만, 때론 경쟁 아닌 경쟁을 해야 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에 원래의 자기 모습이 아닌 다른 자기의 모습으로 위장하려고 하는 심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런 자신의 모습을 인식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경우도 있고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인식을 하면서 하는데, 이때는 약간 양심이 작용하기 때문에 양심에 가책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그런 상황을 합리화하지만 그게 정당한 건 아니라는 건 자기 양심이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인간은 이런 경향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이게 어느 시점에서 그만둬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마약중독처럼 중독이 되면 나중에는 위장한 자신의 모습으로 굳어져서 이전의 모습으로 좀처럼 되돌아가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라고 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영혼이 병들어 있는데 그 병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이 아주 심각한 내용입니다.
육신의 병은 사람이 아프거나 통증이 있기 때문에 자각을 하고 어떻게 치료를 할 수가 있지만, 영혼의 병은 상대적으로 육신의 병처럼 자각증상이 없기 때문에 느낄 수가 없다는 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영혼이 병들어 있어도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수녀님이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실제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신앙공동체에는 이런 환자들과 같이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환자이면서 환자인지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표현을 순화해서 표현을 했습니다만 우습기도 하지만 슬픈 내용입니다. 그래서 수녀님이 하신 말씀이 누구나 인간은 이런 속성을 가지지만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중독으로 갈 수 있는 임계점인 마지노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선을 넘어가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면서 강조하신 게 소죄의 중요성을 언급하셨습니다.
우린 대죄는 누구나 심각성을 잘 인식하기 때문에 짓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려고 노력하려는 성향이 있지만, 소죄는 당연히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소죄를 범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인지라 소죄를 지을 수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게, 이런 당연하다는 생각이 나중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중독의 위험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수녀님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다 언급할 수가 없지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생각한 게 있습니다. 사실 빛이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상태가 바로 하느님과 영원한 단절인 상태입니다. 이런 게 우리 가톨릭 교리상으로 그런 상태가 지옥과 같은 곳이 됩니다.
수녀님께서 최종적으로 마지막에 가장 강조하신 게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많은 것이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고 하는데, 숨기면 숨길수록 자신의 영혼에는 좋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걸 극복하지 않으면 거짓이 또 다른 거짓을 낳듯이, 우리의 영혼도 치유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갈 수가 있기 때문에 이점을 항상 염두에 두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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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부활 제2주일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5,17-26)
그무렵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17~21)
본절부터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사도들에 대한 핍박과 투옥 및 천사들에 의한 구출, 사도들에 대한 대사제의 직접적인 문책, 그리고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중재로 인한 석방 등과 같은 매우 긴박하고도 역동적인 이야기가 5장 끝절까지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의 전파가 결코 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핍박이 복음 전파를 절대 방해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들을 적대시한 자가 바로 대사제이며, 사도들이 당하는 박해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조직적인 박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으로 사두가이파들을 대사제와 함께 있는 동조자로 소개한다.
이것은 이들이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대사제의 역할을 가장 중시하였고, 대사제 측근에 있었던 귀족들이 특히 사두가이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대 최고 권력 기관인 산헤드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당시의 정치 집단인 헤롯왕이나 로마인들과 연합하여 온갖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
사두가이파들이 대사제를 도와 사도들을 잡아들이는 데 앞장선 것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일어난 역동적인 복음의 역사가 많은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감으로써 그들 특권층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이 위협을 받았고, 높아만 가는 인기에 시기가 났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앞장서서 죽인 예수님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활을 부인하는 그들의 교리와 상충되었을 뿐 아니라 과거 그들이 범한 죄악상이 드러나며, 더 나아가 민중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반기를 드는 민란까지 일어나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두가이파들은 누구보다 앞서 사도들을 잡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시기심('젤루'; zelu)이 가득 차(epllesthesan; 에플레스테산)'는 진실에 입각하거나 바른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시기에 의하여 박해가 발생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가득차'에 해당하는 '에플레스테산'의 원형 '플레도'(pledo)는 '충만하다'(사도4,8.31), '채우다'(루카5,7)로도 번역되는 단어로써 빈틈을 찾아볼 수 없으며 넘칠 정도로 가득 채우는 상태를 말한다.
당시 이들은 끓어오르는 시기심으로 인하여 다른 상황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오직 사도들을 박해할 생각으로만 가득했음을 알 수 있다.
유대 종교를 대표하는 이들이 이성을 잃고 이기심에 따라 분별없이 행동하는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그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 수 있다.
'공영 감옥'(teresei demosia; 테레세이 데모시아)에서 '데모시오스'(demosios; 공적인)라는 형용사를 첨가하여 굳이 공영 감옥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도들이 비록 단단히 잠긴 옥에 갇혀 공적 기관의 삼엄한 감시와 경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크신 하느님의 역사로 나오게 된 것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19)
'데리고 나와'로 번역된 '엑사가곤'(eksagagon)의 기본형 '엑사고'(eksago)는 '밖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인도하다'는 뜻의 '아고'(ago)가 합성된 형태로서 '(밖으로)인도하여 내다'(요한10,3),'끌어내다', '데리고 나가다'(마르8,23)는 뜻이다.
이 단어의 의미에는 두 가지 함축적인 사실이 들어있다.
첫째로 이 단어는 속박과 고통에서의 '구원'을 가리킨다(요한10,3; 사도7,36). 본문에서는 사도들이 감옥의 속박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된 것을 가리킨다.
둘째로 이 단어의 의미속에는 '강제성'의 개념이 들어 있다(마르15,20). 즉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끌어냄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이 동사가 이러한 두가지 개념을 모두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사도들의 구출의 목적이 다음 절에 나오듯이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시급한 사명이 사도들에게 있음을 드러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옥에 갇혀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던 사도들을 주님의 천사가 어떻게 쉽게 빼낼 수가 있었을까?
본절에서는 필리피 감옥의 경우처럼 감옥터가 움직이고 지진이 나는 기적 (사도16,26)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주님의 천사는 초자연적인 영적 능력으로 경비병들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사도들을 이끌고 나왔을 것이다.
하느님은 때로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워 어둡게 하기도 하신다는 사실이 (2열왕 6,18) 이를 뒷받침한다.
사도들을 옥에서 이끌어 낸 주님의 천사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사명을 부여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생명'(zoe; 조에)이란, 이 세상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마태18,19; 마르10,30; 요한3,15).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구원의 생명을 말한다.
본문의 '이 생명'에서 '이것'을 가리키는 '타우테스'(tautes)는 지금까지 사도들이 계속해서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되는 생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말씀'은 '타 레마타'(ta remata)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말씀'을 가리키는 '토 레마'(to rema)의 복수형으로서 '설교','연설'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조용히 사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 즉 '케뤼그마'(kerygma)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들이 말씀을 전하되 대담하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이 말씀 앞에 '모두'로 번역된 '판타'(panta)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파되어야함을 분명히 해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혹시라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을 두려워하여 구원의 말씀들을 단 하나라도 생략하거나 약화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구원의 말씀들이 모든 사람에게 들려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 제2주간 수요일
<고통 없이는 생명을 낳을 수 없다>
여자가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과해야만 아이(생명-기쁨)을 낳는다는 것, 다 아시쟌아요?
(요한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너무나- ‘이토록’입니다. (주해서)
앞절~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죽을 죄인들에게 하늘의 영생을 주시기 위해 그들의 죄 값인 속죄 제물로 저주의 뱀이 되어 십자가 기둥에 달리게 하신, 그토록 사랑하신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래서~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말씀을 사람의 관점, 도덕과 윤리로 보면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으로 보면 덮으심 그 용서입니다.
18ㄱ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 예수님께서 대신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18ㄴ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대속으로 용서 받아 의인이 되어 구원 받는 것입니다.(로마3,24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그 대속의 십자가의 ‘길이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신 것입니다.(요한14,6)
그러니 그 진리의 말씀을 믿지 않은 그 자체가 이미 죄인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 빛이 세상에 왜 왔어요? 하늘의 구원의 의로움을 주시기 위해서요. 그러나 사람들은 하늘의 의로움보다 땅의 의로움을 더 믿고 의지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의로움을 흉내 내는 교만의 악한 일입니다.
선이 악을 덮어 생명, 곧 구원을 주는 그 하느님의 의로움보다 사람이 하느님처럼 선악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구원의 의로움을 이루겠다는 것, 교만, 악입니다. 사람의 의로움은 구원의 힘,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의로움으로 죄의 용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면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그것이 곧 하느님을,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카인이 형제 아벨을 죽였듯이 말입니다. 의인으로 착하게 살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듯이 말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피조물로 그분의 죄를 덮으시기 위한 그 사랑을 의지하여 그 하늘의 의로움으로만 구원,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스바 2,2-3) 2 쓸려 가는 검불처럼 너희가 내쫓기기 전에 주님의 타오르는 분노가 너희에게 닥치기 전에 주님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닥치기 전에 3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 하늘의 의로움, 겸손을 찾아야 합니다. 땅의 의로움, 겸손으로는 화(禍)를 피할 수 없습니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선이 악을 덮어 생명을 주시는 그 하늘의 진리를 아는 이는 당연히 자신의 惡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선의 덮으심, 그 예수님의 대속으로 자신의 악이 용서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됨을 믿으니까요.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이 구원의 가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로움, 그 복음을 말하면 듣기 싫어하고 그 사람까지 미워합니다.
그래서 제사와 윤리로 흠 없이 살았던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 스테파노를 죽이는데 협조했던 것입니다. 그 땅의 의로움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던 사도 바오로를 살리시기 위해 그를 엎어 트리신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그 자신의 의로움, 그 가치를 엎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1,2-5) 2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3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4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5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 고통 없이는 생명을 낳을 수 없습니다. 여자가 아이(생명)를 낳기 위해서는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과 해야만 합니다. 그 시련을 통과하면 기쁨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그 산고(産苦)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듯이 말입니다.
(히브12,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장 전체를 보면 더 힘이 될 것입니다.>
아멘.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3,16-21)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19)
요한복음 3장 19절은 요한복음 3장 18절 후반부에서 나온데로,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가 심판을 받는 이유를 다시한번 더 밝혀 강조한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에서 '심판'에 해당하는 '크리시스'(krisis; condemnation; verdict)는 실질적 의미에 있어서 18절에 나오는 '심판하다'에 해당하는 '크리노'(krino)와 거의 동일하다.
불신자들이 심판받는 보다 구체적인 이유는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자신의 행위가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에서 동사 '엔'(en; were)은 미완료형 이므로, 이 사람들의 과거 전력을 드러낸다.
즉 희랍어에서 미완료형은 과거에 계속 혹은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행위가 변함없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형용사 '악한'에 해당하는 '포네라'(ponera; evil)가 서술적인 위치에 있어서 이 사람들의 행위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단어가 마귀의 속성과 관계가 있다.
이 형용사는 '악한'뿐만 아니라 '못쓰게 된', '나쁜', '가치없는', '타락한' 등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나타내는 복합적 의미로 쓰였다.
즉 이 단어는 그들이 마귀의 속성과 관련된 악행을 계속하여 저질러 왔으므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에서 '빛'에 해당하는 '포스'(phos; light)는 태양과 같은 발광체를 나타내며, '어둠'에 해당하는 '스코토스'(skotos; darkness)는 이 빛이 차단된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는 상징적인 의미로 쓰였는데, 성경은 메시아에 의해 선포된 복음이나 구원을 '빛'으로 표현하고(마태4,16; 사도26,18; 에페5,13), 죄와 불신앙의 상태를 '어둠'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마태4,19; 로마2,19; 1티모5,4; 1베드5,13).
요한복음 3장 19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원조 아담이 범죄한 이후 타락한 본성의 소유자인 인간이 죄와 불신앙을 더 사랑함을 보여 주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더'로 번역된 '말론'(mallon; rather)은 '더'라는 뜻의 비교급 부사로도 쓰이지만(필리1,12; 마태10,48; 루카18,39), '~대신에 도리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태10,6; 마르5,26; 로마14,13).
그렇다면 요한 복음 3장 19절은 인간이 마땅히 빛을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대신에 도리어 어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이것은 인간이 그 행위가 악하므로 빛에 대해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어둠만을 수용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시 유대인들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한 근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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