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디찬 겨울을 지내고 봄이 오면 하얀 꽃을 피운 후 노랗게 변하기에
금은화(金銀花)로 불리는 인동초(忍冬草)를 말하는 게 아니다.
또한 온갖 위협 등을 이겨내고 인고(忍苦)의 꽃을 피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을 상징한다는 인동초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금은화와 능동초(凌冬草)로 불리는 냉이 중 과연 어느 게 진정한 인동초일까를
말하고 싶은 거다.
2021. 1. 18. 08;20
밤새 눈이 내렸다.
하늘가는 잿빛 가득하고 주춤했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밤사이 쌓인 눈 위에 다시 내리는 눈은 온 세상을 경계 없는 설국(雪國)으로
만들어간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종종걸음을 걷는 사람,
얼굴을 하늘로 향해 일부로 눈을 맞는 사람,
넉가래로 눈을 밀어내는 사람들로 부산스럽지만 영하의 추위에 내리는 함박눈은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묘한 마력(魔力)을 뿜는다.
소나무와 산수유나무들은 눈꽃으로 천태만상(千態萬象)을 연출하고,
그 사이에 끼어 터벅터벅 걸음을 걷는 나 또한 눈사람이 된다.
08;30
산길 모퉁이를 돈다.
나 혼자만이 오롯이 걷기 좋은 산길을 지나야 사무실 방향이다.
사무실에 나가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보름이 넘어섰고,
삶의 권태기(倦怠期)에 찌들었던 내 몸은 생기를 찾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사라지고 나 혼자만이 걷는 호젓한 산길의 켜켜이 쌓인 눈 사이로
파란빛이 보인다.
무엇일까 톺아보니 눈을 뚫고 '냉이'가 올라온다.
예년보다 강추위였는데 추위를 이기고 냉이가 올라오다니, 어느새 입춘이
코앞에 다가온 모양이다.
사실 냉이는 봄에 싹이 트는 식물이 아니고 가을에 싹이 올라와 모진 겨울을
버티는 식물이다.
아주 작은 미물(微物)인 냉이가 추위를 버티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강인한
생명력에 경외감(敬畏感)을 느낀다.
냉기(冷氣)를 이긴다 하여 '냉이'로 이름 지어졌다는 냉이,
금은화로 불리는 인동초는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내서 인동초로 불리겠지만,
고들빼기, 씀바귀와 함께 능동초(凌冬草)로 불리는 냉이를 보며 냉이야말로
진짜 인동초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부터 딸 아홉이 있는 집이라야 가을 냉이를 맛볼 수 있다는 해학적인 말이
전래될 정도로 우리 민족과 가장 친근한 나물인 냉이는 원래 이 땅에 자라던
식물이 아니고 귀화식물이라고 하는데,
유럽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이 많다.
충청도에서는 나생이라 부르며, 나승구, 나잉개, 계심채, 정장채라고도 불리는 냉이,
단백질, 비타민, 섬유질, 탄수화물, 칼슘이 듬뿍 들어 이질, 설사는 물론 비타민 A가
많아 눈(眼)을 밝게 해준다는 냉이가 살포시 눈을 뜷고 올라오니 봄이 머지않았다.
식약동원(食藥同源)의 대표적인 냉이가 꽁꽁 언 땅을 얼굴을 내민 산길을 돌아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번잡한 길로 다시 접어든다.
10;00
잠시 망설였던 함박눈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다.
우산을 쓰지 않은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눈을 맞으며 서서히 눈사람이 되어가고,
우산을 쓴 사람과 옷에 달린 모자로 머리를 감싼 사람은 수굿하게 걷고,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백묘법으로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를
그려 나간다.
매서운 추위를 능가(凌駕)한 냉이가 파릇파릇 살아나듯이
코로나 19라는 지독한 바이러스 속에서 사람들도 냉이처럼 시련을 이기고 살아간다.
참 모진 세상이다.
웃음기 가득했던 '정인'이라는 아기가 양모(養母)에 의해 참혹하게 죽어 세상이 시끄러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덤덤해지는 게 인간세상이다.
또 더 많은 시간이 지나가고 평범한 일상이 찾아오면 그 일상에 원융무애(圓融無碍)가
되어 내 몸을 온전히 실을 수 있으려나.
편벽됨이 없이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일체가 되어 서로 융화하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원융무애를 떠올리며 하염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본다.
2021. 1. 18.
석천 흥만 졸필
첫댓글 아는 것이 많구나? 덕분에 이제야 냉이가 소중한 먹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맙다.
냉이가 뭉텅이로있는곳을
알고있느데,
같이캐러갑시다.
추진하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