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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미네소타 주립대학에는, “필즈베리 홀”이 있습니다. 이는, 미네소타 주립대학이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자신의 사재로 대학의 재정적 안정에 기여했던 필즈베리를 기념하는 건물입니다. 189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을 보면,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 사람은 가도 그가 한 후원 활동의 결실이 계속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상원의원을 5번이나 했습니다. 그가 미네소타 주의 주지사로 재임할 때, 미네소타에는 3년에 걸쳐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모든 농경지가 참혹하도록 폐허가 되었고, 대 경제공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안목으로는 “감사”보다 “비관, 절망”이 앞서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필즈베리는 1877년 4월 26일을 미네소타 주민들에게 “기도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미네소타 주가 겪고 있는 참혹한 현상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믿음이었던 겁니다. 이러한 주지사와 마음으로 하나된 주민들은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농경지가 메뚜기 떼로 인해 황폐되었으나, 자신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희망을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거듭되는 메뚜기 떼의 습격을 막아서, 농경지가 회복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한 후, 무엇으로도 재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뒤로는, 메뚜기 떼가 습격하지 않았고, 농경지가 더욱 풍성해 진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 나오는 광야는 이렇게, 메뚜기 떼의 습격을 황폐화된 농경지보다 더 처참한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약속받은 가나안은, 이러한 광야를 반드시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자들은 누구든 이 곳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신 8: 15절을 보시면,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말하되,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가 비 기독교인들과 구별되는 삶의 자세는, 미네소타의 주지사였던 필즈베리와 그 주민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가장 먼저 기도한 것처럼, “감사”입니다.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른 감사가 아니라, 매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살전 5: 18절을 보시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매사에 감사하기 보다는, 부분적으로 원망과 불평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겁니다. 원망은, 누구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원망은, 자신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또,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러분, 감사의 조건과 원망의 조건은,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이는, 원망할 환경 속에서도, 혹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더 큰 은혜를 받지만, 혹자는 원망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인 불뱀을 부른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은 사건을 보며, 하나님께 매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매사에 경험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 - 5절을 보시면,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상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며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불뱀에 물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놓인 지름길인, 왕의 대로가 막히고, 멀고 험난한 길을 지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호르산을 떠나 광야를 행진하던 중, 에돔나라의 국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모세는 에돔에 있는 왕의 대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에돔과 협상을 했습니다. 왕의 대로는 에돔과 모압, 암몬을 잇는 대로로 오래 전부터 무역통로로 사용되었고, 전쟁 시에는 군사도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길을 통과하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편하게 빨리 갈 수 있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왕의 대로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길을 통과할 때, 에돔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통과만 할 테니 통과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만약, 피해를 주면, 피해를 보상해 주겠다는 단서까지도 달았습니다. 하지만, 에돔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약 2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땅을 통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사실, 에돔과 이스라엘은 한 형제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이고,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돔은 이스라엘을 시기하며, 이스라엘이 고통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광야 2세대의 이스라엘은, 광야 1세대의 자기 조상들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이 지금껏, 광야에서 먹고 마신 것 역시, 자신들의 노력으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이 본문에서 “하찮은 음식”이라고 표현한 “만나”에 대해, 민 11: 8절을 보시면,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며,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 음식이었고, 그 만나를 처음 보았을 때는 참으로 놀라운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지금은, 기름 섞은 과자같은 만나가 “하찮은 음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세월이 지나면서, 재인식되고, 익숙해지면서, 은혜받은 처음의 감동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하찮고 무가치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본문의 이스라엘이 이 때, 불뱀에 물린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우리에게 더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뱀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는,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때로 내가 원치 않는 상황이라 하여도, 그것이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 자녀들에게 믿음을 가르침으로, 세대를 이어 믿음을 지키고, 믿음이 더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우리의 마음이 상할 만한 현실, 매우 불편한 길, 멀고 힘든 길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길에서, 우리가 지나온 날들을 믿음의 눈으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길을 되돌아보면,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과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원망으로 가득차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안 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거 광야의 이스라엘이 그랬듯, 우리 또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을 잘 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도 잘 잊습니다. 그러기에, 가끔 어려움을 만나면, 이로 인해, 신속하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기억하신다면, 그리고,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그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했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기억함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하나님께 매사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 - 7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배은망덕하여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들을 방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하찮은 음식으로 생각하며 원망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만나는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그들을 살게 했던 생명과 같은 음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만나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생명을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냈습니다. 그 뱀은 매우 독하여, 뱀에 물린 자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헤매다가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이처럼, 불평과 원망의 소리는, 우리 삶에 “불뱀”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불만과 원망은, 엄청난 댓가를 치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겁니다. 불뱀에 물려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자, 자신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깨닫고, 모세에게 가서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며 간청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위해 간청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거나 불평하며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원망의 소리는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원망이 아니라, 감사와 간구로 나가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들에게, 그 죄의 결과로 인해 비참함을 겪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이자 은혜입니다. 만약, 이러한 비참함을 겪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리석기에 그것이 죄인 줄 모를 것이며, 죄의 결과가 비참하다는 것을 모르기에, 계속해서, 죄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자, 죄의 비참함을 알게 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회개의 자리에 있게 하시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에 합당하지 않을 때는, 그 은혜를 거두시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불뱀에 물린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어떠한 노력을 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놋뱀을 보면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에, 믿음으로 그 말씀에 의지하여, 놋뱀을 보았기에 살았던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놋뱀을 세워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3: 14 - 15을 보시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좁고 협한 길로 가기 보다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크고, 넓은 왕의 대로로 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크고 넓은 왕의 대로로 가면, 그 곳에는 오직, 우리 자신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좁고 협한 길로 가면,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함께 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월이 무수히 가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하찮은 것이 아니라, 그 은혜의 크심을 알고, 더욱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 - 9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감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합리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다는 복음의 진리가 너무도 단순해서 믿기 어려워합니다. 그들은 이 진리에 대해 많은 조건들을 붙이며,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못하는 겁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얻는 복음의 진리를,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믿는 자에게는 분명코 구원이 주어집니다. 호 6: 1을 보시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찢으시기도 하지만, 싸매시고 치료해 주시기도 한다는 겁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서 고통 속에서 죽이기도 하시지만, 놋뱀을 만들어 세워서, 긍휼과 자비와 은혜와 구원의 길을 열어주고 싸매어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사도 바울은 갈 6: 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또, 고전 1: 18을 보시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놋뱀을 바라봄으로 살 수 있듯, 성도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증표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불평이 많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감사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아무 죄도 없으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서 원망의 소리가 나올 때,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비 기독교인들처럼, 자신의 삶을 원망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여 불뱀을 불러서는 안 됩니다. 불만과 원망은 불뱀을 부릅니다. 불평하는 삶에는 유익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정적으로 만들고,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차단하여, 더욱 힘든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감사로 이어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하루가 만나이고, 일상생활이 만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귀하며, 감사한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가심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 더욱 감사함으로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은혜와 축복 가운데 거하며,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