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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파트 부동산의 영원한 신앙과 북송 시기 서울 개봉의 집값
2026년 10월 23일
요즘 반도체 장사가 잘되어 무역 흑자가 크게 늘고 주식 시장이 잠깐 활황이었습니다.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값도 날로 오르니까 부동산 신화는 여전히 힘을 내고 있습니다.
젋은 사람들도 은행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사고 원금 상환과 이자 납입에 허덕이면서도 미래에는 아파트값이 오를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 강남에 자기 소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큰돈을 벌어놓은 것처럼 사치스럽게 소비하고 부동산 소유에 따라 사회 계층을 더 잘게 구분합니다. 서울 아파트값이 올라간 까닭은 사람이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개발하거나 힘들게 노동하여 벌어 모은 돈이 아니고 일가구 일주택 법에 따라 저절로 또 시장의 투자심리에 따라 전국에서 큰돈이 몰려오는 빨대 효과(siphon effect)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전국의 재부(wealth)가 서울로 집중되니까 지방 대도시들은 날로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인구도 줄어들고 노령화가 심하다고 합니다. 새로 뽑는 정부마다 균형 발전을 유도하려고 관공서를 지방으로 분산하고 수도를 세종시로 옮긴다고까지 말합니다. 물론 지방 균형 발전 계획은 도시공학 또는 도시경제학을 깊이 연구한 사회과학자들이 상세하게 생각하고 따져서 만들었을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뉴스와 여론을 보고 선거 표를 얻으려고 사회과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해결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4-5년 임기 안에 무슨 일을 잘하고 잘 마무리 지을 수 있겠습니까? 결과가 나쁘니까 국민이 다른 정치인을 뽑아놓으면 앞의 계획부터 바꾸고 새로 계획을 세우고 여론을 보느라고 세월을 보냅니다.
수도 서울의 주택 부족 문제는 어느 시대 또 어느 왕조에서도 있던 영원한 문제입니다. 정치인은 갑자기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단숨에 해결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상황을 보면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현재 서울의 아파트 부동산 신화는 영원히 집값이 오를 것이기에 가장 좋은 저축 수단이고 가장 좋은 투자 수단이라고 여깁니다. 실제로 아파트를 사서 월급 저축으로는 꿈꾸지 못한 돈을 벌어 부자가 된 사례가 많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 신화를 무작정 믿어야 하는지 걱정입니다. 다시 말해 부동산만이 가장 좋은 저축 수단이고 투자 수단인지 또 국채와 주식보다 더 안정된 대상은 없는지 걱정입니다. 과거 역사에서는 수도 서울의 부동산 시장이 어떻고 도시 생활이 어떤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 일본의 중국사 연구자들이 당나라 서울 장안과 북송 서울 개봉을 활발하게 연구하였습니다. 심지어 북송 시기부터 근대사회(modern society)가 시작되었다고 시대를 구분하였으나 중국 근대화의 싹이 부러지고(挫折) 곁가지로 움텄어도(屈折) 결국에는 근대화를 성공시킬 수 없다고 저주하던 연구자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중국사와 조선사 연구는 청나라와 조선이 멸망하고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토쿄와 교토 두 도시가 아시아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고 자랑하던 것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일본 경제가 침체되면서 굳게 믿었던 도시 부동산값이 폭락하였습니다.
중국과 대만에서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서양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영향을 받은 역사 연구자들도 역사에서 일상생활사(research on life history)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 역사에서 도시화(urbanization)도 연구하였습니다. 현재는 시들합니다.
최근에는 도시에 관하여 서양 학자들의 연구도 많습니다. 미국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 1916-2006)의 대표작 『도시 경제(The Economy of Cities)』(1969)과 『도시와 각국의 부(Cities and the Wealth of Nations)』(1984)가 있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L. Glaeser, 1967년생)도 도시경제학을 연구하고 2011년에는 「도시와 생산력 및 생활 품질(Cities, productivity, and quality of life)」 논문을 발표하고 2012년에는 『도시의 승리(Triumph of the City)』 대표작을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2016년 북경대학에서 “기술과 도시(技術與城市)” 제목으로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2023년 10월에는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출범 20주년 기념 국제포럼에 와서 바이오테크와 헬스케어 산업의 허브가 되려면 인재들이 모여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일반적인 상식을 말하였답니다.
서울에서 새로운 주거지역을 개발하거나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는 국가사업에서 반드시 서양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참고하되 어설프게 맹신하지 말고 과거 역사에서는 실제 상황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중국에서는 경제성장률이 둔화되고 부동산 시장이 위축되면서 부동산에 투자하였던 많은 기업과 사람이 손실을 보았고 고통이 지속되고 있답니다. 코로나 이후에는 지방에서 대도시로 인구 유입이 더욱 늘어났고 동북 지역에서는 사람이 빠져나가 텅텅 비었다는 소리까지 나왔습니다. 따라서 도시에서 생활하는 일반인들이 도시 주택 부족 문제와 좁고 답답한 도시 생활방식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일반인들이 과거 중국 역대 수도의 주택 문제와 생활방식을 공부하고 글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들의 글은 현재 중국 부동산 시장의 고통을 반영하여 더러 과장된 내용도 있고 또 도시경제학 또는 도시 설계에 관한 전문지식이 부족하지만 많은 연구성과와 자료를 참고하였기에 소소한 이야기를 읽기에는 좋습니다.
최근에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후기 한성부 토지·가옥 매매문서1’을 발간하였는데 서울의 중부와 동부 지역에서 거래된 토지와 가옥 매매문서 304점을 실었다고 합니다. 서울 300년 동안의 문서이기에 부동산 가격 변동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주목할 것이 있는데 이건창 선생은 서울 소윤(少尹)을 맡았을 때 서울에서 외국인(청나라 상인과 일본인 상인)이 가옥 매입하는 일을 놓고 청나라 영사(領事) 업무를 맡았던 당소의(唐紹儀)와 부딪혔으나 끝까지 막았습니다. 그래서 서울 부동산이 청나라 상인이나 일본인에게 쉽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건창 선생은 이홍장과 당소의 모두 조선을 식민지처럼 만들려는 의도를 알았기에 청나라와는 연대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박사과정에서 2년 넘게 송대사 수업을 들었는데 수업이 끝나고 점심 먹은 뒤에는 가급적 도서관에서 송대 여러 유서(類書)와 필기(筆記)를 많이 읽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 가운데 수업을 듣는 하루를 내서 오후에는 읽었습니다. 당시 송대사 수업을 개설하신 선생님도 독서량이 많은 분이어서 제가 많이 읽는 것을 이해해주셨습니다. 경제사 정치사 사회사 등 굵은 줄거리에 관한 논문 또는 구체적인 사료를 읽고 토론하는 것도 좋지만 당시에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또 당시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실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유서와 필기를 많이 읽었습니다. 옛날이야기를 읽어보면 엉뚱하게 재미있는 것도 있고 더 중요한 것은 당시 큰 문제가 무엇인지를 실감 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유서와 필기를 읽고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등을 이해하는 것도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북송 인종 연간의 신정(新政)과 신종 연간의 신법(新法) 개혁에 관한 유서와 필기를 많이 보았습니다. 개혁의 동기는 서하(西夏)와의 군사적 충돌을 대비하거나 정벌하여 억압하려고 북송 국력을 섬서오로(陝西五路) 지역에 쏟아부었으나 패전하였습니다. 서하 문제에서 비롯된 신법당과 구법당의 당쟁이 시작되고 금나라가 개봉을 함락하여 북송이 멸망하고 또 남송이 원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당쟁은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정치적 군사적 환경에서 사대부 사회가 나타나고 성리학이 나오고 온갖 소소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소소한 이야기까지 잘 아는 사람 앞에서 토론할 때는 몇몇 교과서와 논문을 보고 큰 줄거리가 어떠냐 저떠냐를 떠들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아래 글은 바이두에서 ”古代房價有多高?宋朝開封一套普通房子,官員要攢260年才買得起!“ (野壟敘談, 2026-09-20, 重慶) 글이 개봉의 주택문제를 여덟 가지로 요약하여 잘 설명하였습니다. 이밖에도 몇몇 글을 참고하여 번역하고 두 가지를 덧붙여 열 가지를 열거하였습니다. 북송 시기 개봉 서울의 모습을 개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토지와 집을 뭉쳐서 부동산이라고 말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방산(房産)과 지산(地産)을 합하여 방지산(房地産)이라고 말합니다. 옛날에도 산업(産業) 또는 생업(生業)이라고 말하였는데 사실상 집과 땅 등 재산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복덕방이란 말이 있는데 북송 시기 개봉에는 복전원(福田院) 관청을 두고 가게와 집을 관리하면서 임대를 담당하였습니다.
남송 시기 맹원로(孟元老)가 1147년에 출판한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과 홍매(洪邁)가 편집한 『이견지(夷堅志)』 등 필기를 보면 소소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최근에 중국에서는 『동경몽화록』과 북송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1101년에 그렸다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배경으로 연속극을 방영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글을 보시면 북송 시기 개봉 서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실감이 나실 것입니다. 고려시기 개경을 기록한 『고려도경』을 함께 상상하시길 바랍니다.
맹원로(孟元老)는 『동경 몽화록(東京夢華錄)』의 「머리말(序)」에서 북송 시기 집값이 꾸준히 올랐던 가장 큰 이유를 장기간 평화(太平日久)라고 좋은 교훈을 말하였는데 문학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사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1004년 송나라와 요나라의 평화조약이 맺어지자 개봉 집값과 땅값은 폭등하였습니다. 심지어 북송 서울 개봉이 1126년에 금나라에게 함락될 때까지 평화로웠던 몇십 년 동안에도 집값과 땅값이 줄곧 상승하였습니다. 그러나 개봉이 함락된 뒤에는 부동산 가격은 없어지고 살기 위하여 버리고 피난 갔습니다. 맹원로는 피난 생활 20년 동안에 항상 우울하고 슬펐습니다. 슬픔이 깊어진 뒤에야 북송 휘종 연간의 번화롭고 화려하였던 꿈에서 깨어났다고 말하고 책 이름을 몽화(夢華)라고 짓고 행복하였던 평화의 꿈에서 깨어나라(覺)고 일러주었습니다.
평화는 경제성장에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무서운 해독은 전쟁을 잊고 모르거나 무디어진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사람들이 행복한 꿈을 꾸도록 합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부동산 신화와 신앙은 곧바로 무너집니다. 가난하고 슬퍼한 뒤에야 행복하였던 부동산 꿈에서 깨어납니다. 이긍익(1736-1806) 선생은 『연려실기술』 몇 곳에서 조선 시기에 가장 큰 사회문제가 오히려 평화(太平, 昇平)였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부동산 신화와 신앙이라는 꿈에서 빨리 깨어나서 내 집 인테리어에 돈을 쏟아붓지 말고 평화를 지키는 국방도 잘하여야 합니다.
목차
1. 맹원로(孟元老), 『동경 몽화록(東京夢華錄)』, 「머리말(序)」
2. 북송 시기 개봉의 주택 부족 문제와 좁은 생활방식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1. 맹원로(孟元老), 『동경 몽화록(東京夢華錄)』, 「머리말(序)」
저(孟元老, 생졸연도 불명)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던 양자강 남북 지역을 따라다니다가 휘종 숭녕(崇寧) 2년(1103)에 서울(開封)에 올라와서 변하(汴河)에 있는 금양교(金梁橋, 西水門에서 동쪽으로 가는 제3교) 서협도(西夾道) 남쪽에서 살았습니다. 점점 자라서 어른(30대)이 될 때까지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평화시기가 길어지자 서울 개봉에는 인구가 늘고 경제가 번영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노래하고 춤추는 것만 알고 중년 어른들은 전쟁을 몰랐습니다. 해마다 명절이 올 때마다 볼만한 것이 많았는데 정월 대보름날의 등불놀이와 팔월 추석날의 달구경 또 눈 내리는 초겨울과 꽃 피는 봄, 또 칠월 칠석날 밤에 하늘을 쳐다보며 바늘에 실 꿰기(乞巧)와 구월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가 풍년 제사 지내기, 금명지(金明池)의 수군 훈련과 경림원(瓊林苑)의 꽃구경 단풍 구경 등이 있었습니다.
시내 길거리를 보면 단청을 하려하게 칠한 높은 누각(樓閣) 건물들이 있고 건물의 입구마다 멋진 수를 놓고 예쁜 구슬을 엮은 주렴을 걸어놓았습니다. 개봉 황궁 앞의 넓은 어가(御街)에는 멋지게 치장한 마차들이 달리고 귀한 말을 탄 사람들도 달렸습니다. 장식한 금과 보석이 햇빛에 번쩍이고 얇은 비단옷에서는 향기가 날렸습니다.
환락가에는 새로운 노랫소리가 들리고 멋진 연예인들도 보였고 다방과 술집마다 관악기와 현악기 음악 소리가 들렸습니다. 전 세계 각국에서 사절들이 오고 만국과 교류하였습니다. 전국의 진귀한 물품을 모아 서울의 시역사(처음에는 市易務 나중에 市易司로 승격) 관청에 모였습니다. 각 지역의 별미 음식들도 서울의 식당에서 팔았습니다. 진기한 풍경들이 날마다 길가에서 펼쳐지는데 봄날 축제뿐이겠습니까! 피리 소리와 장구 소리가 하늘까지 울리는 공연이 곳곳에 있는데 몇몇 부잣집 저녁 잔치뿐이겠습니까! 신기한 기예(技藝)는 사람 눈과 귀를 놀라게 하고 화려한 치장은 사람 마음을 흥분시켰습니다.
황제의 얼굴을 보려면 정월 대보름날 금명지(金明池)에서 수군이 훈련할 때,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계절마다 종묘에 제사 지낼 때였습니다. 공주가 시집가고 황제 아들이 결혼하는 장면은 자주 보았습니다. 멋있는 건축물은 궁궐 안에 지었던 명당(明堂)이고 커다란 쇠붙이 주조 작품은 순식간에 만든 크고 작은 솥(鼎鼐)이었습니다. 국가 소속의 여자 연예인들은 관공서 행사가 끝나거나 궁중 연회가 끝났을 때 보았습니다. 조정의 인사 이동은 황제가 진사 합격자들을 접견할 때와 무장들의 교체할 때 보았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몇십 년 동안 이렇게 즐겁게 많이 보고 다녔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금나라 군대가 전쟁을 일으키고 쳐들어와 서울 개봉이 함락되었고(1126) 송나라가 멸망한 휘종 황제 정강(靖康) 2년(1127)에 우리 가족은 서울을 나와 양자강 남동쪽 소주(蘇州)로 피난 왔습니다. 피난 온 뒤 20여 년 동안 기분은 항상 외롭고 쓸쓸하였는데 벌써 50-60대 나이가 되어 늙었습니다.
서울 살았을 때를 가만히 떠올려 보면 명절마다 국가 행사가 많았고 민간 축제도 멋있었는데 이제는 슬프고 한스럽습니다. 얼마 전에 친척들을 만나 옛날 서울에 살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리가 말할 때마다 여기 소주에서 나고 자란 어린 후손들은 거짓말이고 그럴 리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세월이 더 흐른 뒤에는 북송 시기 서울 개봉의 옛날 풍속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갈수록 사실을 모를 텐데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기억(省記) 나는 것들을 모아 순서를 매겨서 책을 만들었는데 펼쳐보면 옛날 서울의 번화하였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열자(列子)』 「황제(黃帝)」편에 황제가 낮잠 자다가 꿈속에서 화서국(華胥國)에 갔는데 한없이 즐거웠다고 합니다. 저도 옛날 서울에 살던 모습을 떠올려 보다가도 지금 현실을 보면 슬픕니다. 어찌 화서국 꿈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몽화록(夢華録)이라고 책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서울 개봉이 아주 넓고 커서 못 가본 곳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서 보충하였습니다. 만약에 피난 내려온 사람들 가운데 잘 아시는 분을 만나면 더 물어보아서 잘 보충하겠습니다.
이 책에서 백화(白話)가 많고 문언(文言)으로 쓰지 않은 까닭은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보시는 독자께서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소흥(紹興) 2년 정묘년(1147) 섣달그믐날에 옛날 좋았던 기억에 깊이 빠진 유향거사(幽蘭居士) 맹원로(孟元老)가 머리말을 쓰다.
孟元老,『東京夢華錄』,「序」︰
僕從先人宦遊南北,崇寧癸未到京師,卜居於州西金梁橋西夾道之南。漸次長立,正當輦轂之下。太平日久,人物繁阜。垂髫之童,但習皷舞,班白之老,不識干戈。時節相次,各有觀賞。燈宵月夕,雪際花時,乞巧登高,敎池游苑。舉目則靑樓畫閣,繍戸珠簾。雕車競駐於天街,寶馬爭馳於御路,金翠耀目,羅綺飄香。新聲巧笑於柳陌花衢,按管調弦於茶坊酒肆。八荒爭湊,萬國咸通。集四海之珍奇,皆歸市易,會寰區之異味,悉在庖廚。花光滿路,何限春遊!簫皷喧空,幾家夜宴!伎巧則驚人耳目,侈奢則長人精神。瞻天表則元夕教池,拜郊孟享。頻觀公主下降,皇子納妃。修造則創建明堂,冶鑄則立成鼎鼐。觀妓籍則府曹衙罷,內省宴回,看變化則舉子唱名,武人換授。仆數十年爛賞疊游,莫知厭足。
一旦兵火,靖康丙午之明年,出京南來,避地江左,情緒牢落,漸入桑楡。暗想當年,節物風流,人情和美,但成悵恨。近與親戚會面,談及曩昔,後生往往妄生不然。僕恐浸久,論其風俗者,失於事實,誠爲可惜。謹省記編次成集,庶幾開卷得覩當時之盛。古人有夢遊華胥之國,其樂無涯者,仆今追念,回首悵然,豈非華胥之夢覺哉?目之曰夢華録。然以京師之浩穰,及有未嘗經從處,得之於人,不無遺闕。倘遇郷黨宿徳,補綴周備,不勝幸甚。
此録語言鄙俚,不以文飾者,蓋欲上下通曉爾,觀者幸詳焉。
紹興丁卯歳(1147)除日,幽蘭居士孟元老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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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송 시기 개봉 서울의 주택 부족 문제와 좁은 생활방식
1085년 가을 지방관을 지내다가 개봉(開封) 시내로 직장을 옮긴 말단(九品) 공무원이 개봉 시내 서쪽에 있는 부동산 중개사 사무실 문 앞에 서 있다. 그는 반평생 모아놓은 돈을 손에 꼭 쥐고 중개사 사무실에 집값을 써놓은 팻말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방 3칸 작은 집이 5,200관(貫)이었다. 그가 받는 월급은 4관이다. 그는 한참 동안 마음속에서 생각해보았다. 도시 사람들은 누구나 서울에서 관원을 지내는 것이 체면 서는 것이라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사람 가슴을 졸여오는 고통이었다. 당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에서 낮은 말단 공무원은 침대 하나 놓을 만큼 좁은 집을 살 돈이 없었다. 집값은 옛날부터 많은 사람의 허리를 휘게 하였다. 그렇다면 북송 시기 서울(개봉)의 집값은 얼마나 미쳤을까?
첫째 :
개봉 도시는 북송 연간에 점점 커져서 부동산 괴물이 되었다.
송나라는 여기에 서울을 정하였다.
인구는 건국 초기에 30만에서 150만 명까지 계속 증가하였다.
어떤 연구자는 그 이상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유동인구(流動人口) 몇십만 명을 더하면 도시의 인구 밀도는 더 높다.
북송 중기와 후기에 개봉 도시 인구는 120-150만 명이었다. 인구 밀도가 2-2.3만 명/㎢이었다. 번화가 지역에서는 3.2만 명/㎢이었다. 2023년 북경 중심 지역의 인구 밀도는 1.4만 명/㎢이다. 북송 개봉 시내는 현재 북경 번화가보다 인구 밀도가 높았다. 사람은 많은데 집이 적고 빈 땅도 거의 없었다. 북송 시기 개봉 지역의 도시화 인구 비율(the rate of urbanization, 城鎮化率)이 22%에 달하였다. 당나라 말기에는 겨우 10%였다.
개봉 시내에는 집들이 빽빽하다. 땅은 이 정도밖에는 없다.
개봉 시내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붐빌 만큼 번화하다.
동쪽에는 화정가(華亭街), 남쪽에는 어가(御街), 서쪽에는 만승문(萬勝門)이 있는데 빈 땅만 나오면 사람들이 사려고 몰려들었다.
땅값은 수익률에 따라 올라가는데 중심 지역일수록 땅값이 비쌌다.
어가(御街)와 연결된 반루가(潘樓街)와 마항가(馬行街) 근처는 고급 주택 지역인데 작은 집이 5만 관(현재 시가 1500만 위안, 한국 30억 원)이었고 재상 채경(蔡京, 1047-1126)의 집은 뒷마당이 딸렸는데 35만 관(한국 150억 원)이었다. 채경은 당시에 농지 50만 무(畝) 곧 333㎢를 가진 큰 부자였기에 이렇게 좋은 집을 살 수 있었다.
여혜경(呂惠卿, 1032-1111)은 신종 황제 원풍 연간(元豐, 1078-1085)에 왕안석을 도와 신법을 실행하였다. 그가 휘종이 즉위할 연도(1100)에 개봉 시내에 3천 관을 주고 집을 샀는데 이 가격은 신종 황제 재위 기간보다 30배 오른 값이었다. 다시 말해 40년 사이에 30배 올랐다. 3천 관은 지방관 지주(知州)의 20년 연봉이고 농가 1만 명의 1년치 세금이었다. 신법 반대파 인사들은 여혜경이 무슨 돈으로 집을 샀냐고 비난하고 탄핵까지 거론하였다. 그러나 여혜경은 자신은 청렴하고 결백하다고 반박하였다.
국자감 근처 학군 좋은 지역의 주택은 일반 주택 지역보다 2배 비쌌다. 돈 많은 상인들이 자식의 과거시험 합격을 위하여 10만 관을 주고 작은 마당 딸린 집을 샀다.(『夷堅志』)
3년마다 과거시험이 있기에 전국에서 수험생들이 몰려들었다. 합격하여도 개봉에 남고 떨어져도 개봉에 남아 오랫동안 합격할 때까지 시험을 준비하였다. 준비생들은 아주 좁은 방을 임대하여 살았다. 따라서 월세는 날로 올라갔다.
어떤 국자감 학생(太學生)은 아버지가 고향에 있는 땅 10무(畝, 2천평)를 팔아 유학 비용을 댔다. 그래서 그는 기숙사에서 맨날 옅은 죽을 사먹고 옷도 사입지 못하였다. 학교 친구들이 술 마시러 가자고 불러도 가지 못하였다. 개봉 시내 술집에서 친구들과 밥 먹고 술 마시면 그의 한 달 생활비 절반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는 짓은 변하(汴河) 강가를 어슬렁어슬렁 산보하는 것이고 오로지 과거시험에 합격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상국사(相國寺) 주변 지역은 상업이 번화하였는데 길가 10㎡ 가게 1년 임대료가 1천 관(한국 6천만 원)이고 보증금은 20년치 임대료(한국 12억 원)이었다.(『東京夢華錄』)
변하(汴河)는 전국의 많은 물산을 배에 실어 개봉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하천이었다. 해마다 6천 척 조운선이 쌀, 비단, 세금 받은 돈을 개봉으로 실어 날랐다. 변하 강가에는 물류 창고가 아주 많았다. 범중암도 여기에 큰 창고를 지었다. 개봉 외성(外城) 동수문(東水門)에는 세관(稅關)이 있었다.
변하(汴河) 강가 양쪽에는 상점이 줄지어 있다.
술집, 약국, 비단 가게, 철물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런 지역에서 상가의 임대 보증금은 10년치 임대료였다.
여기 세관에서 일하는 아전(胥吏)도 1칸 방에 침대 1장을 빌려서 살았는데 아궁이는 처마 밑에 있었다.
아전 월급 3관이고 이것저것 붙여서 1년에 50관을 벌었다.
아무리 작은 집도 120관이니까
적어도 8년을 모아야 부동산 중개사를 찾아가 물어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돈을 모으면 집값도 더 올라갔기에 꿈도 꾸지 못하였다.
변하 양쪽 강가에도 집을 꽉꽉 지어서 빈 땅이 없다.
이제는 2층이나 3층을 올릴 수밖에 없다.
고층 집을 짓는 현상이 다른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았다.
현재 하남성 회양(淮陽, 북송 陳州)에서 서울 개봉에 올라온 학생을 상상하면, 학생은 책가방을 지고 남훈문(南薰門)으로 들어오니 빽빽하게 지어진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쳐다보니 처마들로 가려서 하늘도 바늘 틈새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문학적인 상상이지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남송 시기 1147년에 지은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서 회고한 것을 보면 북송 시기 서울 개봉에는 빈틈이 없을 만큼 집들이 빽빽하였다고 한다.
부동산 중개사는 부동산 시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시내에서 팔려고 내놓은 물건 목록이 들려있다.
시내에서 위치가 좋은 땅 200평은 1천 관(貫) 이상 불렀다.
조금 변두리 쪽에도 몇백 관이었다.
일반 백성이 한평생 돈을 얼마나 모을 수 있을까?
낮은 공무원 월급은 10여 관이다.
이런 사람들은 누구도 집을 살 수 없었다.
권력을 가진 세력가와 고급 관원들 또 돈 많은 상인들만이 집을 살 수 있었다.
도시 밖에 사는 농민들은 채소를 지게에 지고 시내로 들어와 팔았다.
일년 동안 채소를 팔아도 시내 안에 있는 작은 창고도 살 수 없었다.
수공업자는 말할 것도 없다.
대장간 장인, 목수, 재봉사 모두 일년 동안 고생하여 벌어도 남는 것이 얼마 없었다.
이런 사람들은 집을 빌릴 수밖에 없는데 임대료도 비쌌다.
시내 중심지에서 작은 1칸 집도 월세가 300문(文)에서 500문이었다.
이 금액은 젊은 사람의 반달 치 식비에 맞먹었다.
북송 시기에 개봉 시내에서 일하는 일반 노동자들은 평균 3㎡에서 일하고 잠자고 생활하였습니다. 북송 시기에 일반 노동자들과 돈 없는 학생들은 3㎡ 좁은 공간에서 일하고 잠자고 앞으로는 나아지겠지 믿으며 미래의 꿈을 꾸었습니다.
개봉에서 생활공간이 좁으니까 생활 도구는 접는 것이 유행하였습니다. 의자도 접어라, 침대도 접어라, 우산도 접어라, 부채도 접어라, 사다리도 접어라, 옷 넣는 옷장도 접어서 무엇이든지 접는 것이 유행하였습니다. 물론 아주 필요한 물건을 제외하고 모두 버렸습니다. 일회용 물품도 많이 나왔습니다. 병풍도 접어서 사용하였습니다. 병풍이 유행하였는데 좁은 공간을 갈라서 쓰기 때문입니다. 거실과 침실 사이에 병풍을 치고 갈라서 사용하였습니다.
좁은 집에서 개인의 생활공간이 더 좁으니까 소형 취미가 나타났습니다. 작은 창문을 열면 매화 가지 하나만 보이거나 대나무 한 줄기가 보이도록 창문마다 설계하였습니다. 또 담장에는 답답하지 않도록 종이 그림을 붙였습니다.(大相國寺 근처에서 그림 1장 20문에 팔았답니다.) 또 아주 작은 화분 가꾸기와 작은 정원이 유행하였습니다. 작은 화분에 향기 나는 창포(菖蒲)를 심고 작은 어항에 물고기를 길렀습니다. 이런 것을 손바닥 안의 산수(掌中山水)라고 불렀습니다. 좁은 방안에는 그림 1장을 걸어놓고 그림 앞에 작은 화분을 놓고 즐겼습니다.
현재 연구자들은 북송 일반 백성들이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생활을 달래려는 취미 활동을 미학(美學)이라고 말합니다. 현재 홍콩에서는 집값이 비싸서 주방 없는 아파트가 있고 좁은 아파트 안에서 별의별 취미생활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1980년 항주(杭州)에서 발굴한 남송 시기 건축 유적지를 보면 건축 면적이 가로세로 4m의 16㎡이고 2층을 올리면 연면적 30㎡입니다. 건물 구조는 앞에 가게, 뒤에 살림집 또는 아래층 가계 윗층 살림집이었습니다. 수공업자는 가게가 작업장이었습니다. 3-4층에는 방 1칸마다 월세 2백 문을 받았습니다. 1칸 방에는 4-5명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개봉에는 2층부터 3-4층 집이 많았습니다.
어느 길가에는 “작은 자수(刺繡) 가게가 즐비한데 사방 8척(尺)이다.(連排小屋,各闊八尺)”고 합니다. 가로세로 2m가 안 됩니다. 철공소 면적이나 작은 식당 면적도 이와 같았습니다. 이들의 월수입은 5-8관이며 주로 비교적 값싼 국가 소유의 가게를 임대하였습니다. 그래도 월세는 500문이었습니다.
잠만 자도 하룻밤에 50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잠을 안 자는 야간 업종이 나타났습니다. 밤에 시간을 알리는 경부(更夫), 야밤꾼(守夜人), 청소부(垃圾淸運夫) 등입니다. 심지어 방 하나 또는 가게 하나를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칠쟁이 3명이 돈을 모아 길가 가게 하나를 빌려서 낮(7-17시)에는 칠쟁이가 작업하고 밤(17-7)에는 몇 사람이 돌려가며 잠을 잤습니다. 그래도 1년 임대료는 12관이었습니다.
북송 문인 왕우칭(王禹偁, 954-1001)은 『이씨 원정기(李氏園亭記)』에서 “개봉 시내 중심지에서도 궁궐 앞에는 한 뼘 땅값이 금값이었다.(重城之中,雙闕之下,尺地寸土,與金同價)”고 말하였다.
개봉 일반 시민 최백(崔白)은 1015년에 이웃 양문위(楊文尉)의 집을 강압하여 사들였다. 양씨 집은 저당 가격이 1,300관(貫)이었는데 최백이 900관에 매입한 뒤에 120만 문(文)을 더 주었다. 결국 대략 1,200관을 주고 샀다.
궁궐 근처는 집값이 천정부지였다.
자신전(紫宸殿) 근처의 집값은 2만 관(한국 12억 원)이었다.
2만 관이 얼마나 큰 돈일까?
일반 군인 월급이 300문이었다.
이들이 52,000개월 곧 4,500년 월급을 모아야 2만 관이었다.
이런 숫자를 보면 누구나 벌벌 떨었다.
그래서 개봉 서울 시내에 사는 것은 정말로 어려웠다.
개봉 수도사령부(禁軍)에 근무하는 사병은 20년 근무하더라도 여전히 나무 상자 하나밖에 없었다. 여기에 옷, 구리거울, 집에서 온 편지를 넣어두었다. 아들은 20년 근무하면서 한 번도 고향에 가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답답하고 아들이 그리워서 글자를 모르니까 다른 사람에 부탁하여 편지를 써서 보내왔다. 고향에는 귤나무에 귤이 노랗게 익어가는데 너는 어제 고향에 오느냐고 물었다. 아들은 월급을 받으면 대부분 고향 어머니께 보내고 자신은 고향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에는 남은 돈으로 술 몇 병을 사서 마시면서 고향을 잊었다. 그의 일생 꿈은 여기 서울에 작은 집을 사서 어머니를 모셔와서 함께 사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문학가들의 과장된 말이 아니고 당시의 진실이었다.
집값은 커다란 바위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고 일하고 꿈을 꾸려면 어느 날엔가는 자기 집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대다수 사람은 이 꿈을 이룰 수 없었다.
둘째 :
부동산 장부책을 펴보면 놀랄만하였다.
집값과 소득 사이에는 커다란 장애물(鴻溝)이 있었다.
북송 시기 관원의 월급 제도는 상당히 복잡하였다.
본봉(正俸), 직무 수당(職錢), 식비 지원(祿米), 겨울과 봄의 옷값 지원(冬春衣賜)이 있었다.
합하면 9급 개봉 근무 공무원은 한 달에 대략 4-6관을 받았고
8품은 7-8관, 7품은 10관 정도를 받았다.
당시 집값을 보면 개봉 외곽에서도 주택 지역에 있는 아주 작은 방 1칸 집은 50관이었다. 일반 수공업자 1년 수입이 30관이었다. 방 3칸과 마당이 딸린 보통 집은 4천-6천 관이었다. 중간값을 매기면 5천 관이었다.
9품 공무원이 월급 5관을 받는데 1년에 60관이다.
한 푼도 쓰지 않고 83년을 모아야 겨우 작은 집을 살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아무리 식구가 적어도 여기저기 축의금과 부조금을 내고 모임에도 참석하여야 한다.
옷도 입고 밥도 먹어야 하고 관청에서 윗사람에게 명절마다 선물도 보내야 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모을 수 있을까?
1년에 20관을 모으려면 생활이 아주 빡빡하였을 것이다.
1년에 20관씩 250년을 모아야 한다.
250년은 관원 1명이 10대를 모아야 한다.
이것은 개봉 시내에 있는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내 주작문(朱雀門) 밖의 길가에 있는 집은 1만 관이었다.
시내 어가(御街) 길가에 있는 가게는 걸핏하면 수만 관이었다.
개봉시 북쪽에 떨어진 외곽 지역에서도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면적도 1백 관을 주어야 살 수 있었다.
개봉 시내 번화가는 돈을 빨아들이는 커다란 괴물 짐승이며 세상 천하의 모든 재부를 빨아들였다.
집값은 당연히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개봉시에서 유행한 노래가 있었다.
“부자만이 시내에 살고 돈 없는 사람들은 성벽에 붙여 지은 오막살이에서 잠을 잔다.”
성벽에 붙여서 대나무로 지붕을 얹어 지은 오막살이에는 유랑민과 소상공인들이 살았다.
겨울에는 찬바람이 술술 들어오고 여름에는 모기떼가 극성을 부렸다.
시내에서 유랑하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분은 시내 밖에 땅을 갖고 있었다.
시내 밖에서도 땅값이 오르는 부동산 붐이 일어났다.
좋은 땅은 200평에 몇십 관 또는 1백 관까지 올랐다.
심지어 집주인 3명이 연달아 죽어 귀신 나온다는 흉가의 집값이 20관까지 떨어지니까 외지에서 올라온 관원들이 사서 살았다.(『夷堅志』)
사료를 보면 북송 인종(仁宗) 연간에 개봉 시청에서 상소문을 올렸는데 민간에서 주택지 매입 바람이 불면서 땅값이 몇 년 사이에 몇 배가 올랐다고 한다. 국가에서도 땅값을 안정시키려는 정책을 내놓았으나 효과는 없었다.
땅값이 오를수록 땅을 매집(兼倂)하는 바람이 세게 불었다.
사마천 『사기』에서 말하였듯이 부자는 땅 부자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괭이 꽃을 땅도 없었다.
사마천의 이 말이 북송 시기 개봉 서울에서도 실제로 일어났다.
셋째 :
개봉 집값은 왜 미친 듯이 올랐을까?
첫째 근본 원인은 토지제도였다.
북송 정권은 토지 겸병을 억제하지 않았다.
토지의 자유 매매를 허용하였다.
따라서 도시 안의 땅은 금싸라기 땅이 되었다.
개봉 시내 땅은 빨대 효과(siphon effect)가 일어나 전국의 돈이 몰렸다.
황실, 공신, 절간(寺廟), 큰 상인이 핵심지역의 대부분 토지를 장악하였다.
토지 시장에 나온 땅은 아주 적었다.
공급은 아주 적은데 수요는 몹시 컸다.
토지 가격은 자연히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둘째 근본 원인은 인구였다.
개봉 서울은 송나라 제국의 심장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정치 자원과 경제 자원이 여기에 모여있었다.
관원들은 여기에서 살고 싶었다.
상인들도 여기에서 살고 싶었다.
과거시험 수험생들도 여기에서 살고 싶었다.
솜씨 좋은 예술가들도 여기에서 살고 싶었다.
세금을 내기 싫은 유랑민들도 여기로 모여들었다.
150만 명이 면적 30㎢ 시내 안에서 어깨를 비벼댔다.
1인 평균 사용 면적은 현재 토교와 홍콩보다 좁았다.
집 부족은 불치병이 되었다.
황궁의 북쪽 지역은 수도사령부(禁軍)의 주둔지였다.
황궁의 남쪽 지역은 중앙정부의 관공서들이 있었다.
높은 관원들은 넓은 정원이 딸린 집을 차지하였다.
전국 군사력을 통제하던 추밀사(樞密使, 從一品)는 7-8채 집을 가졌다.
이들은 집을 임대하거나 매매하거나 매집하였다.
토지 겸병은 이처럼 권력과 결탁되었다.
일반 공무원이 집을 사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 어려웠다.
셋째 근본 원인은 요나라와의 평화조약이었다.
1004년에 송나라와 요나라는 평화조약을 맺어 북방 지역에서 전쟁 위험이 없어졌다.
돈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간다.
이때부터 투자 위험이 사라지자 전국에서 돈 많은 사람이 개봉으로 몰려들어 가게와 집을 사서 임대료를 받았다.
하북 지역의 대농(大農), 하동(河東) 지역의 소금 장사(鹽商), 사천 지역의 비단 사업자(織錦大戶) 모두 몰려와서 부동산을 사들였다.
이들이 부동산을 매수하는 목적은 본인이 살거나 경영하려는 것이 아니고 돈을 저금하려는 것이었다.
부동산을 사놓고 기다리면 값이 계속 올라갔다.
예를 들어 섬서(陝西) 지역에서 쌀장사하던 상인이 좋은 논밭 3천 무(畝)를 팔아 황금 1백 냥을 갖고 개봉에 왔다. 가게를 사려고 보름 동안 찾아보았는데 보름 동안에 또 값이 올랐다. 할 수 없이 시내에 있는 집과 시외에 있는 집 2채를 샀다. 시내에 있는 집은 임대하고 시외에 있는 집은 비워놓았다. 사람들은 왜 집을 비워놓느냐고 물었다. 그는 비워놓아야 내년에 팔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과연 내년에 시외 집을 팔아 돈을 벌었다. 이듬해에는 갭투자로 집 2채를 더 샀다. 그는 고향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급매로 모든 재산을 팔아 서울로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는 “10년 농사짓는 것보다 서울에서 방 1칸 사서 되파는 수익이 더 크다(種十年地,不如買一間房)”고 아들을 설득하였다.
넷째 근본 원인은 통화량이었다.
북송 중기와 후기에는 통화량이 급증하였다.
진종 황제의 경덕(景德, 1004-1007년) 연간과 천희(天禧, 1017-1021) 연간에는 해마다 동전 수백만 관을 대량으로 주조하였다.
동전을 많이 주조할수록 통화량이 팽창하였다.
통화량이 팽창하자 동전과 지폐(交子) 모두 가치가 떨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금보다 실물을 사들였고 가격이 급등하였다.
물가는 계속 올라갔다.
곡물 가격이 올라가고 옷감 가격도 올라가고 집값은 더욱 무섭게 올라갔다.
사람들이 갖고 있던 동전은 갈수록 화폐가치가 떨어졌다.
월급과 임금은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인구 증가의 숨은 요인의 하나는 과거시험이었다.
해마다 수백 명 새로운 진사(進士)들이 서울에 남아 근무하였다.
이들은 고향에서 가져온 돈으로 서울에서 집을 사려고 하였다.
그런데 집이 너무 부족하였다.
시장에 나온 집 몇 채를 놓고 수백 명이 달려들었다.
집값이 안 오를 수 없었다.
서울에 보고하러 온 공무원, 발령을 기다리는 공무원, 진급하려고 로비하러 온 공무원 모두 서울에 정착하고 싶었다.
수요가 있기에 시장이 있는 것이다.
상상해보세요.
저 멀리 사천(四川) 지역에서 올라온 과거시험 준비 학생(擧子)이 천신만고 끝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개봉 서울에서 형사 사건을 담당하는 검사(推官)가 되었다.
그는 고향에 있는 부인에게 서울에서 잘 지낸다고 편지를 보냈다.
그는 가로세로 3m 9㎡(2-3평) 월세 집에 살고 있었다.
여름에는 찜통처럼 덥고 답답하였고 겨울에는 얼음 굴속처럼 추웠다.
그는 달마다 500문(文) 월세를 냈다.
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이것은 문학적인 상상이다.
그렇지만 좁은 방과 월세 500문은 북송 시기의 많은 필기물에 적어놓은 현실이었다.
다섯째 :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53살(1060)에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가 되었다. 여전히 민간 주택을 임대하여 살았는데 “비 내리면 침대를 옮기며 빗물을 피하였다.(雨至,移床避之)”고 말하고 친구에게는 “서울 생활비가 몹시 비싸서 살기 어렵다!(京師薪米百物皆貴,居大不易!)”고 한탄하였다.
구양수는 늙어서 개봉에서 남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영주(潁州, 현재 안휘성 阜陽市)에 마당 딸린 집을 사고 “내가 늙어서야 겨우 두 다리 펼만한 집을 장만하였다.(吾老矣,方有容膝之安)”고 자신을 비웃었다.
소순(蘇洵, 1009-1066)은 27살에 향시에 떨어진 뒤에 정신을 차리고 6-7년 동안 혼자 공부하였다. 결국 47살(1056)에는 아들 2명(蘇軾, 蘇轍)을 데리고 개봉 서울에 올라와서 아들들의 과거시험을 지도하였다. 부자 3명은 개봉 시외에 있는 아주 값싼 3칸 방을 월세 2관에 빌려서 살았다. 비가 내리면 양재기를 놓고 빗물 받았다. 10년 임대료 220관을 모으면 고향 사천 미산(眉山)에서는 아주 좋은 저택을 살 수 있었다.
두 아들이 여기에서 공부하다가 구양수 눈에 들어 과거시험에도 합격하고 이름을 날렸다. 두 아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뒤에 관사에 들어가 살면서 월세를 내지 않았다.
소철(蘇轍, 1039-1112)은 집을 사려고 일생을 갈아 넣었다.
그는 소동파(蘇軾, 1037-1101)의 아우였다.
재능이 형님만큼 뛰어나고 유명하였다.
관직도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허직(虛職)이지만 문하시랑(門下侍郎)까지 올라갔는데 재상 다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개봉 서울에서 집 같은 집을 사지 못하였다.
소철은 「폐거오영(閉居五詠)」에서 “나는 늙도록 집이 없으니까 자식들이 아버지는 뭐하였냐고 불평한다(我老未有宅,諸子以為言).”고 시를 지었다. 자식들이 아버지를 원망하였다.
그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구준(寇准, 961-1023)은 30년 동안 재상을 지냈으나 개인 주택이 없었다. 그래서 “집 지을 땅도 없는 재상(無地起樓台相公)”이라는 말이 나오고 “재상이 되어도 임대 주택에 산다.(雖宰執亦是賃屋)”는 말이 나왔다.
소철이 70살 늙어서도 임대 주택에 살다가 결국에는 땅을 사서 집을 지으려고 결심하였다.
개봉 서울에서 남서쪽으로 100㎞ 떨어진 허주(許州, 현재 하남성 許昌市)였다.
그는 평생 모은 돈 9,400관을 들여 작은 농장(田莊)을 샀다.
집은 크지 않았다.
땅도 넓지 않았다.
그는 문장 여러 곳에서 자손들에게 이 재산을 지키라고 잔소리하였다.
왜냐하면 이 재산을 사기까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그렇지만 딸을 시집보내면서 집과 땅을 팔았다.
그의 형님 소동파는 처지가 더욱 궁색하였다.
소동파가 1061년에 진사에 합격한 뒤 대리평사(大理評事) 소속의 봉상부(鳳翔府) 절도판관(節度判官)을 맡았는데 월급 30관을 받았고 집 월세 5관을 냈다. 그래서 “월급 받는 대로 금방 다 써버렸다.(俸入所得,隨手耗盡)”고 푸념하였다.
소동파는 중앙정부에서 관직이 들락날락하였다.
소동파는 1071년에 왕안석 신법을 반대하다가 항주(杭州) 통판(通判)으로 좌천되었다. 항주에서 집을 사려는데 마음에 드는 집값이 5천 관이었다. 연봉 200관으로는 엄두를 내지 못하여 집을 포기하였다.
그는 1080년(43살)에 오태시안(烏台詩案) 사건에 휘말려 이듬해 2월 현재 황강시(黃岡市, 黃州)로 좌천되어 관사에서 살았고 다시 관직에 귀환하였다. 1094년(57살)에는 죽으라고 현재 광동성 혜주(惠州)로 좌천되어 합강루(合江樓)에 월세를 얻어 살고 또 1097년(60살)에 광동성 해남도(海南島 儋州) 섬으로 좌천되어 광랑암(桄榔庵) 절간 암자를 빌려 월세를 살았다.
그는 평생 여기저기 떠돌았다. 늙어서도 안전한 자기 집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여관을 떠도는 여행객인데 어디가 나의 고향이냐고 읊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해남도 섬주에서 “내가 죽으면 숭산(崇山) 아래 묻어주고 장례비용도 1백 관을 넘지 말라.(葬我嵩山下,貲用勿過百貫)”고 유언을 남겼다.
소동파가 죽기 1년 전 63살(1100)에 다시 개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진강(鎭江)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들러 머물렀다. 그는 밤늦게(二更, 21-23시)에 달도 기울어 어둡자 승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우니 몹시 처량한데 나도 나를 모르겠다, 내가 귀신인지 사람인지 도대체 무엇이냐? 고향 산천은 여기처럼 그대로 있을 텐데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로 가는지, 양자강 강신(江神)은 나를 아주 이상하게 생각할 테고 더구나 내가 고집스럽게 서울로 가는 것을 보고 놀라겠지.(「游金山寺」:悵然歸臥心莫識,非鬼非人竟何物?江山如此不歸山,江神見怪驚我頑。)”라고 읊었습니다. 이것은 소동파가 서울 개봉에 올라가서 신당파와 권력투쟁을 벌여야 하는 것을 스스로 한심하게 여긴 것입니다. 덧붙이면 개봉에서 집값과 생활비가 비싸서 생활하기 어려운 것도 말합니다.
소씨 두 형제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북송 중기와 후기에 중간급 관원들이 서울에 집을 살 수 없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어떤 사람은 지방관으로 발령 나면 지방에서 집도 사고 땅도 샀다.
어떤 사람은 아예 평생 임대 주택에 살았다.
어떤 사람은 서울 외곽에 집을 짓고 살면서 날마다 나귀를 타고 서울로 출근하였다.
관품이 낮은 공무원들은 서울에서 가까운 외곽 지역에 살면서 먼동이 트기 전에 일찍 일어나서 길을 나섰다.
시내에서 사는 월세를 아끼려는 것이었다.
역사책에 나오는 재상 정제현(張齊賢, 942-1014)은 개봉 서쪽에 큰 집이 있는데 정원과 연못도 넓고 멋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면서도 시기 질투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손에 곱을 만큼 적었다.
대다수 관원은 몇 칸 낡은 집에서 살았다.
한 집에 3-4 가족이 살았다.
부엌은 공용이었다.
이것은 현재 중국 1급 도시에 있는 쉐어하우스(合租)와 같다.
상상해보세요.
7품 어사(御史)가 날마다 새벽에 나와 출근하였다.
그가 임대한 집은 개봉 성곽 북쪽에 있는 좁은 골목에 있다.
골목 입구에는 쓰레기가 쌓여있다.
이웃집 사람들은 생선을 팔았다.
일년 사계절 생선 비린내가 났다.
그는 관복을 입고 출근하였다.
동료들은 그가 잘 산다고 여겼다.
아무도 그가 두 가구와 함께 끼여 사는 줄을 모른다.
이것은 문학적 상상이다.
그러나 하급 공무원들이 개봉에서 쉐어하우스에 사는 것은 일반적 현상이었다.
남송 시기에도 부동산 가격과 주택 문제는 여전하였다.
주희(朱熹, 1130-1200)도 51살(1181)에 절동 지역 구제를 위하여 관직(提舉浙東常平茶鹽公事)을 맡았을 때 태주(台州)에서 월세를 살았다. “어떤 집주인은 월세 10관을 요구하고 주희는 8관을 내겠다고 서로 합의하지 못하여(彼欲月租十貫,吾還八貫,終未諧也)” 다른 싼 집을 구하였다고 한다. 늙어서는 복건성 건양(建陽) 시골에서도 “저축한 돈이 없어 작은 산을 사서 작은 공부방도 지을 수 없다.(恨無囊金,買山結廬)”고 신세타령하였다.
여섯째 :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점포 주택 사무소(店宅務)는 송나라 정부에서 주택을 관리하는 기구였다.
여기에서 국가 소유의 많은 부동산과 임대를 관리하였다.
여기에서 단칸방 월세가 500문이었다. 목수 월급 3,000문(3관)이니까 1/6을 월세로 냈다.
여기에서 임대하는 주택은 어떨까?
대다수가 낡고 오래된 주택이었다.
빗물이 새는 것은 다반사였고 기둥도 썩었다.
담벼락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갔다.
임대료는 싸지 않았는데 시내에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수공업 장인, 소규모 상인, 낮은 아전(胥吏), 합격 못한 과거시험 준비생이었다.
이들은 매달 월세를 냈다.
월세를 못 내면 쫓겨났다.
이 방식은 옛날의 공공임대 제도였다.
이것이 일부분 사람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렇지만 집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민간 임대시장이 특별히 활발하였다.
민간 임대료는 아주 높았다.
시내 길가에 있는 작은 집은 월세가 1관(1천 문)이었다.
그래서 쉐어하우스와 땅콩집이 나타났다.
가로세로 5m 곧 25㎡ 집안에 5-6명이 살았다.
밖에는 솥을 건 아궁이가 있고 작은 방마다 침대 하나에 이불 몇 채가 있다. 누워 자면서 몸을 돌릴 수도 없었다.
임대 주택은 개봉 시내에 사는 대다수 사람의 생활방식이었다.
세입자와 임대인은 법률에 정해진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송나라 법전에는 임대료 가격, 집수리, 재임대 등 조항이 있다.
이것은 세계 법제사에서도 빨리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법률이 임대 금액까지 관리할 수 있을까?
관리할 수 없었다.
집주인은 언제나 수시로 임대료를 올렸다.
세입자는 언제나 쫓겨날 수 있었다.
도시 외곽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무런 법률적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이들은 땅이 없는 농민이며 도시에 들어와서 돈을 벌어 살아갔다.
호적도 없고 가게 사업자 등록증도 없기에 집을 임대할 수 없었다.
이들은 다리 밑에서, 성벽에 붙어서, 절간 처마 밑에서 잠을 잤다.
겨울에는 항상 얼어 죽는 사람들이 나왔다.
관청에서는 어쩌다가 죽을 쑤어 구제하였다.
큰불에 물 한 바가지 붓는 꼴이었고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송사』 「식화지(食貨志)」 몇 곳에서 경기(京畿) 지역의 유랑민(流民) 문제를 다루었다.
이 시기에는 사회보장이라는 말이 없었다.
집(家)은 정말로 방 1칸에 지나지 않았다.
변두리 지역에 있는 주거 형태는 더욱 가슴 아팠다.
어떤 사람은 막대기로 기둥을 세우고 멍석으로 사방을 가렸다.
어떤 사람은 폐기된 배를 뒤집어놓고 그 안에서 살았다.
변하(汴河) 양쪽 강가에는 이런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비가 내리면 빗물이 새고 더운 여름에는 무척 더웠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고생하고 걱정하느라고 눈빛이 어두웠다.
일곱째 :
중앙정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인종 연간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발탁되어 신정(新政)을 기획하면서 개봉 집값이 너무 올랐다는 상소문이 올라오자 관원들의 주택 매입을 제한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동료 관원들은 그에게 문무 관원들 가운데 누가 집 한두 채 갖지 않은 사람이 있냐고 말하고 기획하지 말라고 압박하였다.
이들은 이런 기획이 나오면 많은 관원의 밥그릇을 엎는 것이니까 반대가 크다고 설득하였다. 결국 범중엄도 포기하였다.
신종 연간에 왕안석이 물가 안정법(市易法)을 개혁하면서 주택 가격도 조절하려고 시도하였다.
물가 안정법 사무소에는 물가를 심사하는 관원도 배치하였다.
시내 안에서 일어나는 부동산 거래의 통계를 냈다.
왕안석이 처음에는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억제하였다.
그러나 집행하는 동안에 큰 상인들의 압력이 컸다.
큰 상인들은 고급 관원들과 이리저리 얽혀있었다.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는 현장에서는 흩뜨러졌다.
아무튼지 왕안석이 신법을 실행하면서 복전원(福田院)이라는 시설을 만들어 일시에 유랑민 3천 명까지 수용하였다고 합니다.
송대에 주택 기금도 만들어 부족한 주택을 해결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직업 조합(行會)에서 공채전(公債錢)을 모았습니다. 항주에서는 비단 조합에서 회원마다 매월 50문을 거두어 병들고 곤궁한 조합원을 지원하였습니다. 개봉에서는 식당 업자들이 기금을 모아 공공 주택(義宅)을 사러 늙은이와 오갈 데 없는 종업원에게 살도록 하였습니다. 소주(蘇州)에서는 목수들이 기금을 모아 목수의 집(匠廬)을 짓고 공짜로 3년씩 살게 하였습니다.
집값이 비싸고 일반 개인이 혼자 살 수 없기에 몇 명 많으면 8명이 돈을 모아 공동명의로 집을 사서(合買) 함께 살았습니다. 또는 전당 제도가 있었습니다. 집값의 60%를 내고 10년 거주 권리를 사서 살고 10년 지나면 집을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그래서 전방(典房)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종 황제와 왕안석의 변법 목적은 부국강병을 이루어 서하(西夏)를 평정하는 것이었다. 청묘법, 면역법, 시역법 하나하나 법령이 실행되면서 예상 못한 부작용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 시역법은 전국의 큰 도매상들을 개봉으로 불러들였다. 이들이 일일 교역 금액은 1만 전(錢, 文) 이상이었다. 따라서 전국의 큰돈은 서울로 서울로 몰려왔고 부동산 가격은 더욱 급등하였다.
개봉 시내는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길거리 도로 폭이 아주 좁았다.(屋宇交連、街道狹窄)
집값은 낮추는 방법은 주택 건설을 늘리는 것이었다.
개봉에서는 몇 번이나 성곽을 밖으로 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
태종 옹희(雍熙, 984-987)에 성곽을 밖으로 확장하였다.
진종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에도 또 성곽을 밖으로 확장하였다.
성곽을 밖으로 확장할수록 성곽 안에는 집 지을 땅이 늘어났다.
이런 조치도 주택 부족을 해결할 수 없었다.
성곽 확장의 속도가 인구가 쏟아져 들어오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진종 황제는 고급 관원과 귀족이 시내 안에 여러 채 집을 갖고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명령문은 엄격하게 처리하겠다고 강경하였다.
그러나 고급 관원과 귀족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개봉 시청에서 실지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하는 관원 자신들도 토지 이익을 얻고 있었다.
누가 감히 실지 조사를 하겠는가?
누가 실지 조사를 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에는 흐지부지되었다.
행정 부패가 부동산 시장을 더욱 어지럽혔다.
어떤 관청에서 국가 소유 토지를 팔면 가격은 손이 바뀔수록 올라갔다.
어떤 관원은 매수자에게 뇌물을 요구하였다.
부유한 상인들은 세력을 이용하여 토지를 매집하고 가격이 뛰기를 기다렸다.
개봉 시내 부동산은 거대한 이익 도박장이 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여기에 끼어들 수 없었다.
상상해보세요, 57만 관의 주택 매매를.
인종 연간(1022-1063)에 어떤 권세 있는 사람이 큰 주택을 판 금액이었다.
많은 금액은 소달구지 몇 대가 실어 날랐다.
소달구지에는 끈으로 꼭꼭 묶은 동전 꾸러미를 가득 실었다.
너무 무거워서 소가 제대로 끌지 못할 지경이었다.
거래 금액이 커서 동전의 무게도 무거웠다.
이런 광경은 궁궐 안에 있던 내시들도 밖으로 뛰어나와서 구경하였다.
이것은 송나라 사람들이 필기에 있는데 물론 과장도 섞였다.
그렇지만 고급 주택의 거래 금액이 걸핏하면 몇만 관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북송 후기 휘종 연간에는 개봉 집값이 수십만 관 또는 백만 관까지 올라갔다. 회남 전운사(淮南轉運使) 장근(張根, 1061-1120)은 “집 한 채 값이 수십만 관이고 조금 화려하면 백만 관이다.(一第無慮數十萬緡,稍增雄麗,非百萬不可)”고 말하였다.
북송 시기 황금(gold) 1냥(약 40g)은 10관(貫)이었다. 괜찮은 집값이 황금 5천 냥이니 현재 황금 5만 관이었다. 황금 5천 냥은 현재 황금 200kg이다. 현재 한국 시가 황금 1g에 17만 원이면 황금 200kg은 340억원이다. 다시 말해 북송 시기 개봉 시내에서 화려하고 좋은 집값은 현재 한국 340억 원이다. 위에서 말한 집값 57만 관은 현재 한국 시가 388억 원이다. 용산구 한남동의 고급 주택 평당 3억이면 100평 집은 300억 원이다. 북송 시기 화려한 집값이 대략 현재 한남동 고급 주택 150평 값이다.
집값이 올라갈수록 사회적 모순도 깊어졌다.
불만의 목소리는 시중에서 중앙정부까지 올라갔다.
어떤 간관(諫官)은 상소문을 올려 경기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였기에 백성들은 평생 고생하여도 방 하나 살 수 없다고 직언하였다.
이 상소문은 보류되고 안건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문제는 여전하였다.
개봉의 번화함 밑에서는 무너지고 찢어지는 불만이 더욱 퍼져나갔다.
여덟째 :
시야를 넓혀보면
당나라 장안도 비슷하게 부동산의 곤경을 겪었다.
장안 면적이 넓어서 도시를 여러 구역으로 구분하였다.
주택지를 처음에는 국가에서 분배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중기와 후기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권세가들이 토지를 매집하였기에 집값과 땅값이 줄곧 상승하였다.
백거이(白居易)가 처음 장안에 왔을 때 선배 관원들은 웃으면서 자네 이름처럼 쉽게 살기(居易)가 어려울 것이라고 놀렸다.
백거이는 나중에 장안에서 서북쪽으로 먼 위남(渭南) 지역에 땅을 사서 살았다. 처음부터 장안 시내에서는 집을 살 수 없었다.
이것은 송나라 시기와 아주 닮았다.
명나라 북경을 보면
명 성조가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뒤에 북경 인구가 신속하게 팽창하였다.
북경 시내에 근무하던 관원에게는 주택을 분배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런 제도는 고급 관원에게만 적용하였다.
중하급 관원들, 군인, 백성은 스스로 주거를 해결하여야 하였다.
명나라 중기 이후에 북경 시내에서 200평 땅값은 은화 50냥까지 올랐다.
7품 경관(京官)은 일년 녹봉이 쌀 90가마 곧 은화 30-45냥이었다.
집을 사기에는 북송 시기처럼 어려웠다.
당나라 장안, 북송 개봉, 명나라 북경을 보면 역사는 반복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된 규칙이 있었다.
일국의 수도는 천하의 자원이 모이는 곳이고 집값은 반드시 대다수 사람의 구매력에서 멀리 벗어났다.
이것은 옛날 도시의 공통된 병폐였다.
시대만 다르지 오늘날 사람들도 주택 대출금을 갚고 있다.
미래의 완전한 소유를 위하여 대출금을 갚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수단이 없었다.
집을 살 수 없으면 그냥 살 수 없는 것이다.
북송 시기 개봉 이야기에는 특수성이 있다.
개봉의 경제가 고속 성장하였고
상업도 과거와 달리 크게 번영하였다.
그렇지만 번영의 열매는 결코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다.
소수 사람이 시내 절반을 차지하였고
대다수 사람은 방 하나 얻기도 힘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붐비는 도시는 뚜렷하게 재부(財富, wealth)를 손바닥만큼 아주 작은 토지마다 집중시켜가고 있었다.
(那座連早晨都擠滿人的城市,讓財富戲劇化地濃縮在每一寸土地上。)
(The city concentrates wealth dramatically on every inch of its land.)
중국 사람은 이런 역사를 읽으면서 마음속에서는 화가 날 것이다.
북송 시기 개봉의 주택 가격 문제는 옛날 구리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구리거울 속에 사람이 길가 동전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그 사람 뒤에는 높고 낮은 집들이 들쭉날쭉 엉켜있다.
멋있는 대문 안에서는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집을 사지 못하는 북송 사람들과 우리는 9백 년이나 떨어져 서로 바라보고 있다.
양쪽 사람들 눈에는 서로 비슷한 피로감과 답답함이 보였다.
아홉째 :
역사가 사마천도 역사를 쓰면서 짧은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가 북송 시기에 살았다면 개봉의 집값을 보고 수염을 쓰담으면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주저할 것이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벽돌과 기와는 본래 바람과 비를 막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상품으로 바뀌고 권력과 자본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바람과 비를 막는다는 본래 뜻은 사라졌다.
이것들이 돈으로 바뀌고 권리로 바뀌었다.
사람은 권리에 눌린 그림자가 되었다.
개봉 도시의 교훈은 복잡하지 않다.
자원이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하나의 중심으로만 쏟아진다면 중심에 살던 일반인들은 가격 때문에 쫓겨난다.
재부가 커질수록 쫓아내는 힘도 세다.
번화로운 곳일수록 일반인들이 생존하기 어려운 곳이 된다.
역사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이런 이치를 북송 개봉의 길가와 골목에 써놓았다.
죽을 때까지 집을 사지 못한 사람들, 성벽에 붙인 거적에서 잠들었던 사람들, 낡고 낮은 월세 집에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공무원들은 역사에 출연한 조연 배우가 아니었다.
그들은 폭등한 집값을 나타내는 진실이고 당시 각종 제도와 경제 상황을 나타내는 온도계였다.
그들의 지친 모습과 침묵은 어떤 통계 숫자보다 더 진실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도시에 살면서 언제나 첫째 대출금을 낼 수 있을까부터 계산하고 있다.
지역, 학군, 출퇴근 시간 등도 계산한다.
물려받은 유산이 있다면 방 2개짜리 집을 살 수 있을까를 계산하고 있다.
9백 년 전에 개봉 사람들도 부동산 사무실 앞에서 소리 없이 계산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때 우리는 서로 낯설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북송 개봉 사람들도 집을 살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계산하고 있다.
주택 문제는 결국에 사람의 문제이다.
사람은 몸이 쉬고 꿈을 꿀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하다.
이 그릇이 너무 비싸면 꿈도 꿀 수 없다.
남은 것은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북송 시기 개봉에서 당나라 장안까지 또 북경에서 전국의 대도시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어디에도 있다.
집값은 재산의 차가운 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집값은 한 시대의 체온을 나타내는 온도계가 되었다.
개봉의 온도계는 사람들이 쓰러질 만큼 높이 올라갔다.
오늘 우리도 개봉의 집값 자료를 보면 손을 델 만큼 뜨거웠다.
열째 :
1126년 금나라 군대가 남하하여 개봉을 함락시켰다.
개봉에 살던 황제와 황비 등 황실 가족들과 고급 관원들 가족까지 붙잡아 갔다.
금나라 군대는 개봉 시내에서 온갖 보물과 좋은 것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죽였다. 들고 가거나 실어 갈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불 질러 태웠다.
개봉 사람들은 너도나도 목숨을 지키려고 개봉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피난 갔다.
순식간에 그 비쌌던 좋은 집들은 주인을 잃었다.
집값은 없다. 아무도 집을 사는 사람이 없었다.
고향의 땅과 재산을 팔아 개봉 서울로 올라와 부동산을 샀던 사람들은 모든 재산을 잃어도 금나라 군인에게 붙잡힐까 봐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였다.
개봉 함락은 개봉 부동산의 몰락이었다.
북송 시기 모든 사람의 부동산 꿈도 사라졌다.
남송 정권(1127-1279)이 임안(臨安, 현재 杭州)에 세워졌다.
항주에서 다시 부동산 폭등이 재연되었다.
특히 항주 서호(西湖) 근처의 주택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이들은 일찌감치 개봉의 부동산 몰락을 잊어버렸다.
100년이 지나 1276년에 원나라 군대가 임안을 함락하자 남송 황실은 남쪽으로 도망 갔다. 문천상(文天祥, 1236-1283)이 1279년에 애산 해전(崖山 海戰)에서 패전하여 남송은 멸망하였다.
남송 사람들은 북쪽에 금나라 군사 위협을 머리에 이고 살면서도 잠시 평화를 누렸습니다. 잠깐 평화 속에서 경치 좋은 산과 호수를 보면 노래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래서 남송 시기를 비판하는 말 가운데 호산가무(湖山歌舞)라는 말도 나왔답니다. 남송의 잠깐 평화가 사람의 각성(覺醒)을 마비시켰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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